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과 늙음

1 나이듦과 늙음[ | ]

새해에 48, 29, 36살 되는 친구들이 말했다. “내 나이가 끔찍해(징그러워, 무서워…).” 그들은 자기 나이로부터 상처받고 있다. 나도 그렇다. 최근 나에게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정체성은 여성이라기보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다. 영화 <죽어도 좋아> 검열 논란 당시, 나는 주변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분개했었다(젊은 사람의 섹스는 ‘아름답고’, 나이 든 사람의 섹스는 ‘변태’인가). 일상과 역사를 대립시키며 가두에서 20대를 보낸 나는, 서른이 넘으면서부터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사느냐’보다 더욱 ‘본질적인’ 살벌한 인생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나이 듦. 지나고 보니, 20대는 성별, 계급을 초월하여 그 자체로 기득 계급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폭력, 성차별, 인종주의, 연령주의(ageism)는 모두 인간의 몸에 대한 위계적인 해석의 결과다. 몸은 ‘구별 짓기’를 통해 인간을 계층화시키는 물리적 공간이 되고 있다. 성별과 나이에 따른 차별과 혐오의 시선은, 몸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문제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너무도 쉽게 가해자로 동참시킨다.

한국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다. 지식인, 여성 지식인, 게이 지식인이란 말은 있지만, 노인 지식인이란 말은 없다. 지식인이나 정치인, 재벌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고 불리지 않으며, 그들도 스스로를 노인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민에게만 노인의 칭호를 붙인다. 이것은 나이 듦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여성은 늙지만 남성은 나이 든다. 자원이 있는 사람의 나이 듦은 나이 듦이지만, 사회적 약자의 나이 듦은 늙음이고 추함이다. 늙음은 나이 듦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다.

연령주의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율하고 있는 결정적인 사회적 모순이다. 매력, 열정, 가능성, 순수, 아름다움, 치열함은 젊은이만의 속성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는 ‘철이 없거나 주책’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한때 학생운동을 구국운동이라고 하는 것(젊은이만 나라를 구하나),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정희성의 싯구를 싫어한다. 사회의 주체, 즉 노동과 사랑, 욕망의 주체는 젊은 사람(남성)으로 한정된다. 그래서 남성이나 젊은 여성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리가, 표준적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 나이든 여성에게는 과도한 욕망으로 간주되어 비난받는 일이 일상에 지뢰처럼 깔려 있다. 어떤 사람의 욕망은 질문되거나 문제화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의 욕망은 늘 해명하거나 용서를 빌거나 투쟁해야 할 과제가 된다.

연령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이른바 ‘생애 주기’식의 연령주의와 나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는 연소자 혹은 연장자 우선주의다. 한국사회는 ‘나이에 맞는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패배자’로 간주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직업, 지위, 외모, 언어, 태도, 습관, 문화적 취향, 성생활, 결혼 등 삶 전반에 걸쳐 특정한 나이에 맞는 정상성을 요구하고 요구받는다. 나이에 맞는 삶에 대한 문화적 규율과 통제가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인생을 다르게 살 자유, 방황할 자유가 없고 그것은 낙오로 연결된다. 취업시 나이 제한이 당연한 규정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남과 다르게 사는 것은 곧 생존권을 위협하는 문제다. 나이에 따라 삶의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억압된 사회, 이것은 고도로 치밀하게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이다.

인간의 나이는 임의적인 인식과 제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억압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정치 경제학적, 사회 심리적인 물적 토대를 가진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려면,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나이에 따라 인간의 권리가 다르지 않다면, 박혜란의 말대로 노후(老後)라는 말부터 없어져야 한다. 노전(老前) 생활이 따로 없듯이, 노후 생활도 따로 없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2 # 촌평[ | ]

이글을 읽고 무척이나 시원함을 느꼈다. 대학을 졸업하며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문제로 나름대로 조금 고민을 한 적이 있는 것 같긴 하다.(정말로 쪼금...) 그때 내린 내 나름의 결론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내 욕망에 충실히 살기 위해서' "결혼은 하지 말자, 아니 적어도 아이만은 낳지 말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코카서스 바위에 프로메테우스를 얽어맸던 쇠사슬처럼 가족이라는 사슬은 나를 자본이라는 바위에서 탈출할 수 없게끔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겠노라고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내 생각을 말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니 말은 했던 것 같은데 말 안한 것보다 못한 결론을 초래했던 것 같다. 심지어 부모님들도 이런 내 생각을 젊은 날의 치기려니 생각하는지 코웃음을 치고 철없는 아들의 얘기는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나이 이제 스물여덟. 윗글대로 "나이에 따라 강요되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체계적 억압"을 얼마나 잘 견뎌낼 수 있을지... "연령주의에 따라 고도로 치밀하게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을 얼마나 소신있게 견뎌내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솔직히 두렵기만 하다.

지난해 한겨레21은 커버스토리로 결혼과 아이를 강요하는 사회적 폭력에 대해 다룬적이 있다. 그 나이에는 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맛볼 수 있는 행복이라는 따위의 얘기는 회식자리에서 듣고 또 들어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그만큼 우리사회에 만연한 연령주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는 조용하고도 미세하지만 매우 강력한 힘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기획기사의 결론도 애매모호했고 내 가슴은 여전히 답답했다. 하지만 홀로서서 살아가는 분의 마지막 말이 인상깊었다. "내가 당신들한테 결혼하라고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강요한 적 있었나. 난 그런 적 없다. 그러니 당신들도 나한테 결혼하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 옳은 말이다.

나이라는 것이 단지 생물학적 의미만을 갖는 사회. 자신의 일생에서 시간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던지 간에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을 무심히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바란다. -- 자일리톨 2004-1-1 3:01 pm

3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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