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1 사카모토 료마의 탄생과 성장[ | ]

(1835 ~ 1867) 토사번 출신

하급 무사인 고오시(토착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나 소년기는 누이에 의해 양육되었다. 12세 때 이해 쿠스야마 쇼스케 도장에서 공부를 시작하나 도장 친구와의 싸움이 원인이 되어 도장을 나온다. 14세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예에 심취하여 1853년 에도에 가서 당대 일류 검객인 치바 데이키치의 도장에 입문하여 5년간 검술을 배웠다.

페리의 내항으로 인해 에도가 소란할 때 느낀 바가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 1861년에는 다케치의 토사근황당에 참가하였다. 그들의 정책은 ‘존왕양이’ 운동으로, 무능한 막부대신 천황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서 유럽 세력의 일본 침입을 저지하자는 입장이었다. 료마는 유럽에 대한 개국을 주장하는 가쓰 카이슈를 암살하기 위해서 그를 찾아가나 개국에 대한 그의 주장과 생각에 탄복하여 다음해 번을 탈번(무사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번에서 탈퇴하여 로오닌 무사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무사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지고 죄인으로 처벌을 받았다.)하고 에도에 가서 가쓰 카이슈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고오베 해군조련소의 설립에 협력하면서 점차 항해술에 대해 공부하는 가운데 해외에 눈을 뜨게 되었다.

1864년 사츠마에 가서 기도 다카요시와도 친교를 맺고 사츠마와 쵸오슈우의 사이를 좋게 하려는 가교역할에 노력했다. 마침내 1866년 삿. 쵸오동맹을 성공시킴으로서 막부에 무력으로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나가사키에서 해운업을 일으켜 ‘가메야마샤츄’라는 회사를 조직하고 낭사들을 모았다. 다시 토사번의 실권자 고토오쇼지로에 접근하여 탈번의 죄를 용서받아 출신 번을 위해서도 진력했다.

료마의 기본 구상은 전쟁을 하지 않고 왕정복고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토사번주인 야마노우치를 움직여 쇼군에게 권고토록 한 바, 1867년에 ‘대정봉환’을 실현시킨 것이다. 또한, 오사카로 가는 도중 고토에게 제시하기를 의회를 만들 것, 인재를 모을 것, 해군을 강화시킬 것 등 소위 ‘선중8책’을 새로운 정체의 통일국가 구상으로 밝혔다.

신정부 실현에 분주하게 노력하고 있던 중, 1866년 11월 15일, 쿄토에서 고향친구인 지사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막부의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2 사카모토 료마의 업적(활약상)[ | ]

2.1 사츠마. 쵸슈의 연합 (삿. 쵸 동맹)[ | ]

막부의 독단적 정책에 반대하여 막부에 반대할만한 번체제를 수립한다는 구상으로 나타난 것이 삿. 쵸 동맹이다. 1865년에 이르러 막부에 대항하기 위해 할거체제(제후는 적인 도쿠카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대할거하여 조금이라도 적의 명령을 따라서는 안된다는 말과 같은 발상) 를 취한 사츠마. 죠슈 두 번이 동맹 관계를 맺을 가능성은 확실히 증가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활히 사츠마와 죠슈 두 번이 제휴한 것은 아니다. 이 두 번 사이에 뒤엉킨, 소위 봉건적인 감정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이 감정을 제거하고 양자의 연합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사카모토 료마, 나까오까 신따로 라고 하는 두 사람의 개성을 필요로 했다.

사카모토와 나까오까 두 사람은 사츠마. 죠슈연합을 목표로 가고시마, 시모노세키, 나가사키, 다자이후를 뛰어다니며 두 번의 제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제 2차 죠슈 정벌에 대비하여 군비 확장에 여념이 없던 죠슈번은 무기 구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죠슈번은 “조정의 적” 이라는 이름이 붙은 반란군이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무기를 수입할 길이 막혀 있었다. 죠슈번은 다른 번의 도움으로 무기를 수입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사카모토와 나까오까는 사츠마의 명의를 빌려 죠슈번의 무기 구입의 편의를 도우려 했다. 이것이 실현되면 사츠마. 죠슈 두 번이 서로 상대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사츠마번은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오랫동안 절교 상태에 있었던 사츠마와 죠슈 두 번 사이에 교섭아 개시된 것이다.

사츠마 번사 구로다 료오스께에게 상경을 재촉받아 죠슈번사 키도 다카요시가 교토 사츠마번 저택에 들어선 것은 1866년 1월이었다. 키도는 사츠마번으로부터 정중한 대접을 받았지만 체류한 지 10일째가 되어도 교섭은 시작되지 않았다.

사카모토 료마가 교토에 들어선 것은 마침 이 무렵이었다. 사카모토는 키도를 설득하고 또한 사이고를 설득하여 두 번의 회담 실현에 힘을 쏟았다. 양자가 의구심을 떨치고 연합을 확인 한 것은 1866년 1월 21일이었다.

사츠마와 죠슈 연합의 맹약은 장래 일어날 모든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주도면밀한 공수동맹이었다. 그리고 이 속에는 “병사들도 상국(上國)의 상(上), 히또쯔. 아이즈. 쿠와나 등도 지금처럼 점차 황송하게도 조정을 옹립하여 정의에 역행하거나 진력하는 길을 막을 때에는 결전에 이르를 수밖에는 없다.” 고 장래 무력에 의한 막부 토벌을 결의하는 조문이 들어가 있다. 여기서 탄생한 사츠마와 죠슈의 두터운 동맹관계는 막부 토벌운동뿐 아니라 일본 근대 시대에 길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을 서로 적대 관계에 있던 사츠마와 죠슈번을 중재시킬 수 있었던 이들의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선 료마와 신따로는 둘 다 토사번의 향사 출신이었다는 점에 있다. 토사 향사는 전국시대에 시코쿠 전역에 패권을 떨친 죠오소카베 가문의 유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사 번주 야마우치 가문에 대해서는 일종의 대항의식과 자립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을 비교적 용이하게 “토사번 제일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이유일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사상과 행동을 더욱 자유롭게 했다. 그 후 그들은 토사번 무사라기보다도 사카모토는 사츠마번에 친근감을 가진 무사로서, 나까오까는 죠슈번에 친근감을 가진 무사로서 활동하게 된다. 오랜 반목을 계속해 온 사츠마와 죠슈번을 연합하게 만드는 데는 사카모토와 나까오까와 같은 어느 번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개성을 필요로 한 것이다.

2.2 선상8책[ | ]

1867년초 때마침 나가사끼로 출장 온 토사번 무사 고또 쇼지로와 번을 나와 가메야샤쥬를 경영하고 있던 사카모토 료마와의 화합이 마루야마의 요정에서 이루어졌다. 사카모토는 이 때 중앙 정국 수습책으로서 대정봉환론을 역설하고 고또는 이에 동의를 표했다. 고또와 사카모토는 대정봉환론을 토사번론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당시 상경중인 야마우치 토요노부를 찾아 나가사끼를 출발하였다. 세토나이카이를 달리는 선상에서 사카모토는 토사번 대정봉환론의 대강을 초안하였다고 한다. 소위 “선상8책” 이라 불리는 것이 이것이다. 

  •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정렬은 아무쪼록 조정으로부터 발하여 질 것.
  • 재능 있는 귀족. 제후 및 천하의 인재를 고문으로 모시어 관직을 주고 부디 종래의 유명무실했던 관직을 없앨 것.
  • 외국과의 교제는 널리 공의를 채택하고 새롭게 타당한 규약을 세울 것.
  • 전해오는 율령을 절충하여 새롭고 무궁한 대전을 선정할 것.
  • 해군을 확장할 것.
  • 친위병을 두고 교토를 지키게 할 것.
  • 금. 은 물가를 가능하면 외국과 균등하게 법을 제정할 것.

이 8조는 이후 대정봉환론의 기초가 되었다.

2.3 대정봉환(大政奉還)[ | ]

대정봉환론은 ‘국사’의 형식적 결정권을 막부에서 조정에 귀속시켜 제후회의에 의해 실질적인 정책 결정을 행하고자 한 것으로 막번체제 그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고또, 사카모토 두 사람은 다가 올 대정봉환운동의 기초 공작으로서 사츠마번과의 교섭을 시작했고 고또는  대정봉환론을 공식적으로 토사번론으로 하기 위해 토사로 돌아갔다. 사츠마, 나가사키 두 번에서의 막부토벌파를 걱정하고 있던 야마우치 토요노부는 대정봉환론이 갖는 타협적 성격에 착안하여 대정봉환론을 지지하였다.

고또가 토사에서의 작업을 끝내고 상경한 것은 9월4일이다. 이 때 사츠마번 막부토벌파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지만 무력에 의한 막부토벌 결의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굳어져 있었다. 고또는 사츠마번의 거병을 억제하여 대정봉환을 성공시키려 했고, 막부토벌파는 대정봉환에 앞서 군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이 사건 후에 사츠마번이 대정봉환의 건의백서 제출을 승인한 것은 10월2일이었다. 사츠마의 막부토벌파에게서 막부토벌 거병의 전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10월3일 토사번은 막부 앞으로 대정봉환을 권고하는 건의백서를 제출하였다.   사후 회의가 결렬 된 후, 중앙 정계는 완전히 혼돈 상태였는데 일한 정체 상황은 제후들이 제각기 ‘할거’화 되어 막부의 제후 통제력이 현저하게 저하되고 있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요시노부로서도 무슨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손에 넣게 된 것은 이러한 때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토사번의 건의백서를 읽었을 때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야마우찌 토요노부가 건의백서를 내는 데 있어서 그 속에서 상원제와 하원제를 설치해야 된다는 말을 보니 이는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상원에 귀족과 여러 다이묘, 하원에 제번     사를 뽑아 공론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왕정복고의 결실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용기를 자신을 얻어 이제 이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요시노부는 국가 통치권을 반환한 후에도 새로운 정치체제 아래서 권력을 장악,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 방안을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4일 천황에게 통치권 반환을 신청하였고 그 다음날 천황이 이를 허가하였다. 이에 따라 교토[京都]에서 제후 회의를 열기로 하였으나 무산되었고, 그 사이에 막부를 타도하려고 동맹을 맺은 세력들은 왕정복고와 함께 막부 폐지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가마쿠라 막부이래 675년 동안 계속 되어오던 일본의 봉건제도는 끝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사카모토 료마의 사후평가[ | ]

지난 1천년 동안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인지 아사히 신문에서 여론조사한 결과 사카모토 료마로 나타났다. 2, 3위에 각각 랭크됐던 도쿠카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를 앞섰고 6위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연히 눌러버린 것이다. 일본인들은 왜 33세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그를 좋아할까?

그것은 바로 사카모토 료마가 메이지 혁명이라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서 에도막부를 쓰러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료마의 매력은, 처음에는 죽일 생각으로 가쓰 카이슈와 만났다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가쓰 카이슈의 시대를 바라보는 안목과 인격에 감복하여 그만 제자로 들어가고 말았다는 솔직성, 사고의 유연성에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자질구레한 것들에 얾매이지 않고 항상 넓은 시야로 사물을 바라 본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외국인들이 내항했을 때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도 쇄국을 주장했던 우리와 달리, 개국의 불가피함을 스스로 깨닫자마자, 사고의 유연성을 발휘하여 함포를 앞세운 서양에 맞서 협상가다운 면모를 발휘하여 합리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방안들을 만들어 실천해 나간 것이다.  그는 결국 이러한 노력으로 막부 말기의 사분 오열됐던 일본을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하도록 견인해냈다.

어쩌면 요즘 일본인들이 사카모토 료마를 추종하는 까닭이 깊은 경기 침체에서 탈출하고 정치. 군사 강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욕구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전통과 현대가 맞부닥친 격동기를 헤쳐간 유연한 사고, 그리고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실천이 벤처정신을 요구하며 빠르게 돌아가는 이 시대의 경제 구조와 맞물리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사카모토 료마를 1위로 꼽을 정도로 존경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마치며[ | ]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서 조사하기 전에는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 천하를 통일한 도쿠카와 이에야쓰보다도 일본인들이 더 존경하는 인물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의아해하였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알수록 그가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이유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쇄국과 개국이라는 사이에서 그 동안 쭉 지속해오던 정권을 버리고 새로운 정권을 구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안정적이던 세상이 외세로 인해서 변화하게 된다면 어느 나라라도 그 정권을 지키기 위해 외세의 세력과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개국의 불가피함을 깨달아도 말이다.(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는 이러한 시대의 격동기를 유연한 사고와 변화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실천으로 새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메이지유신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정치가이자 협상의 귀재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5 참고[ | ]

  • 료마의 처, 그녀의 두번째 남편과 정부(2002) : 료마에 대해 일본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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