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은 진짜 개천절에 나라를 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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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은 진짜 개천절에 나라를 세웠나?
  • 저자: Jjw
  • 2014-10-04

개천절이 "민족의 명절"이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조선시대에도 삼성당이나 삼성사를 곳곳에 설치하고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지내긴 하였으나 특별히 무슨 날을 정해 두진 않았다. 개천절은 일제가 조선을 강탈하려는 야욕을 드러내던 1909년 무렵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하고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내세운 뒤에 기념되기 시작하였다. 대종교가 개천절을 10월로 잡은 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시간 관념을 빌린 것이다. 예로부터 음력 시월은 '상달'이라 불려 달들 가운데 위에 놓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서엔 어디에도 단군이 10월에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대종교가 내세운 단군세기는 아무리 따져보아도 대종교 형성 무렵에 만들어진 위서일 뿐이다. 종교적인 신념이나 교리로서 그리 믿는 것이야 종교인의 자유겠지만, 그것을 실제하였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개천절은 만들어진 신화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3세기 무렵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인데, 사료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삼국유사는 일단 연대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설화와 신화 중심의 기록이란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의 임금을 단군왕검이라 불렀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까지야 없지만, 그게 기원전 2333년 10월에 세워졌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매우 불확실한 추측일 뿐이다. 아래의 삼국유사 구절을 보자.

단군은 진짜 개천절에 나라를 세웠나-1.jpg

출처: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그림에서 붉은 밑줄을 친 부분이 단군의 건국 년도를 서술한 것이다.

"壇君王倹以唐髙即位五十年庚寅"


단군왕검이 당고(요임금의 다른 이름이다) 즉위 오십년 경인년에 나라를 세웠다.

몇 월에 즉위하였는 지 같은 말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보이는 푸른 밑줄을 친 일연 본인의 주석이다.

唐堯即位元年戊辰則五十年丁巳非庚寅也疑其未實


당요즉위는 무진년으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실제를 알기 어렵다

일연 본인도 간지(干支)가 맞지 않는 문제 때문에 자신이 인용한 기록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동국통감의 편찬자들은 단군조선에서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하면서 단군조선의 건국연도를 계산하였다. 이것이 서기로 환산하면 기원전 2333년이 된다. 하지만, 편찬자들 스스로도 일연과 마찬가지로 간지가 맞지 않음을 들어 의문이 있다는 주석을 달았다. 물론 몇 월에 건국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시 일제 강점기로 돌아가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족주의 강화를 위해 개천절을 기념하기로 결의하면서 대종교의 것을 따라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았다. 개천철은 해방이후 양력 10월 3일로 바뀌어 계속해서 기념되고 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개천절은 일종의 국가 신화인 것이다. 민족국가의 성립기에 국가적 신화를 강조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는 일이니까,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것을 역사의 명백한 사실이라고 교과서에 기입하는 것은 분명 재고되어야 한다.

날짜야 그렇다 치고...

흔히 자신들만이 이 민족을 생각하는 열혈 우국지사인 것 마냥 포장하는 자칭 재야사학, 타칭 환빠의 가장 큰 문제는 종합적인 판단 없이 사료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 취사 선택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유리한 것은 어떤 것이든 좋은 사료요 불리한 것은 다 왜곡이고 조작이라는 태도로 역사를 다루면 차라리 그냥 판타지 소설을 실제로 믿고 살면 된다. 위서임이 명백한 환단고기나 규원사화니 화랑세기니 같은 서적들을 숭배하는 것은 일종의 유사 종교일 뿐이다. 여기서 이들의 주장을 일일이 다시 들추고 싶지는 않다. 다만 고대사 일반에 대한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적어둔다.

주의사항 1. 칭제 칭왕은 그 때 그 때 다를 수 있다.

고대 이래 근대 이전까지 중국이 스스로를 중화, 중원, 천조국으로 칭한 이래 중국 주변의 국가들은 중국의 정세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맞추어야 했다. 힘이 세지면 묵돌 선우 처럼 중국의 태후에게 "나도 독신이고 그대도 독신이니 우리 한 번 잘해 보자"하고 편지를 보낼 수 있지만, 힘이 약하다면 별수없이 신하를 자처하고 번국(番國)으로서 중국의 황제를 받들 수 밖에 없었다. 이게 아리까리 하면 위만조선의 경우처럼 전쟁이 나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 되었다는 걸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한나라 이후 중국은 주변국을 직접 점령하거나 명예직으로 태수로 임명하는 등 관계를 정리해 왔는데, 그렇다고 그 지역을 직접 통치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베트남의 선조격인 교주(交州)는 오랫동안 중국의 군현으로 취급당해왔지만 실재로는 독립적인 세습 태수가 통치하는 기간이 훨신 더 길었다. 따라서 한사군, 특히 낙랑의 경우도 낙랑군이라거나 낙랑국이라거나 하는 칭호 때문에 두 나라가 아예 다른 나라라고 우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평양 지역에서 출토된 수 많은 고고학적 증거를 눈 앞에 두고도 딴소리를 하는 경우를 보면 안스럽기 그지없다. 처음엔 한의 군현으로 출발했다 하더라도 전한 이후 한나라가 동이를 신경 쓸 겨를 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고 이들 한군현이 독자적인 국가로 바뀌는 건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주의사항 2. 단일민족의 환상을 버려야 한다.

우선 우리 사회는 매우 특이한 민족관을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민족이란 문화, 언어, 국가 이외에도 "혈연"적으로 묶인 집단이란 생각을 은연중에 갖는다. 사실 민족주의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는 문화, 언어, 정치체제의 동일화가 진행되더라도 "단군의 자손"과 같은 생각은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다. 대부분은 워낙에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하나의 국가 속에 묶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혈연을 굳이 강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 북부와 남부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지만 근대 이후 하나의 '국가'로서 통합되기 위해 강력한 어문정책을 사실상 강요했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어서 지금의 중국정부가 관화를 강조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중화민족주의를 강화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꼭 "단군의 자손"이어야 하는 걸까?

고조선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므로 예나 지금이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문화가 한 가닥 있을 것이고, 훗날 여진으로 이어질 말갈 문화가 있을 것이고, 이웃한 흉노, 선비 등도 별개의 문화를 가졌을 것이다. 이들이 서로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므로 당연히 문화와 언어 그리고 혼인 관계가 오갔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북부인들의 남하로 삼한 지역 사람들도 이러한 혼혈 관계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논란이 좀 있기는 하지만 부여계통의 언어와 신라계통의 언어는 단어 등을 보았을 때 방언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고려 조선 시대 까지도 다른 문화의 사람이 들어 오는 일은 종종 있던 일이었고, 이를 특별하다거나 이상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대종교와 그 영향을 받은 임시정부가 단군의 자손, 배달민족을 내세운 건, 필요에 의한 것이었기는 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사실은 아니다. 이 역시 국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의사항 3. 대제국을 꿈꾸지 마라.

고조선의 강역 자체를 놓고 본다면 우선 처음 시작할 때 그 넓은 강역을 차지했다는 거 자체가 상식 이하이다. 고조선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시점에서 한 참 후인 은나라 시절의 중국을 생각해 보면 명목상 주군인 은나라의 실제 강역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조선 역시 단 한번도 그 넓은 강역을 직접 통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조선이 멸망하게 된 한-조선 전쟁을 생각해 본다면 주변 군소 국가들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누가 그들의 상전인가를 겨룬 전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1990년대 이후 연구를 보면 고조선은 점차 동쪽으로 밀려나며 나라의 강역 자체가 이동하는 국가였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내 생각엔 큰 무리는 없는 주장이라고 본다.

환빠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대제국에 대한 환상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들의 대제국 환상은 뒤집어 놓은 대동아공영권일 뿐이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멘스라는 식의 팽창적 민족주의는 매우 위험하다. 우리의 상황 때문에 이들의 환상이 실현될 일은 거의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는 역사가 필요하다.

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기록과 유물 유적이 완비될 때 종합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경우엔 기록도 불완전하고 유물 유적의 연관관계도 확실치 못하며 결정적으로 그들이 살았던 당시에 실재로 무슨 일들이 있었는 지 알 수 있는 것이 극히 드물다. 그 수많은 고인돌과 선돌, 그와 함께 발견된 유물들의 주인들은 주변의 세력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었고 읍성 안에서는 어찌 살았을 것인지에 대해 아직까지 속시원한 답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아는 게 없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야 전문가도 늘 글의 첫머리를 '확실치는 않으나'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공백을 판타지로 채워넣으려고 하지는 말자.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서 여백을 확인하는 것이 진실에 접근하는 길이 될 것이다.

뱀발: 나라가 작으면 어떤가? 세계사 어디에 나라가 작아서 못났다고 하는 역사가 있나? 하여간...

2 같이 보기[ | ]

3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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