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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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Ardor
밀애
  • 2002년 한국 영화
  •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
  • 감독: 변영주
  • 출연: 김윤진, 이종원, 계성용, 윤다경 외
  • 시간: 110분
  •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2 줄거리[ | ]

격정 멜로 | 은밀한 탐닉 ...내가 잘했나요?

서른의 전업주부 미흔의 집에 찾아온 빨간 스웨터의 여자. 그녀가 입을 열어 미흔의 남편을 '오빠'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 몇마디로 미흔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는, 크리스마스 오후의 끔찍한 테러였다.

고요한 나비마을의 평화로움에 도취되어 미흔 가족은 마치 아무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다. 그날밤 이후 원인을 알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고 있던 미흔은, 아주 고통스럽게 자신의 아픔을 내쏟는다. 그렇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인규는 근처 호숫가에서 낚시를 즐기고, 나머지 시간엔 물고기를 낚듯 여자를 만나 섹스를 즐기는 한적한 시골병원 의사. 평화로운 나비 마을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즐기는 것이 익숙해지려는 즈음, 그가 그녀를 만난다. 그때였다. 뜨거운 햇빛이 내비치는 휴게소에 멍하니 앉아있던 미흔에게 날카로운 경적소리처럼 그를 일깨우는 낯선 목소리의 인규. 미흔은 온몸으로 그를 거부하지만, 동시에 온몸으로 그에게 빠져들고 있다.

인규는 미흔의 질문에 말할수 없이 벅찬 대답을 주었다. 삶이 무너졌다고 생각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섹스는 하되, 절대로 사랑해서는 안되는 위험한 게임에 빠진 미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 게임을 탐닉하고 있다.

미흔의 남편은 얼마전부터 연못을 만들고 싶어했다. 연못은 모든 것을 잊고 물고기를 가꾸며 단란하게 살자는 그의 꿈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있어야할 미흔은 없고 연못만 남아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이시간 여관속 숲길을 걸어나온다. 온동네에 퍼져있는 미흔과 인규의 소문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효경과 끝이 어딘지 모르는 이 남녀의 위험한 사랑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것인가?


3 # 오야붕[ | ]

며칠전 누가 변영주 감독의 새 영화 밀애의 평을 올려 주었다. 글쓴이는 극중 여주인공을 답답하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답답함은 아마도 대부분의 여성들이 착각하기 쉬운 사랑과 성욕. 그리고 깨어나지 못한 자아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소 전투적인 문체로 씌여져 있는 글이긴 했으나 공감할 수 있는 꺼리를 주었다. 그래서 영화는 보지도 못했으나 생각하고 있던걸 와라락 풀어 버리고 말았다. 글쓴이는 진정한 해방은 어디에 있냐고 한다. 진정한 해방은 착각하지 않는 선택한 사랑으로 후회하지 않는데 있다!

그 글들을 올린다. --오야붕


4 # 촌평[ | ]

저도 얼마전 우연찮게 보았습니다만...이 영화는 과연 이게 변영주의 영화냐라는 것으로 말이 많죠. 일단 황머라는 분은 영화를 무척 신랄하게 까고있군요.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기도 하거든요.

여자가 남자의 칭찬으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성이 칭찬해주면 기쁜 것이야 남녀노소에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그리고 원래 남녀관계라는 것은 구차한 것이지 타이타닉처럼 멜랑꼴리 한 것은 아니구요.
이런 것들을 매번 성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남자들에게 독니를 드러내는 것이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의 병폐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가만히 있다가 한방에 멕여야죠. 이런 솜방망이 날려봐야 남자들에게 별로 어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남자들에게 왜곡된 성관념을 갖게 도와주는 측면도 있는거 같아요. 사실을 그대로 그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종원은 정말 웃기는 캐릭터입니다. 무드로 모든 것을 해결. ^^

그다지 추천하고싶은 영화는 아닙니다만...본 여자애가 그러는데 여성의 관점으로 그려내어 공감가는 것이 많다고 하더군요. 어서 여성감독의 숫자가 절반이 되어 여성감독이라는 말 자체가 좀 더 편안하게 다가오는 때가 되어야 올바른 시각을 갖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영화가 여성적이라는 것을 잘 못느끼고 있었거든요. ^^a --거북이

음..전 생각이 좀 달라요. 이분은 성정치적으로 쓰신게 아닌거 같아요. 어투가 그렇긴 하지만 그녀의 독설은 남성이 아닌 여성을 향하고 있어요.여자들아 정신차려라. 하고 말하고 있어요.이 글을 읽고서 생각했던건 우리에겐 확실히 고정된 관념의 남성.여성관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래야만 한다...라는거요. 정형화된 성적 편견을 깨고 스스로가 주체가 되라.하는 탈 페미니스트적인 관점에서 쓴 글로 전 봤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타이틀을 붙여놓고 거기에 맞춰주길 바라지요. 그건 기대라는 이름으로 오기도 하지만요. 변영주에 관한 것도 그런거 같아요. 그녀가 여성영화, 사회의식이 물씬 살아있는 영화만 만들어야만 한단 법은 없는대도 말이지요. 변영주가 언젠가 자신은 남녀차별을 받아 본적이 없다.란 말을 했던걸로 기억해요. 그런 그녀가 만든 영화라 역설적인 느낌으로 제겐 오네요. 꼭 봐야겠어요. ^^ --오야붕

그런데 남자들에게 말한다고 해서 페미니스트적이고 여자들에게 말하면 탈페미니스트적이라고 말하나요 보통? 전 그쪽 논의는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페미니즘은 남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여자들이 주체적이 되는 것이 남자들에게도 바람직하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딱히 탈 페미니스트적인 관점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서 평론가는 논지를 극단적으로 끌고가서 비아냥거리지요. 남자들은 그렇고 그런 대상이라고 정형화시키고 그 대상에 맞추어져버린 여자들에게도 비아냥대구요. 틀린 얘기를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여튼 그다지 발전적인 얘기도 아니라는거죠. 하지만 극단적인 것도 하나의 말하기 방식이니 뭐라고 할 것도 없네요. 허허. --거북이

5 # 오야붕, 성. 꼬리를 무는 생각들[ | ]

영화를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말하긴 참 어려우나 이 글을 읽다보니 머릿속에 있던 것이 누에고치 실 뽑듯 졸졸 풀리고 (비록 방향을 잃을것이 분명하나) 하고 싶은 얘기가 미친년 널뛰듯 날뛰고 있으니 그냥 쓸랍니다. (잃어버릴 방향성, 즉 논지에 대한 미리하는 변명. (-,,-)/ )

이 영화가 여성영화냐, 재난영화냐를 제껴두고 영화전반에 걸쳐 주로 말하고 있음이 분명한, 성과 거기에서 파생된 여성의 자아성찰.이란 면을 볼때, 우선 우리는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여성의 성의식에 관해 한번 생각해 봐야 할것 같습니다. 여학교만 다녔고, 여형제 속에서만 자란 저이니, 지극히 여성편향적 관점에서 볼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고.

  • 한국민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은적이 없다.

처음으로 성교육.이란 이름의 수업을 받게 되었던 건 초등 5학년때. 실과 시간이 첨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때도 남자애들은 다 내 �고, 여자애들만 졸졸이 모아서 여성의 자궁과 때가 되면 다 시작한다는 생리현상, 월경에 대한 초보지식을 몇장되지 않는 슬라이드로 보며 머쓱해져선 콩닥거렸던 기억이 나는군요.

왜! 남자애들은 그때 이후 여자애들을 보면 그 수업에 대해 놀려댔고, 여자애들은 괜시리 얼굴 빨개져가며 그런 남자애들을 피해 도망가거나 혹은 약간의 저항의식을 갖고 신발주머니를 휘두르며 그들을 팼을까요? (이때가 좋았지...패기도 하고)

여기서 첨으로 잘못된 성교육의 첫증거가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 슬라이드는 비록 여성만이 가진다는 월경에 관한 것이기는 하나, 여학생들만 봐야 할 것이 아니라 남학생들도 같이 보고, 같이 알아야 할 것이었단 겁니다. 나중에야 알게�던 비슷한 시기에 남자에게 온다는 몽정.이란 것도 여학생들 역시 같이 알아야 할 일이었지요. 함께하는 성이 아닌 나누고 감추어야 하는 성.으로 첫시작을 했으니 우리는 그 안에서 커갈 밖에요.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에 또 한번의 성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때는 생리대 회사에서 나와서 강연을 해 주었지요. 그러나 이때 역시 여성들에 국한된 몇가지 지식이었을 뿐, 남성에 관한 어떤 설명도 없이 기념품인양 생리대 두개씩을 받고 끝났고, 또래의 남자녀석들은 가사책을 구하여 보면서 그 안에 나와있는 몇개의 사진을 보며 히히덕 거렸다고 하더군요.(불쌍도 하지요...) 또 시간이 흘러 이젠 여성학을 들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페이퍼를 써야 하는 관계로 꽤 두꺼운 책을 펴서 보니 남녀 성기에 관련된 총천연색 몇가지 사진이 나왔더군요. 그러나 그런 흥미진진함에도 불구하고 공부.란 이름이니 그 두꺼운 책은 베개로 전락. 쿨쿨자다가 왠지 주위가 수선스러움을 느끼며 눈을 떠보니 펴놓은 그 책에 나와있는 그림을 주변에 있던 남학생들이 자고 있는 제 주위에 모여들어 우옹~ 거리며 보고 있었던 게지요. 이 얼마나 불쌍한 노릇입니까. 그렇게 우리는 카더라. 통신을 절대적 교본으로 삼고, 여성지 뒤에 나와있는 성상담을 부교재 삼아 빈약하기 짝이 없는 성지식을 가진 성년이 되고 마는 겁니다.

  • (보편적)평안한 삶을 위한 한국사회에서의 여성의 성.

그러나 여자에 비하면 남자들은 조금더 열린 분위기(또는 비틀려진) 성이 우리사회엔 확실히 존재하지요. 그리고 여성들은 그것에 맞춰진 여성답기를 강요 당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주된 주입식 교육은 여성에 의해서, 즉 내 어머니들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네들은 자신들이 살면서 느꼈던것들. 소위 말하는 우리사회에서 여성이 가장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전업주부적인 측면에서 최상의 엑기스들을 그들의 딸들에게 알려 주지요.

집에서 말술을 마시더라도 나가선 못마셔여어....이래라 / 손이라도 잡을라 치면 우선은 어머나~하고 놀라는 척이라도 해라. / 결혼.이란 말이 나오기까지 니 몸은 니가 지켜라. 결혼하고 나서 여시로 둔갑을 하더라도 하고..(아, 예에...)

무슨 전투에라도 나가는냥. 지키고 뺏기지 말아야 할 것들 투성이속에서 여성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대 교육자들의 말씀이 상당히 타당성있는 진리였음을 깨닫곤 하지요. 즉, 그네들의 주된 교육내용은 결혼.이라는 전투에서 당당하게 꿀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한국적 여성성의 현재.를 알려 주는 것이었단 겁니다.(만쉐이~)

  • 수동이냐 능동이냐.

윗 글에서 보듯 영화에서 나오는 여주인공은 상당히 오필리어적인 여성으로 보입니다. 약하고, 아프고, 못난 그녀는 찍힘을 당해서 결혼하고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다가 또 그녀와 비슷한 못난 남자에게 걸려 성에 눈뜨는며 쪼까 행복했다가 꼬릴 잡혀서 치도곤을 당한다.로 얘기가 진행되는 모양입니다. 여기서 ***님께서 궁금해 하셨던 디카프리오에 의한 과 이 영화의 관계가 나오게 됩니다. 한번 비교해 볼까요?

에서 여자는 남자의 자신의 성기에 관한 찬사.에 뿅가고 감사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으나 그녀는 남자의 말.에 의해서 약간의 자신감을 회복한거지 자신이 직접 느껴서가 아니란 것에 모순이 있습니다. 그녀가 탐닉하였던 관계는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나 입만은 살았던 책임감 없는 남자에게 걸려 또다른 우롱을 당한거 밖에 되지 않는 거지요. 에서의 남자는 성기.가 아닌 여자를 봅니다. 자신이 가난하거나 말거나 그녀와의 미래를 책임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아… 원하는 모든 것을 다해보고,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죽으라”는 축복의 훈화말씀을 남겼던 디카프리오와는 달리 의 남자는 “너와 나는 예전에 품었던 가정에 대한 희망으로 돌아갈 수 없고… 다시 반복될 것이고…”라 읊조리며 발뺌을 하기 바쁘지요. 이 둘의 차이는 여기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여자를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인정하는 사람과 사랑을 빙자한 성행위용 도구.로 보는 점이지요.

여기엔 여자들의 책임이 사실 제일 큽니다. 자발적 의지와 선택을 당하느냐.의 차이를 혼돈하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선 본인 스스로 허부적 대는 거지요. 의 여주인공은 본인이. 원치 않던 약혼자의 선물인 목걸이를 걸고, 디카프리오 앞에서 본인의. 의지로 나신이 되어 섭니다. 의 여주인공은 자신의 성기를 찬양한 남자에게서 내침을 당한 후 자신을 구박하던 남자와 또 관계를 맺습니다. 즉, 그녀는 약간의 자신감 회복후 또 다른 성기찬양을 남편에 의해 얻으려고 한걸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된통걸린 주제에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라는 나레이션으로 자신을 옹호 합니다. 이런상황을 글쓴이는 덧붙힌 유머로 비꼽니다. 갈아입긴 하였으나 새 팬티가 아니다. 살아나긴 하였으나 새 삶이 아니다. 해방은 어디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 부분을 읽고 오호~하며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모든이가 원하는 사랑을 변명처럼 깔고서라도 자신이 주체가 되서 원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백명이든 천명이든, 그 안에서 어떤 오르가즘을 맛보던 간에 성유희.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고, 진정한 성.의 해방은 주체적 자신의 인정이 없으면 성립될 수 없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 하고 느꼈거든요. 동감에 동감!

때때로 연인과 헤어진후 몸주고 맘줬는데 어찌 이럴수 있느냐. 하는 얘기를 듣곤 합니다. 한국에 있었을땐 함께 화내며, 느아쁜넘들~했으나 연륜이 조금 더 쌓인 지금은 근데 지금은 적당히 돌려서도 아니고 대놓고 얘기합니다. 넌 싫었니? 너도 좋아서 그런 거면 남 탓할게 못 돼! 라고 말이지요. 주는게 어딨습니까, 주는게. 물건도 아니고..그건 행동이고, 거기엔 책임이 따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면 그건 둘의 합의 하에 생긴 일이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내려야 할 선택 사항인 거지요. 내가 원치 않았는데 억지로 그리 되었다면 그건 범죄라 처벌이 마땅하지만 그 후에도 아무일 없이 잘 사귀다 헤어지고 나서 후회가 된다면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일 수 밖에 없다라고 생각니까요.

  • 결론?

위 영화평에서 글쓴이는 말합니다. 남성중심의 매춘적 성담론.이기 때문에 여성영화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전 생각이 틀립니다. 여성영화 맞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성의식에 의한 성과 사랑에 헤메는 오늘의 여자인가.를 보여 준다는 면에서 확실히 여성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오야붕

6 # 황진미, cine 21[ | ]

해방은 어디에?

‘여성주의 다큐 감독’으로 알려진 변영주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 가 ‘격정 멜로’라는 카피를 달고 개봉되었다. 영화는 당연히 ‘여성영화’혹은 ‘멜로영화’로 감상/비평되고 있다. 그러나 는 결코 여성영화가 아니며, 멜로영화로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 영화의 장르는 뜻밖에도 ‘재난을 당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여자’를 그린 ‘재난(극복, 그러나 결국 실패) 영화’이다. Oh! Really

물론 처럼 재난영화이자 멜로영화이고 여성영화인 경우도 있다. 은 거대한 스펙터클의 재난영화이자, 짧지만 평생토록 간직될 운명적 사랑을 그린 멜로영화이고, 한 여자가 자유로운 자의식에 눈을 뜨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도정을 보여준 여성영화이다. 의 그녀는 사고와 연애를 통해 어떤 진실을 깨달았으며, 어떤 해방을 맛보았는가 “그래, 어찌 됐든 죽거나, 미치거나, 혹은 죽거나 미친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성장이고, 성공이야… 아예 뭐라고요 ‘해∼방’이라뇨 그게 무슨 뜻이죠”

왜 여성영화가 아닌가? - 남성중심의 매춘적 성담론 그녀는 “온몸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는 그의 말에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나 남자에 의해 재평가받아 획득되는 자신감은 열등감으로부터의 회복일 뿐 성적 자아의 각성이 아니다. 대체 “통째로 빨아들이는…” 그녀들의 흡입력은 누구를 위한 기능, 혹은 효용인가 성의학적 견지에서, 오르가슴에 도달한 질의 율동적인 수축은 남근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작용을 하며, 사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섹스란 남자는 사정을, 여자는 오르가슴을 목표로 경주하며 상호 서비스를 교환하는 과정’인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의 성의학적 함의는 여성의 흥분이 직접 남성의 극치감을 유도한다는 것이요, ‘섹스란 직접적인 극치감의 교류, 혹은 공유의 과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상호교감의 과정에는 “내가 잘했나요” 따위의 질문은 필요없다. 섹스란 ‘나/너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것’이요, ‘내가 느끼는 바로 이것을 동시에 네가 느끼는 것’이라야 한다. 흔히 ‘잘한다’는 ‘변강쇠/옹녀’적 담론은 상대를 기능적 객체로 전락시키며, 심각한 소외를 양산한다. 또한 성기 중심의 페티시적 섹스관에는 여성이 아닌 암컷, 아니 하나의 거대한 구멍만이 남게 된다.

외람되게도 이 영화의 성기 중심적이고 기능적인 성담론은 “여성들이여 ‘예쁜’ 성적 대상에 머물지 말고 ‘잘 빠는’ 성적 주체, 아니 ‘잘 빠는’ 거대한 구멍이 되어 남자들을 만족시키고 그들로부터 인정받자!”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성의 오르가슴을 위하여 더 많은 애무를!’을 주제로 삼았던 <결혼 이야기>가 10년 전에 나왔고, 비록 도구적이고, 성기 중심적이지만 (남성에 의한 인정이 아닌) 여성의 자족적 성을 강조하였던 <처녀들의 저녁식사>로부터 몇보나 후퇴한 이 영화를 단지 유부녀 혼외정사를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성적 해방을 논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가(정부는~ 시리즈를 재평가하라! 재평가하라!) 남성에 의해 평가되는 여성의 ‘성기적 기능론’은 온몸의 성감이 오로지 성기로만 집중된 남성들에게 복무하는 남성 중심의 매춘적 성담론이자, 소외된 성담론이다. 남자는 여자를 빨판으로, 여자는 남자를 몽둥이로, 즉 살아 있는 자위기구로 보는 성, 나아가 음경확대시술과 질괄약근수축시술을 받아 모두모두 ‘잘하게 되는’ 성을 우리가 꿈꾸는가 소외가 아닌 해방을 지향한다면 성기적 성이 아닌 전신적 성, 나아가 전인적 성을 논해야 하지 않는가

‘악하고 나쁘고 못된’ 게 아니라 ‘약하고 아프고 못난’ 그녀 그녀는 선배였던 남자에게 찍혀서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였고, 믿었던 남편에 의해 치유할 수 없는 외상을 입어 한동안 좀비처럼 살다가(그녀가 가사노동을 소홀히 하는 것은 모든 생활을 방기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침내 ‘엥꼬’가 난다. 길 가던 남자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그녀는 얼빠진 상태를 눈여겨본 그에게 찜당해 섹스를 하게 되고 자신의 성적 ‘기능’을 재평가받는다. 빤짝 정신이 들어 잠시 생기를 되찾은 그녀는 그 특별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거절당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남편과 잔다. 코딱지만한 동네에서 윗집 남자와 뒹굴며 좋아라 하다가 “너무 멀리 온 탓으로” 동네방네 소문나고, 남편에게 들킨다. 잠시 오리발을 내밀어보았으나 소용없었고, 흠씬 두들겨맞고 가정과 아이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이 쫓겨나자, 애인을 불러내 질질 짠다. 사태가 이리 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그다지 새로운 희망을 품지도 않는 그와 대책 없이 떠나보려 하였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남자는 죽고 그녀 혼자 남는다.

자… 여기서 그녀는 어떤 주체적 선택을 하였으며, 어떤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그녀의 마지막 내레이션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는 어떤 장면으로부터 감지/유추되는가 그녀는 자발적으로 가족주의를 깨부수며 금기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는가 불행하게도 그녀의 모든 삶은 남자의 선택과 버림으로 점철된 삶이요, 남성 중심 사회와 운명(<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하느님도 남자더라”라는 대사가 나온다)에 의해 등떠밀려온 삶이다. 그녀는 무엇을 쫓아, 무엇을 위반하였는가 성기의 성능을 인정해준 특별한 남자와의 섹스를 위해, 언제부터 하찮아 죽겠다고 생각한 그놈의 가정의 울타리를 담치기 했을 뿐이다(<우묵배미의 사랑>의 최명길보다 뭐가 더 나은가). 그녀가 처음 남편으로부터 상처받았을 때, 그와의 섹스를 통해 뭔가를 느꼈을 때, 하다못해 온천장 앞에서 남편과 딱 마주쳤을 때 그녀가 먼저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였나 신뢰가 파탄난 가정에서 멍~하니 살다가, 맞바람을 피우면서 온갖 거짓말과 변명을 너절하게 늘어놓다가, 끝까지 “목욕하러… 한 시간 전에…”라며 발뺌하는 그녀, 먼저 쪽박을 깬 게 누군데 손찌검이냐고, 내가 무슨 죽을죄로 내 딸도 못 만날까보냐고 맞붙지 못하고 딸의 사진이 없다며 신파를 연출하는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하랴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통해 무엇을 깨달았을까 과연 성을 통해 자아에 새롭게 눈뜨고, 성 혹은 사랑, 남녀관계 등을 일반화하고, 객관화하여 상처를 치유함은 물론 이후 확장된 사회관계에서 누구와도 능동적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되었나 그와의 눈물의 마지막 섹스는 ‘엉클어진 상황에 대한 피차에 대책없음’의 정서이지, 결코 희망 혹은 해방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의 사회적으로 변화된 삶은 감지되지 않는다. 그녀는 살아생전에는 그에게 집착하였고, 그 남자가 죽고 나니 “내 생에 꼭 하나뿐일 특별한 그”를 추억하며 살 것 같다. 처량하고 궁상맞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악하고, 나쁘고, 못된 여자”가 되지 못하고, “약하고, 아프고, 못난 여자”에 불과한 그녀를 젖혀두고 누구 탓을 하랴마는, 그녀가 만난 놈은 디카프리오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똥폼 잡는 그 그는 게임을 제안해놓고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감정 기복에 쩔쩔매며, 이를 감추느라 시종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권태를 냉소로 치환해낸 쿨한 사내가 아니라, 절망과 혼돈의 와중에서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는 불안정한 남자이다. 그는 결혼이니 사랑이니 섹스에 대해 객관화하지도 못한 채, ‘어떤’ 실패를 반추하며, 자신의 불행과 허무의식을 상대에게 투사시키는 인물이다(356호에 기술한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명확히 하며 애인에게 결혼문제까지 상담해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감우성, 혹은 묻지마 섹스를 즐기며 강수연의 팬티까지 빨아주며, 그녀를 프로로 키워내는 <그대 안의 블루>의 안성기와는 생판 다르다). 그는 “이런 건 가벼워야 하는데…”라고 짐짓 아는 척을 하였으나, 자신은 천근만근이다. 그가 게임에서 이겨본 적이 있기나 한 걸까 아니 넋나간 그녀말고 그런 재수없는 칙칙한 표정으로 입으로만 가벼운 게임을 제안하는 그에게 걸려든 여자가 또 있었을까

그의 장기는 오직 하나이다. 애무를 꼼꼼히 하고, 오럴을 해주며, 관계 중에나, 관계 뒤에 여자의 성기를 칭찬하는 “섹스매너가 좋은 남자”라는 점이다. 그녀는 그의 애무에 성감이 살아나고, 그가 ‘성기의 생김새와 기능’을 칭찬하자 자존심이 고양되어 희색이 만연해진다. 물론 그 바람에 그녀가 죽은 거나 진배없는 삶 속에서 살아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게임을 제안한 그는 맥없이 무너져 자기 감정도 게임의 페이스도 추스르지 못한다. 결국 “너무 멀리 왔다”며 실패를 자인하는 그는 “너와 나는 예전에 품었던 가정에 대한 희망으로 돌아갈 수 없고… 다시 반복될 것이고…”를 읊조리지만, 애당초 그는 그녀에게 삶의 희망을 제시하기는커녕 자기 앞가림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에서 여자의 가슴 속 열정을 발견하여 이끌어내고, 그녀의 아름다운 (성기가 아닌) 전신을 훑듯이 그려주고, 그녀의 함께 살고자 고군분투하다, 죽으면서까지 “반드시 살아남아… 원하는 모든 것을 다해보고,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죽으라”는 축복의 훈화말씀을 남겼던 디카프리오와 비교해보라. 하기야 남편 복 없는 년이 애인 복이나 있을라구

그러나, 해방은 어디에 이 영화는 스위트 홈의 꿈이 개박살나는 재난을 당해 좀비가 된 여자와 무슨 재난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으되 허망해진 남자의 출구없는 연애담이자, 재난 극복(결국은 실패)기 이다.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그녀가 품고 살아갈 희망은 무엇인가 “내 성기가 예쁘고 쓸 만하다는 남자가 있었다네… 그 남자는 죽고 나는 집에서 쫓겨났지만 외롭지 않네… 내 성기는 내 자존심의 근간이라네…” 노래를 부를 그녀에게 유머 하나를 들려주고 싶다. 소대장의 훈시, “기쁜 소식 한 가지와 나쁜 소식 한 가지를 전하겠다. 기쁜 소식은 ‘모두 팬티를 갈아입는다!’와~ 나쁜 소식은 ‘김 상병은 이 일병 것으로, 이 일병은 박 이병 것으로 갈아입는다’. 실시!” 갈아입긴 하였으나 새 팬티가 아니다. 살아나긴 하였으나 새 삶이 아니다. 해방은 어디 있는가?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mailto:chingmee@freechal.com <씨네 21>

★ 옮긴이 사족 : 오오... 근자에 들어 가장 쑈킹한... Really... 멋진 평이야... 비됴방에 누워서 혼자 보다가 2부 어디쯤에선가 잠들어버렸던 타이타닉을 다시 한번 탐닉하고 싶어질 만큼... 근데... 시종일관 댓구처럼 부려먹은 디카프리오의 타이타닉과 초반과 막판에 딸랑 쏘아부친 두 글자 단어 '해방'이랑은 도대체 어떤 류의 혈연적 또는 낭만적 '관계'를 맺고 있을까...

7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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