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의 역사

(락의역사에서 넘어옴)
ROCK.그 파란의 역사
록의 역사, 락의 역사

1 태동기[ | ]

1.1 미국의 Rock'n'Roll[ | ]

Rock'n'Roll의 등장을 알린 것은 1955년 Bill Haley & Comets가 영화 Blackboard Jungle의 주제가인 Rock Around The Clock이란 노래를 크게 히트시키게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원래 컨트리 가수로 출발한 사람으로 54년 Shake, Rattle And Roll이란 노래로 록큰롤 가수로 전향하게 된다. 그의 Rock Around The Clock은 R'n'R이라는 새로운 젊은이들의 음악을 전 세계적으로 알렸고 빌 헤일리의 뒤를 이어 Chuck Berry의 Maybelline, Little Richad의 Tutti Frutti, Fats Domino의 I'm A Man이 계속 적으로 히트하게 됨으로써 록큰롤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록큰롤 붐을 더욱 불붙인 것은 바로 Elvis Presley의 등장이었다. 빌 헤일리가 최초의 백인 록큰롤 스타였다면 엘비스는 최초의 10대의 우상이었다. 56년 Heartbreak Hotel 히트로 순식간에 젊은이들의 스타가 된 엘비스는 당시 10대에게는 가수 이상의 존재로 자리잡으며 원조Idole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당시 기성세대들은 록큰롤이 불량스런 음악이며 폭력적이고 성도덕을 어지럽히는 것이라 여겼으며 자식들이 엘비스를 열렬히 좋아하는 것마저도 싫어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청교도 국가의 도덕이 살아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무척 보수적이었다.이에 TV는 그의 허리놀림이 섹시하다고 해서 그의 하체를 비춰주지 않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56년 엘비스는 Heartbreak Hotel을 필두로 Don't Be Cruel, Hound Dog, Love Me Tender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록큰롤의 인기를 불붙이게 된다. Bill Haley의 Rock Around The Clock의 전세계적 히트와 엘비스의 등장에 의해 록큰롤은 달콤한 발라드풍의 팝송을 제치고 인기차트를 누비게 되었고 50년대 젊은이들의 생활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록큰롤이 점차 그 기반을 잡아감에 따라 새로운 타입의 가수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가수는 Buddy Holly였다. 그는 초창기의 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록큰롤을 팝적인, 그러면서도 친해지기 쉬운 사운드로 바꾸어놓으며 보다 세련된 록큰롤을 들려주게 되었다. 이러한 스타일의 록큰롤은 어떻게 보면 상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초기 록큰롤 스타일을 유지해주고 있었다. 어쨌든 버디 홀리는 57년 That'll Be The Day를 히트시키며 데뷔해서 그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게되는 59년 2월 2일까지 수 많은 곡들을 히트시키며 많은 가수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컨트리와 R&B의 영향이 두루 받았던 R'n'R은 역시 그 영향들이 잔존해 있었다. 40년대부터 R&B가수로 활동하던 Fats Domino는 55년 Ain't A Shame의 히트 이후 록큰롤계에서도 활약했는데 그가 만들어내는 R'n'R 사운드는 R&B분야, R'n'R분야 양쪽에서 모두 호평받을 정도로 R&B의 전통을 잘 살린 록큰롤을 구사했다. 또 록큰롤의 선구자였던 척 베리나 리틀 리차드 역시 R&B적인 성향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초기시절 R&B를 기초로 한 록큰롤을 보여줬다. 특히 이들 둘은 이러한 R&B의 기초아래 척 베리는 록 기타의 기본을 확립했고, 리틀 리차드는 피아노를 두드려대며 흥분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록큰롤에 있어서의 샤우트(SHOUT) 창법을 정착시키며 Rock 음악의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이 외에도 비록 록큰롤 가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Platters, Sam Cooke, Ray Charls등의 R&B 가수들이 - 꼭 R&B 가수라고도 말 할 수는 없다. - 록팬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록큰롤 중에서도 컨트리의 색깔이 짙은 록큰롤을 로커빌리라 불렀는데 Jerry Lee Lewis는 그 대표적 주자였다. Carl Perkins 역시 제리 리 루이스에 버금가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부드러운 보컬과 여유있는 리듬을 중심으로 한 음악을 구사해 강한 비트와 스트레이트한 보컬 위주의 록큰롤과는 다른, 또 하나의 흐름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굳이 로커빌리 가수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Ricky Nelson이나 Everly Brothers의 음악 역시 컨트리 색깔이 짙었다. 특히 에벌리 브러더즈는 뛰어난 코러스 하머니로 후일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갓 태어났던 록큰롤은 다듬어지지 않았고 폭력적인 면도 있었지만 여러 형태의 가수들이 등장하고 많은 노래가 만들어지는 동안 세련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선 달콤한 발라드 분위기의 록큰롤, 바꿔말해 팝화된 록큰롤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Paul Anka, Neil Sedaka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Singer-Songwriter의 선구자였는데, - 평론가에 따라서는 비틀즈를 싱어송라이터의 시초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 누구나 쉽게 친숙해질 수 있는 곡들을 만들어내며 팝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새로운 조류에 밀려 척 베리나 리틀 리처드 등의 정통적이고 하드한 록큰롤 가수들은 차츰 인기챠트로 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는데 엘비스가 군입대로 거의 활동을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가속화 되었고 더구나 59년 2월 버디 홀리가 사망함으로써 50년대 말에는 조용한 분위기의 록큰롤이 유행하게 되었다.

1.2 영국의 Rock'n'Roll[ | ]

영국의 R'n'R은 미국에서 탄생한 록큰롤을 수입해 그것을 재생산해내는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탄생시켜나가게 된다. 영국의 록큰롤이 미국의 록큰롤을 수입해서 생겨난 것이기는 하지만 록큰롤이 전세계적으로 히트하기 이전부터 영국에서도 역시 록큰롤로 향한 새로운 음악적 움직임이 등장한다. 바로 Skffle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원래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즈에서 발생한 흑인음악의 일종으로 딕시랜드 재즈의 모태와도 같은 음악이었다. - 앞서도 흑인들이 초기에 탬버린이나 빨래판 같은 것들을 사용해서 음악을 연주했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바로 그것이 바로 이 Skiffle이다. - 이러한 음악은 1940년대 영국에서 뉴올리언즈 재즈의 리바이벌 붐이 일어났을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50년대에 켄 커리어즈 재즈맨 & 스키플 밴드라는 그룹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에 이른다. 이렇게 스키플이 점차적으로 주목받자 영국의 스키플은 Lonnie Donegan이라는 수퍼스타를 한명 탄생시킨다. 이것은 1956년 초의 일로서 로니 도네건의 등장 이후 영국에는 수백개의 스키플 그룹이 잇달아 탄생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영국은 영국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40년대 뉴올리언즈 재즈 리바이벌은 스키플이란 활동 외에도 영국의 재즈 활동 자체를 활성화 시켰다. 그런 움직임의 주축이 되었던 것은 트래드 재즈였다. 조지 웨브 딕시랜더즈는 그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밴드였고 프레디 랜돌은 수 많은 추종자들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영국의 대중음악은 재즈적인 분위기를 중심으로 흐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영국에서 강세를 보였다 하더라도 팝계의 주류는 록큰롤이었고 재즈적인 분위기로 물들었던 영국의 대중음악계에서의 록큰롤이란 새로운 음악은 젊은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너무도 충분했던 음악이었다. 따라서 5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록큰롤 스타들이 배출되는데 그 중 영국내에서 엘비스와 같은 영향력을 가진 가수로 Cliff Richard가 등장하게 된다. 클리프 리차드는 버디 홀리식의 록큰롤을 구사했는데 당시 영국의 록큰롤의 흐름은 미국에서의 강렬한 이미지 보다는 경쾌하고 깔끔한 멜러디위주의 음악이 강세를 보이며 영국 나름대로의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나타나게 된다.

지금까지 록 음악의 발생과정을 록큰롤의 탄생인 50년대 이전의 상황부터 살펴보았다. 자료부족으로 상당히 부실하지만 초기ROCK이 어떻게 탄생되었는가에 대한 감은 잡았으리란 생각이 든다.이 당시의 음반은 대단히 구하기가 어려운데 다행히 ‘영원한 연인’앨비스의 음반들은 지금도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꼭 사서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발전기[ | ]

50년대 첫 걸음마를 내딛은 Rock'n'Roll은 새로운 음악세계의 개척자들에 의해 그 기틀을 마련한 시기였고, 60년대에 들어 더욱 심화되고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Rock음악의 진정한 기반이 마 련되었다. 이러한 60년대의 다양하면서도 심도깊은 음악의 발전과정을 통해 60년대말에서 70년대 초에 이르는 록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현존하는 모든 형태의 Rock이 60년대 형성된 음악양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역시 60년대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사실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1960년대는 수 많은 그룹들의 혁명적 발자취가 남겨진 시대였으며 현대 대중음악의 기본적 틀이 완성된 시기였다.

2.1 Rock의 성장기 60년대[ | ]

1960년대초 미국 대중음악계의 두드러진 움직이라면 50년대 말부터 붐이 일어난 팝화된 록큰롤의 붐, 트위스트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댄스 뮤직 붐, 주로 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Bob dylan, Joan Baez등에 의한 Folk Music의 붐, Beach Boys, Jan & Dean등에 의한 Surf Music 붐 등을 들 수 있다.

현대 포크뮤직의 귀재였던 Bob Dylan이나 Jon Baez를 중심으로 한 포크 붐은 정치색이 짙었던 것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붐이었다고는 하지만 관계가 없는 붐이었다. 포크계로부터의 인기차트 진출은 Peter, Paul & Mary라든가 Kingston Trio정도가 해내고 있었는데 이 두 그룹은 Bob Dylan이나 Joan Baez만큼 과격하지는 않았다. Blowin' In The Wind가 일반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Peter, Paul & Mary가 부르고나서 부터였지만 그들이 부르는 Blowin' In The Wind는 이미 프로테스트 송(정치가요)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에 의해 밥 딜런의 이름이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게되었다. (밥 딜런이 차트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더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포크 뮤직과는 달리 인기차트에 자주 등장하던 것은 앞에서도 말한 50년대 말부터의 록큰롤, 서프뮤직, 트위스트등이었다. 특히 서프음악은 60년대초 미국 십대들을 열광시켰다.포크가 뉴욕을 중심으로한 East Coast(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번져 나갔다면 서프음악(서핑이 변형된 말.해변음악)은 항상 맑고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는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West Coast(서부)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서프음악은 이러한 지역적 배경을 바탕으로 해변에서 느낄 수 있는 젊은이들의 낭만을 50년대의 록큰롤에 기초를 둔 즐거운 사운드에 담은 것이었다. 서프음악 붐의 주역은 Beach Boys와 Jan & Dean였는데 그들의 음악의 가장 큰 특색은 50년대의 록큰롤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특유의 코러스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60년대초는 베를린 장벽문제나 흑인폭동문제등의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며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침체일로를 걷던 시기였다. 포크 뮤직이 이러한 사회분위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정면으로 맞섰다면, 서프 뮤직은 태양과 파도와 자동차와 여인을 표사한 단순한 가사로 당시의 사회에 도피처가 되었다.(비치 보이스의 음반은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들어보기 바람.그 유명한 SURFIN`USA가 이들의 곡이다.)

50년대에 영국의 젊은이들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록큰롤에 열광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라디오방송의 부족으로 큰 발전 없이 외모와 보컬 중심의 음악인들 뿐이었고, 게다가 이들은 미국식으로 이름을 바꾸거나 미국음악을 모방했다. 이때 등장하여 가장 오랜동안 성공을 거둔 음악인은 Cliff Richard와 Tommy Steel등이며, 당시의 걸작으로는 Johnny Kidd & The Pirates의 Shakin' All Over, Shadows의 Apache등이 전해진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영국의 음악인 중에서 - 미국의 음악을 연주하며 시작했지만 - 자신들의 독자적인 음악을 미국으로 역수출하는 재능인들이 등장했다. 이때 미국에서도 리틀 리처드, 척 베리, 제리 리 루이스,또한 엘비스 프레슬리 조차도 침체기에 빠져있을 때인데, 영국에서는 지금까지 듣지 못하던 음악을 갖고 등장한 것이다. 소위 British Invasion(영국의 침략)으로 일컬어지는 이 현상은 The Beatles, Rolling Stones, Animals로 대표되었으며 이들의 음악은 삽시간에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때는 도시마다 로컬클럽과 로컬밴드가 인기를 얻던시기로 이런 분위기를 Beat-Boom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R&B와 Mods Fashion의 영향까지 겹쳐서 힘이 넘치는 새로운 사운드가 환영을 받았다. 결국 앞서 언급한 브리티쉬 인베이젼의 선두주자 중에서 비틀즈는 모즈 패션과 Pop-Rock이, 롤링 스톤즈와 애니멀즈는 모즈 패션과 블루스록이 결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들은 외모에서부터 혁신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요란한 옷차림이 유행했었다.화려한 색깔과 하늘거리는 옷들을 입고 연주를 했다.) 1963년부터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그룹들이 등장한다. Who가 데뷔하고, The Kinks, Yardbirds, Dave Clark Five, Manfred Mann등이 활약했다. 특히 킹크스는 리더인 레이 데이비스를 중심으로 풍자적인 앨범과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여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 커다란 영향을, 데이브 클락 화이브는 올갠과 색소폰으로 무거운 연주를, 맨프레드 맨은 재즈와 블루스까지 결합시킨 자유로운 연주법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시기에 중요한 사실은 이들 대부분의 그룹들이 영국내에서 일기 시작한 블루스 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브리티쉬 블루스 록이라 불리우게된 이 음악의 역사는 50년대초로 거슬러 올라가, 런던의 한 블루스 클럽에서 Cyril Davis와 Alexis Korner가 만남으로 시작된다. 이 두사람은 그후 8년동안 함께 팀을 이루어 활동을 하다가 Blues Incorporated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한편 블루스 인코퍼레이티드에서 분리된 그룹 Graham Bond's Organisation('63)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래엄 본드는 거친 목소리에 최초로 해먼드 올갠, 멜로트론을 사용한 실험주의자다.)이 그룹 출신으로는 후일 크림의 멤버로 활약하게되는 Jack Bruce, Ginger Baker등이 있다. 시릴 데이비스, 그래엄 본즈에 이어서 브리티쉬 블루스 록을 상징하는 네명중의하나인 John Mayall이 등장한 것은 바로 직후의 일이다. 이러한 블루스 록은 영국 언더그라운드 록의 주류를 이루며 60년대 새로운 실험정신의 기틀을 마련하게된다.

1965년부터는 영국, 미국 대중음악계에 사회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밥 딜런이 프로테스트 송을 들려주면서 더욱 강한 표현과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 포크와 록을 다리 놓은 업적을 이루어내었다. 그는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을 시작으로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 포크록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포크록의 등장 이후 Byrds나 Mamas & Papas등이 성공을 거두며 포크록은 웨스트코스트록을 대표하는 음악이 되었다. 따라서 60년대 중반에는 포크 넘버를 록 비트로 처리하는 독특한 음악을 간판으로 내걸고 성공을 거두게 되는 그룹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포크록의 붐은 월남전쟁을 소재로 사회에 대한 비판을 실은 프로테스트 송인 Eve Of Destruction을 배리 멕과이어가 히트시킴으로써 절정을 맞았으나 이 작품은 프로테스트 송이 주목받기 시작한 풍조에 편승한 상업주의적인 속셈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 하여 비난을 받는등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사실, 당시 포크록의 인기에 편승해 이전의 포크 넘버들을 매끄러운 사운드로 새로 포장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는 음악적 풍조가 등장하는등 포크나 포크록의 근본적인 정신이 많이 퇴색되어 갔다. 이러한 경향에 반발하여 Byrds나 Lovin' Spoonful같은 그룹들은 각기 독자적인 음악영역을 개척해갔다. 예를 들면 버즈는 인도음악과 재즈에서 소재를 얻어 라가록이나, 스페이스 록(우주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음악)을 만들어냈고, 러빈 스푼풀은 랙타임을 시초로하여 미국의 전통적인 음악을 록으로 만드는 등, 각각 팝스의 영역과 관계를 갖는 참신한 실험을 시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크록의 붐과 함께 대중음악계에 사회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한다. 이 당시 주된 메시지는 베트남전, 생활에의의 환멸, 편집증, 환각제였다. (性 해방은 이미 R&B 작품들에서 은유적으로 다루어져왔다.) 특히 환각제가 널리 만연되어서 종교적인 그림, 찬송가, 예식등이 도입되고 비치 보이스의 실험적인(?) 사운드가 환영받는다. (60년대 중반에 들어서 비치 보이스는 필 스펙터의 Wall-Of-Sound라는 새로운방식의 엔지니어방식의 영향으로 새로운 전자악기의 도입과 입체적인 화음의 구사등의 새로운 시도를 하며 60년대 웨스트코스트 록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싸이키델릭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전주곡적인 경향이었으며, 이 시기 신비주의를-죽음의 상태를 넘어선 극한의 무아경, 해체정신, 도시에서의 탈출, 호모섹스와 변태성욕, 프리 섹스등-앞세운 Velvet Underground의 파격성이 대중들에게 환영받으면서 언더그라운드 록은 이제 록신의 전면에 자리잡게 되었다.

1967년 사이키델릭의 영향으로 Flower Power(히피문화)가 만연되고, 실험적인 스타일, 과장되고 익살스런 스타일, 자유분망한 스타일이 뒤섞인 음악으로 전후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또한 이러한 음악들을 뒷받침할 레코딩 기술의 혁신기도 함께 도래했다. 사이키델릭은 66년부터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유행된 음악형태로, 그 특징으로는 환각제와 함께 사용되는 자유로운 음악, 긴 솔로연주, 재즈와 동양적인 사운드가 결합된 실험성, 현실참여보다는 도피적인 음악등으로 정의된다. 특히 록계에서는 최초로 나름대로의 예술(Art)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이다. 사이키델릭 뮤직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텍사스주의 오스틴 지역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텍사스대학 주변이다. 이 지역에서는 60년대부터 장발, 환각제, 남부 특유의 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13th Floor Elevators라는 그룹이 등장하여 포크록과 초기 펑크를 기조로 하는 최초의 사이키델릭 뮤직을 들려준다. 그후 65년부터 Jefferson Airplne, Frank Zappa, Company, Country Joe & The Fish등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67년으로 제퍼슨 에어플래인이 Somebody To Love로 60년대말의 사랑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컨트리 조 & 더 피쉬의 정치적인 유우머, Rock의 장벽을 깨버린 후랭크 자파의 불협화음과 풍자, 그레이트풀 데드의 실험적인 시도와 함께 전개되는 서정적이면서도 힘찬 서사시, 그리고 라이트 쇼(화려한 조명을 통한 환각상태를 조장)가 이때에 모두 개화되었던 것이다. 특히 사이키델릭 음악과 함께 대중문화는 더욱 정치적, 사회적인 기능을 갖게 되었다. 거리에는 꽃과 청바지, 장발, 환각제로 가득찼고 젊은이들은 자유와 평화와 사랑을 외치며 활보하였다. 사이키델릭 음악의 영향력은 대단해져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대거 노출되기 시작하고, 프로그레시브 록을 탄생시켰으며 녹음기술과 포크록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시기 Doors의 등장과 1회 몬테레이 팝 페스티발을 통해 지미 헨드릭스와 제니스 조플린이 등장한 것은 향후, 록의 발전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이키델릭의 영향으로 이제는 언더그라운드는 록신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데, 비틀즈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롤링 스톤즈는 Their Satanic Majestics Request, 그레이트풀 데드는 Anthem Of The Sun을 출반하여 환각제의 경험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환각제의 경험과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서 당시로서는 전자기술의 응용이 가장 시급하게 되었다. 롤링 스톤즈의 작품이 모조품으로 낙인찍힌 반면에 비틀즈는 기념비적인 앨범을 남기게 되었다. 비틀즈의 앨범 Sgt. Pepper's- 는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을 명프로듀서로 부각시켰고 록 앨범을 이제는 감상용의 단계로 끌어올렸다. 특히 A Day In The Lufe는 멜러디와 오케스트레이션과 시적인 언어가 결합되어 훌륭한 예술을 이루어내었다. 이것은 문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흐름'을 나타낸 것으로 앨범 전체가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전개되는 Concept Album의 효시가 되었다. 사이키델릭 사운드가 점점 복잡하고 다양해질수록 레코딩 기술도 점차 진보하게 되었는데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공연에서 전자기술을 시도하였고 종합적인 불협화음 사운드로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던가 그레이트풀 데드가 키보드와 퍼커션과 목소리등 여러 소리를 결합하는 시도등은 이러한 레코딩 기술의 진보를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실헙적인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출현한 프로그레시브 록은 가장 큰 환영을 받는다. 초기 시절 Moody Blues, Procol Harum, Pink Floyd등이 등장하며 프로그레시브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60년대의 가장 큰 특징 두가지는 실험성과 다양성이라 말할 수 있다. 1967년 이전의 음악이 실험성의 시대였다면 이러한 실험성을 바탕으로 1968년부터는 다양성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특히 Woodstock Rock Festival은 다양한 60년대의 음악을 총망라한 음악축제였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1969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뉴욕의 베델에서 열린 공연으로 영국의 Isle Of Wright Festival과 함께 60년대말을 수놓았다. 정치적 사회적인 참여로 특징지어진 60년대의 록 음악이 이 시기로 넘어 오면서 개인화되고 내면화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모두 각자의 개성을 추구하였고 뮤지션과 청중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많은 장르의 록 음악이 등장하게 된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Love, Peace & Music이라는 60년대의 대표적인 슬로건을 실현하였고 60년대 록이 화려하게 꽃피운 행사였다.

2.2 PSYCHEDELIC 이란 무엇인가?[ | ]

60년대의 록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이키델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반드시 이해해야한다.미국에서는 배트남전에 대한 회의가 만연되면서 현실도피적인 경향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퍼지게된다.그에따라 젊은이들은 마약을 하게되고 환각을 탐미하게 되기까지한다.그 결과 환각은 락의 성장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고 갖가지 다양한 음악이 탄생하게 된다.이에따라 환각문화는 60년대 이후의 락에도 오랬동안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먼저 사이키델릭이라는 '음'의 감각을 서술하기 위해선 '음'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기존적인 가치가 필요하고 이러한 취지에서 기존의 사조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겠다. 우선, 신비주의라고 하는 사조가 있었다. 이것에 궁극의 진리는 주관적으로만 알 수 있다는 설이며 그 일환으로 정적주의라고 하는 사조가 있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도 그 정도에 따라 다양한데 이성에 대하는 말로 어떤 것에 대한 주관적인 쾌, 불쾌의 감정을 나타내는 Feeling. 애정, 공포, 슬픔, 기쁨 따위의 강한 느낌을 나타내는 Emotion. 이성에 대한 애정이나 격렬한 노여움따위의 강렬한 감동으로 종종 이성적인 판단을 압도하는 Passion. 어느정도의 사고나 이성이 따르는 고상한 또는 따스한 감정을 나타낼 때 쓰는 Sentiment등으로 그 다양한 감정적 표현을 들 수 있겠다. 여러 사조는 또한 이러한 다양한 감정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며 분화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다른 사조로 관능주의라는 것이 있느네 이것은 철학적으로는 감각론, 미술적으로는 육감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해석은 두가지이며 첫째는 시각, 청각의 미적 관능과 촉각,미각,후각의 저급관능에 감각을 일으키는 감각기관의 작용, 둘째는 육체적 쾌감을 느끼는 감성적인 흐름으로 이루어진 사조가 있는 반면 이성적 판단의 우울성에 의해 형성된 금욕주의가 있었다. 이것은 육체적, 감성적, 세속적인 욕망을 억눌러서 도덕의 이상을 달성하려는 주의로 키니크학파, 스콜라학파등의 주장에 의했었고 카톨릭에서는 수덕주의라고 한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에 있고 도덕은 이 목적을 실제화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쾌락주의와는 정반대의 사조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세상이 싫어져서 삶의 보람을 느끼지 않고 이를 부정하는 인생관 염세주의. 그와는 정반대인 낙천주의등 그 사조가 다양했었다.

사이키델릭은 바로 윗부분과 같은 사조들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각색하여 '音'으로 표혀했다는것이 대체적인 관점이고 또한 이러한 의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마약류의 물질을 흡입했음은 물론이다. 음이 이성,감성에 던지는 충격은 대단히 큰 것으로서 기존의 가치와 해석을 글로 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사이키델릭의 정의를 내린다면 '음'과 '빛'의 조화.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식을 표현한 사상을 담은 음과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여러가지 색채와의 조화가 합쳐져 현대적 감각의 사조에 맞게 변형 발전시킨 문화사조가 곧 사이키델릭인 것이다. 지금까지 사이키델릭을 기존의 사조를 통해 살펴봤다. 그럼 이번엔 좀 더 구체적으로 사회론적인 토대에서 마련된 현실적 측면의 시이키델릭, 즉 우리가 직접 접근해 도달할 수 있는 음악(사이키델릭 록)의 생성과정 그리고 영향을 통해 나름대로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 사이키델릭 음악이 최초로 태동한 곳은 물론 미국이다. 60년대 중반 미국은 케네디 암살에 따른 국론분열과 점차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국가에너지 소모등에 의해 안팍으로 사회,문화적인 격동기를 맞이했다. 기존의 윤리적 관념에 대한 재고, 신종 이데올로기의 엄습, 경쟁적 사회질서에서 오는 괴리등 단순한 의식적 격변에서 극한의 해체정신에서 오는 무분별한 이성으로 점차 정치색 짙은 과격성으로 치달렸다. 이로인해 사람들은 점차 복잡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고 이러한 때 마약은 자연스러운 길잡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마약류의 Acid Trip(환각 여행)체험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즉, 환각제를 복용했을 때 일어나는 환각, 환청의 이미지를 록 음악속에 표현한 음악이 바로 사이키델릭 록이며 음악의 형태는 블루스 록, 포크 록을 근본으로 인도음악의 선율을 가미한 일종의 다변적이며 절충주의식 음악이다. 사이키델릭 사조가 파생된 곳으로 두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샌프란시스코의 Haiht Street과 Ashbury Street이 교차하는 Haiht Ashbury District로 이곳은 약물실험으로 시작된 사회적인 의식혁명이 발생된 지역이다. 특히 이곳은 30년대부터 마약의 유해, 무해를 가지고 큰 논란을 빚었는데 60년대 중반을 전후해 LSD(1943년 호프만에 의해 발견된 환각제의 일종) 연구가인과학자 오즐리 스탠리의 지도하에 하이트 애쉬베리의 주민 켄키지(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원작자)등이 LSD의 약물실험을 한것이 동기가 되어 이에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뮤지션이 적극 동조함으로써 전 서부지역으로 파급되었다. 그중 제퍼슨 에어플래인, 퀵 실버 메신저 서비스, 그레이트풀 데드 등은 샌프란시스코의 초기 사이키델릭 뮤직을 이끌었으며 그룹 이름 자체도 환각적인 내음이 짙었다. 다른 한 곳은 텍사스주의 어스틴 지역이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텍사스 대학 주변이다. 장발, 환각제, 인도풍의 의상 그리고 남부 특유의 전원적인 기질등이 합쳐져 하나의 풍속으로 정착되었고 그 지역그룹인 13th Floor Elevator의 독특한 음악과 함께 동부지역으로 파급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사이키델릭 록이 추구하는 내용도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종교적, 관념적 세게에서 인간사의 불협화음, 소외계층의 사회적 존재부각, 정치적인 유우머, 그리고 도시생활의 환멸, 편집증, 완전하고 자유로운 性해방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 다양한 성격을 띠었다. 이와같이 사이키델릭 록은 기존의 사조와 새로이 파생된 이념을 합쳐 '음'이라는 실체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후 거대하고 종합적인 문화사조로 발전되며 또한 LSD의 급속한 보급으로 인해 이에 관련된 새로운 형태의 예술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그중 오버헤드의 환각적 정신 분석학과 색채를 혼합한 라이트쇼나 사이키델릭 아트등, 일종의 전위예술이 그것이다. 이후 사이키델릭 사조는 대중들과의 통일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나름대로 사회적 의식을 반영하는 척도로서 한 시대의 문화예술을 찬란하 꽃 피웠다. 이처럼 음악은 영화처럼 사회,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따라서 음악을 단순한 음의 향유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의 이해를 위한 하나의 자료로 삼는것도 무방하다 하겠다.

2.3 히피문화란 무엇인가?[ | ]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가 처한 세계의 관습과 도덕, 법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인간은 그것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인간은 좀 더 그러한 외부적인 틀에서 탈피해서 자유로와지기를 원하며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그러한 상태에서 가지게되는 자유와 환희에 있다고 보고 그런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한다. 후자의 인간들의 경우 전통적 권위와 기성세대가 구성한 사회적 조직과 불화가생기게 된다. 따라서 탈피를 시도하는 인간들은 적극적인 반항과 불신감을 가지고 기성세력과 맞부딪히기도 하고 소극적인 경우에는 자기들의 공간과 세계인의 침묵으로써 묵묵히 탈피의 시도를 행하기도 한다. 적극적인 형태로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나 노동자, 농민들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을 통해 나타난다. 그들은 소극적인 저항으로는 늘 사건이 일어나고 분쟁이 끊이지 않는 복잡한 세계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뚜렷이 보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 목숨을 던져서까지 적극적인 저항을 보인다. 소극적인 형태로는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히피들의 문화와 행위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궁극적인 탈피에서 가치를 찾는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기성권에 저항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 저항은 일시적인 목적 - 즉 세상의 관심 -을 이룰수는 있어도 영우히 자기들이 추구하는 세계를 이루어 그것을 정착시킬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어찌보면 인도의 명상가나 라마교 승려의 고립된 생활과 흡사하게 소극적이고 개인적으로 혹은 작은 집단을 형성해 자기들의 가치를 추구해나간다. 그러한 것에 지금 당장은 몰라도 차츰 많은 동조자들이 나타날 것으로 그들은 보는 것이다.또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들 공통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작은 세계를 이루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형태로 히피들은 이 세계에 나타났다. 이러한 소극적인 저항이 사회에 어떤 집단으로 보여지게 되고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의 일로서 히피 문화와 60년대의 록의 연관성등을 살펴본다면 60년대의 록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히피문화는 미국에서 발생되었다. 땅이 넓은 나라, 물질문명의 대표적인 나라, 정신적인 문화가 깊지 못하고 역사가 길지 못한 나라, 이러한 나라인 미국에서는 어떤 편한 제도적 장치나 물질적 만족이 있는 반면 정신적으로 뭔가를 찾으려는 이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또 땅이 넓어 나름대로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도 히피문화가 생성된 배경이다. 또한 가장 법이 잘 정비되어 있는듯 하나 허술한 것이 미국이란 것도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젊은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히피문화에 동조적이었고 나아가서 예술인들 가운데에서 동조하는 입장을 보인 이들이 많았다. 그것은 그들이 미국이 갖고 있는 문제점, 즉 정신적 빈곤과 세계의 큰 문제 해결에서 오는 국민과 정부와의 갈등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히피 문화세력이 갖고 있는 현실불만의 표현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으로 60년대 말에 이르러서 점차 사회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히피문화는 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60년대의 미국은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서의 승리감의 시대(40년대)와 그런 승리감과 보수주의 물결을 등에 업은 안위의 시대(50년대)를 보낸 시기였다. 세계 제1의 국민의 힘으로 세계평화를 수호했다는 긍지가 정치가나 국민들에게 팽배해 그것이 물질적 풍요로 상징되는 미국의 생활과 결부되어 대부분의 미국민은 50년대를 만끽했고, 정치상황 역시 미소 강대국의 냉전으로 동서진영이 분리되어 별 말썽없이 지났고 예술가는 전위,현대 예술이나 미국인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만족스런 생활을 표현했고, 젊은이들은 미국인이라는 강한 긍지속에서 정치와 기성세대의 온화한 가운데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60년대초 월남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인은 부담스러운 짐을 스스로 지게 되었다. 사소한 전쟁으로 보고 공산주의에게 미국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뛰어들었던 월남전이 그들에게 회의와 불안, 거부, 반항의 동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미국인의 세금으로 미국군이 뛰어들 월남전에서 월남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무지로 패배하기 시작하자 미국내에서는 참전 찬반양론이 거세게 일어났고 정치가의 무능이 드러났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젊은 세대간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부는 국가의 체면으로 이미 시작된 전쟁을 이기려는 의도로 계속 전쟁을 이어가려고 했고 국가권력의 강제에 의해 자의던 타의던 전쟁터로 끌려가는 젊은이중 많은 사람이 비판적으로 월남전과 미국정부를 보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또 월남전을 다루는 국가권력의 실체속에 위선과 모순이 느껴져 비판의식과 회의감을 느낀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평화를 전쟁터로 끌어들이는 정부를 비난했고 데모가 미국 전 대학에 펴졌다. 학생들 사이에는 스스로의 권리와 요구를 당당히 해야한다는 자각의식이 팽배해졌고 이런 반항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결국 패배한 전쟁을 지속시켰고 젊은이들은 평화를 내세우며 반전구호를 외쳤다. 어떤 젊은이들은 소극적인 저항으로 기성세대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었고 사랑과 평화만이 있는 세계를 자기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또 다른 측면은 안위와 만족으로 이어지는 미국인의 생활에 허점과 모순을 느낀 젊은이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풍요에의 갈증을 느꼈으며 물질적 풍요에 만족하는 기성세대와 유리감을 느꼈다. 어떤 젊은이는 록큰롤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했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정신적 갈증을 메우려고도 했으며 자신의 생활을 버리고 의기투합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방황하거나 어느 곳에 정착하여 생활한 소수의 무리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60년대 중반부터 강하게 나타나 사회문제로서 이들의 반항과 도피를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통해 히피는 탄생했다. 히피는 사랑과 평화를 외치며 현실사회의 모순을 지적했고 프리섹스나 약물복용등과 같은 과격성을 통해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히피의 모습은 사이키델릭 문화와 맞물려 60년대 록의 주된 주제가 되었던 순수한 사랑, 절대 자유등에 영향을 끼치며 60년대 록의 사상적 면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히피문화는 음악뿐 아니라 60년대의 미국사회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세계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잘 알아둬야 하겠다.다시한번 말하지만 음악을 포함한 인간의 문화라는 것은 그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자신의 음악을 찿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음악의 뒷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3 록의 절정과 쇠태기 그리고 현재까지의 변화[ | ]

60년대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 록음악은 그 예술적 기반을 탄탄히 다지게 된다.따라서 70년대 초반에는 다시는 재현되지 않은 록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된다.하지만 70년대 들어서 록의 정치성이 사라지고 미학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져 사회와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어떤이들은 록의 진정한 전성기를 60년대 후반으로 보기도 한다.하여간 70년대는 뛰어난 많은 그룹들을 통해 록이란 꽃이 가장 만발한 시대였고 또 빨리 시들어버린 시기이기도 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60년대 후반의 불안했던 사회는 차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고 따라서 변혁의 음악인 록음악도 슬슬 시들어가기 시작했다.사람들은 어렵고 강렬한 음악보다는 편안한 음악에 자신을 내맡기기 시작하고 록의 입지는 줄어든다.70년대 초반의 왕성한 실험정신은 음악계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을 상업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사라져갔다.이에따라 초반기에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던 록은 차차 단순해져 가는데, 그 중 대표적인 모습이 하드록이다.사람들은 간단하면서도 화끈한 것을 원했기때문에 하드록이 득세하게 된다.이러던 중 70년대 후반에 펑크록이 혜성같이 등장한다.무사안일하게 흘러가던 主流록에 반기를 들고 엄청 파격적인 정치성을 무기로하여 당시 대중음악계를 휘저어 놓는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보수층의 반발에 의해 아주 짧은 생에를 마치게 된다.하지만 잠들어 있던 펑크록은 90년대들어 얼터너티브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 현 음악계를 주도하고 있다. 80년대로 접어들어 감각적 댄스 음악에 의해 거의 고사 직전에까지 이른 록은 또다른 변신을 시도하게 된다.하드록 음악이 더욱 거칠어져 해비매틀이라는 록의 극단적 모습을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초반에는 다소 언더그라운드적 성격으로 소수의 지지층만을 얻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기가 더해져서 80년대 중반부터는 주류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90년대 초반에는 데스매틀이란 초극단의 음악까지 탄생시키면서 승승장구하지만 대그룹들의 잇다른 침몰로 다소 인기가 떨어지져 다소 세력이 약해진다.이때 펑크의 또다른 이름인 얼터가 등장하여 지금까지 큰 인기를 얻고있다.어떵게 보면 초반의 정치성에서 70년대에 미학을 추구한 후 80년대에 힘을 추구하고, 어쩌면 목표가 없어진 지금 세기말적 불안에 의해 초반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음악을 또다시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로서 록의 역사를 대충 살펴보았다.너무나도 방대한 록 음악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하기가 무척 힘들었다.그래서 후반부가 무척 부실한 졸고가 되었다.이점 양해바란다.

4 록계의 거인들[ | ]

이 부분에서는 록의 본격적 이해를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슈퍼그룹들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다.

4.1 BEATLES[ | ]

63년에 데뷔한 이들은 초창기에는 청소년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귀여운 R&R사운드로 앨비스 이후 가장 큰 인기를 얻는 아이돌 밴드로 그 역사를 시작한다.65년부터는 초기보다는 더욱 세련되고 약간의 사회성을 표출하는 음악을 행하면서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서서히 음악성을 나타내면서 음악계를 주도하게 된다.67년 록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SGT,PEPER`S LONELY HEARTS CULB BAND 음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이때부터 다양한 실험성을 보여준 이들은 해산때까지 뛰어난 걸작들을 남기게 된다.이들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한데 우선 록의 태동기에 다양한 실험으로 록의 활성화를 꾀했고,그들의 삼업성에 음악성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필청음반- HELP!,REVOLVER,WHITE ALBUM,ABBEY ROAD

4.2 LED ZEPELIN[ | ]

69년 그룹 야드버즈의 후기맴버였던 지미 페이지에 의해 결성된 그룹으로 초창기에는 블루지한 하드록을 중심으로 음악을 시작한다.잠시 포크록적 경향을 보인 후 4번째 음악에서 위대한 음악성을 표출한다.이후로도 걸작들을 발표하면서 60년대의 비틀즈를 이어 70년대의 황제로 군림한다.이들은 블루스를 기반으로한 하드록을 하면서 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게 된다.이러한 탐미적 성향때문에 후에 펑크록 그룹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한다. 필청음반- VOL1,VOL4,PHYSICAL GRAFFITY,

 THE SONG REMAINS THE SAME

4.3 PINK PLOYD[ | ]

67년 데뷔한 이들은 록에서 가장 독특한 모습을 보였던 프로그래시브록 그룹중 최고의 밴드이다.초창기에는 사이키델릭을 기반으로한 스페이스록(우주적 분위기를 표현)과 아방가르드(매우 실험적인 음악)를 하면서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다.70년부터 좀더 록적이면서 짜임새 있는 컨셉트 앨범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73년 비틀즈의 SGT,PEPER 음반이후 가장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THE DARK SIDE OF THE MOON 음반을 발표하면서 대중적 인기도 획득하게 된다.이후로도 걸작들을 발표하다가 79년 대작 THE WALL 음반을 발표하여 다시한번 음악계를 놀라게 한다. 필청음반- 그들의 83년 이전의 모든음반

4.4 JIMY HANDRIX[ | ]

67년 그룹 EXPRIENCED 를 결성하면서 혜성같이 등장하여 당시 록계를 놀라게 한다.그는 천부적인 기타리스트로서 다양한 기법들로서 록 기타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그는 기타를 자신의 몸이 된것처럼 연주하면서 강렬한 록음악으로 음악계에 혁명을 가져오지만 아깝게도 70년에 약물중독으로 사망하게 만다. 필청음반- 그의 70년 이전의 모든음반

4.5 DEEP PURPLE[ | ]

68년에 데뷔한 이들은 초창기에는 다소 프그래시브한 음악성을 보이며 입지를 굳혀가다가 70년 뛰어난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의 가입으로 변모하여 하드록 그룹이된다.이후 하드록계를 이끌어가면서 수많은 록커들이 거쳐가게 되고 또 이들이 그룹을 결성하면서 하드록 전성기를 만들어 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한마디로 하드록의 전설이다. 필청음반- IN ROCK,MACHINE HEAD,MADE IN JAPEN

4.6 METALLICA[ | ]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매틀그룹으로서 83년에 데뷔하여 거친 매틀의 맛을 보여준 후 서서히 음악의 틀을 잡아가게 되어 86년에 MASTER OF PUPPETS 음반을 발표하면서 스래쉬 매틀을 완성하게 된다.88년에 4집을 발표하면서 중후하면서도 사회적인 음악으로 매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는다.이들이 매틀을 이끌어가면서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청음반- RIDE THE LIGHTING,...AND JUSTICE FOR ALL

4.7 MEGADETH[ | ]

70년대의 레드 제플린과 딮퍼플처럼 80년대를 매탈리카와 함께 이끄어나갔던 그룹이다.85년 데뷔하여 가능성을 보여준 후 차차 완성도들 높여가다가 90년에 RUST IN PEACE 로서 지적인 스래쉬를 완성한다.이들의 사운드는 데이브 머스테인의 카리스마적인 지휘아래 현란한 기타와 복잡한 구성,그리고 매우 사회적인 가사말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완성도로서 매탈리카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밴드이다. 필청음반- PEACE SELLS...BUT WHO`S BUYING?,RUST IN PEACE

4.8 NIRVANA[ | ]

89년 힘있는 데뷔앨범으로 주목받다가 91년 혁명적인 음반 NEVERMIND 로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어 얼터너티브 음악이 90년대를 주도하도록 만든그룹.얼마전 커트 코베인의 죽음으로 그 역사는 끝났지만 그 이름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5 같이 보기[ | ]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