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널한동네

2002 10 18 金 : 널널한 동네[ | ]

아침에 일어나서 아저씨의 브리핑을 들었다. 왠지 어딘가 갈 곳이 많아보인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지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알함브라 궁전에서의 아픔을 달래주려나 싶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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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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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랄다 탑

먼저 들어간 세비야 대성당은 정말 크다. 세계에서 세번째 가는 규모라는데 그럴만도 하겠다 싶다. 옆에 있는 히랄다 탑은 아랍풍의 하단과 카톨릭 풍의 상단을 가지고 있어 유명하다. 원래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인데 나중에 이슬람 세력을 �아낸 다음에도 모두 부수고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을 살려두고 그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 관용성인지 게으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흔치 않은 역사적 경험일것이다. 하긴 이슬람 애들이 깔고앉아있던 기간이 400년이나 되는데 그것들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은 안좋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흠 카톨릭도 나름대로 원리적인 면이 있었을텐데 정말 그런 관용성을 발휘한 것일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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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를 연상시키는 무데하르 양식

이 성당의 스타일을 보면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가우디다. 가우디가 이것저것 덕지덕지 붙여가며 만든 스타일은 바로 이 무데하르 양식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과 카톨릭이 결합해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기존 기독교의 직선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가우디는 부서진 타일 조각을 사용하길 즐겼는데 이 타일도 스페인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해오던 인테리어(?) 스타일이다. 가우디는 멀쩡한 것을 부수어 사용하지 않고 부서진 타일 조각들을 맞추어 사용하곤 했다고 한다. 이렇게 이슬람의 흔적과 스페인 전통 산업 그리고 또 뭔가 까딸루냐적인 요소가 함께 녹아들어 승화된 것이 가우디인 것이다. 가우디는 불세출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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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erere mei, Deus, secundum magnam misericordiam tuam"
주여, 당신의 선함을 인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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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성당 벽에 이런 악마가 묘사되어있다. 이 녀석은 유독 거시기가 돌출되어있다. 설마 이것이 단지 지옥을 묘사하고 싶어서 한 것일까? 정말 이런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점심을 조금 넉넉하게 먹었다. 10E짜리인 뭔가 코스 비스무리한 것인데 글쎄 별로 소화가 잘 될거 같지는 않다. 이 코스 중에 와인이 하나 있었다. 레몬과 조금 뒤섞인 빨간 것이었는데 마시고나니 꼴에 알콜이라고 졸립다. 이 것이 샹그리라라는 것은 조금 뒤에 알았다. 결국 공원에 가서 한 3-40분 잤다. 자고나니 엄지손가락이 가렵다. 뭔가가 물었나보다.
이 공원 오지게 지저분하다. 여기는 마차가 대로 한가운데를 지나다닐 정도로 마차가 많은데 운송수단으로 쓰기보다는 관광객을 태우고 돌아다니는가보다. 좌회전 신호가 떨어졌을 때 마차가 앞에 있으면 터덜터덜 가느라 신호 다 잡아먹더라. 여튼 말들이 이렇게 많은 덕분에 말똥과 말오줌이 시내 어딜 가도 있다. 개똥도 눈에 거슬리는데 말똥이야 오죽하겠는가. 특히 이 공원 근처는 아주 절정이라서 스페인의 느슨함을 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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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나무들~

박물관 두개가 붙어있어서 갔는데 하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나머지 하나는 고고학 박물관인거 같은데 유료다. 여튼 왔으니 구경이나 하자 하고 들어갔는데 와 정말 정리라고는 쥐털만큼도 해놓지 않았다. 대단하다. 대충 보니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나온 각종 고고학과 고생물학적 유물들, 그리고 아랍과 로마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거 같긴 한데 정말 시골 티가 팍팍 난다. 영어로 설명이 안되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유물의 연대 추정도 안되어있다. 런던에서 본 박물관들과는 레벨이 다르다. 조금만 정리하고 공부해도 이정도까지는 아닐거 같은데 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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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지게 나른하다. 그 나른함도 찍혔을까?

스페인 광장으로 왔다. 스페인은 어딜가나 광장 하나에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같다. 심지어 다른 나라를 식민지 삼았을 때도 거기다 스페인 광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튼 이 스페인 광장도 멀리서 보면 뭔가 있어보이지만 조금만 가까이 가면 오리똥 비둘기똥에 말똥을 먹고있는 참새들, 다 떨어진 타일과 벽돌들, 어떤 것은 물을 뽐고 어떤 것은 안뿜는 분수, 새로 그린듯한 조잡한 그림들 하며 아주 가관이다. 작렬하는 햇빛 아래 마차들만 어슬렁대는 아주 나른한 분위기다. 아 이런 나른함 싫다. 이러니 이 사람들이 낮잠을 즐기지 않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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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광장. 코를 막고있는 모습이 포인트다.

아마 이런 곳도 성수기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박터질게다. 조금 어이가 없다. 지금도 저 건너편에는 아줌마 관광객들이 있는데 들려오는 익숙한 말을 보아 한국 아줌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람의 말에 의하면 한국 아줌마들의 외양은 꽤 특징적이라고 한다. 차양만 있는 모자, 특색없는 시장통 아줌마 복장, 조금 탁한 원색의 옷들 등등으로 판단이 가능하다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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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줌마들. 어쩌다가 세비야처럼 사람들 잘 안오는 동네까지 온걸까.

아 여기서 정말 처절한 장면을 보았다. 왠 기타리스트가 뛰어다니면서 기타를 치고있었다. 어라 왜저러나 했는데 알고보니 마차를 따라 기타를 치면서 돈을 좀 달라고 하는 것이다. 안주면 도로 원위치까지 와서 다음 마차를 기다린다. 고작 1분도 안되는 단편영화지만 나는 정말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저런 것이 인생이구나. C'est la Vie.

황금의 탑인가로 갔다. 여기는 콜럼버스가 사용한 지도가 있다고 하는데 있는지 없는지 알게뭐냐. 있어봐야 나에겐 아무 의미도 없다. 이 인간들은 콜럼버스 시대 이후로 세계사에서 반짝한 일이 없어서 그런지 그 당시를 항상 띄우곤 한다. 물론 이 황금의 탑도 별로 볼품은 없다. 아랍식 밋밋한 탑인데 정말 심심하다. 아랍의 탑들은 다 비슷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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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것이 황금의 탑. 그것보다는 혼자 노저으면서 강을 지나가는 저 녀석이 겁나 부러웠다.

결국 세비야에서도 상처받은 우리는 플라멩코를 보러갔다. 골목 구석에 짱박혀있어 꽤 찾기 힘들었지만 잘 찾아서 티켓을 끊고 밥을 먹으러 나왔다. 먹을만한 밥집이 안보여 빵집에서 케익 두조각 사서 먹었는데 뭐 맛있더라.
플라멩코 공연은 좋았다. 구성이 어떤가 하면 노래하며 박자맞추는 아줌마, 충추는 언니 그리고 기타치는 뺀질이 이렇게 트리오다. 판소리로 비유하자면 춤추는 언니와 뺀질이 기타리스트가 창 하는 사람에 가깝고 아줌마가 고수쯤 되겠다. 분위기를 보니 춤추는 언니가 나이먹으면 노래하는 아줌마로 변신하는 듯 하다. 아줌마의 노래는 하하 정말 적응 안된다. 민박집 아저씨는 이것이 진짜 좋은거라고 말하셨지만 글쎄 난 좀 빼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춤추는 언니는 키도 크고 몸매가 아주 쫙 빠진 처자였는데 춤도 정말 잘 추더라. 어떻게 추냐하면 팔을 올렸다 돌렸다 하면서 몸을 두세번 꼬아주다가 시동을 걸면서 구두로 '또바바바바바박' 소리를 한번 굴러주고 다시 몸을 꼬는 뭐 그런 것의 연속이다. 생각해보면 꽤 단순하다. 하지만 발 구르기 자체가 묘기대행진 수준인데다가 미인이 앞에서 춤을 추니 아무래도 눈이 간다. 그리고 이 춤은 그 자체가 상당히 에로틱한데 몸을 비비 꼬을 때는 시선이 팔과 몸으로 가서 조금 편안해지다가 자연스럽게 손으로 치마를 들어 맨 다리를 내보여주고 발을 구르기 때문에 시선이 다리로 많이 가는, 즉 눈으로 쓰윽 쓰윽 훑을 수 밖에 없게끔 유도하는 춤인 것이다. 그냥 구르는 것도 진짜 힘들것 같은데 그 와중에 박자를 두개로 쪼개가면서 구르는 것을 보면 정말 탄성이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박자를 쪼개는 것은 동일하게 반복되는 패턴이 주는 지루함을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 락음악이나 메틀에서도 박자를 쪼개는 것은 그런 효과가 있다. 그리고 기타리스트 녀석 역시 기타치다가 종종 발을 구르는데 아줌마가 구르는 것과 엇갈리게 굴러서 역시 박자를 쪼개주는 경우가 있다. 즉 적당히 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 의도된 동작들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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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에 방해될까봐 플래쉬를 쓰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렇게 나왔다. 아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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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막판. 플래쉬를 써서 찍은것.

스페인이 정열의 나라 운운하는 말을 듣게 된 것은 아마도 이 나라가 너무도 느슨한 나라이기 때문일거다. 날도 덥고 크게 먹을 걱정도 없고 하니 평상시에는 느슨하게 지내다가 가끔 한방을 터뜨리는 것이다. 지금은 축구와 축제가 그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아저씨 표현을 빌자면

아 스페인은 아주 날씨도 좋고 땅도 기름져. 그리고 태풍같은 것도 다 피레네 산맥이 막아주는 천혜의 땅이여. 그런데도 땅들 놀고있는거 봤지? 한국애들 풀어놓으면 그거 금방 다 옥토돼. 애들이 게으르니까 올리브나 심고 노는거지.

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 트럼펫 소리를 들었다. 아 이게 야밤에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그거 내년 축제를 대비해 연습하는 거라고 한다. 축제 끝난지 고작 두달밖에 안되었는데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축제와 휴가를 기다리며 탱자탱자 논다. 스페인 광장에서 느낀 느슨함이 스페인의 이런 정서를 반영한 것일까?

모 항공사에서 왔다는 다른 투숙객 아저씨들과 함께 나가서 포도주 한잔 마시고 들어와 뻗었다. 안주가 너무 느끼했어...-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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