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기자의 현장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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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고 3교실엔 불신이 넘쳤다[ | ]

김용옥 기자/mailto:doholk@munhwa.co.kr http://www.munhwa.co.kr/series_imsi/html/doall_5.html

“요즈음 학생들을 ‘이해찬석두세대’라고 부르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의도는 좋았지요. 국·영·수라는 공부성적하나를 기준으로 인재를 뽑지는 않겠다. 그래서 사회봉사영역이니 농촌출신영역이니 하는 다양한 영역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런 영역으로 들어가는 학생도 적을 뿐아니라 그 영역으로 몰리는 학생이 많아 결국 또다시 잣대는 국·영·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국·영·수 공부는 소홀히 했거든요 초등학교때는 거의 시험을 보지 않았고 중학교도 입시가 없이 들어왔지요. 시험으로 본격적인 평가를 처음 받아보는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같은 일반계 고등학교는 400점 만점에 320점정도가 전교에서 최고입니다. 상위권은 이미 다 외고나 과고로 다 빠졌어요. 저의 반이 37명이 정원인데 수시합격·유학·취직으로 7명이 빠지고 남은 30명중 250점 넘은 학생이 5명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입시지도라고 해봐야 지방대학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제가 딸을 가지고 있어도 어떻게 함부로 시골에 보낼려고 하겠어요. 선생님부터 자괴감에 시달려요.”

서울 풍문여고 3학년을 담당하고 있는 이경림선생님의 진솔한 고백이다. 학생들이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한달 1,000개씩 날린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서울대·연고대를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올해 입시상황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혼란입니다.”

“혼란의 가장 큰 이유는?”

“수시에요.”

“수시로 많은 우수한 학생이 빠지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메우게 되는 상황에 대한 점수 파악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소신지원을 권유합니다. 한군데는 소신지원을, 남은 곳은 적정지원을 하라는 것이지요. 소신지원은 물론 인기있는 학과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문과대 비인기 학과나 법대 같은 곳은 소신지원 할만 합니다.”

풍문여고 3학년 13반 김성숙선생님의 변이다. “교육부에서는 일렬로 줄세우기를 지양하라고 하지만 이제는 줄세우기 밖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총점에 의한 석차정보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진학지도가 어렵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은 개성이 강해서 이미 과는 정해놓았고 대학의 선택이 있을 뿐인데 작년자료는 써먹을 수가 없고요….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위치를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대입 수능시험성적이 수험생들에게 전달된 2일 오전 내가 만난 학생들은 교육평가원에서 난이도를 맞추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외고학생들은 수시모집에서 내신 등급으로 약세를 면치못한 것에 큰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변환 표준점수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시제도의 다양화로 인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본고사 일원체제에 비하면 어차피 변해가야할 반향으로 입시제도가 흘러가고 있다는데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2 # 是夕也放聲大哭[ | ]

김용옥 기자/mailto:doholk@munhwa.co.kr http://www.munhwa.co.kr/series_imsi/html/doall_6.html

우리는 더이상 반미(反美)니 친미(親美)니 하는 말을 해서는 아니된다. 어떻게 존엄한 인간의 무자비한 살상에 대한 항거가 반미라는 구호로써 규정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이 지구상의 생령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보편적인 윤리에 대한 각성이요,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생명을 제도적 흥정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이른바 정언명령(定言命令)의 외침이다.

두 어린 생명의 불꽃이 지금 조선의 대지를 불사르고 있다. 한 티의 불씨가 지금 메마른 대지를 태우며 급속히 번져나가고 있다. 한 네티즌의 발의로 시작된 광화문 촛불시위에는 수천수만의 시민들이 가족의 손을 잡고, 연인의 손을 잡고 모여들고 있다. 봉오리가 피기도 전에 이승을 떠난 동년배 효순이, 미선이 그 어화너 상여소리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손에 손을 잡고 촛불앞에 입김을 모으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시국기도회가 열리고, 대중문화의 스타들, 연예인들, 문인들은 한 마음으로 우리민족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호소하고 있다.

천하의 유객 맹자(孟子)에게 당대 최강의 대국이었던 제(齊)나라의 통치자 선왕(宣王)은 물었다: “이웃나라를 사귀는데도 도가 있습니까?”(交隣國, 有道乎?)

“물론 있지요. 오직 인한 사람(仁者)이라야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고, 오직 지혜로운 사람(智者)이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지요.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즐겁게 하는 것이요,(以大事小者, 樂天者也.)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함이외다.(以小事大者, 畏天者也.) 하늘을 즐겁게하는 자는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이요,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 한 나라만을 보존할 수 있을 따름이외다.”

우리는 미국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강하기 때문이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인 미국은 하늘을 즐겁게 할 줄 알아야만 그 대국다움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하늘을 즐겁게한다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하의 공도(公道)를 지키는 것이다.

가교전차의 관제병은 분명히 두 어린 생명이 좁은 길을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장갑차와 전차가 엇갈리기도 어려운 도폭의 상황이었다면 하등의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생명이 위협당하고 있는 그 상황의 공도는 무조건 차를 정지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단순한 윤리적 명제도 그들은 지키지 않았다. 장갑차와 전차의 부딪치는 손상이 두려워 진행을 강행한 것이다. 여기에 도대체 어떠한 변명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너무도 억눌려 살아왔다. 우리는 너무도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데 익숙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대국은 소국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한국이라는 우방의 존재가 없이는 미국은 세계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상의 재판권의 포기에 관한 강제규정은 삭제되어야 하며 공무여부의 판정권도 우리 한국법원에 있어야 한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대국은 소국앞에 엎드릴줄 알아야만 그 소국도 취할 수 있다.”(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열리고 있는 이밤, 나는 호호 손을 불어가며 외친다: “시석야방성대곡!”(是夕也放聲大哭!)

3 # 감흥없는 허무개그[ | ]

김용옥 기자/mailto:doholk@munhwa.co.kr http://www.munhwa.co.kr/series_imsi/html/doall_7.html

백락천(白樂天) 이라는 당(唐)대의 위대한 문장가는 고적한 귀양살이 시절에 구강(九江) 포구에서 우연히 만난 퇴물기생 하나의 이야기로 ‘비파행(琵琶行)’이라는 눈물겹도록 흥미진진한 서사시를 썼다. “심양강변 어둑어둑 객을 보내는데, 붉은 단풍 갯부들 검푸른 강물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尋陽江頭夜送客, 楓葉荻花秋瑟瑟).” 훌륭한 문필가의 역할이란 역시 재미없거나 하찮은 이야기를 가지고 위대한 재미를 창출하는 묘미에 있다. 3일밤 나는 평생 처음 기자신분으로 대선후보 심야토론을 관전하는 스릴에 온몸이 떨렸다.

아무리 재미없더라도 재미있는 글 하나쯤은 만들어 낼 수 있겠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기자실에 앉아 부산하게 들락날락 떠들어대는 몇몇 기자님들의 소음을 차단하고 토론회에 집중을 했으나 한시간이 지나니 머리가 멍해져서 필기조차 잘 되질 않았다. 한마디로 재미가 너무 없는 것이다. 재미를 만들어 볼 거리를 아무리 찾아봐도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어쩔거나 어쩔거나 하고 풀이 죽어 귀가길에 잡은 택시 운전사 아저씨께 여쭈어보았다.

“재미있었어요?”

“재미참 되게 없으라우. 서루 흠집만 내는디, 흠집이랑게 젠부 아는 것뿐 아니것소? 뭔가 새것이 있어야제. 그러니 재미가 없을건 당연지사제.”

드디어 토론의 막이 오르기 직전 민주당진영 대기실에선 노무현후보 부인 권양숙여사 주변으로 모여있던 사람들의 초조감도 짙어만 갔다. 어느 누군가, “기도합시다”하고 외쳤다. “불공드리는 사람은 어떡하고?” “그래도 기도 한번 해주세요.” 이재정신부님의 유려한 기도가 시작되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뜻을 펴게 하여주옵소서…” 권양숙여사는 내 손을 잡고 같이 기도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그토록 절박한 순간들이었지만 나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토론이 끝난후 노후보 자신이 기자회견에서 지적했듯이, 우선 TV토론의 형식이 문제였다. 노후보가 이회창·권영길 두 후보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노후보는 시간제약으로 이후보에게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 질문도 받지 않은 권후보는 반론을 해야한다. 뿐만아니라 그 반론자의 순서도 질문의 순서와 관계없이 이미 결정되어있다.

테제(論)가 없는 안티테제(反論), 이것 자체가 일종의 ‘허무개그’였다. “반론하십시오.” 도대체 뭘 반론하라는 것인가. 사회자 염재호교수의 진행언어 중에서 1분이나 1분 30초라는 말은 인수분해해서 빼버려도 되는 말이었다. 모든 문답을 그렇게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군사정권의 브리핑문화의 소산에서 생긴 타성인지, 퀴즈문답이나 암기위주 단답식 입시지옥의 연장일까? 공정성을 전제로 한다해도 문답하는 시간 길이의 다양성은 두시간 내에서 얼마든지 확보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토론의 초점이 노·이후보 양인에게 맞춰져 있다면 아예 정직하게 두사람의 대결로 제한해도 좋을 것이다. 인신공격은 아니더라도 서로의 약점들추기에 급급한 노·이후보 사이에서 정강정책발표의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한 것은 권후보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이번 토론은 민노당 정책발표에 노·이후보가 들러리를 선 셈이 되고 말았다. 노·이후보의 언어는 ‘낡은 정치청산’ ‘부패정권청산’이라는 기존 구호의 쳇바퀴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었다.

내가 대기실에서 노후보와 악수를 나눴을 때 노후보는 “긴장됩니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고백했다. 이후보는 인해장벽을 뚫고 들어간 나를 반기면서 ‘공진단(拱辰丹)’이야기를 했다. 몇년전 우연한 계기에 내가 이후보의 맥을 짚어준 적이 있다. 그때 김종필 총재가 녹용·사향이 들어간 공진단을 먹고 건강을 유지한다는 소리를 듣고 당신도 먹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태양인에 가까운 선생체질에 태음인 약인 공진단은 독이 되니 당장 끊으라고 권유했다.

내 말대로 약을 안먹으니까 오히려 건강이 좋아졌다고 했다. 이후보는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 토론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청문회스타인 노후보는 TV에 나올수록 유리하다는 예측은 최소한 이번 토론에 한해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잃은 것은 없지만 얻은 것 또한 별로 없는 것 같다. 단답식 선(禪)문답에후보는 노후보는 익숙지 않은것 같다. 그에 비하면 TV화면에 약하다는 이후보는 그래도 선전한 느낌이다. 그러나 대세를 흔들 수 있는 어떠한 빌미도 잡지못했다. 현 흐름의 고착이라면 이후보에게는 바람직한 것이 별로 없다.

노후보는 초장에 좀 흠칫했다. 단일화문제에 대한 이후보의 공격에 노는 보다 확실한 대처를 했어야 했다. 합당이 아니라 후보만 단일화한 것이므로 정책까지 단일화할 것은 없다고 변명한 것은 좀 박약한 펀치였다. 나였다면,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토론을 통한 신사적 단일화 합의 그 자체가 이미 낡은 정치의 청산이며 새로운 이념의 출발이라고 확실하게 주장했을 것이다. 미군철수에 대한 과거의 주장을 지적한 자리에서도 초선의원때 잘 모르고 저지른 실언이었을 뿐이라는 식의 변명은 정당치 못하다. 당시 나의 주장은 정당한 판단이었지만 나는 지금 그러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성숙했다고 보다 당당하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서술했어야 한다.

이후보의 ‘극장불’의 비유도 매우 치졸한 것이다. 불은 절대적 사실이다. 물론 꺼야 한다. 그러나 도청은 인간의 관계 항목에서 성립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그것은 그 관계 항목을 밝혀야만 성립하는 사실이다.

전체를 관망해 보건대 이러한 대화의 장이 재미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냉소적인 정치불신을 말해서는 안된다. 한국사회는 분명히 이런 재미없는 재미를 통해 밝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4 # 도올 김용옥기자 李-盧 동행 취재기[ | ]

4.1 # 직접 만난 그들은 달랐다[ | ]

김용옥 기자/mailto:doholk@munhwa.co.kr http://www.munhwa.co.kr/series_imsi/html/doall_8.html

선거의 기원중 하나로서 우리는 희랍의 도편추방제(ostracism)를 거론하기도 한다. 참주(僭主)가 될 우려가 있는 인물을 시민의 투표에 의하여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를 말한다.

우리는 우리사회의 참주들을 선거라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사회 밖으로 추방해버려야 한다. 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항아리단지에 항아리조각을 넣었을 때 그 조각에 쓰인 이름이 가장 많이 나온 사람은 아테네를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도편 쪼가리를 항아리에 넣기 위해서 우리는 선거의 현장을 체험해야 한다. 정말 추방되어야 할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를 직접 손으로 만져봐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직접체험은 요즈음의 선거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디어선거전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직접체험을 차단시킨다는 면에서 좀 문제점이 있다. 브라운관의 영상을 통해서 만난 사람은 조작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나를 만나는 많은 사람들도 TV화면에서 본 나와 직접 만나본 나의 느낌이 너무도 다르다고 경악하는 모습을 자주 체험한다. 그래서 공설운동장에서 두 다리를 벌벌 떨며 후보연설을 들었던 감격이 있던 우리세대에게는 무엇인가 속시원치 않은 감회가 남는다.

때마침 나는 기자가 되었다. 우리 민족 역사의 중요한 고비의 현장으로 투입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자격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직접 느낀 것을 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유세의 언어는 즉각적으로 득표와 연결되어야만 하는 대중선동의 장(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인간의 정감의 내면실상과 핵심적 논리를 파악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될 때가 많다.

나는 나의 삶의 역정에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두 대통령후보를 이토록 열띤 역사의 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인간은 부정적인 안경으로 보면 한없이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잣대로 보면 한없이 긍정적일 수 있다. 나는 두 후보 모두, 가급적이면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평소 언론이 전하기 어려운 측면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언론의 사명은 비판에 앞서 사회적 가치들을 소통시키고 화해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임무에 관하여 내가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해주었으면 한다.

4.2 # 이회창후보 서울유세 동행취재기[ | ]

김용옥 기자/mailto:doholk@munhwa.co.kr http://www.munhwa.co.kr/series_imsi/html/doall_9.html

내가 이회창후보 유세단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은 7일 오후 3시쯤 광화문 앞 공터,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재하는 단식기도회에서부터였다.

“하느님이시여 이 세상에 정의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소서. 이 차가운 땅에 다시 앉지 않게 하여주소서. 비굴하고 비참한 역사를 후손에게 남기지 않도록 하여주소서.”

이때 갑자기 이회창후보와 박계동 전의원·이부영의원이 서 있는 곳으로 달걀이 날아왔다 미사를 집도한 김영현 신부님이 미사도중, 정치인들은 이 자리에 서있지말고 돌아가라고 말씀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치인이라 해도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미사에 참여한 사람에게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의로움을 말하는 자들의 지나친 독선일 수도 있다.

평화의 기도는 역시 포용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순식간에 경호팀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달걀세례를 퍼부은 젊은이가 붙잡혀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는 보고가 나중에 들어왔을 때 이후보는 그들에게 아무 피해가 없도록 부탁한다고 말했다.

황급히 자리를 뜬 후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두타·밀리오레 광장 앞이었다.

“젊은이 여러분 12월19일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새나라·새조국을 만듭시다. 우리의 조국을 우리의 손으로 만듭시다.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조국을 만듭시다. 거짓말하지 않는 깨끗하고 정직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젊은세대와 서민을 위하여 일자리를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25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실망에 찬 국민들에게 모두 제자리를 찾아드리겠습니다. 5년동안에 250만가구의 주택을 건설하겠습니다. 저는 불의 앞에 머리숙이고 엎드려 본 적이 없습니다. 세계속에서 당당한 자존심을 지키는 강력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불의로부터 이 사회를 지키는 강력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우리국민들에게 대한민국의 자존심과 명예를 다시 찾아드리겠습니다.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이회창을 밀어주십시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노무현후보와 이후보의 연설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노후보는 분명한 테마가 있다. 노후보는 산발적으로 말을 던져도, 연속적인 주제의식을 가지고 변조해나간다. 노후보는 무엇인가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한다. 이후보는 스타일이 다르다. 그의 언어는 센텐스마다 단절되어 있다. 단절되어 있기에 오히려 강렬한 인상을 주는 모자이크의 나열인 것이다. 테마를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지지를 즉흥적으로 호소할 뿐이다.

노후보는 한번 연단에 서면 30분을 넘어간다. 이후보는 5분을 넘기지 않는다.

노후보의 부산 롯데유세장과 이후보의 서울 두타유세장은 콘트라스트가 극적이다. 부산은 노후보가 인기를 못끄는 곳이지만 유세장의 분위기는 진지하고 열기가 넘쳤다. 서울은 이후보의 인기가 좀 떨어지는 곳인데 유세장의 분위기조차 좀 피상적이고 어색했다. 심금을 울리는 한표보다는 떠들썩한 이벤트성의 과시가 위주였다. 선거참모들의 전략에 약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노후보는 이후보님께서 서민의 삶과 지방민의 서러움을 체험하지 못한 중앙집권지의 엘리트일 뿐이라는 점을 들어 유세장에서 맹공세를 펴고 있습니다. 뭐라 답변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클 시절에는 사실 서민과 귀족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봐야 거기가 거기였습니다. 우리국민 모두가 다 어렵게 살았다는 것이죠. 아버지가 공무원이셨는데 우리엄마도 닭을 키워 달걀을 시장에 내다 팔며 생활을 꾸려가기도 했습니다. 외가는 좀 부자였는데 부친이 처가집 도움받는 것을 극히 싫어하셨기 때문에 저도 동아일보 신문배달원 노릇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충남 예산에 사시는 자작농이었는데 방학때 내려가면 새벽같이 일어나 똥장군도 지고 다니며 밭에서 일하곤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인간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출신성분만으로 자기인격의 내용을 규정한다는 것은 심한 어폐가 있습니다.

그리고 매사는 각유소장(各有所長)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키 어렵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도 부유한 환경에서 컸습니다. 좀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오히려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정의에 대한 균형있는 감각을 지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노후보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요즈음 신문광고를 보면 이후보는 노후보를 인신공격하거나 DJ와의 연계라는 측면에 매달려 비판을 하곤하는데 반하여 노후보는 21세기를 향한 발돋움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네거티브한 선거전략은 좀 유치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진영은 당권과 대권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광고전략은 당차원에서 결정되어 제가 모르는 사이에 나갈 때가 있습니다. 김교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런 부분은 즉각 시정토록 하겠습니다. 그러한 지적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연설하는 것을 들으셔도 아시겠지만 저는 노후보를 인신공격하는 그런 발언은 하지 않습니다.”

우중충하고 음산한 기운이 도는 토요일 오후 밀리오레 앞 인파를 비집고 이후보가 타는 카니발 속에 들어갔을 때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처투성이인 손을 보라는 것이다. 얼마나 열성적으로 악수를 해대는지 손이 긁힌다는 것이다. 유세자의 곤혹스러운 삶을 보여주는 단적인 징표였다.

그러면서 동대문 포장마차 집에서 방금사온 식어가는 만두쪼가리를 꾸역꾸역 먹었다. 그러면서 연설을 하면 허기가 진다고 했다. 아무거나 먹어 배를 채워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뱃심이 없이는 입심이 안나온다는 것이다.

“연설끝나면 부지런히 춤을 추세요. 춤한번 잘추면 백만표입니다”라고 옆에서 훈수두는 보좌관 말에, “춤도 젊어서 추어야 춤이지. 내가 춤까지 추는 것이 좀 어색하지 않아? 김교수님, 어때요?”

그의 말은 정확했다. 그의 삶의 역정과 오늘의 유세의 현장이 무엇인가 괴리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만 맞추라고 나는 충고를 했다. 어색하게 춤을 추면 오히려 표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지금 묘사되고 있는 이 장면에서 나에겐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다. 나와 만난 이 긴박한 짧은 시간 속에서 이후보는 전혀 나를 유세전략의 일부로서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후보는 모든 순간을 일정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는 감각이 뛰어나다. 노후보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은 실상 모두 정확히 연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보는 자기가 치열한 선거의 와중속에 들어 있다고 하는 의식조차 별로 없다. 그는 자연스럽게 보여야 한다는 의식조차도 없는 자연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중앞에 선 이후보는 매우 어색하고 인위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여튼 이후보에게는 불리한 신의 마술이다.

대쪽이라구? 깐깐하다구? 천만에 이후보를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하며 자애로운 인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식이 없는 천진난만한 한 어린애 같은 인간이다. 역시 그는 고귀하게 큰 사람이 분명하다. 나의 세속적 감각으로도 그는 너무 체할줄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경직된 것처럼 보인다.

“이후보님께서는 법관시절에 우리사회의 현실적인 진보를 기록한 매우 혁신적이고도 파격적인 판례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일반육체근로자의 가동연한을 55세에서 60세로 늘려 손해배상을 받게 해준다든지, 남편이름으로 되어있는 재산도 부부공동소유로 판결을 내리신다든지, 북한을 찬양하는 표현이 이적물에 들어있다 할지라도 국가존립을 해치는 것이 아니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든지, 계엄이 풀린후에도 군사재판을 계속 강행하는 것은 위헌이라든지 하는 판례는 당시의 역사상황에서 도저히 내리기 어려운 획기적인 판결들이었습니다. 그토록 법조계의 존경을 받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대쪽같이 사신 분이 왜 오늘날에는 보수당의 보스로서 사회진보를 거부하는 인물처럼 비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가 없는데도 여러사람이 계속 호랑이가 있다고 하면 호랑이가 정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치에 입문하여 이러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내 신념대로만 살며는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통하지 않더군요. 요즈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을 많이 생각을 합니다. 구정물을 뒤집어쓰고서도 깨끗함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인의 역량이요, 국가혁신의 사명이라고 다짐하고 있지요. 우리사회는 더 이상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으로 규정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규정해야 합니까.”

“정의입니다.”

“정의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페어네스(Fairness)라는 것입니다. 공정성이라는 것이지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정확히 해주는 것이 공정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를 포괄하는 것입니다. 원칙성과 상황성이 모두 같이 고려되는 공정성이지요. 법의 가치란 바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페어네스란 한마디로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간의 페어게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개인들간의 자유의 상충을 균형잡는 것이 곧 법이지요.”

“혁신적인 판례의 배경에 깔린 후보님의 생각도 그러한 정의와 관련된 것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저의 사상은 한마디로 개인의 존엄과 가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헌법의 기본정신입니다.”

“법이라는 틀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관료사회의 부패를 가장 잘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일각에 있습니다. 그 결정적 복안은?”

“클린 거버먼트(clean government) 즉 깨끗한 정부입니다. 부정부패를 차단할 수 있는 모든 시스템을 정확히 가동시키는 것입니다. 싱가포르와 핀란드의 예를 생각하시면….”

“역대의 모든 대통령후보가 부패척결을 기치로 들고 나왔지만 그것을 실천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실천의지로만은 될 수 없는 문제 아닙니까.”

“저는 우리사회를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와 관념이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법관으로 살았지만 상앙(商�)과 같이 엄형을 주장하는 법가(法家)가 아니었다. 그는 인치(人治)를 말하는 유가(儒家)였다. 그리고 법은 단순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법관은 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법을 창조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법의 창조의 궁극적 기준은 개인의 존엄과 가치라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 당신은 어느쪽입니까?”

“평등을 도외시한 자유는 죽은 자유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평등은 바람직한 가치가 아닙니다. 평등은 제가 말씀드린 정의의 속성일 뿐입니다.”

나는 이틀동안 이후보를 동행했다. 마지막 행선지는 효순이·미선이네집이었다. 진눈깨비가 쌓인 마찻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이후보와 효순이네집에 들어갔을 때 윗목에 놓인 메주덩어리들이 너무도 처량하게 보였다. 효순이가 너무도 맛있게 먹었을 텐데…. 미선이 삼촌은 추모비는 의미없는 것이라했다. SOFA가 개정되어 우리민족의 자존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이 두 소녀의 죽음은 추모비로 보상될 수는 없는 것이라 했다.

4.3 # 노무현후보 부산유세 동행취재기[ | ]

김용옥 기자/mailto:doholk@munhwa.co.kr http://www.munhwa.co.kr/series_imsi/html/doall_10.html

"유세 현장 한번 가보실래요?”

기자의 신분으로 현재 가장 핫이슈가 되고 있는 현장으로 투입되는 것처럼 영예롭고 행복한 일은 없다.

유세(遊說)란 본시 춘추(春秋) 고전시대의 사(士)의 역할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나 그 당시 유세의 대상은 열국의 제후(諸侯)였다. 그러나 지금 유세의 대상은 일반 백성(百姓)이다. 제후가 될 사람이 자기가 다스릴 민중에게 유세를 하는 것, 이것이 민주라는 정치행태의 매우 중요한 프로세스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김해공항에 내린 것은 6일 오후 2시쯤이었다.

“아무래도예, 나이먹은 사람은 이회창 지지고예, 젊은 사람은예 노무현하고 이회창으로 갈라져 있지예.”

“그럼 부산은 이회창 우세군요. 왜 그렇게 자기 고향사람을 박대합니까?”

“사람보고 찍는 게 아니구예, 당보고 찍는다 이 말씀이지예.”

정치부 김성훈 기자의 핸드폰 지시에 따라 부리나케 자갈치시장으로 달려가는 택시안에서 내뱉어지는 기사의 일성은 부산민심의 현황을 정확히 전달해주고 있었다.

언제나 시장은 나를 흥분케 만든다. 왁자지끌한 소리, 부산한 움직임, 싱그러운 비린내, 하역인부의 구성진 가락….

“노후보 어디로 갔습니까?”

유세장을 몰라 묻는 나의 질문에 생선 파는 아줌마가 별 관심을 쏟아주지 않는다. 저기저기 하고 손짓하는 아줌마의 얼굴은 매우 무뚝뚝했다.

“나도 모르는 30억원 짜리 땅이 있으면 찾아내라 하십시오. 찾아오면 이후보에게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흑색선전을 하면 이길 선거도 집니다. 그런데 지고있는 선거, 확실하게 집니다”

“와아”하고 울려퍼져야 할 함성도 풍겨오는 갯냄새에 묻혀버리고 만다. 한마디로 기대와는 달리 썰렁했다. 우선 유세장에 사람이 없었다. 유세장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생선을 파는 아줌마에게 사진기를 들이대니깐 그냥 훌쩍 일어나 버린다.

“99% 지지율이라구요? 그건 과장된 숫자구요 한 74.5%는 됩니다. 그렇지만 이 경상도 노무현이가 전라도에서 지지받는다는 것이 왜 나쁘단 말입니까.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한 일입니까. 여태까지 대통령은 모두 반쪽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무현이는 호남에서 지지받고 경상도에서 지지받고 충청도에서, 강원도에서, 경기·서울에서 지지받아 국민통합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이제 이 노무현은 호남·영남의 대통령이 아닙니다. 남이 나보다 못되어야 한다는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납시다. 호남, 영남이 따로 없는 새나라! 반목, 질시가 없는 새로운 나라를 만듭시다!”

자갈치의 썰렁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노후보는 매우 또박또박 명연설을 했다. 한마디로 그의 자세는 매우 성실했다. 연설 도중, 매우 빈한하게 보이는 꺼칠한 수염의 늙은 지게꾼이 지갑을 털어 5만원 가량의 빳빳한 지폐를 연단 아래 서있는 김근태의원에게 들이민다. 너무도 그 모습이 측은하게 보였는지 김의원이 그냥 거두셔도 될텐데 하니깐, “내가 우리나라 바른 정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더 있겠소? 받으시오!”하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은 순간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우리 국민의 바른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저런 것인데.

다음 일정지는 서면 롯데백화점 앞이었다. 어차피 또 썰렁하겠거니 하고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새벽 6시에 출근한 이래 변변히 식사를 하지 못해 배가 몹시 출출했던 것이다. 국수나 한 그릇 훌러덩 먹고 올라가려고 국수코너에서 기웃거리는데 순식간에 아주머니가 수북이 국수 한 그릇을 퍼준다.

“돈은 어디서 내지요?”

“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한 그릇 맛있게만 드셔주시면 더 없는 영광이겠습니다”하고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힌다. 내 인생에서 먹어본 가장 맛있는 한 끼였던 것 같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정문 앞에 당도했을 때 나의 두 눈은 휘둥그레 뒤집어지고 말았다. 연변을 가득 메운 군중, 밤의 열기가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남녀노소 층도 다양했고 무엇보다도 듣는 자세가 진지했다. 노후보의 연설은 자신과 열정이 넘쳤다.

“제가 동북아시대를 열겠습니다. 동북아경제협력공동체를 마련하여 자주적인 외교를 펼치겠습니다. 부산에서 베이징으로, 부산에서 모스크바로, 부산에서 파리로 갑시다. 동북아시대가 오면 부산은 세계물류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고 부산은 쾌적한 삶의 보금자리가 될 것입니다.”

“동북아시아시대를 열어 부산을 세계의 물류중심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지방화시대를 엽시다. 이제 우리나라는 영·호남의 대결이 아니라 중앙·지방의 대결의 장으로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말만 지방자치이지 진정한 분권이 실현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지방화시대의 핵심은 지방대학의 집중적 육성입니다. 수도권대학에 집중되어 있는 연구개발재원을 파격적으로 지방대학에 돌리고, 지역별로 특성화하여 지방산업과의 유기적 연대를 강화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독자적인 지방산학공동체의 기획능력을 키워나가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그 능력을 대접받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지향적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아! 우렁찬 박수가 계속 터져나왔다. 나는 길거리 청중 속에 묻혀, 박수를 치는 한 여성에게 물었다.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자발적으로 나오셨습니까? 혹시 동원된 것은 아닙니까?”

“금품동원? 그런 것은 요즈음 인터넷시대엔 통하질 않습니다. 예전에 제 언니가 억울하게 곤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노후보가 무료변호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노후보를 소신껏 후원하는 사람이지요.”

이때 노후보의 유세소리는 높아지고 있었다.

“우리 보통사람들의 삶이 문제입니다. 그 고난을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고난을 위해 어떠한 실천을 할 수 있으며 과연 얼마나 지속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회창 후보는 서민을 모릅니다. 지방을 모릅니다. 서울의 밀집한 지역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산 적이 없습니다. 최소한 지방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치러봐야 지방을 알게 됩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행정수도를 지방으로 옮기겠습니다.

이 문제는 신중한 국민적 합의를 요구하는 문제이므로 국민투표에 부쳐서 결정하겠습니다.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로 잡읍시다. 우리 후손에게 떳떳한 역사를 물려줍시다. 집에 와서 아들에게 내가 오늘 산 모습을 정직하게 다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듭시다.”

노후보의 열변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나는 재빨리 의전담당관에게 다음 행선지까지 노후보와 같이 동행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했다. 나의 청은 기민하게 처리되었다. 넉넉히 마주보고 앉아있을 수 있는 관광버스 속에서 우리의 대화는 이루어졌다.

“서민의 대통령후보임을 자처하는 후보님의 유세에 서민지역인 자갈치에서는 별 호응이 없고 비싼 쇼핑을 하는 롯데백화점 앞에서는 열기가 느껴지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 정치의 현장입니다. 서민은 하루 먹고사는데 급급해서 정치라는 것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그리고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일수록 자기표현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들은 이미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묵은 기나긴 우리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어온 지도자들의 과오를 극복해온 침묵입니다. 한국의 민중들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후보는 역시 정치인이었다. 내 질문에 즉각 대응하는 탁월한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언어구성이 매우 적절하게 안배되어 있었다. TV토론에서 받은 엉성한 느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부산에 오셨으니까 부산사람들 구미를 부추기는 화끈한 공약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저는 지역적인 선심공약을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전체를 고려하는 큰 틀의 비전을 우선적으로 제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체의 틀 속에서만 지역의 득실을 얘기해야겠지요. 저는 지금 유세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유세라는 것을 대통령이 되기 위한 수단의 한 작은 단락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유세야말로 정치의 핵심이며 바로 국민의 정치수준의 바로미터입니다. 이 유세의 장에서 수준 낮은 언행이 저질러지면 곧 우리 국민의 정치 그 자체가 타락하는 것입니다. 제가 비록 낙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유세의 장에서만은 바른 말을 해야하고 야비한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선거, 그것이 바로 국민정치의식의 훈련장입니다.”

“오늘 구덕체육관에 희망돼지 모으러 가신다는데 희망돼지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희망돼지는 제가 말씀드리는 새 정치의 상징입니다.”

“새 정치라는 건 또 뭡니까?”

“저는 정치라는 것을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된 후에 이렇게 하겠다라는 약속은 모두 엉터리 약속입니다. 그런 식으로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희망이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 정치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정치는 돈입니다. 돈이 없으면 정치는 못합니다. 그래서 여태까지의 모든 정치인은 돈줄에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계파를 만들고 조직을 만들고 가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액의 돈을 보이지 않게 큰손들로부터 갹출했습니다. 결국 표는 서민대중들로부터 얻습니다. 그러나 당선만 되면 서민에게 등을 돌리고 온갖 큰손들의 이익에 굴종하는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풀이돼온 악폐에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저의 희망돼지는 바로 지금 여기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보자는 서민대중들의 절규입니다.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돼지저금통에 한 푼 두 푼을 모아 단기간에 50여억원의 성금을 보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새 정치의 출발입니다. 계보도 없고, 가신도 없고, 조직도 없고, 돈도 없고, 청와대도 없고, 동교동도 없고, 4번이나 선거에 떨어진 제가 어떻게 국민의 후보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제가 대통령 단일후보가 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우리나라 정치혁명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지방화전략 운운하시는데, 현재 지방자치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재원불리기, 예산낭비, 유기적 통제의 단절로 민심이 추락하고 국토가 타락하고 있습니다.”

“어린애가 넘어진다고 울밖에 나가 걷지 못하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대안이 없습니다.”

그의 말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나는 이날 밤 구덕체육관 희망돼지 모으는 행사에 참석했다. 이은미의 발랄한 노래도 좋았고 분위기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건강했다.

나는 김해에서 일박을 했다. 7일 새벽에 김해평야를 가르는 찻간에서 나이 먹은 운전사 양반이 한마디 거든다. “양산군수 될래, 김해 대저면장 될래 하면 누구나 김해면장되겠다 했다 아입니꺼. 그만큼 유족한 곳이지예. 노무현이가 이곳 한림면 아라예. 고생 많이 했지예.”

나는 김해평야를 바라보면서 이곳이 가야의 고도라는 것을 생각했다. 철기문화를 가장 선구적으로 도입한 개방적 문명의 요람이었다. 그러한 풍요 속에서 태어난 우륵의 가야금 튕기는 소리가 서낙동강에 너울치는 갈매기 날갯짓 사이로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5 # 나는 배우고 싶었다[ | ]

김용옥 기자/mailto:doholk@munhwa.co.kr http://www.munhwa.co.kr/series_imsi/html/doall_11.html

“6시출근입니다.”

“엣∼?”

“저희 신문은 석간이라서…”

국장님의 말씀에 신입사원의 모든 로맨스가 맨하탄 트윈빌딩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평생 출근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내 인생에 유일한 취직생활이라는 것이 고려대 교수4년이다. 그것도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 달걀두개, 어김없이 콕 쏘아오르는 사이다 한병의 소풍점심이 그리워 새벽에 일어나 고사리 손을 호호 불었던 동심의 긴장감처럼 나는 벌떡 일어났다. 어김없이 5시였다. 쿠∼웅∼, 때마침 동구밖 서낭당곁에 있는 봉원사의 바라가 세차게 울려퍼졌다. 서울 신촌의 봉원동에 30여년을 살았어도 그렇게 크게 듣는 새벽종소리는 난생 처음이었다.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고소성밖 한산사, 한밤중의 종소리, 잠못이루는 객의 뱃전에 닿았어라.)

도올城外奉元寺, 曉碧鐘聲충憂心. (도올집밖 봉원사, 푸른새벽의 종소리 근심스러운 마음을 더욱 근심스럽게 만드는구나)

아내가 밤새 고아논 곰국에 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훌훌 뱃속에 털어넣고 서대문밖 문화일보사옥에 당도한 것은 6시정각이었다. 사실 이날, 나는 9시에 사장실로 첫신고식을 올리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인생 첫출근의 테이프를 아주 평범한 일개사원으로 끊고 싶었다. 과연, 전사옥엔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나에게 그토록 겁을 주던 황열헌편집국장님의 자리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4분40초후에 당도한 국장님은 태연히 책상에 앉아 조간신문을 읽고 있는 나의 모습에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6시45분에 편집국장주재 부장회의가 열리고 그곳에서 오늘기사의 대강이 잡힌다는 것, 그런 것이고 뭐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난 그냥 히멀건하게 책상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7시20분경 나는 국장실로 불려갔다.

“독자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는데 현장취재 한번 나가보실랍니까? 오늘 일면톱은 역시 수능성적발표입니다.”

사회부 오남석기자와 사진부 신창섭기자와 함께 멀쑥하게 풍문여고 교무실을 들어갔을때, 나는 취재하러 온것이 아니라 취재당하러 온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와∼아∼. 여선생님들이 갑자기 내주위를 에워쌌다. “정말 기자님이 되셨군요.”

그러나 풍문여고는 취재원(取材源)으로는 부적당하다고 생각되었다. 서울 한복판의 좋은 학교이지만 이미 입시경쟁의 치열한 대열에서는 처져 있었다. 나는 이화여자외국어고를 생각했다. 그리고 잽싸게 외고로 달려갔다. 그런데 예상외로 외고의 선생들은 나를 쌀쌀하게 대해주었다.엘리티즘은 항상 냉정하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오신 교감선생님의 야단을 듣고서야 조금 입을 열었다. 외고는 내신평가의 불리함때문에 수시에서 밀린다는 별볼일 없는 얘기만 내뱉었다. 마감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온다. 무조건 3층의 고3교실로 튀었다. 이건 또 뭔가? 와아∼. 오빠부대처럼 외고여학생들이 계단을 가득 메우며 따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귀사해서 10시 5분부터 10시 40분까지 일곱장을 썼다. 편집실의 벨이 두번이나 울렸다. 탈고가 되자마자 옆자리의 박부장님이 원고를 낚아채듯 가지고 간다.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무심코 내려간 곳은 4층편집실이었다. “신문은 이곳에서 만들어집니다. 한번 보세요.”충격이었다. 지면을 안배하고 헤딩을 뽑느라고 움직이는 사원들의 얽힌 움직임은 맨하탄 월스트리트 증권가의 긴박함을 무색케 만들었다. 11시 12분! 땡하고 국장님이 완료를 선언하자 마자 편집국은 갑자기 싸늘한 정적으로 되돌아갔다.

“야! 오늘 좀 늦었다. 내일부터 좀 땡겨!” 편집완료가 11시 10분을 넘기지 말라는 국장님의 지시다. 나는 10분후에 사장실을 올라갔다. 이건 또 뭔가? 비서실데스크앞에 문화일보가 놓여있고 거기에 내 사진이 실려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편집이 완료된 것이 겨우 10분전이었는데 사장실에 이미 온전한 신문이 배달되어있는 것이다. 좀 어지러웠다. 납활자, 지형, 동판, 이런 언어에 익숙한 나의 구세대감각으로는 이 비서실데스크에 놓인 신문은 루카스영화의 우주비행체보다 더 어지러운 스피드의 상징체였다.

12월 2일의 첫기사는 우리사회의 현장을 보고하는 것이 그 주목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소견을 가급적 배제했다. 그리고 선생님과 학생들의 이야기로써만 구성했다.

이부영의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충격이었어! 고3교실 현장이 그렇게 피폐했는지 몰랐다구. 내가 그걸 그대루 국회에 보고 할라구 해. 써먹어도 되겠지?”

“아∼ 좋지!”

점심을 같이 한 관리국 조국장님은 의견이 좀 달랐다. 도올의 첫기사인데 너무 사소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 문화일보 자체의 심의팀에서 배부하는 심의평에는 “두부자르는데 웬 작두?”라고 쓰여있었다. 그러나 두부를 자르는데 작두를 써볼줄도 아는 문화일보편집국의 순발력과 모험심에 나는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도올은 깨져야 한다. 사람들의 머리속에 자리잡은 중후하고 경외로운 도올은 깨질수록 좋다. 그래야 도올은 기자가 될 수 있단다.

둘째날도 어김없이 6시에 출근했다. 놀라운 일은 편집국장님이 나보고 부장회의에 앉아있어도 좋다는 것이다. 배꼽, 스트레이트, 박스, 기획기사, 조간용, 석간용, … 알도못할 소리들이 오갔지만 나는 문화일보가 지극히 민주적인 절차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체의 연역적인 전제가 없이 순수하게 실무급 부장들의 소견의 절충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후 나는 부장회의에는 나오지말라고 할때까지는 꼭 참석하리라고 마음 먹었다. 무엇보다 나는 배우고 싶었다. 공자는 말했다: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不如丘之好學也.) 나는 말한다:“不如도올之好學也!”

나는 이날 하루종일 반미촛불시위를 취재해서 내일 아침 기사를 쓰기로 되어있었다. 어제 밤에 현장은 한번 둘러본 터였다. 그런데 부장회의를 끝내고 아침상황을 타진한 국장님은 내일은 양후보TV토론이 핫이슈로 장식되기에 촛불시위얘기를 써봐야 빛이 안난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 쓸까요?” “정말 그러실 수 있겠어요?” 이 대화가 오간 것이 아침 10시 정각이었다. 순간 영감이 스쳐지나갔다.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의 통곡과 함께 맹자의 교린(交隣)에 관한 구절들이 긴장된 의식의 시간을 줄지었다. 나는 30분동안에 “是夕也放聲大哭”을 완성했다. 이날 심의평은 “도올이 마음껏 춤을 출 수 있도록 멍석을!”너무도 감사했다. “우리는 기자다운 도올을 원하지 않는다. 도올다운 기자를 원한다!”

그리고 이날 밤 KBS 대선후보토론에 또다시 투여되었던 것이다. 너무도 재미없는 대화를 재미있게 전달하려고 애쓴 나의 고심을 독자들은 “감흥없는 허무개그”에서 읽었을 것이다. 이로써 입사3부작은 완성되었으나 도올기자초주(初週)의 절정은 목요일밤 국장초대 편집국술자리였다. 이니시에이션 세리머니!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긴장감을 못견뎌 나는 위스키를 두컵이나 꿀컥 들이키고 마이크를 잡았다. 취기에 내가 쏟아부은 한시간의 장광설은 단 두마디로 요약되는 것이다: 내 인생은 재즈(Life is Jazz). 기자의 생명은 스폰테네이어티(Spontaneity)! 국장님은 답사를 했다:“김선생님이 왜 KBS강의를 64회로 끝내셨을까요. 주역의 64번째 괘는 미제(未濟, 끝나지 않음)로 끝납니다. 이제 우리가 그 미제의 한을 풀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나는 수없이 건배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6시에 정확히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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