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바 칸시온 이야기

배윤경

1 # 칠레 누에바깐시온의 세 거물 그룹들 by 배윤경의 월드뮤직[ | ]

1.1 # Inti Illimani(이이마니산의 태양) / Quilapayun(수염 기른 세 남자) / Illapu(천둥)[ | ]

세 그룹의 음악적 뿌리는 누에바 깐시온이었기 때문에 초창기엔 정치적 운동가요와 안데스 민요를 기반으로 출발했다. 그룹의 공통된 특징은 보컬앙상블의 완벽에 가까운 조화로, 교회 칸타타를 차용하고 전통악기의 합주방식을 통해 세밀하고 정교한 하모니를 연출한다. 또한 야라비와 같이 구슬프고 느린 박자에서부터 와이뇨나 까르나발리또 같은 빠르고 활기찬 박자들은 마치 플라멩코에서 듣는 패턴과 유사하다. 이러한 극단적 대비를 통한 연주방식은 선주민 인디오 역사의 민족적 자존심과 스페인 식민지의 경험을 잊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고, 동시에 인생의 오묘하고 복잡다단한 여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73년 9월 쿠데타와 이어진 군부의 억압으로 칠레 내에서의 음악활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룹들은 저마다 고국을 떠나 대부분 유럽에서 활약하면서 안데스 음악을 서구에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 무대에서의 활동을 계기로 이들의 음악적 지향과 방식은 차이를 나타내는데, 인띠 이이마니와 낄라빠윤이 중미의 손(son), 볼레로(bolero), 밀롱가(milonga) 리듬의 일반 가요까지 음악적 지평을 넓히다 89년 군정종식과 함께 70년대 중반까지의 전통적 연주방식인 폴크로레와 뛰어난 보컬 하모니의 조화는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 두 그룹의 높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여타 장르의 그룹과 마찬가지로 초중반기까지의 앨범들이다. 이와 달리 야뿌는 초지일관 폴크로레를 중심으로 연주했기 때문에 초반기의 거친 연주에서 점차 중창과 기악의 하모니를 정교하게 연출해갔다. 즉, 인띠 이이마니와 낄라빠윤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점이다. 어쩌면 이들의 정치적 메시지는 우리에게 우선순위가 아닐지 모른다. 대게 노래 가사를 알지 못하고 듣는 현실 속에서 감상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음악적 부분이기 때문에 낄라빠윤과 인띠 이이마니의 80년대 앨범을 두고 아트록이나 프로그레시브로 다루기도 하는데 체계적인 정보제공이 아쉬운 부분이다. 상대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페루와 볼리비아의 폴크로레의 원형이 알려진다면 야뿌의 진가가 돋보일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의미를 알고 듣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1.2 # [Inti-Illimani], 이이마니산의 태양에서 해안가 별장의 식어 버린 낙조가 된 그룹[ | ]

1967년 5월 호르헤 꼬울론(Jorge Coulon), 오라시오 두란( Horacio Duran), 뻬드로 야네스(Pedro Yanez), 막스 베루(Max Berru) 등 네 명의 칠레국립공과대(Universidad Technica de Estado) 대학생들이 께추아어로 '이이마니山의 태양'이란 뜻의 인띠 이이마니를 결성하였다. 낄라빠윤과 마찬가지로 비올레따가 일궈놓은 누에바 깐시온의 개간지에서 더욱 민중적이고 정치적인 성향의 노래를 만든다. 그 작업은 대게 빅또르 하라와 앙헬 빠라 같은 새로운 노래운동의 일꾼들과 함께하였다.

(Venceremos, 작곡: 세르히오 오르테가(Sergio Ortega), 작사: 끌라우디오 이뚜라(Claudio Iturra))

1960년대 남미의 정치적 격동기에 칠레에서 인민 연합이 승리를 얻을 때까지 민중의 지탱이 된 노래. 아옌데(Salvador Allende)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붕괴한 뒤에도 피노체트 정권에 저항하는 상징적인 노래였다. 1973년 9월 11일 마침내 쿠데타가 일어나 아옌데 대통령은 살해되고 피노체트가 정권을 찬탈한다. 빅토르 하라(Victor Jara, 1935-1973)는 군부에 의해 구속되고 산티아고 시내의 스타디움에 수용되었다. 그곳에서 보낸 이틀간 그는 인민 연합의 테마곡인 이 노래를 기타를 치며 동료들을 계속 격려했고 기타를 빼앗겼으나 손장단을 치며 계속 노래했다. 그 때문에 군인에 의해 양손이 총의 개머리판으로 깨뜨려졌으나, 그에 굴복하지 않고 역사의 진실과 민중의 승리를 외쳤기 때문에 얼굴이 뭉개지고 결국은 비운의 총탄을 맞고 절명했다.

Desde el hondo crisol de la patria
se levanta el clamor popular,
ya se anuncia la nueva alborada,
todo Chile comienza a cantar.
Recordando al soldado valiente
cuyo ejemplo lo hiciera inmortal,
enfrentemos primero a la muerte,
traicionar a la patria jamas.
Venceremos, venceremos,
mil cadenas habra que romper,
venceremos, venceremos,
la miseria (al fascismo) sabremos vencer.
Campesinos, soldados, mineros,
la mujer de la patria tambien,
estudiantes, empleados y obreros,
cumpliremos con nuestro deber.
Sembraremos las tierras de gloria,
socialista sera el porvenir,
todos juntos haremos la historia,
a cumplir, a cumplir, a cumplir.
조국의 깊은 시련으로부터
민중의 외침이 일어나네
이미 새로운 여명이 밝아와
모든 칠레가 노래 부르기 시작하네
불멸케 하는 모범을 보여준
한 용맹한 군인을 기억하며
우리는 죽음에 맞서
결코 조국을 저버리지 않으리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파시즘의 비극을 이겨내리라
농부들, 군인들, 광부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여성과
학생, 노동자들이여
우리는 반드시 이룩할 것이다
영광의 땅에 씨를 뿌리자
사회주의의 미래가 열린다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1973년 칠레에서 134회 공연에 이어 7월 첫번째 유럽 순회공연에 나섰다. 같은 해 9월, 이탈리아에서 공연도중 조국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 발발로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로마에 정착한다. 8월 발표한 앨범로 이탈리아에서 백만장 이상 판매를 기록하고, 꾸준한 해외 순회공연으로 누에바 깐시온의 전령사가 되었다. 는 그간의 역량이 결집된 앨범으로 인민연합 찬가 'Venceremos', 비올레따의 노래 'Rin del angelito(아기 천사 린)', 'Simón Bolívar(볼리바르 장군)' 등 세 곡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연주곡으로 채워져있고, 폴크로레에 충실하면서 선배 음악인 비올레따 빠라와 빅또르 하라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밀라노에서 녹음한 앨범 와 도 <비바 칠레>에 이어 누에바 깐시온의 연장선 위에서 불렀으며, 음악적으로 큰 변화없이 이들의 연주역량을 재확인시켜주는 앨범으로 전통적인 폴크로레 그룹임을 알 수 있다. 1975년 이탈리아에서 플래티넘을 기록한 는 대부분의 곡이 삼바(zamba) 스타일로, 유려하고 서정적인 곡들로 구성돼있다. 1980년 3월에 비올레따 빠라의 노래 13곡을 리메이크한 로 스웨덴에서 골드레코드 기록한다. 1981년 가 이탈리아에서 골드레코드를 기록한다. 이 시기부터 연주 세계가 넓어지는데, 과거 연주와 보컬 하모니보다 중남미 전반의 노래에 주력하고 스타일면에서도 아르헨티나쪽의 밀롱가, 스페인의 전형적인 기타 연주곡 등이 첨가되기 시작하며 방향이 클래식쪽으로 흘러간다. 이전 폴크로레 스타일에서 실내악적 앙상블로 변모하는 과정의 앨범, 마지막 곡으로 수록된 'Tonada y Banda'는 기악곡과 다름없다.
1982년 1월 빠뜨리시오 만스(Patricio Manns)와 제작. 칠레 국경지역인 따끄나 페루(Tacna-Peru)에서 공연.
베네수엘라 출신의 플루티스트 호르헤 발(Jorge Ball)을 영입하여 7인조 체제를 갖추었다.
1983년 칠레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에우헤네 요나 Eugene Llona, 1992년까지 그룹의 매니저)와 공동작업, 독일에서 발매.
3월 마르셀로 꼬울론과 호세 세베스가 칠레 산띠아고 공항에 입국하려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5월 홀리 니어(Holly Near)와 미국 투어, 이 실황을 앨범 으로 제작, 영국 BBC에서 두번째로 연주곡 위주의 앨범 출시
7월 호르헤 발(Jorge Ball) 탈퇴, 레나또 프레이강(Renato Freyggang)영입.
1985년 2월 기존 민속악기 외에 색소폰과 드럼이 추가된 녹음, 3월~5월 빠뜨리시오 만스와 제작, 7월 12년만에 고국 칠레로 귀국.
존 윌리암스(John Williams), 빠꼬 뻬냐(Paco Peña)와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에서 공연.
1987년 3월~8월 존 윌리암스?빠꼬 뻬냐와 클래식 기타 소품집 녹음, 소니(Sony)社와 계약.
1988년 9월 군부에 의해 강제추방된 이후 칠레 당국의 전면금지 당했던 이이마니의 전곡이 15년만에 해금되었다.
9월 18일 칠레에서 공연, 10월 5일 국민투표에서 독재타도를 위한 집회에 참가, 10월 아르헨티나의 멘도사에서 Amnistia 공연에 참여함
(이 공연에 Bruce Springsteen, Sting, Peter Gabriel, Tracy Chapman, Youssou´n´Dour 등 참여).
1989년 4월 칠레 전국 순회공연(Santiago, Valparaiso, La Serena, Talca, Concepcion, Valdivia , Punta 등), 11월 대통령 후보 파트리시오 아일윈(Patricio Aylwin)을 지지하였다.
1990년 1월 독일의 콜로니아 필하모니 극장(Teatro Philarmonie de Colonia)에서 존 윌리암스?빠꼬 뻬냐 와 함께 라이브 앨범 제작.
2월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 페스티벌에 참가, 이란 타이틀로 두번째 칠레 순회공연.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푸에르토 리코 등 6개국 70회 공연.
90년 이후 발표된 앨범은 폴크로레를 재탕하는 80년대 초반과 중반의 클래식적 변모, 90년대 이후엔 초기 긴장감 넘치는 화음은 온데 간데 없어진다.
1991년 3월 칠레의 그룹들과 함께 전국 순회공연, 4월 미국, 6~7월 이탈리아, 터키(이스탐불 페스티벌)에서 공연, 9월 브라질, 10월 일본(콘다 로타 페스티벌), 11월 이란 타이틀로 공연.
1992년 3월 미국 공연, 5월 아일랜드에서 첫 공연, 소수 인종 보호를 위한 기구와 엘 살바도르에서 첫 공연, 8~9월 이탈리아와 스페인 공연.
엑스포 세비야(Expo Sevilla ´92)에 칠레 정부의 문화사절단으로 참여,12월 존 윌리암스?빠꼬 뻬냐와 함께 칠레에서 로 단독 공연.
1993년 3월 에쿠아도르 공연. 발표, 이 앨범은 연주의 기교와 레퍼토리가 다양해져 음악적 성숙이라고 부를만도 하지만 초기의 창작력이나 신선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스페인 기타음악과 중남미 가요 그리고 칠레의 노래를 같이 감상하고 싶다면 참고할 정도는 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저항가수 미리암 마케바(Miriam Makeba)와 <Festival de Espal `93>에 참여, 7월 콜롬비아 공연.
중미 문화외교사절단으로 코스타 리카, 니카라과, 엘 살바도르, 과테말라에서 공연.
Peter Gabriel, Wynton Marsalis와 함께 산티아고 인권 엠네스티 페스티벌에서 공연, 10~12월 존 윌리암스?빠꼬 뻬나와 함께 오스레일리아 순회공연.
산티아고에서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공연과 워크샵 개최.
1994년 2월 미국, 5월 이탈리아?폴란드?네델란드, 6~7월 빠뜨리시오 만스와 꼰셉시온(Concepción)과 비냐(Viña)에서 공연, 8월 이탈리아, 10월 아르헨티나,11월 미국,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오페라 극장(Teatro Opera)에서 재공연, 12월 아르헨티나 루나 파크(Luna Park)에서 메르세데스 소사와 공연.
1995년 3월 레따노 프레이강 탈퇴, 페드로 비야그라(Pedro Villagra) 영입. 4월 산티아고 바께다노 극장(Teatro Baquedano)에서 공연.
에쿠아도르, 콜롬비아, 브라질 투어. 쿠바 출신 퍼커션 주자 에프렌 비에라(Efren Viera)영입, 8인조로 편성. 7월 팔레스타인 투어, 9월 텔레톤 극장(Teatro Teleton)에서 피트 시거(Pete Seeger)와 공연, 10월 런던의 로얄 페스티벌 홀(Royal Festival Hall)에서 존 윌리암스?빠꼬 뻬나와 함께 공연. 1996년 2월 그룹 결성 30주년을 맞아 비냐 델 마르(Viña del Mar) 페스티벌 에 초청돼 실비오 로드리게스(Silvio Rodriguez)와 처음으로 협연하였고 그룹 로스 뜨레스(Los Tres)와 연합공연. 3월 브라질 대통령 에두아르도 프레이(Eduardo Frei) 사절로 초청돼 브라질 가수 에두 로보(Edu Lobo)와 이따마라티(Itamaraty) 궁에서 공연. 6월이 플래티넘 기록, 하지만 기록적인 판매고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볼레로 스타일을 선보이며 인띠 이이마니의 독창적 앙상블은 전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즉 폴크로레와 결별한 아프로쿠반 스타일의 중미 가요앨범이며, 'EL Hacha'는 부에나 비스타 소시알 클럽도 부른 'Chan Chan'과 같은 곡이다. 이 정도면 이 앨범 색깔을 짐작할 수 있을 듯싶다. 마찬가지로 도 평범한 중미 볼레로 스타일 앨범이다. 8~9월 이탈리아?스웨덴?스위스?체코 등 순회공 1997년 2월 가 출시되자마자 플래티넘 기록, 7월 시카고 필하모닉과 신포니아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구성된 [Grant Park Symphony]와 협연, 9월 청소년 신포니아 오케스트라와 산티아고에서 협연. 베네주엘라와 일본 투어, 10~11월 미국? 캐나다 공연, 푸에르토리코 신포니아 오케스트라와 워싱턴의 케네디 센터(Kennedy Centrer)에서 협연.
1998년 2월 "Vuelvo al Sur(남쪽으로의 귀환)"이란 타이틀로 칠레 18개 도시 순회공연, 3월 다니엘 깐띠야나(Daniel Cantillana)영입, 4월 독일, 신포니아 오케스트라와 브라질(리우 데 자네이루? 상 파울루? 브라질리아?마나우스 등지)에서 협연, 8월 Petrer Gabriel? Emma Thompson과 런던 로얄 페스티벌홀에서 빅토르 하라 헌정 공연. 출반. 칠레 국립 스타디움(Estadio Nacional)에서 아엔데 전 대통령 헌정 공연. 앨범 <레하냐 Lejania(노정 路程)〉로 안데스 전통의 명맥을 이었다. 칠레,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를 포함하는 안데스 민속음악에 기초한 기악곡집으로, 삼포냐, 께나, 차랑고, 둘시머(dulcimer; 세모꼴 현이 달린 타악기의 일종. 피아노의 전신)나, 멕시코의 기따론(guitarron) 등 민속악기와 클라리넷, 색소폰, 기타 등 클래식 악기의 선율이 잘 어울리는 크로스오버이다
1999년 8월 시애틀에서 열린 WOMAD에 참가, 캐나다 밴쿠버 심포니와 협연, 에드몬튼(Edmonton) 포크 페스티벌 참가, 9월 빅토르 하라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에 특별 게스트로 멤버인 호세 세베스와 막스베루가 출연하였다.
2000년 4월30일 CUT(Central Unica de Trabajadores; 노동자 연합)의 기념일에 빅토르 하라를 위한 무대에 섰다. 이후 야뿌와 만났지만 지속적인 교류는 없었다. 8월 시카고 심포니와 협연하고 필라델피아, 텍사스, 보스톤에서 열린 포크 페스티벌에 참가, 9월칠레에서 열린 CISAC(Congreso Mundial de Autores; 세계작가회의) 2000에 참가....

칠레 출신으로 유럽과 미국 무대의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그룹임엔 틀림없다. 한국에서도 이들의 공연을 보고 싶지만 현재 너무 커져 버린 명성과 음악적 변화 때문에 폴크로레의 레퍼토리를 과연 제대로 재현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1.3 # 낄라빠윤Quilapayún, 중후반 매너리즘으로 절반만 성공한 그룹[ | ]

이 그룹에 대한 기억은 한 냅스터 사용자(red rebel이란 ID로 기억)와의 채팅 때문에 선명하다. 질문은 언제나 그렇듯 "넌 어떻게 그런 그룹을 아느냐?"로 시작해서 "너는 북한에 대해서도 잘 아느냐?", "나는 네가 낄라빠윤같은 칠레 공산주의 노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게 더 궁금하다..."등등 대강 이런 난처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가장 당혹스런 질문은 "너는 김일성을 좋아하냐?"였다. 낄라빠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다 난데없이 김일성에 대해 물어보는 그 친구의 의도를 생각해보다 "no"라고 답을 달았지만, 세계청년학생축전 따위를 고려해볼 때 사회주의권 국가들끼리 연대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지 못했음을 뒤늦게 반추할 수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음악에 접근한 적이 그동안 없었기 때문에 이었다. 그러나 한국어로도 제대로 답변을 못할 수준에서 엉성한 콩글리쉬로 궁색한 단어들을 나열했던 것보다 나 자신도 레드 콤플렉스에서 온존치 못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낄라빠윤에 대해 괜히 우회하면서 설명하거나 순수한 시선으로 그들을 대할 것을 요구할 필요도 없어진다. 인민연합의 선전음악단체로 소개하면 아주 쉽다. 다만 70년대까지만 그런 규정이 유효하지 70년대 후반부터 멕시코에서부터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일반적 가요, 즉 볼레로, 밀롱가, 삼바(zamba) 따위의 레퍼토리까지 손대면서 음악적 색깔의 많이 변한다. 참고로 피노체트가 화해의 제스처로 1988년 아옌데 전대통령의 장례식을 허용하면서 민중의 저항을 누그려뜨리려 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뚜렷한 정치적 이슈를 찾지 못하면서 낄라빠윤의 음악적 생산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마치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노래운동이 거의 자취를 감춘 것과 비슷하다. 그것이 시대의 변화든 인식의 변화든 창작의 열정은 다 때가 있나보다. 북한과 관련된 또 하나 떠오르는 일이 있다. 그건 남북정상회담 훨씬 전 북한 소식을 전하는 국내TV프로(MBC로 기억)에서 본 것이었다. 북한의 학생들이 기악합주를 하는데, 국악기와 서양악기를 같이 연주하는 장면이었다. 거기에서 사용되는 악기는 전통 국악기나 클래식에서 보는 서양악기가 아니었다. 가야금은 서서 연주할 수 있도록 선반 위에 올려놓고 12줄의 모양과는 달리 25줄의 개량가야금이었다. 거기다 아코디언, 색소폰, 리코더 같은 좀처럼 쓰이지 않는 악기를 두고 TV속의 진행자는 조악하고 어줍잖다며 약간 경멸스런 말꼬리를 달았다. 그러나 그 장면은 한국 음악의 월드뮤직으로서의 가능성을 담보할수 있는 요소가 들어있는 새삼스러움이었다. 전통적인 음악정신을 기반으로 일상생활과 밀착된 전자기타, 색소폰, 아코디언 등을 하나의 음악어법으로 차용한 그들의 수용방식은 결코 폄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건 음악이란 보편언어를 만들어가는 자연스런 현대의 크로스오버였다.

낄라빠윤은 1965년 세 명의 젊은 학생 훌리오 까라스꼬(Julio Carrasco), 에두아르도 까라스꼬(Eduardo Carrasco), 훌리오 눔와세르(Julio Numhauser), 빠뜨리시오 까스띠요(Patricio Castillo) 등이 모여 만든 새로운 노래를 표방한 그룹으로 탄생하였다. 낄라빠윤은 본격적인 활동은 볼리비아의 라우로 축제와 아르헨티나의 꼬스킨Cosquin 축제와 더불어 신인 가수와 연주자들의 등용문인 비냐 델 마르 Viña del Mar 국제 가요제를 통해 시작하였다. 바로 이 칠레의 민속축제에서 1회(1965년) 때 참가하여 우승컵을 거머쥐게 된다. 그룹명 낄라빠윤은 마뿌체어로 '세 마리의 새' 또는 '검은 수염 기른 세 남자' 란 뜻이다. 검은 수염과 검은 뽄초(poncho)를 걸친 스타일은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켰고 여러 아류 그룹을 탄생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룹 초기엔 멤버들의 음악지식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데뷔앨범은 비올레따의 아들 앙헬 빠라(Angel Parra)와의 협업으로 노래를 만들어나갔다. 이후 2집부터 빅토르 하라가 음악감독 격으로 참여하며 공동작업을 진행하였고, 음반은 1973년 9월 군부 연합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오데온(ODEON)레이블 을 통해 제작한다. 이 그룹은 멤버들은 모두 공산주의 청년회(Juventud Comunista) 출신으로 누에바 깐시온을 대표하는 세 그룹 가운데 가장 정치적인 메시지를 강조한 노래를 불렀다. 포클로레에 기초한 중창의 하모니 위에 남미 원주민 문화의 가치를 옹호하고 도시 노동계급의 문제, 민중의 투쟁사 등을 노랫말로 표출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의 저항 가요를 소개하는데 주력했고, 라틴 아메리카의 연대의식을 북돋는 노래들을 많이 불렀다. 이른바 안데스 음악(Andean Music)과 누에바 깐시온의 기수가 되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레파토리를 방대하고 다양한 중남미의 음악으로 넓히는 과정에서 음악적 긴장감은 지나치게 이완되었고, 80년대엔 칸타타나 오라토리오 스타일로 접근하면서 대중성은 크게 축소되어 신비적 성향마저 띄게 되었다.

1.4 # 살아있는 안데스의 정신, 야뿌[ | ]

우리가 원한다면
우린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고
새 날의 광명을 밝힐 수 있고
하늘을 열게 할 수도 있고
가슴을 울리는 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네

과연 야뿌가 칠레 그룹인지 음악을 들어보면 페루의 한 그룹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폴크로레의 해석과 다른 장르와의 음악적 융화를 가장 잘 하는 그룹니다. 페루의 정통 폴크로레 그룹이 놓치기 쉬운 팝적인 멜로디라인과 꾸에까에 한정된 리듬을 넘어 다양한 폴크로레의 리듬을 갖춘 것은 칠레의 여느 그룹보다 뛰어난 그룹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분이다. 인띠 이이마니가 태양, 유빵끼가 대지와 바람, 그룹 이름은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태양과 달 다음으로 숭배하는 세 번째 신 '천둥'을 의미한다. 야뿌는 1971년 칠레 북부의 안또파가스따(Antofagasta)에서 마르께스 부게뇨(Roberto Márquez Bugueño, Cristián Márquez Bugueño, José Miguel Márquez Bugueño) 형제들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1973년 첫 음반을 낸 이들은 북부 출신답게 다른 곳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안데스 민속음악을 산티아고뿐만 아니라 전국에 전파하는데 기여했다.
앞의 두 그룹이 70년대까지 폴크로레에 기초한 자기만의 음악과 민중의 호응과 응원을 기반으로 분명한 음악적 색채를 보여주다 80년대 이후 지나친 클래식적 실험과 관념적 음악세계에 빠졌다면, 야뿌는 비슷한 그룹 경력을 가지면서도 폴크로레의 뿌리를 깊게 박고 여러 시도를 한 음악인들이다. 그래서 야뿌의 전성기는 인띠와 낄라빠윤이 유럽적 색채로 흔들리고 있을 때의 80년대이다.
야뿌는 1971년 노동운동의 전통적 지역 칠레 북부의 카르나발과 축제를 통해 등장하였다. 1973년 9월 연합 쿠데타 당시 군부는 낄라빠윤에 대해 즉각 입국금지조치를 내렸고 인띠 이이마니마저 빨갱이 딱지를 붙여 칠레 국내의 음반유통 및 모든 공연활동을 금지시켜 버린다. 그러나 야뿌는 낄라빠윤처럼 정치적 메시지를 강조하거나 현실참여의 목소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깊이있는 인생의 철학적 가사와 자연과의 조화를 노래한 폴크로레 그룹이었던 탓에 군부의 정치적 탄압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쿠데타 이후 절멸된 누에바 깐시온의 자리를 메꿔야하는 커다란 역할이 주어졌고 민중의 지울 수 없는 생활양식인 폴크로레를 전승하는 야뿌의 인기 또한 높아갔다. 1978년 첫 해외공연지인 유럽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에 다시 전세계 순회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다. 하지만 이들이 여전히 비올레따의 노래를 부르고 군부독재로부터 신음하는 노동자, 농민, 쿠데타의 희생자들을 위해 활동을 멈추지 않자 군부는 1981년 야뿌에게마저 귀국 불가 조치를 내린다. 멕시코에서 불귀의 객으로 보내다 피노체트의 화해의 제스처 일환으로 마침내 1988년 그리던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90년대 이후엔 더욱 음악적 역량을 높여간다. 단 한번도 외도하지 않은 탓에 대중적 기반을 잃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평가들로부터도 최고의 인기그룹으로 평가받았다. 음악경력 30년의 야뿌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안데스 폴크로레를 근간으로 역동적이며 복잡한 하모니를 개발했고 삼뽀냐, 께나, 가스까야스, 꿀뜨룬, 등과 같은 전통 현악기와 퍼커션부터 전기기타, 색소폰, 플룻 등 30종 이상의 악기로 재즈, 팝, 록 등 대중적 요소의 수용과 결합으로 거듭 음악적 혁신을 이루어왔다. 노래가사는 네루다의 시로부터 바로 자신과 이웃의 세상 이야기, 즉 인간미가 넘치는 모든 것들을 노래했다. 아마 가장 전통적이면서 가장 현대적인 밴드라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 남미와 유럽 무대에서 꾸준히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으며,메르세데스 소사의 주선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유니세프 문화사절로 맹활약중이다. 개인적으로도 칠레에서 가장 우수한 그룹으로 소개하고 싶다. 안데스 전통음악의 뿌리인 폴크로레를 이해하고, 감상용 기악곡뿐만 아니라 폴크로레의 보컬하모니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생명력 넘치는 리듬과 연주를 보여주는 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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