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에 취하다

(녹색에취하다에서 넘어옴)

2002 10 12 土 : 녹색에 취하다[ | ]

어제밤부터 비가 오더니 오늘 아침까지 줄기차게 내렸다. 오늘은 그리니치에 가려했는데 이래서는 못간다싶어 아침을 먹고 계획을 수정했다. 낙첨된 곳은 과학 박물관과 우표 박물관. 일단 우표박물관 쪽으로 갔다.

Tep:PA120568.jpg
지나가다 들린 옛 성의 흔적

우표박물관이 있다는 곳까지 왔지만 찾을 수가 없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그저 모른단다. 그래서 가까운데 있는 런던 박물관에 갔다. 별로 볼게 없으니 그냥 나왔다. 계획을 잘 세우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함을 말해주는 사례라 하겠다. 여행가서 유적따위를 도는거 다 좋긴 한데 그게 니랑 무슨 상관이고 라고 한번만 물어보시라. 그럼 아마 갈 곳에서 2/3을 날아가버릴 것이다.

Tep:PA120569.jpg Tep:PA120570.jpg
옛날 마차. 그리고 런던을 표현했다는 모던 아트. 이런걸 자꾸 보여주니 우람이 자기는 일하다 안되면 모던아트를 하겠다는 말을 계속 하는 것이다. -_-

나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다. 런던 박물관이 있는 건물은 주상 복합으로 이루어진 얼토당토않은 건물이었는데 워낙 꼬여있었고 크기때문에 출구를 못찾았다. 우리는 10-20분은 족히 헤맨 뒤에야 간신히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건물은 Barbican이라는 전철역과 이어져있더라. 아 절대 가지말기를 권한다. -_-

Tep:PA120572.jpg
엄청나게 꼬인 주상복합건물. 이 건물은 하나의 블럭정도 크기다.

다행히 비도 그쳐 우리는 그리니치로 향했다. 정말 변덕맞은 날씨라 아니할 수 없다. 그나마 내가 갔던 시기는 날이 상당히 좋은 시즌이라고 하네. 확실히 비는 별로 안왔다. 운없이 눈물젖은스카이섬에 갔을 때 비가 와서 그렇지.
그리니치에 내리니 점심때가 되어 언제나처럼 샌드위치와 잡동사니 요기거리를 사갔는데 샐러드를 팔면서 포크를 안주네 그려. 당황해서 우리는 어떻게 포크를 얻을까 고심했다. 장터같은게 열려 어묵요리 비슷한 테이크 아웃 음식을 하나 사먹고 포크를 얻었다.
그리니치 공원으로 와서 염소젖과 함께 샐러드를 먹었는데 뭐 괜찮다. 역시 유제품은 좋다니깐. 또 비가 질질 내리는 바람에 우리는 잽싸게 천문대로 올라갔다. 천문대에는 별로 볼만한 건 없었고 남들처럼 경도 0도 선에서 사진을 찍었다.

Tep:PA120573.jpg Tep:PA120574.jpg
자오선 기준점에서. 오른쪽 사진에는 서울까지 127도만큼 가면 된다고 써있다.

화이트헤드가 이성의기능에서 적어놨던데 과학과 기술이 처음으로 행복하게 결합했던 것이 바로 이 그리니치에서였다고 한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영국이 대항해시대에 고도의 천문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설치한 것이었으며 여기서 연구한 순수과학들은 곧바로 항해사들이 써먹었고 결국 스페인이나 다른 나라들을 가볍게 누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Tep:PA120575.jpg Tep:PA120576.jpg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바라본 그리니치 공원. 오른쪽 뒤의 건물은 해군 박물관.

그리니치 공원은 너무 이쁘다. 쭉 뻗은길, 주위의 나무들, 넓게 펼쳐진 잔디밭, 수령 100-200년은 가뿐히 되어보이는 고목들, 뛰어노는 개, 다람쥐. 유럽에서 정말 눈물나게 부러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녹지일 것이다. 삶의 질 같은 것은 이런데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Tep:PA120580.jpg Tep:PA120582.jpg
Tep:PA120588.jpg Tep:PA120585.jpg
Tep:PA120589.jpg Tep:PA120590.jpg

오늘은 기분이 계속 좋은데 그것은 아마도 비가 온 직후라 공기가 무척 알싸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공기를 가르는 바람이 내 뺨을 스칠때 그 쾌감이란 정말 잊기 힘든 생쾌함이다.
가로수길에 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데 가끔 퉁, 퉁 하는 소리가 난다. 이것은 밤이 떨어져서 차위를 두들기는 소리다. 그만큼 밤이 많다. 하지만 여기 밤은 맛이 없어서 아무도 안먹는다는구만.

Tep:PA120578.jpg Tep:PA120587.jpg
밤이 떨어져 소리를 내던 그 거리. 또 나온 우람. 그리고 널부러진 밤들

Tep:PA120579.jpg
애기들이 진짜 잔디에서 축구를 하고있다. 이러니 베컴이 나오지.

나는 이따가 공연을 보기로 했고 우람은 해군박물관에 간다고 갔다. 공원을 혼자 걷는 것도 좋은 기분이다.
이 글을 적고 있는데 갑자기 개 한마리가 나에게 덤벼든다. 이 놈은 아까 잠깐 봤던 놈인데 영 촐랑대더구먼. 여튼 이녀석은 나에게 달려들어 내 일기장에 마구 발자국을 찍어놓았다.
가는 길에 커티샥이 보였다.

Tep:PA120593.jpg
요거이 커티샥.

Tep:PA120591.jpg
세상의 첫번째 시계가게. 경도 0도 0분 24초에 위치. 애교있는 가게다.

Tep:PA120592.jpg
린킨 파크와 슬립낫이 친구사이인줄은 아직 몰랐는데 :)

공연장 가는 길은 종점까지 가야 했기에 자버렸는데 정말 종점까지 잤다. 흠 서울에서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구만. 앞에있던 사람이 깨워주어 일어날 수 있었다. -_-a
사실 나는 잠 하나는 죽여주게 자는 스타일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물론 잘 잤지만 긴장을 했는지 자다 일어나 화장실 가는 일이 많았고 가끔은 잠이 빨리 들지 않기도 했다. 신병훈련소에 갔을때도 처음에 그랬었는데 비슷하다. 피로가 누적되는 것도 그렇고 기간도 비슷한 것이 훈련소 갔을때와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훈련소에서는 아침에 텐트가 안쳐졌었는데 여기서는 문제없이 쳐졌다는 점이다 :)

식사를 해야하는데 마땅히 먹을만한 것도 없어서 버거킹을 먹었다. 아 이동네는 패스트푸드가 너무 비싸다.
트랜스 암TransAm의 공연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우경군과 함께 갔다. 오프닝은 코인 옵Coin Op이라는 친구들이 했는데 실력이 비리비리한 것이 얼마 못가 밴드를 해체할 것 같다. 그래서 사진도 안찍었다.

Tep:PA120596.jpg Tep:PA120599.jpg
정말 열심히 연주했던 트랜스 암. 드러머가 노래까지.

반면 메인 공연인 트랜스 암은 역시 이름값을 해준다. 이 밴드는 토터즈Tortoise, 스테레오 랩StereoLab과 더불어 포스트 락의 가장 중요한 밴드 중 하나이다. 일단 곡들의 파워도 훌륭했지만 멤버들이 각자 멀티플레이어들이었기 때문에 포지션을 마음대로 바꾸어가며 연주를 했다. 이 밴드는 드러머가 리더인듯한데 시작할 때부터 웃통을 벗고 하더니 그 옷차림에 걸맞을만큼 격렬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드러머가 찬익이형과 닮았다.

Tep:PA120600.jpg Tep:PA120602.jpg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여 나에게 오라는 듯한 눈초리를 하던 키보드주자 Philip Manley 그리고 묵묵했지만 꽤 진지하게 인상써가며 연주하던 베이스 Nathan Means

앵콜곡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드러머를 검지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이런 행위는 주목도가 매우 높기때문에 그는 나를 보았다. 그가 나를 보자 나는 재빨리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었고 그는 고맙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름대로 찬사를 보낸 것이고 그는 그것에 답례를 한 것이다. 이런 교감들이야말로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들이 아닌가 싶다.

Tep:PA120604.jpg
눈에 불을켜고 연주하는 드러머 Sebastian Thomson

막판에 왠 녀석이 맥주를 뿌리는 바람에 다 뒤집어썼다. 머리 탈색되게 생겼다...-_-


그저유럽일뿐 <= 녹색에 취하다 => 본토침공

거북이유럽서부여행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