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나무 창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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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 창간사
  • 1976-03-15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하고

좀 엉뚱해 보이는 이름을 지었읍니다. 뜻이 넓을수록 훌륭한 이름으로들 치는 터에, 굳이 대수롭잖은 “나무”를, 더구나 뜻을 더 좁힌 “뿌리깊은 나무”를 이 잡지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우선 이름부터 작게 내세우려는 뜻에서 그랬습니다. 이 이름은 우리 겨레가 우리말과 우리글로 맨 처음으로 적은 문학작품인 ≪용비어천가≫의 ‘불휘기픈남…’에서 따왔습니다.
이 땅에서는 “어제”까지도 가을걷이와 보릿고개가 해마다 되풀이되었읍니다. 열두달 다음은 “오늘”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고 아들의 팔자는 아비의 팔자를 닮았었읍니다. 아마도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의 걸음이 이 땅 사람들이 “어제”까지 일하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또 그들은 대체로 “숙명”을 받아들였읍니다. “숙명”끼리 서로 아우름이 그들이 생각하던 삶의 슬기였읍니다. 따라서 그들은 큰 변화를 바라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역사는 끝까지 그런 쳇바퀴는 아닌 듯합니다. 이제는 “잘 살아보자”고들 해서 사람들이 변화를 많이 받아들입니다. 이른바 개발과 현대화가 온 나라에 번져, 새것이 옛것을 몰아내는 북새통에서 삶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읍니다. 마침내 “잘 살아보려고” 받아들인 변화가 적응을 앞지르기도 해서 사람이 남이나 환경과 사귀던 관계가 뒤흔들리기도 합니다. 이 변화 속에서 엇갈리는 가치관들이 한꺼번에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개발과 현대화는 우리가 겪어야 할 역사의 요청이라고 하겠읍니다. 곧, 이것들은 우리에게 모자라던 합리주의의 터득 과정이겠읍니다. 그런데, 합리주의는 개인주의나 물질주의의 밑거름이어서 그것이 그릇되게 퍼진 나라들에서는 인간성의 회복이 외쳐지기도 합니다.

“잘사는” 것은 넉넉한 살림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도 누리고 사는 것이겠읍니다. “어제”까지의 우리가 안정은 있었으되 가난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물질가치로는 더 가멸돼 안정이 모자랍니다. 곧, 우리가 누리거나 겪어온 변화는 우리에게 없던 것을 가져다 주고 우리에게 있던 것을 빼앗아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사는” 일은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뿐만이 아니라 억울함과 무서움에서도 벗어나는 일입니다.

안정을 지키면서 변화를 맞을 슬기를 주는 저력-그것은 곧 문화입니다. 문화는 한 사회의 사람들이 역사에서 물려받아 함께 누리는 생활방식의 체계이겠읍니다. 그런데 흔히들 문화를 가리켜 “찬란한 역사의 꽃”이라느니 합니다. 또 문화는 태평세월에나 누리는 호강으로 자주 오해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문화의 한 속성으로써 본질을 설명하는 잘못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이것은 예로부터 토박이 민중이 지닌 마음의 밑바닥에 깔려 내려와서 “어제”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를 이어온 토박이 문화가 외면되고 남한테서 얻어와서 실제로 윗사람들이 독차지했던 조선시대의 고급문화와 같은 것만이 문화로 받들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문화는 역사의 꽃이 아니라 그 뿌리입니다. 그리고 정치나 경제는 그 열매이겠읍니다. 정치나 경제의 조건이 문화를 살찌우는 일이 있기는 하되, 이는 마치 큰 연장으로 만든 작은 연장이 큰 연장을 고치는 데에 곧잘 쓰임과 비슷할 따름입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우리 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라고 믿습니다. 또 이 토박이 문화가 역사에서 얕잡힌 숨은 가치를 펼치어, 우리의 살갗에 맞닿지 않은 고급문화의 그늘에서 시들지도 않고 이 시대를 휩쓰는 대중문화에 치이지도 않으면서, 변화가 주는 진보와 조화롭게 만나야만 우리 문화가 더 싱싱하게 뻗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 문화가 그렇게 뻗어야만 우리가 변화 속에서도 안정된 마음과 넉넉한 살림을 함께 누리면서 “잘 살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문화가 세계 문화의 한 갈래로서 씩씩하게 자라야 세계문화가 더욱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문화는 이 땅에 정착한 토박이 민중이 알타이말의 한 갈래인 우리말로 이 땅의 환경에 걸맞게 빚어왔읍니다. 따라서 우리말과 이 땅의 환경은 문화발전의 수레인 교육과, 문화의 살결인 예술과 함께 ≪뿌리깊은 나무≫가 톺아 보려는 관심거리입니다.

조상의 핏줄이 우리 몸을 빚는다면, 그 몸을 다스리는 우리 얼은 우리말이 엮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왕조 시대에 걸쳐서 받들리던 중국말과 일제시대에 우격다짐으로 주어진 일본말의 영향은, 멀리는 세종 임금이 한글의 창제로 또 가까이는 개화기의 선구자들이 ≪독립신문≫의 발행과 같은 운동으로 그토록 가꾸려고 힘썼던 토박이말과 그 짜임새를 얼마쯤은 짓누르거나 갉아먹었읍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흔히 심각한 글이라면 무턱대고 읽기를 꺼리는 탓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뿌리깊은 나무≫는 그 안에 실리는 글들을 되도록 우리말과 그 짜임새에 맞추어서 지식 전달의 수단이 지식 전달 자체를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힘쓰려고 합니다. 또 우리말과 그 짜임새를 되살려 새로운 시대에 알맞은 말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분들의 일에 보탬이 되려고 합니다.

환경은 문화의 집입니다. 사람과 환경은 긴 세월에 걸쳐서 서로 사귀고 겨루어서 균형을 이루어 왔읍니다. 그런데 개발과 현대화는 이 환경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더 잘살려는” 사람에게서 변화를 겪은 환경은 공해와 같은 보복으로 사람을 “더 못살게” 하기도 합니다. 또 대중문화의 거센 물결이 이 땅을 휩쓸어 우리의 환경을 바꾸고 있읍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이러한 환경의 변화가 자연의 균형을 잘 지키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뿌리깊은 나무≫는 이 나라의 자연과 생태와 대중문화를 가까이 살피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멍에를 벗고 서른 해를 보내는 동안에 남녘과 북녘의 분단 속에서나마 눈부신 학문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문의 업적이 잘 삭여져서 토박이 민중의 피와 살이 되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이것은 교육이 질보다는 양에 기울어졌기 때문이며 “생각하는” 공부보다는 “외우는” 공부에 치우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이 땅의 교육이 “생각하는” 공부를 시키는 일을 힘껏 거들고 학문과 토박이 민중과의 사이에 있는 틈을 좁히도록 힘쓰겠읍니다.

중국의 고급 문화에 휩싸였던 조선 시대에도 토박이 예술이 있었읍니다. 나라를 남에게 앗긴 시절에도 이 땅의 흙내음과 겨레의 얼을 잊지 않았던 예술이 있었읍니다. 해방이 되고서 오늘에 이르는 사이에 속된 바깥 바람이 일고 상업주의가 번졌을 망정 이 땅과 이 시대의 아들과 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어엿한 예술인이 된 사람들도 있읍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로 이런 예술을 뭇사람에게 접붙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포부들이 한꺼번에 다 이루어질 수는 없는 줄로 압니다. 잡지의 편집은 아마도 영원한 시행­착오일 수도 있음을 이 ≪뿌리깊은 나무≫에 대를 물리고 떠나는 ≪배움나무≫를 펴내면서 배웠읍니다.

이러한 잡지의 구실은 작으나마 창조이겠읍니다. 창조는 역사의 물줄기에 휘말려들지 않고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해서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주는 일이겠읍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그 이름대로 오래디 오랜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도 바로 이런 새로움의 가지를 뻗는 잡지가 되고자 합니다.

발행-­편집인 한 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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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