소나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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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박수철[ | ]

소나티네 (Sonatine) 박수철 문화부기자 (mailto:film@jabo.co.kr)

죽음에 대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성찰 '소나티네', 그 선율을 따라가 보자.

'하나비(HANA-BI)'에 이어 두 번째로 개봉되는 기타노 다케시(北野 武)의 영화 '소나티네'는 자타가 공인하는 기타노 다케시 최고의 걸작이다. 물론 기타노 다케시를 세계적으로 알린 영화도 바로 이 영화 '소나티네'다. '하나비'에서 보여주었던 폭력을 다루는 기타노 다케시만의 연출력도 사실은 이 영화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소나티네'가 기타노 다케시 감독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한국에서 먼저 개봉된 '하나비'의 영향으로 이 두 영화를 순차적으로 비교하는 데에 있어서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겠지만, '소나티네'와 '하나비'를 비교해가며 보는 것은 기타노 다케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나티네'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영화다. 그 안에는 희비극이 함께 공존하고 있고, 폭력과 천진함이 그 끝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죽음과 삶은 마치 하나의 모습인양 영화 주변을 맴돌며 하염없이 관객들의 머리를 산만하게 만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아주 정적인 영화는 결코 아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내내 객석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극장 문을 나서면 '소나티네'가 죽음에 대한 감독의 성찰이었음을 다시금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야쿠자의 일상을 다룬 '소나티네'를 보며 가장 처음 든 의문은 이 영화의 제목이다. 과연 이 영화의 제목 '소나티네'는 무슨 의미일까. '소나티네'의 제목의 의미는 영화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영화의 형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음악의 형식을 영화에서 차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용된 형식 자체를 영화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영화적 리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기타노 다케시는 여기에 더 나아가 영화 전체를 하나의 악곡의 흐름에 따라 연출해 나간다. (이 점은 구로사와 아끼라(黑澤明)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에서 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영화 '라쇼몽'은 한 시퀀스 전체에 라벨의 '볼레로'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하여 영화적 리듬과 음악적 리듬을 일치시키고 있다.) 영화 전체를 마치 소나티네 형식과 같이 3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소나티네'의 첫 부분에서 볼 수 있는 야쿠자의 일상은 너무나 덤덤해서 그냥 넘어갈 정도로 그들에게 폭력은 마치 그들의 일상 같아 보인다. 폭력을 행사할 때, 더욱이 사람을 죽일 때마저도 그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고, 마치 타자기를 두드리는 사무원처럼 무덤덤하다. 그들에게 있어 폭력은 그들의 일상이고, 죽음은 그 일상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을 벗어났을 때 그들은 이러한 폭력적인 일상과는 전혀 다른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오히려 그렇게 변해버린 모습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폭죽으로 총싸움을 하고, 모래사장에서 스모 놀이를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는 저들이 폭력 사용을 主業으로 하는 야쿠자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속에서 배어 나오는 불안감만이 그들이 지금 일상을 벗어나 있음을 짐작케 할뿐이다. (이 영화의 白眉는 오키나와의 그 푸른 해변과 그 곳에서 뒹굴고 노는 야쿠자들의 모습이다. 특히 모래사장에서 스모를 하며 노는 이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한다. 또한 그 때에 보여지는 오키나와 바다의 그 푸른빛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으면 뭐라 설명할 수 없다. 해외 영화제에서 기타노 블루(Kitano Blue)라고 불리는 그 푸른빛은 그 후 기타노 영화의 하나의 심벌이 되었다.)

하지만 곧 다시 그들은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배신으로 인해 복수를 하는 야쿠자의 중간 보스 무라카와의 모습에서는 다시금 일상 속에서 폭력과 죽음을 맞대한 그들의 씁쓸한 일상이 드러난다. 그리고 다시금 그 일상이 마무리 지어졌을 때 무라카와는 죽음을 선택한다. 언제나 그들에게 가까이 있었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무라카와는 어느 샌가 그에게 공포로 다가오는 그 일상을 끝맺음하는 것이다. 마치 영화 속의 그의 대사("적어도 죽음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애주니까")를 실행에 옮기려는 듯.

이렇듯 '소나티네'는 기타노 다케시가 말하듯 죽음과 일상에 대한 감독 스스로의 성찰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죽음이라는 묵직한 이야깃거리를 희극과 비극을 버무려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또 한가지 '소나티네'를 비롯한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의 특이한 점은 폭력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다른 영화들 속에서 드러나는 폭력이 준비되어 지고,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드러난다면, '소나티네'에서의 폭력은 다분히 일상적이고 급작스럽다. 언제고 어디에서나 폭력은 아무 예고 없이 영화에서 폭발한다. 화장실에서, 사무실에서 너무나 급작스럽게 다가오는 폭력, 그리고 엘리베이터와 해변에서 행해지는 총격은 너무나 돌연히 나타나는 총성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렇게 '소나티네'에서 보여지는 폭력은 숨겨져 있으나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폭력이다.

웃으면서 영화를 보고 나서 문득 드는 생각, 나는 얼마나 내 일상 속에서 폭력을 감추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폭력은 또 무엇일까.

  • 사실 이 영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라서 글을 쓰는 데 있어 망설여졌다.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를 분석하는 것은 정말 재미없는 일이므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보다 극장에 가서 한번 더 필름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 순간도 머리 속을 어지럽힌다.

2 # 촌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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