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동서남북 이야기

밴드 동서남북 이야기

1 #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 | ]

하나가 되어요 나 비 모래위에 핀 꽃처럼 밤 비 나 비(Extended Version) 빗줄기 그 대 바 람

기 획:양병집 Produced By이승용 Engineered By 최세영 Designed By 윤진호 Recorded At 서울 스튜디오·영동 스튜디오(1980년)

영원한 ‘靑 年 音 樂’ - 東쪾西쪾南쪾北 80年代 중반 우리 大韓民國

비록 정치적으로는 그 이전 시대 보다 진보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는 격동의 70년대를 지나 그 나름대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다. 취미인지 직업인지 다소 애매모호하기는 했지만 당시 필자는 대중음악 해설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 대중음악도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이야 당시의 한국 대중음악 변화가 그 근본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제한적 시도였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헤비메틀을 포함한 본격 록 등 다양한 장르 음악의 시도, 히트곡 한 두 곡으로 앨범을 만들던 시대에서 본격 앨범용 음악으로의 변화, 컬러 TV 시대에 부합되는 A/V용 가수들의 각광 등 다소 과장한다면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라 해도 좋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급속한 변화를 마음속으로 환호하면서 필자는 역설적으로 70년대 우리의 젊은 청년문화를 대표하던 포크 음악의 쇠퇴를 가슴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차에 쇠퇴하던 한국 포크 음악의 명맥을 잇기 위해서는 초기 포크송 아티스트들의 재등장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 잠시 음악 일선에서 몰러나 있던 한국 포크 음악의 기인이자 거물이던 양병집씨의 앨범 제작을 자청하고 나섰다.
양병집씨는 자신의 새앨범 제작에는 선뜻 응했으나 음악 방향에 대해서는 정통 모던 포크 취향을 원했던 필자와는 심한 이견을 보여 포크록 더 나아가 프로그레시브나 헤비메틀 까지 자신의 음악세계를 확장하려 했다. 이러한 의견차로 앨범 제작이 난항을 거듭하자 그는 새로운 곡을 쓰기 위해 복잡한 서울을 떠나 낙향해야겠다고 이야기하며 필자에게 케이스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카세트 테이프와 마스터 테이프라고 하기에는 너무 볼품 없는(?) Work Tape 형태의 릴 테이프를 하나 넘겨 주었다. 1980년 말 의욕적으로 앨범을 만들기는 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제대로 홍보 한 번 못해보고 사라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설명과 함께 양병집씨는 앨범에 대한 권리를 나에게 양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양병집씨가 앨범 제작에 소홀할까 두려워 자세한 결정은 후에 하기로 하고 일단 동서남북 이라는 그룹의 마스터 테이프를 필자가 보관하기로 했다.
그후 별반 기대를 갖지 않고 테이프를 들어보니(사실 그 테이프는 완벽한 것은 아니었고 녹음 상태도 좋지 않았다.) 타이틀곡 ‘하나가 되어요’는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록 비트의 다소 리듬있는 발라드로서 쉽게 친숙할 수 있는 곡이었다.
하이 옥타브를 처리하는 보컬 창법이 다소 문제있는 듯 하기는 했지만 판에 박은 듯한 꾸며진 창법에 익숙했던 당시로는 새로움을 주는 맛도 있어 보컬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 참신함이었다. 흔히 당시의 밴드 지망생들이 범하기 쉬운 외국 그룹의 모방이 아니면서도 한국적 진부함에서는 벗어난 ‘새로운 느낌’ 그리고 더하여 신인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세련됨이 인상적이었다. '하나가 되어요’로 이들의 음악에 주목하려 할 때 다음곡으로 들어본 ‘나비’는 조금 과장하면 하나의 충격이었다.
당시 한국의 팝스계는 성시완씨 등의 활발한 소개로 프로그레시브 음악이 인기를 모아가고 있었지만 정작 창작곡은 문자그대로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비’는 우리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갈구했던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꽤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특히 과도한 건반악기의 사용으로 록 음악의 본류를 벗어나 그 정신을 왜곡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기까지 했던 해외의 프로그레시브 그룹들과 달리 건반, 기타, 타악기가 조화를 이루면서도 독특한 이미지를 만드는데 성공한 곡으로 그 후 이 앨범이 음악 애호가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사랑받게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외에도 '모래위에 핀 꽃’에서 보여주는 헤비메틀의 느낌이나 연주곡 '밤비’의 서정성도 산뜻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런 음악이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는 우리 대중음악계의 풍토에 대해 적지 않은 실망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필자가 그 후 발매됐던 앨범을 구해 들어보았던 ‘빗줄기’나 '바람’ 같은 곡도 그 노랫말이 다소 진부하기는 했지만 록 음악의 다양성을 한국 대중음악에도 뿌리를 내리려는 그 실험적이면서도 서정성이 깃든 사운드가 기억에 남는 곡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이 이 음반이 이미 1980년도에 나왔다는 사실이었고 당시 멤버들의 연령이 스물을 겨우 넘은 나이였다는 것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부터 몇년의 세월이 흘러 서울 올림픽을 얼마 앞두고 양병집씨는 호주로 이민을 결정하였다. 필자에게 동서남북의 마스터를 넘겨주고 창작곡을 몇곡 만들기는 했으나 복잡한 외부 문제가 겹쳐 본격 포크 앨범 발매는 불발이 되었고 몇 년전 양병집씨가 말했던 대로 동서남북의 모든 권리는 필자에게 귀속되게 되었다. 필자 역시 광고대행사의 TV-CF PD로 입사하면서 음악 관련 일은 다소간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필자가 입사한 국내 대형 광고대행사였던 C기획에는 동서남북의 주요 멤버이자 이광조의 밀리언 셀링 히트곡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의 작곡자 이태열씨가 오디오 PD로 활동하고 있어 업무적으로 자주 만나게 되었고 동서남북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때가 많았다. 그리고 필자와 가깝게 지내던 음악관계자들 중에는 동서남북 음악의 재조명을 위해서 재발매해야 된다는 의견을 주는 분들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필자가 자주 들르던 비디오 샵에서 대학생 몇 명이 테이프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옥신각신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연유를 알아보니 그 주인이 어렵게 구한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서로 자기가 먼저 가지고 가겠다고 싸우는 것이었다.
그룹사운드 지망생들이었던 그들이 원했던 테이프는 한국 음악들 중 귀한 음악들만 모은 것이라고 하는데 필자가 그 수록곡을 보니 바로 동서남북의 ‘하나가 되어요’와 ‘나비’가 첫 번째로 실려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동서남북의 음악에 대해 물어보니 언더그라운드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그룹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필자는 1988년 재발매 작업에 서둘러 그해 연말에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라는 부제를 달아 이 음악을 재발매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본격적으로 이 앨범을 홍보해줄 사람이 당시에는 없었다.
필자 역시 직장 생활 중이었고 자금력이 취약해 홍보 예산을 집행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있는 방속국 PD와 음악관계자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재판을 넘어 3판까지 찍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판매에 성공하였고 일부 지방의 다운타운가에서는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로 호소력있는 보컬과 사운드의 '그대’가 새롭게 발굴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필자에게 알려오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가 되어요’는 다운타운가 히트챠트 Top 10에 오르는 조그마한 기적(?)을 연출하기도 하였고 방송관계자들 중에는 이들의 출연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박호준, 김광민씨 등이 미국으로 유학중이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이들의 재결합이 있었다면 보다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당시에는 많이 가졌던 것 같다.
이러한 아쉬움도 세월과 함께 잊혀져 다시 10년이라는 세월이 더 흐르자 취미활동으로 음반을 수집하거나 또는 광고용 BGM 음악을 고르는 일 외에는 점차 대중음악계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고, 한국에 팝 음악을 제대로 소개하고 한국 대중음악의 발전을 위해 조그마한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선배들과 술자리에서 열변을 토하던 나의 젊은 시절은 아주 오랜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런 중에서도 몇몇 음악관계자들은 간헐적으로 동서남북 음반의 재발매를 제의하기도 했으나 마스터를 보관해 오던 '예음사’의 담당자들에게 그동안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않은 미안함과 그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해 준 것처럼 '신화는 신화로 있을 때 신비로운 것이다"라는 말이 꽤 의미있다고 생각된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었다. 사실은 모두 필자의 게으름 때문이었겠지만… 그러던 어느날 음반 수집에 조예가 깊어 평소 가깝게 지내던 S그룹의 S부장님이 일본에 있는 음반 수집가가 한국 대중음악 앨범중 꼭 구하고 싶다는 목록을 전해주면서 협조를 부탁했다. 그 목록을 보니 외국인이 어떻게 그렇게 한국의 포크 음악과 록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은지 놀라움을 지나 약간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음악적으로 뛰어난 작품들로만 작성된 그 목록에 N.E.W.S라는 앨범이 있었다. 나 자신도 어떤 그룹인가 하고 잠시 생각해 보니 바로 동서남북의 앨범이 아닌가!
이런 에피소드가 또 한 번의 계기가 되었고 성시완씨의 적극적인 권유로 시완레코드사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잊혀진 명반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출반되는 영광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동서남북의 음악은 참 특이한 음악이다.
필자 역시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명반이라 불릴 정도로 그 음악성이 높다고는 솔직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끈질긴 생명력으로 비록 많은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소중한 사랑을 받는 음악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 가치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이 음악이 갖고 있는 청년정신 - 어느 기업의 광고에서도 인용했듯이 영원한 도전정신 -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음악으로는 비록 성숙하지 않을 지는 몰라도 이 앨범에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패기가 있고 ’하나가 되어요’나 ‘나비’에 열광했던 젊은이들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세월이 흐르고 유행음악의 그 유행이 바뀌어도 이 음반의 진가를 인정하는 청년들의 순수함은 언제나 이들의 음악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 아닐까?

동서남북 멤버중 박호준씨는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재즈 음악을 전공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대중음악과 상업용 음악에서도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김광민씨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그 성가를 높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태열씨 역시 중견 레코드사 간부로 한국 대중음악에 새 바람을 불어 넣고 있으나 그 외 멤버들은 음악계의 일선에서는 떨어져 있어 그 소식을 자세히 듣지는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다보니 벌써 어둠을 지나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 음악 설명에 대한 글이 아니라 어줍잖은 필자의 잡담이 되고만 것은 동서남북의 음악을 처음 듣고 흥분을 느끼던 시절의 청년정신이 그리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벌써 추억을 먹고사는 연배가 된 것은 아닌지, 어둠속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는 새벽 여명을 느끼며 이 앨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니 동서남북의 음악이 바로 긴 어둠을 지나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한국 록 음악의 여명을 밝혔던 음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 빛이 찬란하지는 않지만 그 빛줄기 하나만으로도 모든 암흑을 잠재우고 자신만의 빛을 뽐낼 수 있는 그런 음악 - 아무도 찾지 않는 길을 외롭게 그 선두에 서서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깃발을 들고 있는 기수가 되기를 자처했던 그런 음악!

동서남북처럼 멀리 퍼져나가 누구에게나 사랑 받기를 원했고 비록 그런 커다란 사랑을 받지는 못했어도 그런 사랑을 받았던 음악들이 모두 잊혀질 때에도 사람들의 잠재된 기억속에서라도 살아 숨쉬고 있는 그런 음악을 이 음악의 사운드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음악을 만들거나 기획하고 제작했던 많은 사람들까지도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는 시각에 다시 한 번 생명력을 넣어준 성시완씨 이하 시완레코드사 직원 여러분들에게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서 송구스런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음악의 주인은 제작자나 뮤지션이 아니라 그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팬들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망각했던 죄인으로 오랫동안 갖혀있던 ‘마음의 감옥’에서 필자를 자유롭게 해준 그런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글/ 이승용


동서남북을 아시나요?(우리나라의 아트락)      08/04 23:14   39 line

좋은 음악은 듣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 동서남북의 유일한 앨범 '아주 오랜기억과의 조우'에 실려있는
말입니다.
밑에 보니 국내의 아트락 얘기가 나온 것 같아 써봅니다.

동서남북은 6명의 멤버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2대의 키보드는 아주
일품인 그룹이었죠.. 잘은 모르지만 지금도 셋션멘으로 활약하는
김광민씨도 포함이 되있는 실력있는 그룹이었습니다.

이 앨범은 88년에 나왔지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70년대에
녹음 한것을 88년에 제작해서 냈다고 합니다. 전영혁의 fm25
시에서 들은 후 살려고 돌아다녔지만 못 구하다가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어렵게 발견을 해 사게됐죠.. 사도 후회가 전혀 없는
국내 아트락의 대표적 앨범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국내에 아트
락 그룹이 없기도 하지만요..

아마 마그마와 비견될만한 국내의 그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한 번 구해보세요. 구하기는 어렵지만 어려운 만큼 좋은 앨범
이니까요..

그럼 이들의 멤버와 수록곡을 소개하고 마치죠..
20000

                                      Orange Party
                                       정 병훈

A. 1. 하나가 되어요.
   2. 나비               →→→가장 좋은 곡
   3. 모래위에 핀 꽃
   4. 밤비
B. 1. 나비(Extended Version)
   2. 빗줄기
   3. 그대
   4. 바람

Line Up
박호준--기타  이태열--베이스  김득권--드럼
이동훈--Organ   김광민--string,synth.,piano  김준응--보컬

『HoPE (Progressive Rock)-호프 음악이야기 (go SGGHOPE)』 204번 제 목:[추천] 우리나라 최초의 아트락 그룹은? 동서남북이죠..
올린이:pelosi (임태균 ) 96/09/01 18:26 읽음:301 관련자료 없음


우리나라 최초의 아트락 그룹은 동서남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구하기 힘든 앨범이 되었죠...
앨범타이틀은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입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한번 구해보세요..쉽지는 않으것임..
그리고 여기에서 키보드를 김광민이 연주 했지요...
아시는 분은 다 아실 이야기를 했습니다..

『HoPE (Progressive Rock)-호프 음악이야기 (go SGGHOPE)』 205번 제 목:하지만 동서남북은... 올린이:kinski (김재홍 ) 96/09/05 20:58 읽음:201 관련자료 없음


동서남북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그룹입니다만..
프로그레시브라 고 보기에는 조금 앨범 전체로보아 부족함이 있는데요..
한두곡을 제외하고는 프로그레시브 , 재즈 , 하드록 , 등등을 추구한 퓨전그룹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리고 김광민 자신도 동서남북은 팝그룹이었다고 하던데요..
장르야 어쨌건 동서남북은 훌륭한 밴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제가 가장좋아하는 국내 밴드중하나죠,..

그럼이만..

2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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