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단신

1 # 민중가요 단상[ | ]

제 목:[단상]민중가요에 대한 짧은 생각들.. 관련자료:없음 [119] 보낸이:문태준 (taejun ) 1998-03-01 13:32 조회:42

[단상]민중가요에 대한 짧은 생각들.. 09/17 01:39

하이텔 민중가요소모임에서 그냥 다른 분 글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온라인상에서 가능한한 글을 안 쓰려고 하는데... 하면서도 온라인상에서 글을 쓰게 되는군요.
솔직히 미리 써서 글을 올린다는게 엄청난 정성이지요.
이점 감안해주시고.

일단 제일 처음 천지인이 나왔을때가 기억이 나는군요.
잘 모른채로 무조건 락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것은 무언가 우리것(?)이 아니라는 거부감들.
저또한 그랬습니다. 앞에 나와서 신나게 노래하고 그런 모습이 속으로는 좋았으면서도 저것은 아니다라는 당위적인 생각만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민중가요는 투쟁적이고 힘찬 노래만 해당된다는 막연한 생각들.
물론 서정적이고 슬프지만 또한 그 슬픔속에서 피어나는 처절함들, 패배의 쓰라림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승리의 예감들, 그런 노래들에 대해서는 예외였지만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네들 스스로는 그런 변화의 물결에서 한발치 물러서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93년도 천지인이 락이라는 형식을 접한 민중가요를 선보이고 94년도 꽃다지와 노래공장이 합법음반을 펴냈습니다.
꽃다지는 말그대로 그동안의 인기곡들, 많은 사람들이 불러왔던 것들을 모아서 펴냈고 노래공장은 그전의 노래들을 기억했던 사람들은 어? 왜 그러지 하는 생각도 들 정도로 랩이라는 형식을 민중가요에 도입했습니다.
솔직히 노래공장 저는 별로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현실에 안주했다고는 볼 수는 없지만) 새로운 형식들을 지금의 감성에 맞추어서 새롭게 흡수해내고 발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현실적으로 대중적(?)이지는 못할지라도 오히려 노래공장의 새로운 시도들이 노래운동의 역사에서는 더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데요.

그러면서 천지인에 대해서도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투쟁가라는 하는 것들. 한편으로는 80년대 중,후반 투쟁의 고양기에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투쟁의 전선에서 언제나 사람들을 북돋았던 노래들. 그러나 저또한 과격한 노래들을 좋아했으면서도 어쩌면 변증법이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세상의 원리마저도 거부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노래쪽에 문외한이고 잘 모르지만 80년대 투쟁가들이 군가풍, 행진곡풍이 많이 않았나요. 행진곡풍이 문제가 아니라 투쟁의 정서들, 그들의 힘을 북돋우고 전선에서 싸우기 위해서 힘찬 노래가 필요했고 그런 요구에서 행진곡풍이든 군가풍이든 그런 형식들을 민중가요의 틀로 흡수했다고 생각합니다.

락이 원래 출발은 미국에서 50년대, 60년대 기존의 가요의 틀을 깨고 젊음의 문화, 저항의 문화에서 출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히피문화등의 영향도 있었고 미국에서 60년대가 반전운동, 민권운동이 활발하던 때였지요. 물론 자본은 이런 락이 가진 저항성마저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서 팔아먹지만요.
(지금에 와서는 그렇구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랩도 우리나라에서야 댄스음악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주류사회에 속하지 못하는 흑인들이 저항의 의미로서 만들어졌고 발전된 것으로 알고 있는대요.

말이 길어졌는데 어떤 음악적 장르가 있으면 그것은 필요에 따라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흡수하고 소화해내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90년대 서태지가 등장하고 대중가요도 엄청나게 변화하였지요.
서태지가 그렇게 각광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신세대 논쟁이 90년대 초반 한창 붙었었지요.
지금의 세대들, 저또한 포함해서 우리들은 적어도 새마을세대처럼 배고프로 굶주리고 오직 편안히 먹고 살기 위해서 자라오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 어느 때보다 남한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인 발전의 혜택을 풍요롭게 받고 자라왔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기 지향이 강하고 자기 개성들을 강하게 표출하고 싶은, 표출하는 시대에서 자라왔습니다.
변화의 흐름들이 그 어떤 때보다도 빠르고 거세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변화의 흐름들속에서 오히려 정체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저 과거에 해왔던 것들이 좋았던 것이 아닌가하고 멈추어 있지는 않았을까요.

오히려 군대라는 곳에 가서 천지인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웃긴 말일지 모르지만 짬밥먹고 내무반에서 천지인을 들었습니다.
과거의 관성에 사로잡혀 있던 내 자신을 반성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질은 불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본질들이 나타나는 것은 표현되는 것은 무척이나 다양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제가 노래패를 했던 것도 아니었고 노래에 문외한이지만 그렇다고 현재 문제점들의 극복점이 전문화인가? 라고 생각하면 저는 오히려 의문이 갑니다.
물론 ***님말처럼 운동을 고민하고 현실의 모순을 변화시켜나가려는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더 치열하게 살아야합니다.
남들처럼 살아가도 힘든데 우리들은 그들보다 더 힘들고 거칠은 길을 가야 하기때문입니다.
또한 자본의 논리란 것이 그리 생각만큼 만만하지도 않기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밤잠안자고 이윤을 위해 침 흘리는 그들! 부르지아들보다도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그렇다고 전문성을 강화하면 그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뭔새가 뭔새를 쪼차가면 뭐가 찢어진다는 말도 있던데 전문성의 강화만을 외치면 우리들은 그들보다 항상 뒤떨어질 수 없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이것이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전체운동이 있다면 각 부문운동들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각 부문운동들이 잘 된다고 전체운동이 잘 되어가는 것은 아니니깐요.

전문성의 강화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님의 글에서는 오히려 관성적으로 행해오던 것들로부터 벗어나 언제나 대중의 정서의 변화에 대해서 관심있게 바라보고 또한 기술적인 면에서도 같이 노력을 해야한다라고 저는 읽겠습니다.

"민중가요를 이제는 멋있게 부르고 정말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연을 그리고 잘 부르고 잘 치는 공연을 하자는 것이다. 많은 관객들과 진정으 로 호흡하고 많은 박수를 받고 그런다면 더 좋지 않을까 .. "

93년도 천지인을 보면서 이건 막연하게 아니라는 생각, 속으론 좋은데...
94년도 부산지역 머더라? 바리케이트를 보면서 정말로 너무나 뿅뿅 가도록 좋은데 몸은 좋은데 마음은 무언가 이게 아니라는 생각들... 이런 생각들 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올초 총파업당시 2월달엔가 종로4가에서 문화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노라하는 민중가요가수들 다 나오더군요. 열심히 으샤으샤 주먹뻗으 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메이데이가 나오고 이스크라가 나오자 주먹을 위로 돌리면서(대중가수들 나올때처럼) 머리를 흔들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 물론 저도 좋았습니다.

이건 좀 딴 소리일지 모르지만요....
저는 주류음악에 저항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좋습니다. 은퇴선언 이라는 노래로 인기를 위해 은퇴했다가 다시 나오는 가수들을 조롱한 시나위도 좋구 2집에서 박노해시를 부른 윤도현. 젊고 당당함, 그리고 삶에 대한 건강함을 담은 노래를 부르는 윤도현이 좋구요, 생기발랄하고 희망에 찬 여행스케치도 좋답니다. 나가서 싸우라고 열나게 외쳐대는 메이데이도 좋구요, 어설픈 지식인적인 감성일지는 몰라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라고 외쳐대고 2집의 현실을 조롱하는 빠른 비트의 천지 인의 노래도 좋답니다.

    • 으아.. 생각보다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삶의 노래, 희망의 노래 꽃다지의 멘트(?)를 생각하며 추석날 태준 (taejun)

2 # 민가는 죽었다.[ | ]

제 목:[노래-월례포럼]민중가요는 죽었다 기조발? 관련자료:없음 [124] 보낸이:문태준 (taejun ) 1998-03-04 00:02 조회:40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노동자문예교육협회(노문교협)에서 작년에 매월마다 문화관련 주제를 가지고 월례포럼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아마도 96년 12월달에 했었던 자료입니다.
약간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참고로 보면 좋을 것 같군요.
뮤직센타 21세기는 윤도현, 메이데이, 이스크라등과 관련된 문화 기획단체로 알고 있는데요.


제 목:[월례포럼]민중가요는 죽었다 기조발제

12월 노동문화월례포럼 / 민중가요는 죽었다?!

발제문 :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갑니다

<뮤직센타 21세기>

1. 최근 30년의 발자취

1-1 민중가요는 죽었다!? 이러한 역설적 선동과 흥분에서 벗어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더욱 차분하고 냉정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죽었다, 한총련 은 죽었다 등등의 선정적 문구 앞에서 우리는 그 의도만큼이나 과도 한 역의도의 함정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민중가요를 되돌아보는 까닭은 그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용법 때문이 아니라, 그 특수하고 정형화된 한 시대의 산물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필요 때문 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토론 시점이 1996년 끝물의 '오늘'이라는 점을 고의적으로 잊지 않아야 할 줄 압니다. 훗날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오늘 토론을 아주 구닥다리로 바라볼 것이라는 점 또한 익히 예상해 야 할 줄 압니다. 이점을 도외시하는 순간 민중가요를 주제로 한 어 떤 토론도 실은 자신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을 신화화하고 싶은 과욕들 의 무절제한 충돌에 불과할 것입니다.

1-2 민중가요는 오늘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오래 전의 민요부터 근래의 투쟁가요까지를 민중가요라는 개념으로 총 괄한다면 말입니다. 이때의 민중가요란 시대를 뛰어넘는 개념으로서 민중의 하위문화 전체를 아우르는 사회문화적인 이해를 전제합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민중의 정신 또는 이념으로서 다뤄야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로 흐르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민중가요에서 벗어 나고자 합니다. 물론 그럴 능력과 의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하나 확인해 둘 점은 오늘의 토론 이 매시대의 민중가요들이 지니고 있는 음악적 특징들을 한데 모아서 어떤 공통분모를 도출하려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미리 말하 지만 우리는 민중가요를 1980년대의 시대상황과 결부 지어서만 말할 것 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오늘 토론을 잘못 전개하는 것입니다.

1-3 민중가요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몇 가지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있습 니다. 운동권, 대중집회, 노래패, 불법테잎, 노천무대 그리고 질펀한 뒷풀이. 이 모든 이미지들을 통으로 부르자면 그것은 바로 1980년대일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토론할 주제와 관련해서 1980년대를 주목하는 까닭은 민중가요에 생성·발전·소멸의 싸이클을 갖는 시공간의 제약과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기실 민중가요는 시대를 뛰어넘 어 존재하지만 동시에 매시대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했 습니다. 아버지가 있었기에 아들이 있지만 아들이 그 아버지는 아니었 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아버지를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가만히 경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말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아들의 인 생을 이야기할 것이고, 더 나아가 아버지하고는 또다른 아들의 장래를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1-4 우리는 1990년대 오늘을 말하기 위해서 최근 30년간의 노래운동을 간 략히 되돌아보고 그 전후 맥락에서 1980년대의 민중가요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민중가요의 뿌리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지 모르지만, 노 래운동이라는 문제의식 아래에서 민중가요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시도했 던 최근 30년간의 발자취가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시간대이기 때문 입니다. 알다시피 최근 30년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1970년대를 생 성기로, 80년대를 절정기로, 90년대를 쇠퇴기로 떠올리게 됩니다. 이 30 년간의 시간표를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과 그 갖가지 모순들에서 비롯된 사회문화의 변모상일 것입니다.
이 변모상 속에는 우리가 노래운동이라 불렀던 흐름과 민중가요의 대 표적 장면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하에서는 오늘 토론에 필요한 정도로 만 그 흐름과 장면을 스케치해 보았습니다.

1-5 1970년대는 노래운동의 자연발생적인 생성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미 8군을 진원지로 한 영미권의 팝 음악이 대중가요로 정착되기 시작했고 그 토대 위에서 한국 대중가요의 온갖 짬뽕으로 범벅된 '역사'가 쓰여 지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무렵 이러한 흐름과 별도로 암울한 시대상 황에 저항감을 가지게 된 일군의 무리가 자신들만의 해방구를 꿈꾸며 흔적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훗날 노래운동 1세대로 불렸던 주인공이들인데 그들의 흔적을 모자이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대학가를 중심으로, ② 기 존의 노래양식(포크, 복음성가, 민요, 구전가요 등)을 선택적으로 차용 해서, ③ 낭만적 절망과 자생적 저항의 정서를, ④ 구전 방식으로 유 통·확산하면서, 대중가요의 흐름과 구별되는 독자적 노래운동의 모 태가 형성되었습니다.

1-6 1980년대에 들어서면 80년 광주항쟁, 84년 학원자율화 조치, 87년 민주 화항쟁과 노동자대파업 그리고 대통령직선제 부활 등의 격변을 거치면 서 전에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정치적 블랙홀이 92년 대통령선거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시기는 무엇보다 학생운동의 부흥기였고 그 영향 력 안에서 노래운동 또한 전에 없는 절정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통상 노래운동 2세대로 불린 이들은 ① 대학 안팎의 전문적 노래운동 집단 을 구성해서, ② 문예이론과 아마추어리즘으로 무장하고, ③ 포크, 가 곡, 행진곡풍의 창작곡들을 통해, ④ 정치적 선전·선동과 조직적 보급 으로 매진하면서, 독자적 노래운동의 전형과 모델을 창출했습니다. 해방 구가 현실이 될 것 같았던 이 시기에 노래운동은 대중가요의 영향력 을 무시할 만큼, 아니 그것의 적대적 대안으로 자신을 확신하게 되었 습니다.

1-7 그러나 1992년 대통령선거와 사회주의권 몰락을 거치면서 80년대를 강타했던 정치적 블랙홀은 급속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동시에 믿 어지지 않을 만큼 더 빠르고 전면적으로 노래운동과 그 전형적 모델로 서의 민중가요도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이 있다면 정치적 블랙홀에 미 처 빨려 들어가지 않은 잔존물 아니면 그 상처였습니다. 이점에서 90 년대의 우리는 분명 혼돈과 모색의 시기를 거치고 있습니다. 그 혼돈 과 모색의 와중에서 1996년 6월7일 음반 검열제도 철폐를 기념한 의 무대는 무척 상징적 이었습니다. ① 기획은 80년대 노래운동의 후예들이 맡고, ② 무대에는 꽃다지와 삐삐밴드가 서고, ③ 객석에는 소위 쉰세대와 신세대가 물 과 기름처럼 앉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상징적 징후를 제대 로 읽어 내고 대처하지 못하는 한 남은 길은 과거로의 주관적 회귀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1-8 이처럼 우리는 최근 30년간의 노래운동의 흐름 속에서 1980년대의 노 래운동을 집약하고 대표했던 전형으로서 민중가요를 돌아봅니다. 앞 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시각은 민중가요를 영구불변하는 원리원칙으로 절대화하는 우를 피하면서, 동시에 민중가요를 특정한 관점과 장르로 박제화하는 우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점에서 1990년대를 혼돈이 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이념적 쇠퇴와 조직적 동기의 상실에서 완 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 이며, 모색이라고 한다면 미래의 대안을 선언하기 이전에 실험과 연 대를 더 충분히 축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만큼 실천해야 하고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만큼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1980년대의 노래운동, 그 전형 적 모델로서 민중가요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오늘의 실천으로 돌아 오고자 합니다.

2. 1980년대 민중가요 약평

2-1 1980년대 민중가요는 이전 시기의 노래운동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던 수많은 성과의 상징이었습니다. ① 전문적 노래운동 집단의 형성과 전국적 확대, ② 문예이론의 도입과 실천적 심화, ③ 대학과 공단을 대 상으로 한 창작 및 연행의 실험, ④ 정치적 문선대의 적극적 자임 등등, 이 모든 업적의 대명사로서 우리는 민중가요를 기억합니다. 이처럼 민 중가요는 이전 시기의 자연발생적인 노래운동 위에 체계적이고 조직 적인 질서를 부여한 새로운 그 무엇이었습니다. 70년대의 노래운동으 로 돌아가 미래를 내다본다면 1980년대 민중가요는 그 현상만으로도 연속성보다는 단절과 비약의 측면으로 더 크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러나 이 정도에 그쳤다면 70년대의 노래운동에 대한 1980년대 민중가 요의 차별성이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2-2 1980년대 민중가요는 과학성이라고 표현하는, 즉 특정한 역사 철학으로 무장하고 현실의 대중투쟁과 결합하는 가운데 이전 시기의 노래운동과 결정적으로 다른 무엇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힘은 노래운동 자 체에 내장돼 있었다기 보다는 80년대의 시대상황에 있었습니다. 돌아 보면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오늘은 투쟁 내일은 승리'였습니다. 그에 걸맞게 증폭된 정치투쟁의 공간이 조성되면서 노래운동 또한 링 위로 올라설 것을 요구받았습 니다. 권투장갑을 끼고 무대 위로 올라서면서 '노래운동', '민중가요', ' 문화일꾼' 등의 신조어들이 만들어지고 급속도로 광범위하게 유포되 었습니다. 요컨대 1980년대 민중가요는 이념적 지향이자 정치적 투신 이며 그것에 가장 효과적인 음악적 표현이었습니다. 87년 이후의 절 정기에 '노동가요', '투쟁가요', '전술가요' 하는 말들이 나온 것도 그 러한 맥락에서입니다.

2-3 한마디로 1980년대 민중가요는 목적의식적인 형태를 취했습니다. 여기 에는 노래운동의 발전이라는 내적 요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정세의 변화와 전체 운동의 목표에 이끌린 측면이 더욱 주요했습니다. 이 시 기의 노래운동 집단들이 음악 공부보다 사회과학 학습과 정세 토론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할애했다는 사실도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 입니다. 그 결과 어느 시기보다도 이때 노래운동의 철학적 기반이 견 고해졌지만 반대급부로 음악 이론과 실기에 관해서는 초보적인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었습니다. 87년 노동자대파업 이후 노동 현장을 휩쓴 김호철씨 류의 투쟁가요들이 김 호철 개인의 명성을 넘어서는 성과로 이어지지 못한 점도 그 반증의 하 나였습니다. 따라서 1980년대 민중가요는 목적의식적인 형태를 취했지 만 내용 면에서 시대상황을 쫓아가기에 바빴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2-4 그 대표적이자 최종적인 징후는 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명징해 지고 있었습니다. 전체 운동의 이념적·조직적 분열이 대중적으로 확 고해진 직후 노래운동 내부에도 파장이 뒤따랐습니다. 한편으로는 전 문성과 대중성의 대립으로, 또한편으로는 계급이론적 분석틀과 민족이 론적 분석틀의 대립으로 노래운동 내부의 조직적인 논쟁과 분열이 불 가피한 대세로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대중적으로는 파업 현 장, 대중집회, 정치투쟁의 공간에서 선전·선동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 는 노래는 마치 민중가요가 아닌 것 같은 선입견이 확고해지고 말았습 니다. 그 어느 순간부터, 주되게는 나라 안팎의 정치적 전망이 벼랑 아 래로 떨어진 1992년을 기점으로 민중가요는 딱 그 자리에서 멈추었 고, 그 상태 그대로 '빛나는' 동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2-5 지금은 당연한 말이지만 민중가요의 퇴조는 80년대의 이념운동 및 대 중운동의 퇴조와 일치합니다. 문제는 계급이론이든 민족이론이든 그 조직운동의 흥망성쇠를 민중가요의 운명적 싸이클로 그대로 수용할 수 밖에 없는 내적 구조가 정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정치적 전망과 그 조직적 질서에 구속받는 민중가요의 내적 구조는 노래운동의 독자 적 발전 구조를 갖추는 문제와 상당 부분 충돌했습니다. 그 필연적인 모순은 노래운동 집단의 문선대라는 위상과 자의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알다시피 문선대는 선전·선동할 내용을 담지하는 조직운동의 존재와 지도를 전제하는 것인데 반해 노래운동은 그 자신의 내적 질서와 발전 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자율적인 생리를 갖고 있습니다. 양자가 조화 를 이루기 바란다면 무엇보다 노래운동 자신의 준비와 노력이 필수적 인 것입니다.

2-6 1980년대 민중가요는 그토록 강렬하고 전면적인 현상이었음에도 불구하 고, 독자적 발전 구조를 갖추지 못함으로써 노래운동의 자생력과 토대 를 확립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중가요가 곧 투쟁가요라 는 대중적 선입견, 일상에선 안 불려지는 소통의 협소함, 관념적 급진성 과 아마추어리즘의 절충에 따른 불철저한 태도 등등의 감추어진 파열 구들이 수면 위로 급부상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직면한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이점에서 1980년대 민중가요는 외파外破한 것이 아니 라 내파內破한 것입니다. 80년대의 문학운동과 미술운동이 민중가요와 대동소이한 궤적을 그렸지만, 90년대에 보여주는 나름의 위기관리 능 력과 현실 적응력에서 적잖은 차이를 보여준 사실은 문화예술운동의 독자적 발전 구조의 중요성을 새삼 환기하게 되는 타산지석입니다.

2-7 이러한 인식은 1980년대 민중가요를 노래운동의 80년대적 흐름이자 절정으로서 동시에 노래운동의 역사에서는 매우 특수했던 상황의 불가 피한 '정치적 외도'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 '외도'가 다행히 성공적 이었다 할지라도 매번 정치적 돌파구가 성공할 때에만 노래운동의 발 전이 가능한 내적 구조라면, 거듭되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심 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자의 말마따나 영미권의 언더그라운드 개념의 한국적 실체에 근접했던 유일한 실례로서 1980년대 민중가요 현 상이 거론될 정도이지만, 견고하게만 보였던 생산--유통-소비의 독자 적 토대와 자산이 하루 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 현실은 1980년 대 민중가요에 대한 안팎의 비판을 관점과 태도의 문제로만 방어하기 에는 너무나 안이하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2-8 비유컨대 맘모스의 종말을 떠올리게 하는 1980년대 민중가요의 발자 취는 맘모스의 생존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만으로는 부족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경우 심정적인 안타까움은 이해에 도움이 되지만 개선에 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90년대에 들어와 민중가요의 뚜렷 한 쇠퇴를 절감하는 사람일수록 맘모스의 운명 전체를 통찰하는 시야에 서 열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1980년대 민중가요가 걸어간 영 욕의 발자취에서 그 경험적 교훈을 잘 헤아리되, 무엇보다 노래운동의 독자적 발전 구조를 확립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천착해야 할 줄 압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지점이 1980년대 민중가요 전체를 빠짐없 이 조감하는 넓이를 가지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그 핵심적 문제의 진 원지가 어디인가를 규명하고 개선하려는 거친 초점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혼돈과 모색의 시기

3-1 우리는 지금 1990년대의 절반이 지난 하반기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 1980년대 민중가요는 없습니다. 아니 연대표를 떼고 '민중가요는 없다' 고 해야 할지 모릅니다. '없다'는 서술은 정신으로서, 역사로서, 발자취 로서가 아니라 현재와 대면하면서 자신의 변화·발전을 응시하는 노래 운동의 실체로서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와 <조국과 청춘 >은 1980년대 민중가요의 후파이자 동시에 1990년대의 낯선 시간에 대한 과거의 적응입니다. 와 <조국과 청춘> 내부의 고민은 매우 치열한 것이겠지만, 이들 또한 1990년대의 한복판을 경과하면서 자신의 육체에 새겨진 변화의 요청을 완전히 뿌리칠 수는 없었습니 다. 96년에 선보인 이들의 새로운 음반과 창작곡들은 민중가요의 90년 대적 계승과 혁신이라는 고민의 응축된 상이한 두 가지 샘플입니다.

3-2 이 고민의 일단을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90년대는 우선 노래운동 집 단에게 무기력과 매너리즘을 동반했습니다. 1980년대 민중가요의 이념 적·정치적 동기가 증발하면서 노래운동의 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 다. 동시에 선전·선동의 무기로서 민중가요라는 전형이 해체되었기 때문입니다. 동력의 상실과 전형의 해체는 노래운동 집단의 생존 문제 로 직행했습니다. 파업현장, 대중집회, 정치투쟁의 공간에서 마련했던 자신들의 무대가 엄청나게 축 소되면서 설 자리를 잃은 노래운동 집단과 개인들은 갈 곳이 분명했 습니다. 프로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무대를 떠날 것인가, 양자택일 의 순간들이 90년대 초중반의 언저리에 무수히 지나갔습니다. 90년대의 모든 집회와 투쟁의 공간에서 부르는 노래가 전부 과거의 것들이라는 점은 96년이 저무는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명합니다.

3-3 다음으로 90년대는 1980년대 민중가요의 폐쇄 회로를 순환하는 동안 의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대중가요의 가공할 만한 위력을 새삼스럽 게 절감하게 만들었습니다. 단적으로 90년대 들어와 주요 노조들이, 그 지도부가 대중가요 가수들을 노동자대중 앞에 세우는 풍경은 <꽃 다지>를 임투나 파업 때에만 부르는 풍경과 함께 90년대의 대중가요 가 가지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노조 담 당자의 의식과 태도의 문제로 환원해 버리는 순간 우리는 똑같은 해결 책밖에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는 자체의 독자적 발전 구 조와 토대를 갖추지 못한 조건에서 '대중가요 대 민중가요'라는 외피 가 제거되는 순간 닥쳐온 필연적인 위기입니다. 충격이 다소 일상화되 어 버린 지금 위기에 대한 인식이 게을러지는 순간 가장 익숙하기에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3-4 끝으로 90년대는 1980년대 민중가요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철저한 자기 반성에서 출발할 것을 강제했습니다. 관점과 메시지만으로 주류 대중가요의 대안적 위상을 점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순진한 태도부터 극복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음악적 특성과 테크닉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노하우를 연마하고 축적하지 않는 한, 생산-유통-소비의 전과정에 대한 독자적 발전 전략이 없는 한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딛을 수 없습니다. 대자본을 투자하면서 음향과 조명의 뒷받침 아래 기술적 혁신을 거듭하는 대중가요 가수들과, 연주테잎을 들고 무대에 서서 자 신의 음반을 사지도 않는 조직대중에게 거대한 명분과 값싼 개런티로 같은 수준의 노래를 반복해야 하는 민중가요 가수 사이에는 '민중가수 =실력없는 가수', '민중가요=수준을 상관하지 않는 노래'라는 악선동을 이겨낼 길이 없는 것입니다.

3-5 이상이 90년대에 직면한 주체적 문제였다면, 그 객관적 환경에서도 의 미심장한 지각 변동이 뒤따랐습니다. 다소 도식화하자면 1980년대의 ' 대중가요 대 민중가요'의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소멸하고 주류 대중가 요의 전면적인 융단 폭격이 일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열 린음악회, 청소년음악회, 자치단체의 지역음악회 등등의 무대가 대자본 의 후원과 공중파 방송의 주도 아래 무차별적으로 감행되기 시작한 것 은 그 전초전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위 운동권 가수로 불리는 일군의 가수들이 그러한 무대의 보조축을 형성하면서 TV 화면을 채우는 광 경도 이제는 낯선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주류 대중가요 이외의 지형 이 초토화되면서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양자 사이에 폭넓게 걸쳐 있 던 비주류 대중가요의 영역이 이전과 다른 이유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습 니다.

3-6 첫째 요인은 민중가요의 내파와 주류 대중가요의 획일화 속에서 비주류 진영 전체가 이전보다 더욱 심각한 생존권 박탈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점입니다. 비주류 나름의 흐름이 있고 그 안에서 각각의 독자적 발전 구조를 갖춘 다양한 진영이 공존하는 영미권과 달리 우리 사회는 주류 를 뺀 그 누구도 독자적인 생존이 불가능한 조건에서 그 절실함은 더 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요인은 음반 검열제도의 철폐와 함께 비주 류 대중가요와 민중가요를 나누었던 가시적 경계선이 허물어졌다는 점입니다. 아직도 적잖은 차이점이 상존하지만, 이전과 비교했을 때 향 후의 발전 방향에 대한 공감대는 더욱 넓어졌습니다. 그것은 공중파 방송 주도의 주류 대중가요에 맞서 라이브 중심과 저항적 지향으로 비주류의 독자적인 대중적 풀을 형성한다는 방향입니다.

3-7 이렇듯 90년대의 대중음악 지형은 공룡같은 주류 대중가요를 한편으로 하고, 비주류의 다양한 갈래들이 또한편으로 모여 나가는 방향으로 변 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징후가 현재로서는 이런저런 연합공 연의 무대 위에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성장해 온 뮤지션들이 함께 출 연하면서 새로운 연대를 실험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 치면서 상호 비적대적이었으나 무관하게 걸어왔던 민중가요권의 경험과 비주류 대중가요권의 경이 교류되면서 창조적 충돌을 일으킬 때 여기에 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발전적 방향의 주동력으로 연결시켜야 할 것입 니다. 그 과정의 산물로서 한국 대중음악사에 새로운 발전적 대립구 도를 형성하느냐 하는 역사적 과제도 윤곽을 드러낼 것입니다. 현재까 지 그러한 출발점을 확고히 하는 몫은 1980년대 민중가요에서 자라나 온 우리 세대에게 속해 있습니다.

3-8 우리는 앞에서 와 <조국과 청춘>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예로써 우리의 혼돈과 모색을 진단하자면, 그것은 1990년대의 시대상황 속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결론이 자유주의적이고 무정부적으로 들린다면 더는 설명할 도 리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내던졌고 그 공은 아직 도 허공을 날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방향이 단 하나의 포물선 밖에 는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내던진 선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의 선택을 대안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동시 대의 모든 선택들에게 상호간의 창조적 자극과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 <조국과 청춘>도 그리 고 1980년대 민중가요의 영욕을 기억하는 모든 집단과 개인들도 철저 하게 앞으로 자신을 내던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4. 우리가 가는 길

4-1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간략히 재정리하자면,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분명 1980년대 민중가요의 길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1980년대 민 중가요가 한 시대의 사명에 충실했음에도 자신의 내적 발전구조를 확보 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보며, 그로 인해 내파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 니다. 따라서 1990년대 현재 1980년대적 의미의 민중가요가 되풀이되 어서는 안되며, 나아가 그러한 인식과 태도에 철저해지지 않는 한 우 리 자신도 모르게 '뒤로 돌 아'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대중가요 대 민중가요'의 기존 구도가 소멸하고 혼돈이 조성된 1990년대에 주류 대 중가요에 대한 비주류 대중가요와 기존 민중가요권의 연대를 모색의 실마리로 잡았습니다. 우리가 그리고 있는 포물선은 바로 여기에서 출 발하는 것입니다.

4-2 먼저 우리는 공중파 방송이 주도하는 10대 편향의 상업주의적 댄스 왕 국에 대해 주류 내부의 스타 반란보다는 단결한 비주류의 방식으로 반 란의 바람을 일으키는 데 주력하고자 합니다. 그 첫 관문으로 라이브 중심의 전국 순회무대를 지속적으로 마련해 새로운 수용자층을 발굴하 고 이를 지지층으로 확대·강화하는 시도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점에 서 은 기존의 노래운동에서 보자면 새로운 질서 재편기를 헤 쳐나갈 연대의 범위를 타진하는 최초의 시금석이 되는 무대였습니다.
아울러 의 성과를 이어받아 새로운 구도를 디자인하고 그 실 체를 조각하는 구체적인 모색과정에 돌입한 첫 발걸음이 였습 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공연의 취지와 짜임새 그리고 기술적 문제를 대폭 보완하여 뜻에 공감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양질에서 더욱 발전된 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4-3 다음으로 우리는 1980년대 민중가요의 성과와 한계 속에서 관점, 방식, 장르의 전 방면에 걸쳐서 새로운 실험을 전면화하는 역할을 더욱 심 도깊게 추진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민중가요의 맥락에서 보면 기존의 전형과 모델들을 해체하고 새로운 양식과 메시지를 실험하는 일 에 주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진보적 재편을 바라는 진영으로 국한할 때 일종의 역할 분 담으로 바라봅니다. 아울러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적 대중운동 조직 들은 조직운동의 내부 강화와 외연 확장을 위한 필요로서 전문적인 산 하 문선대를 조직하고, 전업적인 프로 지향의 요소들은 문화예술의 지평 속에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결실을 향해 전력 질 주하는 길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다시금 '정치의 계절'이 돌 아올 때 발전적인 결합을 꾀할 수 있을 것입니다.

4-4 끝으로 우리는 한국 대중음악의 진보적 재편을 위한 독자적 발전 구 조의 정립에서 핵심 열쇠에 해당하는 독자적 토대의 문제를 심도깊게 조사·연구하여 나름의 노력을 경주하고자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 만 영미권의 독립레이블로 상징되는 독자적인 생산·배급 네트워크를 신화하하지 않고 우리의 현실로 끌어내려 대단히 실물 경제적인 자세로 접근해 일익을 담당할 생각입니다. 이 과제는 음반 기획과 제작에 이 르는 생산 단계부터 도매상과 소매상 등의 유통, 그리고 대학, 노동조 합, 각 지역 등의 창조적 수용자 집단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서 포괄 해 들어오지 않고서는 성취할 수 없는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일입니다.
기획전문집단으로서 우리는 힘이 닿는 데까지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 달하고 의견을 교환하여 구체적인 단초를 잡고 아주 실제적으로 일에 뛰어들 생각입니다.

4-5 이상의 내용을 한데 모아서 표현하자면, 우리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의 형성'으로 집약하고 싶습니다. 1980년대 민중가요는 한국 대중음 악 역사상 언더그라운드 개념에 가장 근접했던 실체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탱하고 재생하는 독자적 발전 구조를 갖추지 못한 채 정치 적 고갈과 함께 내파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형 성'은 민중가요의 경험적 교훈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현 재 언더그라운드라는 개념은 민중가요라는 용법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유동적이고 개방적인 쓰임새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특 징들을 최대한 장점으로 살려야 할 때이지, 과거의 잣대나 선험적 규 정으로 편을 가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형 성은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성향의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협력할 때 가능한 대역사입니다.

4-6 우리는 이제 1970년대 노래운동의 생성기로 돌아가는 마음과 자세로 1980년대의 민중가요가 부닥친 한계를 극복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역 사를 다시 써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누더기를 기운 옷처럼 억지로 끼 워맞추는 외래적 계보학이 아니라, 노래운동과 그 1980년대의 결정판 으로서 민중가요를 비판적 교훈으로 삼는 우리 자신의 일관된 음악적 계보학을 구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로 시작해서 잡 다한 분열과 결합을 거쳐 커트 코베인으로 끝나는 영미권의 록 계보 학이 그저 먹음직한 떡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신중현에서 시나위 에 이르는 한국 록의 끊어진 다리를 잇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걸 어온 길을 우리가 통찰할 수 없는 정신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1980년대의 민중가요도, 1990년대의 우리도 실은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 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4-7 잠시 록에 대해 말했습니다만, 우리가 락에 주목하고 그 육체의 어느 한 부분을 창조하려고 하는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전자산업의 발달과 전자제품의 대량 소비를 배경으로 하는 록 음악의 발전이 우리 사회의 특수한 정치적 맥락으로 일정 기간 지연되었다가 최근 기지개 를 다시 펴는 듯한 상황 속에서 록 매니아의 기호와 거품같은 록 담론 에 끌려갈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동시에 록을 통해 새로운 저 항음악의 탄생을 예고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록이 그 발생과 변천의 역사처럼 이 땅에서도 노동하는 사람들과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노동과 여가를 위한 일상적 소통의 통로로 자리잡길 바라는 매우 단순 명료한 이유 때문입니다. 아울러 1980년대 민중가요의 빈 자리에 목 말라하는 90년대의 진보적 청년학생들의 방황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 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4-8 여차여차하여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우리 의 길을 가로지르는 또다른 길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건을 거치며 우리 모두 어떻게 변모해 있을지 지금 이 자리에서 장담하는 것만큼 무모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1996년 한해의 끝에서 1980년대의 민중가요에 대해 비판하고 토론하는 모습은 뒤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매우 요긴하고 아름다운 자리라는 점입니다. 저마다 관점과 방법론에서 크고 작은 차이를 느끼겠지만, 노동문예활동에 많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 주최측에서 우리와 같은 기획전문집단을 주발제자로 부른 데에는 내부에서 오고가는 견해 들과 다른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뜻이라 여겨지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쪼록 새해에는 서로에 대한 긴장감과 기대가 더욱 성숙해지기를 기원하면서 부족한 발제문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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