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과의 만남

1 산울림과의 만남[ | ]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1 --허경, 1999

1.1 # 들어가며[ | ]

아래의 글은 98-99년이던가 나와 음악 비평가 친구들이 함께 창간한 계간 록 음악 전문지 [뮤지컬 박스]의 각 1, 2호에 실린 나의 개인 칼럼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에 수록된 글들이다. 3호 이후는 현재 단행본 체제로 개편 중이라 미발표분이다. 참고로 1집은 핑크 플로이드 특집, 2호는 제너시스와 피터 게이브리얼 특집이었다. 여하튼 산울림과 나의 개인적 만남의 광경을 한번 들여다 보시길...

1.1.1 뮤지컬박스 편집자 주[ | ]

앞으로 매호 연재될 <뮤지컬 박스>의 고정 칼럼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맡아줄 분은 본지의 편집위원인 허경 씨입니다. 중고등학생 시절 퀸과 에어로스미쓰, 킹 크림즌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스스로를 세대로 생각하는 허경 씨는 65년 생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몇몇 대학의 강사를 거쳐 현재에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박스>는 '쉽고, 이해될 수 있는 글쓰기'를 지향하는 허경 씨의 지식 고고학적인 본 칼럼이 인문학적 전통이 희박한 우리 나라 (록) 음악 비평계에 새롭고 참신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합니다.
또 본 칼럼의 제명인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은 1980년 발매된 미국의 록 그룹 '말하는 머리들'(TalkingHeads)의 4집 「빛 속에 남아」(Remain in Light)에 수록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Seen and Not Seen)을 '음악' 잡지의 칼럼이라는 특성에 맞게 차용한 것(Heard And Not Heard)임을 밝혀 둡니다.

1.1.2 들어가기 전에[ | ]

무엇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본 칼럼을 통해 <뮤지컬 박스> 독자들과 고정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과 흥분을 감출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어느 날 우연히 전철 혹은 카페 안에서 <뮤지컬 박스>와 같은 책을 읽고 있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면,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사람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도 나처럼 밥을 굶고 퀸의 「재즈」를 산 경험이 있을 것이고, 종종은 참고서를 산다는 거짓말로 부모님께 타낸 돈으로 킹 크림즌의 「1집」을 샀을 것이며, 또 종종은 정말 갖고 싶은 고가의 판이 내걸려 있는 레코드 가게 앞을 그냥 돌아 나오며 돈 없는 서러움을 만끽해 보기도 했을 것이다. 앞으로 연재될 본 칼럼의 이야기들은 바로 나 자신의 이런 평범하고 시시한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다. 나는 나의 이러한 경험이 나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그러한 일들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칼럼을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와 같은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쯤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부디 발신자인 나의 '느낌'이 수신자인 '당신'에게도 비슷한 공감과 기쁨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바라본다.

1.2 # 1977년 '가수 왕' 선발 대회: 남진, 나훈아 ... 그리고 산울림[ | ]

1976년 12월 31일 섣달 그믐날 저녁 나는 아버지의 고향인 춘천으로 향하는 경춘선 기차를 타고 있었다. 춘천에 도착해 먼저 안방의 할아버님, 할머님께 큰절을 드리고 떡만두국으로 늦은 저녁까지 다 먹고 난 후, 나는 마당에서 사촌 형들과 '오징어' 놀이를 하며 앞으로 벌어질 흥미진진한 논쟁에서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를 사뭇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잠시후면 테레비에서 올해의 '가수 왕'(이 말 누가 만들었나? 歌手王. 이것도 일본 프로그램에서 따온 것일까?)을 뽑는 프로가 시작될 것이다. 물론 그 때도 많은 가수들이 있었다. 1976년에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만 11세였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하여튼 여전히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내 초등학교 시절의 - 그러니까 1971년에서 1976년까지다 - '스타들'이란 대충 김추자, 김세레나, 김부자, 패티김, 조영남, 하춘화, 정훈희, 이용복 등등과 같은 분들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님부터 큰 아버님, 두 분의 작은 아버님, 우리 가족, 7명의 사촌형, 누나들과 4명의 내 손아래 동생들 등 무려 20여명이 넘는 대 가족이 모두 참여하게 될 논쟁의 핵심은 오직 다음과 같은 단순 명쾌한 양자택일에 다름 아니었다: 남진이 더 좋냐? 나훈아가 더 좋냐? 나는 ... 나는 ... 고민 끝에 나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나는 남진이 더 좋다! 왜? 남진이 더 잘 생겼으니까 ... 테레비 앞에서 온 가족은 설전을 벌였다. 들어봐, 나훈아는 말이야 ... 아녜요, 남진은 있쟎아요 ... 그게 아니라니까, 나훈아야말로 ... 무슨 소릴, 남진이가 그 때 ...

내 기억으로는 이렇게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가수 왕 논쟁은 우리 집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의 어느 가정, 어느 골목길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그야말로 온 국민의 '공통 주제'요, '관심사'였다. 그러나 그 때 춘천에서 있었던 논쟁을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각기 1900년대 초에 태어나신 우리 할아버님, 할머님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셨던 것 같다. 그분들이 라디오를 곁에 끼시고 밤중에 '전설 따라 삼천리'를 들으시며, 거의 항상 그때에도 이미 '노인네들 빼고는 아무도 듣지 않던' 국악 프로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던 것을 생각하면, 이 때 벌써 음악에 관한 우리 민족 감수성의 '가요화'는 완성된 지 오래였을 것이다. 그 가족이 그로부터 겨우 10년도 채 지나기 전에 각기 김소희와 나훈아와 비지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될 것임은 그날 저녁의 논쟁 속에 이미 담겨 있었던 것이다 - 이에 대해서는 본 지[<뮤지컬 박스> 1호 - 필자주]에 실린 나의 글 <한국록의철학적조건들> 중간 부분 이후를 참조.

1977년. 이제 만 12살이 된 나는 중학교 1학년말까지도 사실 팝송은커녕 가요조차도 열심히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이 때까지 나는 음악에 관한 한 참으로 평균적인 한국의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냥 테레비에 나오는 가수하고 노래만 알았지, 누구의 판을 산다든지, 방송국에 구경을 간다든지 하는 일은 생각도 못 해봤다. 당연히 가수들의 '리싸이틀' 한 번 구경 못 해봤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여름이었다. 학교와 집 사이에 있던 이문동 고갯길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놀라운 음악에 정말 난생 처음으로 어떤 음악을 듣고 '온몸이 뜨거운 피로 가득 차 오르는 듯한', 어쩌면 거의 '성적인' 흥분을 느꼈다. 산울림이었다! 노래의 제목은 '아니 벌써'. 그 노래는 1976년 말에 나온 그들의 데뷔 곡이었다. 나는 정말 흥분했다. 그런 음악은 태어나서 그때까지 정말 한 번도 못 들어봤다. 아니, 음악이란 게 사람 기분을 이렇게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 음악이 내게 준 흥분과 감동이 너무도 생생했고, 그 음악이 너무 듣고 싶어 테레비 가요 프로를 보기 시작했다. 그 여름의 어느 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 테이프 하나를 샀다. 「산울림의 새 노래 모음」, 그들의 1집이었다. 내가 어떤 음악을 '정말 좋아한다'고 느끼면서, 더구나 '나만의 음악'이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들었던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학교 친구들 중 이미 음악을 좀 듣던 녀석들은 이미 '산울림'과 그들의 노래를 알고 있었고, 심지어 신문에서도 '충격적 사운드'니 뭐니 해서 종종 그들에 대한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산울림은 TV, 라디오에도 자주 나왔다.

여기서 당시 산울림의 음악에 대한 사회의 일반적 인식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볼까 한다. 이 이야기는 나처럼 산울림을 좋아하던 학교 선배가 당시 라디오에서 듣고 다음날 나에게 전해준 말이다. 가요 순위 프로에서 젊은 여성 진행자가 산울림의 '아니 벌써'를 틀고 난 후 해설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참 독특하지요? 전문적인 가요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산울림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0대 정도 목소리의 가요평론가: "엄밀히 말하면 산울림의 노래는 음악이라고 할 수 없지요" - 위의 신문에서 "충격적" 사운드 운운했던 것도 바로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하튼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산울림은 그 해 연말 '77 가수 왕 선발 대회에서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정말 내 기억에 남는 일은 산울림이 가요계에 등장한 이후 우리 가족 모임에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공감대를 가진 '국민 가수 뽑기 토론'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할아버지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세대와 나 자신의 세대 사이에 음악적 취향에 관한 근본적 단절이 생겨났다. 65년 생인 나보다 거의 10살 가량이나 더 많은 사촌 형들의 증언에 따라도 이런 일은 신중현 씨의 경우에조차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1977년 같은 해 추석과 섣달 그믐에 다시 모인 우리 가족들의 대화에서도 여전히 주된 주제는 '남진이냐? 나훈아냐?'하는 것이었지만(지금 생각해보면 싱어 송 라이터로서 작사, 작곡에 프로듀서 능력까지 갖춘 나훈아 씨가 음악사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음직 하다), 산울림이 나타난 이래로의 '토론'은 이전과 달랐다. 산울림이 불러온 시대는 더 이상 그러한 '국민 가수 뽑기'식의 대화를 불가능케 하는 '취향의 다양화, 전문화' 시대였던 것이다. 트로트가 일제 강점기 초기에 국악에 대하여 그랬을 것처럼, 이제는 록이 트로트에 대하여 똑 같은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던 것이다. 참으로 우리의 20세기는 격동의 세기였다.

1.3 # 비지스가 남자게? 여자게?[ | ]

1978년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어느새 나는 그들이 나오는 TV,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 것은 물론, 각 곡들의 가사, 작곡가까지 줄줄 외우는 '산울림 매니아'가 되어 있었다. 산울림은 그후 2집, 3집, 동요모음, 크리스마스 캐롤을 발매했고(정말 '주옥같은' 판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의 선구적인 '록에의 도전'은 이 다섯 장으로 끝난다고 본다), 그 사이 나는 나와 네 살 터울이 지던 당시 초등학생인 남동생까지도 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뭐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대개 음악을 좋아하는 오빠나 언니가 있는 사람들은 '자의반 타의반' 혹은 '반(半) 강제로' (집에서 오빠, 언니가 틀어놓으면 안들을 수가 없으니까) 음악을 듣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길거리에서 너무도 나를 흥분케 하는 한 장의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바로 산울림의 공연 포스터였다. 장소는 정동 MBC 문화체육관(위치는 같지만 지금은 로 바뀌었다). 동생과 나는 용돈을 아껴 난생 처음으로 공연 티켓을 샀다. 나는 그날 하여튼 라이브 연주라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것도 학교 밴드 부의 '행진곡' 연주나, 통기타와 같은 어쿠스틱 포크 음악이 아닌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 있는 라이브를 말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산울림이 튜닝을 시작했을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렉트릭 악기 소리를 직접 들었다. 그 순간, 김창훈의 베이스와 김창익의 드럼 소리를 듣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전율했다. 일렉트릭 베이스와 드럼의 소리가 그렇게 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온 몸, 전 존재를 관통하는 소리, 나의 일생을 바꿔놓은 소리, 바로 '록'의 소리였던 것이다. 그날은 '풋내기' 록 애호가 허경의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한 계기로 당시의 나에게는 전혀 또 다른 미지의 신세계, '팝송'과 만나게 된다. 산울림 공연을 구경가기 이전, 1978년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방과 후 전철 회기역 근처의 버스 정거장에서 친구와 함께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흔히 그렇듯이 그 정류장에도 레코드 가게가 끊임없이 당시의 기라성 같은 팝송 히트곡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내가 아는 음악이라곤 '산울림'을 빼고는 당시 그들의 라이벌로 학생들 사이에 편이 갈라져 있던 '사랑과 평화', 그리고 'Bridge Over Troubled Water'처럼 몇몇 정말 유명한 팝송 몇 곡이 전부였다. 친구는 바로 근처가 집이었지만 나를 위해 버스를 같이 기다려 주고 있던 중이었고, 버스는 한참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스피커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지스의 'Tragedy'였다(당시 우리는 '택시비'라고 불렀다). 가사도 모르면서 한참 흥에 겨워 노래를 흥얼거리던 나에게 친구는 한껏 목소리를 깔고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듯이 나에게 물었다(나는 형이 있던 그 녀석이 정확히는 몰라도 나보단 음악을 많이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야, 내가 문제 하나 낼까? 비지스가 남자걔? 여자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뭐야? ...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비지스가 여자가 아니란 말이쟎아 ... 으음 ... 그럼 비지스가 남자란 말인가 ...' 그렇다. 비지스는 남자였다. 친구는 나의 반응에 신이 나서 나에게 '팝송의 세례'를 퍼부었다. 버스도 안 오고, 얘기는 재미있고 ...

결국 그날 나는 그 녀석의 '꾀임'에 빠져 녀석의 집으로 갔다. 녀석의 집에는 벌써 몇 번 놀러 갔지만, 나는 레코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집 2층에 있던 녀석의 형방에 들어선 순간, 나에게는 별천지가 펼쳐졌다. 방안에는 우리 집에 있던 독수리표 '이글' 전축이 아니라, 국산이지만 진짜 3단 고급 오디오가 있었고, 판이 글쎄 '50장'도 훨씬 넘게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비틀즈 레코드의 '애플' 레이블도 처음 보았다. 형의 콜렉션에는 비틀즈의 「Abbey Road」, 「Let It Be」라이센스 이외에도 존 레논 플래스틱 오노 밴드의 셀프 타이틀 앨범 빽 판(Mother, 그 종소리!), ONJ(퀴즈 - 요새 '젊은이들'이 이게 누군지 아나?), 린다 론슈태트, 엘비스 ... 물론 남일해와 키 보이스, 송창식도 있었다 ...

그날 이후 나는 '사부님'의 적절한 조언과 자상한 지도편달을 받아 FM을 듣기 시작했다 - 친구: "(낮게 깔리는 남 저음 목청으로 한껏 무게와 권위를 실어) 야, 낮 2시나 저녁 8시부터 보통 2시간 정도씩 팝송을 틀어주거든, 그걸 그냥 무조건 녹음해서 열심히 반복해 들어봐." 나: "(암행어사를 대하듯 최대한의 공손과 예의를 담아) 예-." 당시 내가 갖고 있던 '시스템'은 판과 라디오를 들을 수 있지만 녹음이 안 되는 이글표 '최신형' 전축과 재생과 녹음이 되는 파나소닉 카세트 플레이어가 전부였다. 문제는 이 두 기기를 연결할 '잭'이 없었다 - 물론 나는 당시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저녁 8시. 나는 전축의 FM을 크게 틀고는 내 방문을 걸어 잠그기 직전, 가족들에게 엄숙히 선포했다: "지금부터 녹음하니까 소리내지 마세요." 정말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종종 동생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나한테 무지하게 혼났다(지금 생각하면 되게 미안하다). 그 날 저녁 바로 나는 60분 테이프 하나를 녹음했다. 한 열 곡 넘게 녹음되었었나? 테이프에 녹음된 곡들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레오 세이어의 'When I Need You', 린다 론슈태트의 'Long Long Time' 등등. 그후에도 그런 테이프를 몇 개 녹음했는데, 녹음 한 번하기가 너무 힘들어, 그 첫 테이프를 나는 거의 고등학교 때까지 들었다.

당시 '영어가 짧았던' 나와 동생은 그냥 '콩글리시'로 가사를 거의 '만들어' 외웠는데, 종종 나의 실수로 제목이 녹음 안 된 곡들은 거의 몇 년이 지나서야 그 정확한 아티스트와 제목을 알았다. 예를 들면, 우리가 후렴을 '아도 레 부처-'로 만들어 불렀던 곡은 스티브 밀러 밴드의 'Fly Like An Eagle' 중 후렴 'into the future-'였다 ... 여기서 뮤지컬 박스의 독자분들께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다.

그 테이프의 곡 중 내가 지금까지도 모르는 곡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시기는 테이프의 녹음 시기로 볼 때, 분명히 1978-9년 이전 곡이고, 반복되는 후렴이 '우리가 듣기에는' '해리 아 라이킨, 해리 아 라이킨'인데, 지금의 영어 '실력'(?)으로 생각해보면 'Harry(혹은 Baby), I Like It' 정도 될 것 같다(물론 아닌지도 모른다). 가수는 남자 목소리이고, 신나는 고고 풍의 음악이었다. 이 곡의 아티스트 (혹은 그룹) 이름이나 노래 제목을 아시는 분께서 뮤지컬 박스로 연락주시면, 제가 개인적으로 후사하겠습니다(마음에 드시는, 저의 추천 CD 한 장 - 정말입니다).

또 내가 나의 중2 때, 즉 1978년 FM의 어느 '8시 팝송 프로' 연말 결산 차트 순위를 지금도 대략 기억하는 것을 보면, 처음으로 팝송에 맛들인 내가 당시 얼마나 라디오를 열심히 들었던가를 가늠케 한다(당시 상황으로 보면 분명 KBS, MBC, TBC 중의 하나인데, 방송국과 프로그램 이름, DJ분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TBC였던 것 같다. 내 엽서도 종종 읽어 주시고, 내 이름도 분명히 알고 계셨던 그 다정한 목소리의 남자 DJ분을 기회가 되면 언젠가 한 번 꼭 만나 뵙고 싶다! - 지금 이 글을 치는 데 내 컴퓨터의 영문 맞춤법 자동 수정 기능이 TBC가 오타라고 깜빡이 신호를 보낸다.
Alas!).

78년 '국내' 연말 팝 차트 1위 곡은 당시 라디오에서 '하루 종일 나오던' 랜디 밴 워머(Randy Van Warmer)의 'Just When I Needed You Most', 2위는 칩 트릭(Cheap Trick)의 일본 부도칸(武道館) 라이브 중 'I Want You To Want Me', 3위는 퀸(Queen)의 'Don't Stop Me Now'였고, 그 외에도 키스(Kiss)의 'I Was Made For Lovin' You', 레이프 가렛(Leif Garrett)의 'I Was Made For Dancin, M의 'Pop Music' 같은 곡들이 있었다.

이번 글은, 나보다 더 '어린'(?) 세대들에게는 '전혀' 감이 안 오겠지만,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칠 나의 '또래들'을 위해 용감히 한 번 써보았다. 우리의 1978년은 이렇게 FM을 무대로, 지금은 '추억의 팝송'이 되어 버린 '그 때 그 시절'의 노래들과 함께 흘러갔다. 정말,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들을 죽여 버렸다(Video Killed Radio Star)!

  • 추신 - 당시 이미 어지간히도 팝송에 빠져 있던 그 친구와 그가 가장 아끼는 '수제자'였던 나는 방송국에 열심히 신청곡을 적어 보냈다. 뭐 거의 방송된 적은 없었지만, 종종 우리의 엽서와 신청곡이 방송되는 날이면 다음날 둘은 학교 전체의 스타가 되었다(내가 직접 들은 것도 한 두세 번 된다). 당시 우리는 정동 MBC 문화체육관 같은 곳에서 열리던 '예쁜 엽서 전(展)' 같은 것도 '교복을 쫙- 다려 입고' 구경 다니곤 했다 - 우리는 물론 '예쁜 엽서'보다 '예쁜 여학생들'을 보러 갔지만.

또 히트할 만하다 싶은 곡을 우리가 임의로 정해 방송국에 우리가 아는 온갖 친구, 누나, 동생 등을 총 동원해서 한 주에 집중적으로 200장, 300장씩 엽서를 보내 주말 차트에서 띄우던 일명 '작전'도 생각난다(물론 방송국에서는 금방 알아 차렸다. DJ 멘트에서 '귀엽다'는 듯이 언급해 주었다). 당시에는 아바의 '불레-부'(Voulez-Vous) 앨범이 막 발매되어 'Chiquitita'와 'Does Your Mother Know' 두 곡이 이미 히트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세 번째 히트곡으로 'I Have A Dream'을 '찍어' 엽서를 보냈다. 물론 우리의 '작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여하튼 그 곡이 얼마 후 방송을 타고 히트를 해서 우리는 학교에서 그야말로 '영웅'이 되었다.

>> 무협과전도로 계속

1.4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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