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의낙원혹은지옥난제춘

<html> <![5] 제목 폰트 크기 수정> 마오쩌둥의 낙원, 혹은 지옥

<![6] 본문 폰트 크기 수정&amp; span 태그 추가> ‘죽은 이념’을 붙들고 사는 중국 공산주의 집체마을 ‘난제춘’을 가다


“마오쩌둥 사상이 모든 것을 이끈다.” “정치가 사상을 통솔하고 이끈다.”   중국 허난성에 있는 ‘공산주의 집체마을’ 난제춘(南街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마오 주석’을 만나게 된다. 입구의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가로등마다 마오쩌둥 어록이 즐비하게 걸려 있을 뿐 아니라 건물의 벽이란 벽에는 죄다 마오 시절의 정치구호들이 씌어 있다. 마을 안 공장의 게시판에도, 공동식당 안에도, 심지어는 호텔이나 여관을 들어설 때도 가장 먼저 마오 주석이 ‘손님’을 맞는다. 마치 죽은 마오쩌둥이 되살아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필요한 모든 것이 공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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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난제춘 입구에서 방문객들을 맞고 있는 마오쩌둥 주석. 이 마을에 들어가면 마치 마오 주석이 되살아온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명 ‘마오쩌둥 마을’이라고도 하는 난제춘은 중국 내에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오쩌둥식 사회주의 집체촌이다. 마오쩌둥 사상을 중심으로 일체의 개인 재산을 허용하지 않는 집체주의 발전모델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히는 난제춘은 지난 몇년간 중국 내 많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언론매체에서 가장 다루기 좋아하는 신선한 소재였다. ‘죽은’ 마오를 다시 불러들인 덕분에(?) 마을이 ‘살아난’ 보기 드문 발전사례이기 때문이다.   난제춘에서 마오는 곧 법이자 밥줄이다. 또한 과거 마오가 말했던 것처럼, 이곳에서 “모든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를 향해 걷는 무리)들은 타도대상”이다. 중국에서 마오는 죽었지만, 이곳 난제춘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유일한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마오 주석 동상 앞에는 두명의 건장한 민병대원들이 24시간 마오 주석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은 자체 치안을 담당하는 민병대를 양성한다. 35도 가까이 되는 고온이지만 이들 민병대원의 표정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근엄하고 단정하다.   “여기 주민들은 다 공짜로 살아요. 아파트는 물론이고 집안의 가구, 심지어는 숟가락·젓가락도 다 집체 소유예요. 쌀, 계란, 밀가루, 기름 등 14가지 생필품이 다 무상으로 제공되고 전기세, 전화세, 수도세도 무료지요. 무상 의료보험에 아이들 대학 학비, 생활비까지 다 무상으로 제공된다고요. 이사를 간다고 해도 개인이 챙기고 갈 게 거의 없는 셈이죠. 여기서 살면 자연 돈 쓸 일이 없어지니까 개인 재산이 필요없는 거예요. 나도 여태껏 개인 저금통장을 가진 적이 없다고요.” 한가롭게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식히던 마을 촌로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는 듯’ 신나게 ‘지상낙원 난제춘’의 위대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옆에서 그의 말을 무심히 듣던 다른 두명의 남자들 중 한명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뜸 “말이 좋아 지상낙원이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민병대한테 잡혀가거나 마을에서 무일푼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데 그게 어디 살 만한 곳인가. 더군다나 우리 같은 외지인들은 그런 복지혜택도 받지 못하는데…”라고 말해 방금 전 촌로의 ‘지상낙원’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다른 지방에서 건설공 일용잡부로 일하기 위해 이 마을에 왔다는 그들은 마을 토박이 주민인 촌로와는 달리 난제춘을 ‘그들만의 독재왕국’이라고 폄하하고 있었다. 즉, 이 마을 주민들에게는 더없이 살기 좋은 지상낙원일지 몰라도 외지인들에게는 복지혜택도 없고 그저 낮은 임금에 ‘말과 생각’까지 억압하는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것이다.


자유화 정책을 거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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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마오쩌둥과 관련된 각종 기념품들을 파는 ‘붉은 태양’ 상점. 난제춘에서 유일하게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마오쩌둥 기념품이다.

그러자 부채를 부치던 촌로의 손놀림이 느려지면서 외지에서 온 일용잡부를 향해 ‘퍼붓듯’ 말한다. “다 같이 배부르고 잘살면 그만이지 그 외에 필요한 게 더 뭐가 있단 말인가! 마을 주민들이야 당연히 이 마을을 위해 희생하고 공헌했으니 그만한 대접을 받는 거고. 마오 주석 때는 다 같이 한솥밥 먹고 싶었어도 너무 가난해서 실패했다고. 우리 ‘반장’(이 마을을 일군 당지부 서기 왕홍빈을 마을 주민들은 존경과 친근의 의미로 반장이라고 부른다)이 억압하긴 뭘 억압했다고 그러는 거야!”   중국 허난성 루어허시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달리면 도달하는 난제춘은 주변의 다른 전형적인 중국 농촌마을들과는 달리 세련되고 현대화된 작은 공업촌이다. 거리에서는 좀체로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고 방금 전 마을 촌로의 말대로 현대식 주민 아파트마다 에어컨이 하나씩 구비되어 있다. 마을에는 개인이 경영하는 상점이나 식당 대신 마을 전체에서 집체 소유로 운영하는 상점과 식당들이 있을 뿐이다. 상점과 식당들마다 입구에서부터 마오 주석의 대형 초상화나 입상, 그의 어록을 새긴 간판이 걸려 있고, 공장과 사무실 곳곳에서도 제일 먼저 마오 주석의 입상과 초상화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예 마오쩌둥과 관련된 각종 상품들만을 파는 ‘붉은 태양’이라는 전문상점도 있다. 거리에서 만난 한 밀가루공장 여직공은 “난제춘에서 유일하게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은 아마 마오 주석 관련 상품일 것”이라는 농담을 했다.    총 1만3천명(원주민 약 3천명, 외지노동인구 약 1만명)의 인구에 면적 1.78㎢의 작은 마을 난제춘이 중국 내에서 일약 ‘스타촌’으로 부상하게 된 이유도 바로 마오쩌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개혁·개방 이후 사실상 폐기된 마오쩌둥 사상과 인민공사식 집체주의 모델을 다시 전면에 복귀시켜 농촌에서는 보기 드문 초고속 경제성장 ‘신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중국 대부분의 농촌에서는 인민공사가 해체되고 대신 농지를 각 농가에 분할해 사실상 농민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한 ‘농가청부제’를 실시하고 농촌 내 기업 역시 개인청부제를 도입했다. 난제춘도 개혁·개방 초기에는 이러한 국가정책에 부응해 농지를 농민에게 분할하고 집체소유 기업을 개인에게 청부해주는 ‘경제 자유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마을 ‘반장’ 왕홍빈이 중국 언론에 쓴 글에 따르면 “당시 개인청부제 등의 자유화정책을 실시해보았지만 결과는 모든 주민들이 다 잘사는 것이 아니라 일부 개인의 치부로만 이어지고 빈부격차만 커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반장’ 왕홍빈을 중심으로 한 마을 간부들은 1984년 ‘중대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다시 “마오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즉, 개인에게 분할한 모든 농지 및 기업을 다시 집체 소유로 전환해 일체의 개인 소유와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과 “마오 사상이 모든 것을 이끈다”는 정치사상을 마을의 핵심 정치지도 사상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사회복지 이면엔 최저임금


1984년 벽돌공장과 밀가루공장에서 출발해 현재는 식품가공업을 위주로 하는 26개의 대형 기업군을 거느린 ‘부자마을’로 발전한 난제춘은 다른 중국 농촌들과 달리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민에서 공장노동자 신분으로 탈바꿈했다. 이것은 중국 농촌발전사에서도 획기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일이다. 도대체 난제춘의 성공신화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반장’ 왕홍빈의 말처럼 정말 “마오 주석의 사상을 부여잡고 전심전력을 다해 위대한 공산주의 사업에 공헌한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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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난제춘에는 다른 농촌 마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대식 주민 아파트들(위)과 26개 대형 공장들(아래)이 들어서 있다. 따라서 대다수 주민들의 신분은 농민에서 공장노동자로 바뀐 상태다.

사회주의 지상낙원이라고도 불릴 법한 이러한 완벽에 가까운 복지제도의 뒷배경에는 중국 내에서 최저라고 할 만한 저임금제도가 한몫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단, 난제춘에서 저임금제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착취’가 아니라 널리 권장해야 할 ‘바보정신’으로 통한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바보정신’이야말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혁명정신’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마을의 공장 직원들과 집체상점 직원들에게 물어본 결과 그들 대부분의 월급은 200위안(약 3만원)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밀가루공장에서 일한다는 한 여종업원은 “그런 대로 지낼 만하다. 다른 데 돈 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월급으로 받는 돈은 그저 필요한 옷이나 화장품 등을 사는 데 쓰는 용돈 정도로 쓴다. 사실 나처럼 학벌이 낮은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봤자 허드렛일도 구하기 힘들고 거주지도 형편없게 마련이다. 도시인들의 차별은 또 오죽한가. 그러나 이곳에서는 비록 돈은 못 벌지만 이런저런 눈치 안 보고 대우받으며 사니까 좋다. 사상학습만 없으면 정말 좋을 텐데…”라고 말해 별다른 불만이 없음을 표시했다.   학벌과 기술이 없는 사회 하층계급에게 난제춘은 확실히 ‘그런 대로 지낼 만한 곳’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난제춘의 발전신화가 앞으로도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더군다나 난제춘에서는 마오쩌둥 사상과 마을 자체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 집체규약을 위반한 사람들에게 엄격한 비판과 처벌을 가하고 있다고 한다. 정도가 심각하면 아예 공장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일자리를 잃으면 곧바로 주택이나 식료품, 의료혜택 등 모든 복지혜택 대상에서 제외되고, 이것은 곧 마을에서 쫓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경우 그야말로 무일푼의 ‘무산계급자’로 전락하게 된다. 마을에서 발행되는 <난제춘 신문사>의 셩깐위 주임에 의하면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3대 활동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마오 주석 배우기, 둘째 뇌봉 따라 배우기, 셋째 혁명가 부르기다. 마을의 집체상점에서 일하는 한 아가씨의 말에 따르면, 마오 주석 어록을 외우지 못하거나 사상학습에 문제가 발견되면 벌금을 내거나 자아비판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매일 지겹도록 외워서 잊어버릴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난제춘은 쇼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난제춘에는 인권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90년대 후반 이후 치열한 시장경쟁에서 점차 도태돼가는 마을 내 집체기업들의 경쟁력 하락도 문제지만, 개인의 정치적 의견이나 불만을 말했다간 ‘사상문제범’으로 찍혀 마을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에 흡사 공포정치를 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성격’이 있는 사람들은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마을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난제춘에서 우연히 만난 허난성 루어허시의 한 변호사는 이 마을을 아예 ‘독재체제’로 규정했다. 그는 “마을이 발전한 것도 다 정부에서 막대한 특혜 은행대출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초기와 달리 몇년 전부터 경영이 크게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전체가 이미 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닮아가는 마당에 이 마을 하나만 ‘공산주의촌’으로 남아 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모든 극단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 난제춘은 쇼를 하고 있는 거다”라고 덧붙이며 난제춘의 ‘미래’를 좀체 인정하지 않았다.

사회학자 차오진칭 교수 역시 난제춘의 미래를 그다지 긍정적으로 예측하지 않았다. 그는 난제춘의 발전신화는 이 마을 당 서기인 왕홍빈이라는 걸출한 능인(能人)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종의 ‘능인 현상’이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난제 공산주의 촌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마치 중국의 걸출한 ‘능인’ 마오 주석이 사라진 뒤 그의 ‘공상적 사회주의 국가’ 이념이 중국에서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마을 ‘반장’ 왕홍빈은 “견지하고자 하는 방향대로 계속 길을 걸어나갈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그의 작은 ‘공산주의 왕국’ 난제춘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난제춘(허난성)=글·사진 박현숙 전문위원 <a href=mailto:strugill@hanmail.net>strugill@hanmail.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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