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스펜스 -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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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The Memory Palace of Matteo Ricci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2 책 소개 (알라딘)[ | ]

16세기 후반 중국에 들어갔던 이탈리아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의 시각을 통한 중국 이해를 담고 있다. 저자가 역점을 둔 것은 마테오 리치의 발걸음을 통해 16세기 중반 명나라와 종교개혁기의 서양을 대비하고, 이 두 세계의 공통된 시공간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1583년부터 1610년까지 중국에 머물렀던 마테오 리치는 '기법(記法)'이란 책을 만들어 중국인들에게 기억하는 법을 가르쳤다. 책은 이 '기법'의 구성을 따른다. '기법'의 기초가 되는 네 개의 이미지, 무(武), 요(要), 이(利), 호(好)가 뜻하는 바를 설명한다.

무(武)는 당시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중·일 세 나라가 전란에 휩싸인 동양 사회를 이해하는 상징이다. 요(要)를 위 아래로 나누면 '서녀(西女)'즉 서쪽의 여인이 된다. 중국 서역에 살고 있던 이슬람 교도를 통해 중국의 서양인, 서양문화를 설명한다.

3 # 거북이[ | ]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1552~1610) 원문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최초로 제대로 된 카톨릭을 전교하였던 사람. 천주실의의 저자와 같은 뻔한 수사로는 마테오 리치라는 거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에 관해 단편적인 방법으로 정리를 해보려한다.

일단 그가 속한 집단인 예수회를 보자. 고등학교때 아무것도 모른 채 예수회, 로욜라, 예수회, 로욜라를 외운 기억이 난다. 이 예수회라는 집단은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라는 인물이 1534년 창설한 카톨릭 원리주의적 단체이다. 로욜라가 저술한 영신수련이라는 교재를 지주삼아서 자신의 인격수양 및 이웃과 이교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적극적인 포교단체인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아 당시 유럽을 휩쓸던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발한 카톨릭의 정면대응이라고 보면 무난할 것이다. 예수회는 무려 20개국의 언어를 수사들에게 가르쳐서 어떤 문화권에서 전교를 요청해와도 금방 그 언어를 알고있는 수사를 파견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교단은 이후 꾸준히 활동하였는데 특히 교육사업에 열중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강대학교가 예수회 계열 대학교로 유명하다.

리치는 이탈리아의 예수회 회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카톨릭과 서구문명에 대한 치밀한 훈련을 받고 전교를 위해 스페인→포르투갈→인도(고아)→마카오→중국(북경, 1601)으로 들어간다. 당시 예수회원으로서 그가 받은 교양은 매우 높은 것이었으며 특히 그를 유명하게 만든 기억술에 대한 훈련은 그가 서구 문명을 덩어리로 떠서 중국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다.

리치의 위대한 점은 종교적 열정을 안고 이교도들에게 포교하겠다는 일념 하에 스스로 중국인이 되려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바닥부터 전교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는 곧 사대부 계층에게 카톨릭을 전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예수회 회원 복장을 승복에서 유학자의 옷으로 바꾼다. 단순한 중국어 정도가 아니라 중국의 교양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의 중국 이름은 이마두(利瑪竇). 그가 중국에 입국한 것이 1583년이고 사서의 초벌번역을 시도한 것이 1591년이다. 그는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 중국 고전을 공부하기 시작해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내 최고 지식인 반열에 오른 것이다. 리치는 르네상스인이면서 유학자였고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동서양의 문명을 딛고 선 인간이었다.

리치는 '산해여지전도'와 '곤여만국전도'를 만들어 중국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바꾸었으며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을 중국어로 번역했고, '기법'과 '교우론'을 지어 중국 지식인들의 찬사를 얻었으며 '천주실의'를 저술해 동양 카톨릭사의 교과서로 만들었다. 한국 천주교의 성립에 천주실의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있다.그는 서구 문명을 충실히 중국에 소개했다. 그가 만든 수많은 번역어-天主,亞細亞,歐羅巴,幾何-들은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가 전한 과학기술 들은 중국 지성인들에게 서양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리치가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수개국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지 연상을 통한 기억술 훈련의 도움이 컸으며 리치는 마술사로 오인받아가면서까지 중국에서 이 기억술을 활용했다. 카톨릭 문명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카톨릭 포교의 밑거름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으며 그때문에 리치는 성공적으로 중국내 포교에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인의 허상과 실재를 보면서, 야만적인 면과 찬란한 문화를 동시에 보유한 중국 문명을 보면서 리치는 일희일비했다. 하지만 그는 종교적 열정을 가슴에 안고, 그것을 위해 종종 카톨릭 교리의 해석까지 자의적으로 행하면서, 전교와 동서문명 교류를 동시에 진행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하고 배우려하는 지성인의 모습을 우리는 마테오 리치라는 한 인간에게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 거북이 2004-2-5 11:12 pm

4 같이 보기[ | ]

5 바깥 고리[ | ]

마테오 리치의 기억술은 장소를 이용한다. 지금은 흔히 '기억의 궁전'이라고 불린다.
간단하게 기억의궁전을 학습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 앱이 있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hungry.ex_frag

6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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