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강병

1 개요[ | ]

富国強兵
부국강병
  • 나라를 부유하게 하여, 군사력 증강을 촉구하는 정책

2 부국강병을 추구한 인물[ | ]

2.1 박규수의 개국통상론(부국강병론)[ | ]

  • 조선 후기의 문신 박규수의 서구열강과의 교역을 통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서기(西器)를 배워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주장
  • 당시 서구열강의 침입에 대해 대원군을 위시한 척화론자들은 화이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개항불가론을 주장했지만, 그는 서양문물의 유효성을 인식하고 서구열강과의 교역을 통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서기(西器)를 배워 부국강병을 도모할 것을 주장했다

2.2 김홍집[ | ]

  • 온건 개화파를 대표하는 인물
  • 천주교인으로 개화사상을 지녔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박규수를 선생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 1880년에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서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 미국, 영국, 독일 등과의 수호 조약 및 임오군란에 따른 제물포 조약 체결 과정에서는 실무 책임자로서 수완을 발휘하였으며,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전권대신으로 한성 조약 체결을 주도하였다

3 중국[ | ]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제후의 나라가 실시한 정책을 ‘부국강병’이라고 말하며, 《전국책》(戰國策)의 진책(秦策)에 용례가 보인다.[1] 이 시대에는 각 나라들이 《제자백가》라는 사상가들로부터 인재를 등용하고 기마 전술이나 전차 등의 신무기를 도입하면서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오서》(呉書) ‘육손전’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4 일본[ | ]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메이지 정부의 국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사용의 역사는 에도 시대 중기에 다자이 슈다이(太宰春台)가 저서 《경제록》(経済録)에서 부국강병을 ‘패자의 설’이라고 비판하는 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국가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을 빠뜨릴 수 없다고 역설했다.

일본의 국력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자, 조약 개정과 함께 열강과 마찬가지로 식민 제국 건설을 목표로 하여 청나라, 조선, 남방에 경제적, 군사적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조약 개정의 달성과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의 승리가 지금까지 국가 지도자나 지식인의 이론적 목표에 불과했던 ‘부국강병’을 일반 국민에게도 현실로 인식시키고, 메이지 초기 이후 ‘부국강병’, ‘문명개화’ 사관을 정착시키게 된다.

5 같이 보기[ | ]

6 참고[ | ]

  1. 戰國策 권3 秦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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