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또역시 33화 (백년의 백년전쟁) 통일대박! 그리고 복수혈전(feat.대조영)

1 개요[ | ]

(역사학팟캐스트)다시또역시
다시또역시 33화 [백년의_백년전쟁] 통일대박! 그리고 복수혈전(feat.대조영)
  • 고대사 전공자인 백년선생이 삼국통일 전후시기를 서술하고, 진행자 및 패널 (금강경 등) 이 질문하는 식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됨. 백년의 사견도 같이 이야기됨.
  • 2016년 11월 21일 업로드 (팟빵기준)
  • http://www.podbbang.com/ch/11600?e=22137098 : 팟빵 에피소드 링크

2 00:24[ | ]

  • 7세기 동아시아는 어디로
  • 백년선생 (고대사 전공자)

3 당시 국제정사와 삼국의 정세판단은?[ | ]

  • 당시 국제정사와 삼국의 정세판단은?


  • 중국은 수의 전쟁, 수의 멸망, 이후 당
  • 당고조 이연은 주변(오랑캐)과 우호적
  • 정관연간에는 오랑캐를 치는 정책
  • 몽골고원의 우두머리였던 돌궐의 힐리카간이 잡힘.
  • 오아시스 교역로로 635년(아마도; 주 : 위키백과에는 630년으로 나옴) 동돌궐을 격파.
  • 634-5년 토욕혼(영어: Tuyuhun, 한자: 吐谷渾)), 또는 토고콘 격파. 감숙성 사이 활처럼 생긴 나라.
  • 토번(티벳)은 크기전 이었음.
  • 장안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압한 것. 북쪽의 돌궐, 서쪽의 토요콘을 제압. 투르판지역의(돈황의 약간서쪽) 투르판분지의 우르무치일대, 현재의 신장 감숙성 사이의 고창(Karakhoja, 가오창)이라는 나라를 640년 경 멸망.
  • 남는 것은 동쪽의 고구려로 시선을 돌리는 상황
  • 7세기의 포인트. 삼국통일의 발화점이 된 630-40년에 초점을 두어 말함.


  • 백제는 무왕치세. 무력을 잘 씀. 신라 서변을 공략. 많은 성을 함락시킴.
  • 원래 섬진강 근처의 산맥을 못 넘어감. 남원지역을 잘 못 넘어감. 무왕은 남원너머 경북내륙 섬진강까지 넘어 공세를 펼침.
  • 이전까지는 한성지역의 고토수복의지는 있었다. 성왕의 죽음으로 촉발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무왕부터는 타겟을 서라벌(경주)로 잡고 물량공세.


  • 신라는 문제가 심각.
  • 진흥왕의 영역확장 이후가 중요함. 여러 후유증에 시달림. 땅이 두배가까이 늘어나고 경비도 2배 늘어나는 것임. 하지만 세금을 두배 늘릴 수는 없음.
  • 기록에는 없으나 추론할 수 있음. (백년) 경비에 구멍이 뚫리는 것임.
  • 고구려도 평원왕 시기부터 남하. 한강유역을 뺐지는 못하지만 강원도 쪽으로는 많이 남하함.
  • 급히 먹은 밥은 채하게 마련.


  • 정리하면 (이전까지의 백년선생의 서술을 금강경이 정리)
  • 당나라는 당태종 이후 팽창정책. 북쪽-서쪽을 먼저 정리. 동쪽이 남고 고구려를 공략할 때 즈음.
  • 백제 무왕은 신라를 공격, 신라는 진흥왕 팽창의 후유증을 겪던 선덕여왕 연간. 고구려는 남쪽으로 공략하던 상황이었음. 신라가 두드려 맞고 있던 상황.


  • 일본은 열도가 통일된 상황.
  • 도쿄 북쪽의 에미시(주: 에조, 에미시蝦夷, 에비스, 에조). 큐슈 남쪽의 하야토(주: 하야토隼人). 를 제외한 야마토의 열도 통일.
  • 야마토 왕권이 설립. 거대한 귀족세력의 권한이 강함. 귀족연합체같은 성격인가? 오야붕이다.
  • 소가씨(蘇我氏) 세력 (또는 소하씨). 백제와 친밀한 관계. 귀족세력. 일본 불교수용의 주체.
  • 천황은 불교에 호의적이지 않았음. 100년전 이야기이고, 6세기 중엽 소가씨가 몰락.
  • 왜왕중심 체제. 다이카(大化)개신 646년. 신정부는 백제일변도 노선을 바뀌 다양화를 꾀함.


  • 확실히 변동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 남북조시대부터 4세기부터 7세기 초까지는 큰 틀의 변화가 없었음.
  • 백제가 한강을 뺐기는 것도 사건이지만, 한반도에 국한된 이야기.
  • 동이지역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전체가 흔들리는 사건은 없었던 셈.


  • 이 지역의 변화조짐은 7세기 중엽까지의 시기
  • 가장 큰 변화의 계기는 당태종의 팽창정책.
  • 여기까지가 국제정세.

4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의 삼국의 정세판단은?[ | ]

  •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의 삼국의 정세판단은?
  • 신라는 교과서 서술에 따르면 당과 연합. 고구려는 계속 싸우는 중. 백제는 잘 모르겠는데... 왜왕의 외교변화. 백제의 선택이 필요. 신라와는 다투는 중.
  • 기점이 되는 사건은 642년 의자왕의 즉위. 삼국 내에서의 큰 사건. 의자왕의 집권 후 3년상 기간에 신라를 기습. 성 40개를 함락. 대야성(大耶城)까지 함락.
    • 샛길 : 성주 김품석는 개차반, 쓰레기. 외도하는 등. 성안 민심이 이반됨.
  • 낙동강 서쪽의 대부분이 백제로 넘어감.
  • 김유신은 경산에 주로 주둔. 경산과 경주는 멀지 않음. 위기가 코앞에 닥침.
  • 김춘추는 고구려에 가서 도움을 요청.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정권을 막 잡은 상태. 대야성함락과 연개소문 쿠데타가 같은 해.
  • 연개소문은 고구려 고토를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여 협상 결렬하고 김춘추는 귀환.
  • 당시에도 한강은 중요했나?
  • 모두에게 중요하지만, 각국에게 중요한 정도가 달랐다 (백년).
  • 신라에게 한강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대중교역로라는 의미를 비롯하여.
  • 김춘추는 당에 사신을 보냄. 당태종은 미온적으로 반응. 빈손으로 돌아오지만, 당은 거절한 것은 아니고, 무리한 제안을 했던 것.
  • 당태종은 단독으로 고구려에 진격. 644년- 645년. 우리가 잘 아는 안시성 싸움 등.
  • 백제도 중국에 줄을 대려 함. 수나라 때에도 백제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
  • 당이 고구려를 칠 때. 신라는 3만정도의 군사로 후방지원. 백제는 이 틈을 타 신라의 성을 차지함.
  • 당의 입장에서는 백제가 신뢰가 안 가고, 신라에게 마음에 돌아섬.
  • 이후 당태종 사후 당고종 즉위(주 : 649년)후 소모전. 1만, 2만씩 소규모 병력을 보내면서 고구려 국력을 소진시킴. 고구려 내부는 연개소문 독재정권 강화.
  • 고구려의 외교적 선택은 백제와 손을 잡으려 했던 것 같지만, 의견이 분분. 여제동맹을 회의적으로 보는 설도 있음. 어쨌든 고구려와 백제가 같이 움직이려고는 했음.
  • (백년의견) 땅이 닿아있지 않기 때문에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어려움. 신라와의 동맹이 더 나았을 것임.
  • 연남생은 9살짜리 소위직위. 30살에 장군에 오르는 등. 연씨일가의 전횡.
  • 백제는 김유신과 일진일퇴상황. 신라가 수세였음. 신라 여왕이 백제가 큰나라라고 언급.
  • 김유신 전승은 공세보다는 수비전이 대부분.
  • 의자왕은 권력이 강대해짐.
  • (백년) 최고지도자 권력이 강할 때 나라가 잘 되는가? 연개소문 의자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중.
  • 신라는 왜에 사신을 보냈으나, 잘 안 됨.
  • 소가씨 몰락 이후 왜가 다변화 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알고, 백제는 왜에 우호적으로 대응.
  • 백제가 왜에 수세적인 때에는 이유가 있다.
  • 백제-왜-고구려 연합이 구성.
  • 648년 신라가 당에 사신(김춘추가 직접)으로 감. 이세민이 반갑게 맞이.


  • 금강경 선생의 정리
  • 신라 : 백제가 자꾸 때려요. 도와주세요. 고구려/당/일본에 도움을 요청.
  • 백제 : 당과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하지만, 신라만 조지겠다. 신라와 당이 가까워진 이후에는 당과의 관계를 끊어버림.
  • 고구려 : 백제와 손을 잡으려. 신라는 싫고, 고립되면 안 되니 마지못해 백제와.
  • 왜 : 백제말고 딴 줄을 잡으려지만, 옛정이 있고.
  • 거란 : (말갈은 덜하고) 몽골고원과 중국에 가까워서 고구려에 복속된 애들도 있었지만, 북쪽은 고구려와 당 사이를 이합집산.


  • 7세기 국제정세 어떻게 정리될까
  • 고구려-백제-왜 연합. 당-신라 연합. 십자가형태. 돌궐로 교과서에 나오지만 설연타였음을 백년선생이 언급. (어쨌다는거야?)
  • 640년대 50년대를 거치며 정리가 됨.
  • 나당은 백제를 먼저 치고. 고구려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

5 지난시간 논의와 합쳐. 백제통합인가 삼국통일인가?[ | ]

  • 지난시간 논의와 합쳐.
  • 백제통합인가 삼국통일인가?
  • 신라 중앙 조정이 통일의 구색을 맞추려 함. 구서당(주 : 신라 통일 후 마련한 중앙군사제도) 등을 보면 그렇다.. 당시 기준에서 통일이었는가? 그것근 아니지만 (백년), 구색은 맞추려 했다.
  • 오늘날 기준에서 통일인가는 생각해 봐야겠는데, 과연 이것이 통일일까? (백년은) 회의적인 입장.
  • 아니라면, 정복전쟁인가?
  • 평양성 공략시 신라가 주가 아닌가?
  • 평양성 공격시 신라가 보급을 하는데, 매우 중요. 신라나름대로 통일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전쟁을 수행하며, 삼한일통이라
  • 궁극적으로는 발해에서 고려로 넘어온 수가 20만 정도 됨. (처음에 200만으로 잘못 말함)
  • 발해인구에 대한 여러 설이 있음. 인구가 10여만호. 4-60만. 전성기의 수는 아님. 100만 이하.
  • (고구려계)발해인의 수는 적고 말갈이 많다. 20만이 온 것은 누적계로 상당히 많이 온 것임. 상당수는 거란으로 끌려갔으나 200만이 누적된 것은 . 고려인구의 10퍼센트 되는 수치 20-30만.
  • 지금으로 치면 한 도의 인구.
  • 고려의 발해인이 넘어온 부터가 통일이지 않을까.
  • 현대적 관점에서 , 역사교육의 입장에서 통일이란 이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 현대의 관점이고, 당대에도 통일이란 인식이 있었던 건가,
  • 영국 웨섹스왕국 중심으로 7왕국의 통합. 이후 에는 잉글랜드 왕국으로 나옴. 이런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웨섹스 중심으로 통일되었지만 앵글로 색슨으로의 정체성.


  • 통일이라는 용어에 의문.
  • 통일은 근대 이후의 용어. 당대에는 일통. 통일은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해석이 있다고 생각.
  • 하나여야 한다는 자의식의 표현.
  • 너무 현대적인 관점 아닌가? 통일엔 두가지 용법. 하나는 지역의 통일. 두번째는 하나였던 왕조가 분열되었다가 다시 합쳐지는 것.
  • 고조선부터 있었던 것이 삼국으로 쪼개졌다가 신라가 통일했다는 식의 인식을 비판하는 것은 맞지만.
  • 지역적으로 합쳐진다는 의미는 있다.
  • 현대에는 전자의 용어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 통합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수도 (백년)
  • 정복은 어떤가?
  • 병합/합병/정복은 우열을 나누는 것이어서 문제가 있는 듯.
  • 신라정통이라는 마인드?
  • 지역적 개념. 반도안에서 남부 일대를 통괄한다는 개념. 백제 고구려고 꼬봉으로 들어왔다는 인식이 있다면, 통일보다는 통합이 어울리지 않나.


  • 통일이 어떤 주체적 역량을 강조하는 것도 고려가 통일을 했다고 했을 때 불편한 의견은 고려가 한게 없지 않은가. 역사에서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발해유민의 유입도 간단치 않은 사건. 계획한 통일만 신성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백안시하는 것은 문제가.


  • 나당연합을 할 때부터 신라가 고구려백제를 통합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시작했나 아니면 백제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당나라의 도움이 통일까지 이어진 것인지.
  • 노태돈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선생이 가장 저명한데, 애초에 신라의 의지는 없다고 보는 듯. 642년부터 676년까지 신라는 전쟁이 없던 해가 없었으므로, 점차적으로 의지가 생겼다고 봄.


  • 백제 병합전쟁이 더 맞다고 생각.
  • 싸우며 정들었다기 보다는 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 상대를 멸망시켜야 겠다. 신라는 백제 성왕을 죽이고, 백제는 신라 실력자를 죽임으로서 둘 중 하나가 망해야 하는
  • 신라로서 백제는 땅을 다 먹으려는 목적이었고, 고구려는 멸망만 시키려 했다. 고대에 정복이 불가한 주변세력을, 멸망만 시키는 것도 한 방법.


  • 신라의 686년 당시 경계선은 임진강을 크게 안 벗어남. 7세기 말 효소왕 당시 임진강을 넘어 예성강. 예성강을 넘어 황해도로 가는 것은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 733년 성덕왕때 발해가 성장하면서, 영토 관리가 힘들어짐. 월경지( 국가에 속하지만, 본토와 떨어진 섬같은 곳). 발해가 압록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평안도가 떨어진 땅이 됨. 지배가 어려워 평안도를 신라에 할양해 줌.
  • 처음엔 신라가 올라가지 않음. 경덕왕때가 되어서야 올라감.
  • 올라간다는 의미는?
  • 지배한다는. 군현지배는 아니고. 특수행정지역으로 진을 설치하여 지배. 토호들을 설득. (고구려계 토호) 영토적으로 고구려 영토를 확보하는 상황.
  • 이것과 별개로 정신승리적 삼한일통은 7세기에 이미 이루어짐.
  • 태종무열왕의 업적에 대해 당에서는 태종이란 이름을 싫어하고, 이에 대한 신라의 논리가 삼한일통한 왕이다.
  • 한쪽은 멸망시키고, 다른 하나는 영토적으로까지 병합했을 때. 당시 살았던 백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을 테니 정치적인 프로파간다가 아니었을까. (금강경)


  • 일통의 의식이 있었지만. 능력은 없어서 임진강에 머물렀지만. "해냈다"는 프로파간다라는 것인가.
  • 평양성 함락에 큰공을 세웠으니 했다고 인정하자.


  • 나당전쟁 때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감 고구려군과 연합하여.
  • 안승을 제후로 봉해주고.
  • 우산국 탐라에게 조공을 받고. 탐라는 백제의 속국이었음.
  • 나름 이 세계를 정리했다고 생각할 수 있음.
  • 고구려 보장왕의 지친 및 엘리트가 오니 사실상 통일이다. 안승이 온 게 참 좋죠.


  • 고구려의 통일을 바라는 대중들의 마음. 영토상실에 대한 실망. 고토회복에 대한 열망. 대중은 신라와 당이 짬짜미를 해서 소중한 고구려를 망하게 했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데.
  • 교과서에서도 드러남. 고구려의 멸망이 안타깝게 그려짐.

6 01:05[ | ]

  • 고구려는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까? 의지는 있었을까? 연개소문/남생 등의 문제.
  •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
  • 의지가 없다는 것은 (백년생각) 한반도 중남부의 성들은 매우 작고. 요동쪽은 매우 큼. 오골성(烏骨城)은 한변 둘레가 10킬로미터가 넘는다. 한양성곽 둘레가 15킬로.
  • 안시성이 중형급. 한변둘레가 2킬로. 남한지역의 성은 2킬로미터급 성이 거의 없을 것임. 둘레 1킬로면 매우 큰 것.
  • 보루정도 급의 성. 안에 10명이 있는 곳도 있음. 관심이 떨어지는 지역일 수 있음.
  •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금강경)
  • 조선시대 중앙집권화된 한양성곽이 18킬로 정도인데, 당시 1500년 전에 수도도 아니고 변방, 거점지역이 너무 크지 않은가 관리가 가능한가.
  • 계엄적인 분위기. 요동지역은 분절적인 것. 40만 제곱미터정도 전성기 영역. 현재 독일보다 큼. 고구려 문화도 집안, 평양이 완전히 다름.
  • 독일도 연방이고. 프랑스도 북/남프랑스가 다른데. 고구려도 지역마다 다르게 통치한 것 아니었을까?
  • 남한 한강 중상류 통치는 무관심한 듯 한 모습.
  • 다른곳과 균일하게 지배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다른 근거를 찾으려함.
  • 백제신라가야 합치면 고구려 인구의 1/3을 넘는다. 고구려 주력은 대중국전선에 투입됨. 3천~만명. 기록상 5만 군사를 모을 수 있음.
  • 남쪽으로 5만이 가면 서쪽은 어떻게.
  • 광개토왕 때 전병력 긁어서, 내려간 것 아닌가?
  • 5만 내려갔지만, 실병력이 5만이었는지는 의문. 쳐들어온 일본군 수가 만을 넘기 힘듬. 고구려가 당시 후연에 털림. 700리 땅을 빼앗기고 타격을 입음.
  • 광개토왕이 이후 후연과 대립. 이런 양면전선을 가지고 있어서 한계.
  • 요동에 대한 관심과 남한에 대한 관심이 다르다.
  • 당과 관계가 무마되고 남쪽에관심을 가졌다고 해도, 만주에 있었던 많은 정복왕조처럼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건가.
  • 금의 경우도 장성을 넘는 것은 우연한 계기. 아골타도 만주 통일로 끝내려 했으나. 송의 요청으로 장성을 넘어가고. 이후 운이 터지지만, 고생도함


  • 넓은 영토에 대한 환상.
  • 각 지방마다 문화가 다르고 광활한 영토 통치에 대한 역량도 필요할 것인데.
  • 고구려 주력은 서북한 평안황해요동. 당의 지배가 거기까지. 그 너머 발해가 존재.
  • 발해의 국력은 고구려에 딸리는 것이 사실. 주요 집산지를 빼앗김. 고구려 멸망 후 당이 20만정도 끌고 감.
  • 고구려 인구에 대해 설이 있지만 약 100만 _200만이하. 이중에서 20만 끌고감.

7 01:15[ | ]

  • 이후 이야기를 더 해보자. 7세기 중반 이후. 660년 백제 부흥운동.
  • 7세기말 698년 발해가 건국.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을...


  • 백제멸망후. 이어 고구려가 8년 뒤 멸망.


  • 질문하나. 계백은 어떤사람? 설이 많던데. 황산벌은 계백을 위대하게. 계백이 이끌었던 군대규모등을 봤을 때 하급무장이 잘 방어해서.
  • (백년생각) 공수특전단 사령관 정도이지 않을까. 계백의 직위는 달솔로 두번째로 높은 계급. 좌평이 장관. 달솔이 차관이니 2스타정도는 됨. 김유신은 보급대.


  • 고구려 망하기 직전에 신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냄. 당에서 신라까지 공격할 것 같다. 신라와 일본이 동맹을 맺음. 일본도 당을 막기 위해.
  • 나당전쟁이 발생.
  • 나당전쟁이 멈추게 된 이유는 , 당시 종전이란 인식을 없었음. 전쟁중반기 이후 토번이 강성해짐. 토번은 티벳. 티벳세력이 커져서 활약하게 되는 것이 흑치상지, 설인귀 등.
  • 정예군이 토번으로가고, 2군 말갈 거란등이 신라로.
  • 신라의 승리로 평화. 당과의 관계복원은 7세기 말-8세기 초
  • 북쪽상황은 고구려 멸망하며 20만명이 끌려갔고, 부흥운동이 일어나지만 부흥운동지역이 고구려의 중심지이고. 실패함. 당도 인구가 희박한 지역까지 지배력이 미치지 않음.
  • 발해지역 등이 무주공산. 지역적으로 . 만주의 농한에서 5시방향선을 그으면, 말갈친구들이 많음. 중국으로 끌려간 애들 중에 대조영 , 아버지 걸걸중상, 속말말갈(粟末靺鞨)계 고구려인으로 봄.
  • 대조영은 말갈이지만 고구려로 귀화하였으니 상투 틀었을 것이다. 발해건국후 귀족 중 말갈계가 하나정도 밖에 없음. 자신은 말갈계였으나 고구려화.
  • 30년 정도 있다가 탈출. 돌궐 제2제국(682년?)이 다시 부흥. 묵철가한. 몽골고원 제패. 이 여파로. 요서에 반란이 일어나고, 거란족이 이진충(李盡忠, 거란추장)을 중심으로 당과 대립. 혼란속에 대조영이 무리를 이끌고
  • 대조영은 왜?
  • 고구려 아이덴티티가 있었던 것 같다.
  • 돌궐 제1제국을 일으키는 친구도 17명이 광야로 나가서 170명이 되고 1700이 되고 17000이 되어 나라를 다시 세우고 맞서싸우리라.
  • 대조영도 기록은 없지만, 그랬을 것. 수많은 유민들이 같이 함. 고구려계말갈계 고구려유민.
  • 구석으로 가서 안전한 무주공산에서 나라를 세움.
  • 돌궐이 계속 세력이 커져서 발해를 동방의 우호적인 세력이 필요해짐. 당이 발해군왕으로 인정함. (원래 이름은 대진)
  • 대조영은 돌궐과도 적당히 우호관계. 주변세력을 규합.
  • 고구려인 아이덴티티가 강했는데, 왜 국명은 발해인가? (금강경)
  • 발해 명칭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 요동산동 사이의 보하이(발해)
  • 8세기 일본문서의 호칭은 자신을 고려국왕으로 자칭.
  • 당시 발해가 내부적으로 사용했던 용어가 발해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음.
  • 그렇다면, 학계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나? (금강경) / 의문은 가지고 있다.
  • 그렇다면 교과서에선 왜 발해인가? / 구분을 위해서. 왕조줌심이지만 왕가중심은 아님.
  • 조선도 유럽식으로 4개 정도의 왕가. 명종까지, 선조광해, 인조-철종, 고종
  • 서양식으로는 고구려 제1왕조, 제2왕조 발해, 제3왕조가 고려가 아닐까 (백년생각)
  • 동양은 왕조가 변화를 많이 담는 특성이. 있음.
  • 9세기 선왕(宣王) (해동성국). 이후 발해가 8세기 고려의 후신이라는 발해와 정체성이 같을까? 선왕은 상경천도. (주 : 맞나, 성왕이 천도했다는) 발해 원래 수도는 중경/동경. 상경이 나라 가운데 있음. 발해가 선왕 시기 북으로 뻗어나가며 말갈을 다수흡수. 상경은 말갈지역. 고구려땅이었던 적이 없음.
  • 갑자기 북쪽으로 천도. 의도/비의도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 물론 반론도 있음. 기존 귀족들은 유지되는 등.
  • 이 때에는 고구려가 약해지고 발해라는 인식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 그럼에도 발해는 고구려인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사람들이 왕위를 이었고. 고구려계 귀족들도 이어졌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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