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질서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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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질서에 대해
  • 저자: Jjw
  • 2013-02-02

Hammurabi.jpg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진 현무암 비석, 위키미디어 공용)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던 고대 왕국으로 대략 기원전 2300년 쯤부터 기원전 500년대 쯤까지 있었다. 바빌로니아 왕 가운데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 함무라비가 있다. 대충 기원전 1810년쯤에 태어나 1750년 정도에 죽었으니 자그마치 4천년전 사람이다. 이 사람이 유명한 건 누구나 세계사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함무라비 법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현무암에 세겨진 이 법전에 명시된 사형받아 마땅한 죄 가운데에는 "속임수를 써 술을 파는 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술에 물을 탄다 거나 잔의 크기를 속인다거나 하면 죽인다는 말이다. 이 법률이 요즘에도 통용된다면 호프집 사장님들 가운데 몇이나 살아남을 지 알 수 없다. 그 외에도 노상 강도를 저지른 사람, 유괴범, 도둑질을 하고 훔친 물건의 열배를 보상하지 못한 자, 노망간 노예 역시 잡히면 사형이었다.

최근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뜬금포 같이 든 생각은 법률의 표면과 실재에 대한 것이다. 법은 언제나 자신이 그 사회가 인정하는 권위를 대변하고 공평무사하다고 주장한다. 함무라비 법전의 서문을 좀 장황하게 인용하면;

"숭고한 아누나크의 왕 아누와 하늘과 땅의 지배자이며 마루두크로서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고 에아의 맏아들로서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인 벨이 온 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지역인 바빌로니아를 세우시고 하늘과 땅에 영원토록 굳건하게 한 그 때, 아누와 벨은 나, 함무라비에게 귀족을 높이고 신들을 찬양하며 온 땅에 정의를 펼치고 나약와 사악을 정벌하여 나약함을 벗어나 강인함을 얻게 하고, 검은 머리 종족이 태양과 같은 힘으로 온세상을 밝히고 인민들의 복리를 도모하도록 명하셨도다...."(1904년 로버트 프랜시스 하퍼의 번역)

말인 즉슨 함무라비 법전은 신의 뜻을 하늘과 땅에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법전의 내용은 신의 뜻이 얼마나 세세한 것까지 꼼꼼하신 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서, 의사가 수술하다 사람이 죽으면 그 손을 자르라느니, 새로 아내를 맞이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갖추지 않으면 자신의 아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느니 같은 내용이 줄줄이 나와 그 조항이 자그마치 282개에 달한다. 이에 비하면 로마의 12표법은 마치 유방의 약법삼장과 같이 느껴질 지경이다. 각설하고..

물론 함무라비 법전이 서문에서 위대한 신을 자신의 근거로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결국 법전의 내용은 당시 바빌로니아 사회의 "유권자"들 사이의 관계를 반영한 정치의 산물이다. 역사 수업에서는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가 노예제를 수반하는 신분제 사회로서 상업활동이 활발하였고 귀족과 자유민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였다고 가르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법의 표면과 실재는 딱 잘라 "하부구조의 갈등을 억압하고 계급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못박아 버리거나, "강자를 구속하는 약자의 도덕"이라고 조롱하고 말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어른의 사정"을 지니고 있다.

한 편에서 법은 분명하게 "지배층(또는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며, 사회적인 공익과 지배층의 이익이 충돌할 때 어지간하면 지배층을 두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진다. 함무라비 법에 따르면 도망간 노예뿐만 아니라 노예가 도망가도록 도와준 자도 사형이었다. 조선은 형법에서 대명률을 기준으로 하였고 경국대전이 완성된 이후에는 경국대전을 기준으로 하되 대명률을 참조하였다. 이 두 법에 따른 유교적 법치국가의 신분은 기본적으로 양민과 천민 둘 뿐이지만, 조선 시대 내내 양반들은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법령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나라의 살림살이가 거덜날 지언정 자신들의 은닉한 토지에 대해 세금을 낸다거나 양반에 대해서도 군포를 물리는 것에 대해 한사코 거부하였다. 게다가 조선 시대에 상전을 업수히 여기는 강상죄는 최고 사형을 선고하기도 하였으니 "이웃집 소를 몰아 내 논 먼저 갈게 하여도...어느 놈이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네 놈의 코에 잿물을 따르고 상투를 범벅이며 수염을 뽑더라도 원망조차 못하리라"는 것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법은 피지배층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이도 하였고, 사회의 유지를 담보하는 최소한의 장치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춘향이는 변사또에게 "대전회통 어디에 남의 아낙더러 수청들라 하는 법이 있느냐"며 따질 수 있었다. 고대 이래로 상거래를 억제하거나 이자를 제한하는 법률은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였지만, 상거래 자체에서 속임수를 쓰거나 도둑질을 하는 것은 언제나 처벌 대상이었던 것도 기본적인 사회 유지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법이 얼마나 근엄한 권위를 공표하건 간에 그 실재는 결국 이쯤에서 타협하기로 한 정치적 결과물이다. 조선 후기 민란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타협을 깬 지배층의 수탈이었다. 물론 칼자루야 양반이 쥐었지만 가끔은 백성도 칼날쪽을 쥐고서라도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법의 표면과 실재는 어떠할까? 우리의 법체계는 정치 체계로서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 구성원의 권리에 대하여 "보편 평등한 기본권의 인정과 특수 신분의 불인정", 경제 체계로서 "사적소유의 인정과 경제 민주화의 추구"를 내세우고 있다. 참으로 훌륭한 원리이다. 그러나 법 질서 집행의 실재는 이미 법 위에 특권층이 엄연히 존재하여 자신들이 만든 법이라 할 지라도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어기면 그만이고, 법정의 심판을 받더라도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가벼운 형벌을 받고, 그나마도 얼마지나지 않아 사면받고 나와버린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의 법체계는 간신히 명목만 간당 간당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총리로 지명되었던 "우리 사회의 법 질서가 매우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는 분이 각종 비리 의혹 때문에 자진 사퇴하였다. 그런데, 이 결과를 놓고 대통령 당선인은 "신상 털기"를 하면 일할 사람이 누가 있냐고 투덜대고 있는 중이다. 매우 중요한 발언인데, 사실 지배층 누구나 그만큼 법을 개무시하며 적당히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있는 중이란 소리다. 물론 그 이익을 본 만큼 누군가는 손해를 보았지만, 재판정에 까지 가서 내 돈 내놓으라 넥타이를 붙잡고 통곡을 한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음 사면에서 그들은 매우 친절한 "사회적 배려"를 받아 무사히 본업에 복귀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선거철이 되면 또 다시 "멸사봉공"을 외치겠지.

법 질서 확립? 니들만 잘하면 된다.

2 같이 보기[ | ]

3 참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