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립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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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s Van Dongen / Le Coquelicot (The Corn Poppy) (ca. 1919)
Toys / A lover's concerto

'차라리 가을이라 다행이야'라며 그녀는 말을 꺼냈다. 그도 그럴것이 그 가을에 우리는 오래 사귀었던 연인과 둘 다 깨졌던 것이다. 남잔 이제 징글 징글 하다며 우리는 자그마한 초록색 병에든 사케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작은 잔 끝까지 찰랑거리게 채워들고 외쳤다. '앗싸~'

그녀와의 기억엔 늘 술이 따라다녔다. 처음 우리가 친해지게 되었던 날. 그날은 새내기들의 단체미팅 때였다. 당시로서도 촌스럽게 10명도 넘는 수의 여학생과 그보다 둘 적은 수의 남학생이 주루루 도산공원 kfc에서 모였더랬는데 어찌된 일인지 짝이 맞지 않았던 관계로 제비뽑기로 두명을 골라내게 되었고 그 떨거지가 그녀와 나였다. 당시엔 그걸 피보기팅이라 불렀다. 전혀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우린 친구들이 걷어준 용돈(?)으로 우선 햄버거를 사먹고 도산공원을 제주도 유채꽃 밭인냥 슬로우모션 포즈로 나잡아 봐아라~를 하며 돌아 다니다 해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집에 갈 순 없다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집 근처 호프로 갔다.

당시만 해도 술을 전혀 못하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대대로 여주당 가문이라고 뻐기며 엄청시리 마셔댔었는데 뜬금없이 한다는 말이 '너어...키스 해봤니?' 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사만 했었을 뿐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그녀가 던졌던 질문에 좀 당황도 됐지만 우습기도 해서 너 우리집 상황을 한번 들어나 보련? 하고 유난히 엄하신 아부지 이야기와 여형제 속에서만 자랐고, 여학교만 다닌 내 과거를 읊어댔더니 그녀, 날 어린애구나 하는 눈으로 보며 '난 해봤어!' 하고 역시 뻐기며 대답했다. 그리곤 곧 우울한 얼굴로 '근데 저번 주에 헤어졌어' 라며 고1때 부터 사겼다던 남자친구 이야기를 묻지도 않았는데 줄줄 하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한참을 울어대던 그녀를 보며 난, 그녀가 코를 풀때 마다 비엔나 소세지 볶음이 있던 테이블 너머로 티슈를 건네 주었을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재수 옴 붙었나봐. 오늘 킹카 나온대서 꼭 할라구 그랬는데..히히' 그렇게 말하며 붉은 눈 했던 그녀가 내겐 참 예뻐 보였다. 그렇게 우린 친해졌다.

남자랑 별 상관없이 방학마다 떠날 여행자금 모으느라 아르바이트에 바빴던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참 많은 연애를 했고, 시작할 때와 끝날 때는 무슨 불문율인냥 날 불러 우리가 친해졌던 날의 반복연습을 했댔다. 물론 그때마다 술과 함께였다. 그러니 우리 셋은 슬픈 날도 기쁜 날도 함께 했던 셈이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쯤엔 둘다 꽤 진지해진 남자친구가 있었고 우리 넷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4년 뒤 우린 다시 둘만이 낯선 타국의 작은 일식집 구석쟁이서 서로를 쳐다보며 앉았다. '남자...이젠 징글징글 하지?' 그녀가 말했다. '응' 짧게 대답하며 잔을 가득 채우는 내게 의아한 눈을 하며 그녀 또 물었다. '너 술이 왜 이렇게 늘었어? 속상하다고 술만 마셨니?' 생각해 보니 참말 이상한 일이었다. '술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었는데 왜 늘었지?' 그렇게 말하며 우린 서로를 쳐다 보고 피식 거리고 웃기 시작 했었다. 헤어진 앤인냥 모듬 꼬치를 질겅 질겅 씹어대며. 그리곤 유행색조와 새로나온 음반, 전날 보았던 티비 프로그램, 나왔던 배우 얘길했다.

다시 빈 잔을 채우려다 그녀의 것을 보니 반도 넘게 남아있었다. 두시간 동안 그녀는 한잔도 비우지 못한 것이다. 갑자기 한계점이 치솟은 나와는 다르게 그녀의 포물선은 아래로 향해진 것이었을까? 그러고보니 그녀는 울기조차 않은것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부터 내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우리의 처음처럼 그녀는 아무말 하지 않고 모듬꼬치가 있던 테이블 너머로 내가 코를 풀 때마다 티슈를 건네 주었다.

'정말 다행이지? 가을에 헤어져서? 누가 우울해 보여 하고 물으면 가을타.란 대답이면 되니까 말야. 겨울 탄단 말은 왠지 어색하잖아. 썰매타러 가는것도 연상되구.히히' 한참의 침묵끝에 그녀가 꺼낸 말에 우울한 얼굴로 가마니 썰매를 타는 모습을 상상하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푸핫.하고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남은 반잔을 홀짝 비워 버리고 잔을 채웠다. 우린 잔을 부딪치며 외쳤다.'앗싸~'

우리 붉은 립스틱을 사자. 그리고 불여시가 되 버리는게야.하고 내가 말했다. '그랫. 우리 꼭 그러자. 그리고 인간성 좋고, 돈도 많고,능력도 좋은 영곌 잡자' 라고 대답하며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왜이랫 절루 가~ 이러구 다님 레즈비언인 줄 알고 남자 안붙어' 라며 잡힌 손 빼는 나를 엉덩이로 세게 밀더니 '남자 징글징글 하다며?' 하곤 쫓아와 손을 잡으려는 그녀에게 낼름 혓바닥 내밀며 말했다. '어. 징글징글 해. 근데 좋아. 푸하하~' 그렇게 뱉어내고 횡단보도를 휙 건너 버렸댔다. 그런 날 보며 길 건너의 그녀는 외쳤다. '으유~ 모자란 년~' '응, 너두~' 그리고 두 모자란 년은 사이좋게 집으로 가서 두 지집을 기다리던, 역시나 모자란 언니와 함께 또 다시 술판을 벌렸다.

그날 밤도 그녀는 참 예뻤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나도 예뻤을 것이다. --20030326 오야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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