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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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Norwegian Wood
ノルウェイの森
노르웨이의 숲, (번역서 제목) 상실의 시대

 

   

2 책소개 (알라딘)[ | ]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거듭난 무라카미 하루키를 대표하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이던 주인공 ‘나(와타나베)’를 중심으로, 절친한 친구 기즈키와 그의 여자친구 나오코와의 삼각관계로 시작된다.

나오코와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던 기즈키가, 돌연 자살을 하게 되자, ‘나’는 나오코와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 두 사람은 심신이 하나로 녹아든, 황홀하고 감미로운 첫날밤을 보낸다. 그후 돌연 나오코는 실종, 한참 후 그녀가 깊은 산중 정신 요양원에 입원중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나오코와 떨어져 고민하던 ‘나’ 앞에, 나오코의 내성적인 성격과는 정반대인 풋풋한 젊은 매력과 적극적인 행동파인 미도리가 나타나,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져, 파격적인 러브 스토리가 전개된다.

죽음과 자살과 이별, 꿈과 이념, 우정과 사랑, 그런 모든 젊은 날에 차례차례 빚어지고 사라지는, 감격적인 환희와 슬픈 ‘상실’의 아픔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엇갈리는 가운데, 언제나 깨어나면 ‘나는 혼자’라는 고독을 깨닫게 되는, 누구나 겪게 되는 ‘젊은 시절의 나날’이란 테마가 부각되어 있다.

3 # 임은숙(그레이)[ | ]

NORWEGIAN WOOD written by John Lennon

I once had a girl, or shoud I say She once had me.
She showed me her room, isn't it good?
Norwegian Wood She asked me to stay and she told meto sit anywhere.
so I looked around and Inoticed there wasn't a chair.
I sat on a rug biding my time, drinking her wine.
We talked until two, and then she said, It's time for bed.
she told me she worked in the morning and to laugh, I told her I didn't and crawled off to sleep inthe bath.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Norwerian Wood

노르웨이의 숲

예전에 나는 한 여자를 가졌었지 아니 그녀가 나를 가졌었다고 할 수도 있고 그녀는 내게 그녀의 방을 구경시켜 줬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그녀는 나에게 머물다 가길 권했고 어디 좀 앉으라고 말했어,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의자 하나 없었지.
양탄자 위에앉아 내 시계를 흘끔거리고 그녀의 와인을 홀짝이며 우리는 밤 두시까지 이야기했어.
이윽고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잠잘 시간이잖아.
그녀는 아침이면 흥분된다고 말했어 그리곤 깔깔거리며 웃었지, 나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곤 욕실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어.
눈을 떴을 때, 난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 거야, 난 벽난로 불을 지폈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20세기를 마감하며 집계한 온갖 음악차트에서 대부분 최고로 뽑힌 밴드 비틀즈 그들의 음악은 물론 말할 것도 없지만 가사 까지도 거의 한편의 시의 경지에 올라있는것 같아요 isn't it good?
멋지지 않냐고 묻는 가사가 마치 그의 노래에 대해 묻는것 같군요........
이 노래 노르웨이의 숲의 가사는 게다가 굉장히 cool 하게 느껴져요 ......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네요 러버소울(lover이 아닙니다. 고무입니다.)과 함께 꼭 들어보고 싶은 노래인데요 아직 기회가 없었네요 노르웨이의 숲이나 러버소울을 듣고 싶은 이유는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이죠 비틀즈의 노래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은 하루키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고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죠 한때 이작품을 표절했다고 몇몇 국내 작가들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구요 실제 저도 이 노르웨이의 숲을 첨 읽게 된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고 난 후였어요

고베에서 도쿄의 시시한 사립대학에 입학한 와타나베 그러니까 10대의 말기를 통과하는 중입니다.
우연히 17살에 자살한 고등학교 시절 유일한 친구인 기즈키의 여자친구인 나오코를 우연히 만나게 된 와타나베는 매주 일요일 나오코를 만나 마냥 거리를 걷게 되고 서서히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오코의20살 생일 비오는 날 그녀의 방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나오코를 안게되지만 그녀는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한참 후에야 나오코가 산골의 요양원에 있다는 걸 알게되죠 학교에서 와타나베는 또 다른 여자아이 미도리를 알게되는데 미도리를 만나고 나오코를 면회가고 미도리에게 마음이 쏠리지만 나오코를 향한 마음도 접지 못하는 와타나베 그러나 나오코는 요양원에서 자살을 하게되죠........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와타나베가 10대를 지나 20대가 되면서 두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40대가 된 와타나베가 어느 외국 공항에서자신의 20대를 회상하는 이야기 입니다.
와타나베의 20대가 두 여자아이로 나타나는 거죠 이를테면 나오코는 10대 사춘기라면 미도리는 20대의 시작을 의미할까요?
자신의 반쪽이었던 기즈키가 자살해 버리자 모든걸 잃어버린 나오코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와타나베는 세상관는 무관한 듯 심드렁하게 살지만 (전공투로 대표되는 일본의 그 치열했던 70년대) 나오코로 상징되는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시절은 꽤나 혼란스런 시기이었을 것이다.
도식적으로 미도리를 20대로 표현한다면 미도리는 연약한 나오코와는 달리 생기발랄한 계집아이이다. 여로모로 나오코와 반대지점에 서있는 미도리는 꽤나 강인해 보이지만 사실 여기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와타나베가 아닐까 싶다.
하루키 자신의 자전적 인물인 듯 보이는 와타나베는 학생운동에서 속하지 않고 언제나 하루키의 화두가 되는 고도 소비사회에 휩쓸리지도 않고 그저 쿨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 기즈키의 자살이 와타나베의 십대시절의 끝이라면 나오코의 자살이 20대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되고 나오코와 함께 지냈던 40대의 레이코와의 섹스로 그는 마침내 자신의 10대를 마감하고 어른으로 이동해 가며 마지막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애타게 미도리를 부른다.

아이가 아무리 어른이 되기 싫어도 언제가 어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는 그때 그 시절이란 언제나 좋았다고 하지만 과연 그 때의 우리는 행복했을까?
한 친구가 자기는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절대 돌아가기 싫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 누구나 예전엔 좋았다고 생각하고 추억이란 언제나 아름답지만 추억이란 포장을 한꺼풀 벗기고 보면 그속엔 너무나 혼란스럽고 힘겨웠던 통과제의라고 불리는 시절이 들어있는 것이다.

아름다웠지만 잔인했던 그 방황들이 너무 잘 녹아있는 이 소설은 그래서 언제나 나를 사로잡아요 여러 훌륭한 성장소설 성장영화들이 있지만 이 노르웨이의 숲은 그 시절의 공기들을 너무나 잘 실어보내 주죠 20대 초반에 만난 노르웨이의 숲으로 20대 내내 하루끼에게 사로잡혀 살아왔어요 번역된 모든 소설들을 찾아 읽고 언제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흔들리지 않는 듯 보이는 주인공들이 하지만 늘 혼란에 휩싸이게 되는 하루끼의 세계를 모두 이해할 순 없지만 이노르웨이의 숲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책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첨 본 판본은 노르웨이의 숲으로 나온 판이지만 이 소설은 상실의 시대란 번역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죠 하루끼동에선 여러 번역들 중 어느 번역이 더 좋냐 갑론을박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전 상실의 시대란 너무 빤한 신파조의 제목보단 원제 노르웨이의 숲이 훨씬 좋네요 왠지 나오코의 생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오코와 섹스를 나눈 그 포그한 비오는밤 의 약간 서글픔이 느껴져요 그런데 노르웨이는 추운나라죠?

4 # 자일리톨[ | ]

최근에 짬이 나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고 있다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하루키를 좋아했다. 그의 소설 중에 처음으로 접했던 것이 상실의 시대였고, 그때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던 듯하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동아리에는 나보다 4살 위의 매력적인 선배누나가 있었는데, 그가 내게 권해주었던 소설이 바로 ‘상실의 시대’였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이 책을 권했던 그도 다소간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만큼 하루키소설의 문체와 분위기는 젊은 층에게 강렬하게 다가올 이유가 충분했다. 그 후로 하루키의 소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의 소설은 여름날 밤 원샷으로 읽는 게 제 맛인 까닭에, 대학교 1학년의 여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밤에는 그의 책을 읽었고, 낮에는 커튼을 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은 하루키의 소설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태엽감는 새, 댄스댄스댄스, 하루키 단편선 등등

그의 소설에는 항상 허무함이라는 냄새가 깊게 배어있다. 그의 소설 한켠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찾아냈던 기억이 있을만큼 그의 소설에서는 항상 죽음과 허무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인간은 그가 겪었던 시공간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 마련인지라, 6-70년대 일본의 전공투는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전공투는 미일안보조약문제가 발단이 되어 6-70년대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구었으나, 너무나 어이없는 한편의 드라마로 끝나버린 극단적인 방식의 일본 학생운동으로 68년 세계혁명의 일부이기도 했다. 당시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생이었던 하루키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이 때문에 늦깍이로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내 전공투세대의 위치다. 유럽의 68혁명세대가 정치, 교육, 문화계에 대거 진출하여 극단적인 냉전대립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개량하는, 체제내의 새로운 목소리이자 활력으로 작용한데 반해, 일본의 전공투세대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를 추종하던 戰前세대와 풍요로운 물질적 성장을 기반으로 한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들인 신인류세대 사이에 끼여 제도권에 발을 붙일 수 없이 떠도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2차대전과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부재,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맹종은 결과적으로 80년대의 일본을 극단적인 우경화의 길로 들어서게끔 만들었다. 하루키의 경험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모습 앞에 그는 한없는 상실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그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나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나라에 번역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기묘하지만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생시절 친구인 기즈키의 죽음 이후, 세상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혼자서 수업을 듣고, 혼자서 식사를 하고, 어디서건 혼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등 그는 무인도에 떨어뜨려 놓아도 혼자서 능히 살아갈 수 있을 법한 自足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와타나베가 그리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미도리에게 “봄날의 곰만큼 네가 좋아”라는 기상천외한 고백을 할 줄 알며, 주변의 매혹적인 사람들(레이코여사, 하쓰미, 나가사와 등)을 자신에게 끌어당길 수 있을만큼의 매력을 지녔다. 그가 혼자인 이유는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은 생명체이고, 생명체에게 죽음이란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신념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을만큼 절대적인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無인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정해진 만큼의 시간을 허가받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 젊은 시절, 신념의 좌절과 허무함을 맛보았던 그였기에, 인간의 본질에 대해 천착했고, 결국 그는 “죽음앞에 선 인간”이라는 무오류의 명제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허무함에 빠진 주인공의 생존의 증거는 욕망이다. 정확히 말하면 섹스(!)에 대한 욕망. 중간중간에 섹스장면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서술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하루키의 다른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주인공의 페니스를 가리키며 당신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의 결말부분, 레이코 여사와의 포만감이 깃든 몇 번의 섹스 이후, 와타나베는 빗속의 공중전화에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미도리는 어디냐고 계속해서 묻지만,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못한 채 흐느낄 뿐이다. 난 이 장면에서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너무나 기뻤다. 사랑과 애정이 깃든 섹스를 통해, 와타나베는 비로소 자신이 궁극적인 無가 아니라, 욕망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고, 자신의 둘레에 쳐둔 벽을 허물고 능동적인 소통을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러나 예전만큼은 아니다. 내 건방진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난 하루키가 동시대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주제의식)는, 상실의 시대 이후 더 나아간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저 소설의 플롯과 등장인물들을 약간 변형시키고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시킨 것 밖에는 없지 않나 싶다. 오히려 과장된 그의 기교가 독자들로 하여금 주제를 읽어내는데 더 난해함을 던져주고 있지 않은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씨는 어느 글에서 “이성이 사라지면 소녀 취향만 남는다”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고 썼다. 나는 위의 경구와 하루키를 동시에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어제 친구가 “해변의 카프카”를 빌려주기로 했다. 그 책 속에서 하루키의 더 나은 생각의 단편들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 자일리톨 2004-5-1 9:39 am

5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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