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의마을

1 #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 ]

아직은 따스한 토담에 기대
모두 토해버리고 울다 일어나
무너진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무것도 없는
댓잎 하나 쓰적일 바람도 없는
이렇게 비어 있고
이렇게 메말라 있고
미칠 것만 같은 미칠 것만 같은
서로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저 불켠 방의 초라한 술자리 초라한 벗들

날이 새면
너는 진부령 넘어
강릉으로 오징어잡이, 나는 또
몸을 피해 광산으로 가야 할 마지막
저 술자리

서로 싸우지 않고는 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낯선 마을의 캄캄한 이 시대의 한밤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아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2 # 바다[ | ]

넘치지는 않는다
고이는 바다
움푹 패인 얼굴에 움푹 패인 멧자욱에
움푹 패인 농부의 눈자위 속 그늘에 바다
열리지 않는 마른 입술 열리지 않는
감옥에도 바다
고이는 바다
매우 작다 조용한 노여움의 바다
넘치지는 않는다 물결이 일어
찢어지는 온몸으로 촛불이 스며든다
몸부림이 몸부림이 일어 압제여
때로는 춤추는 바다 번쩍이는 그러나
달빛이 없는 바다 불타지 않는 바다
매우 작다 압제여
조용한 노여움의 바다
어느 날 갑자기 넘쳐버릴 바다
넘치면 휩쓸어버릴 자비가 없는 바다
쉬지 않고 소리없이 밑으로 흘러
땅을 파는 팔뚝에 눈에 입술에
가슴에 조금씩 고이는 바다
아직은 일지 않은 폭풍의 바다.

3 # 타는 목마름으로[ | ]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루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4 # 1974년 1월[ | ]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5 # 詩[ | ]

詩가 내게로 올 때
나는 침을 뱉었고
떠나갈 때
붙잡았다 너는 아름답다고

詩가 저만치서 머뭇거릴 때
나는 오만한 낮은 소리로
가라지!

가라지!
아직도 그렇다 가까운 친구여!
어쩔 수도 없는 일

詩가 한번 떠나면
다시 오지 않는 걸
알기 때문에, 가라지!
난 그랬어
돌아올까봐 행여 올까봐
가라지!
몇 번이고 가라지!
가라지!

새벽까지 눈을 흡떠도
감옥 속에 몸부림쳐도 오지 않는 詩
나는 서른셋
부패할 나이 이젠 진정으로
가까운 친구여!
어쩔 수도 없는 일
가라지!

6 # 엽 서[ | ]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 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 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 자국이야
아니야
벽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 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네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 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

7 # 사랑[ | ]

누굴 보듬어 안을 만큼
팔이 길었으면 좋겠는데
팔이 몸통 속에 숨어서
나오기를 꺼리어
손짓도 갈고리마저 없이
견디는 날들은 끝도 없는데
매사에 다 끝이 있다 하니
기다려 볼 수 밖에
한 달 짧으면
한 달 길다 했으니
웃을 수 밖에
커다랗게 웃어
몸살로라도 다가가
팔 내밀어 보듬어 볼 수 밖에.

8 # 사랑[ | ]

내가 이렇게 기대있는 것은
누굴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기대있는 것은
한밤중 열 두시가 지난 시간
당신도 자고 아이들도 잠든 시간
담 건너 고양이 울음도 죽은 시간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괴로운 시간
깨어 있다는 것
죽기보다 더 버리고 싶은 일
알겠어요. 이 시간
내가 기대고 있는 까닭
내가 기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누구라도 좋지요
돌멩이라도 좋고
쓰레기라도 좋고
잿더미라도 좋지요
사랑하겠다는 것.

9 # 우리가 하자[ | ]

몹시도 눈이 쌓인 날
치악산 밑에 사는
한 친구집에 간 일이 있었지
지금도 생각난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들을 하는지
참 우수한 아이들이었는데
넷이었던가
다섯이었던가
기억은 참되지 않다
기억은 오직 구성될 뿐이다
눈에 덮인 너와집
그 작은 방
그 희미한 촛불
해월 선생처럼 수염을 기르고 엄장 큰 한 분이 농주를 마시고 있었다
첫 마디
'베토벤이 죽은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긴 논쟁은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나는 낫셀의 방향을 주장했던 것 같고
공과를 지망했던 내 친구는 그 무렵에 벌써 로스토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얘기는 사분 오열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똑같은 것이었다
'베토벤이 죽어간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다
이 점을 기억하라
역사는 대를 이어서 자기의 본체 이성을 발전시키는 법이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고등학교 모자가 날아가고
다시 줏어 쓰며
우리가 얘기한 것은
한 가지였다
'우린 아직 어리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것도 저것도 다 틀렸다
우리가 하자!'

10 # 바다[ | ]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참으로 이제 가겠다
손짓해 부르는
저 큰 물결이 손짓해 나를 부르는
망망한 바다
바다로

없는 것
아득한 바다로 가지 않고는
끝없는 무궁의 바다로 가는 꿈 없이는 없는 것
검은 산 하얀 방 저 울음소리 그칠 길
야예 여긴 없는 것

나 이제 바다로
창공만큼한
창공보다 더 큰 우주만큼한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만큼한
끝간데 없는 것 꿈꿈 없이는
작은 벌레의
아주 작은 깨침도 있을 수 없듯
가겠다

나 이제 가겠다
숱한 저 옛 벗들이
빛 밝은 날 눈부신 물 속의 이어도
일곱 빛 영롱한 낙토의 꿈에 미쳐
가차없이 파멸해갔듯
여지없이 파명해갔듯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백방포에서 가겠다
무릉계에서 가겠다
아오지 끝에서부터라도 가겠다
새빨간 동백꽃 한 잎
아직 봉오리일 때
입에 물고만 가겠다
조각배 한 척 없이도
반드시 반드시 이젠 한사코

11 # 마른번개의 날에[ | ]

사람 없는 곳 골라 앉아
사람을 기다린다

예전엔 그렇지도 않더니
요즘엔 세월 흐르는 소리 들린다

흰 영산강으로 달을 베먹고
비녀산 위에서
별을 훔치던 때는 언제

사람 물결에 실려
자유를 외치던 때는 그 언제

천지가 내 집이나
머리 둘 곳마저 이제 없는 이 가슴

가슴속에 바람 한 오리 휘돌아
기인 하늘 저쪽에
마른번개가 한 번
또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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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전남 목포(木浦) 출생
19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1969년 「황톳길」 등 시 5편을 『시인 詩人』지에 발표
1970년 5월, 담시 『오적(五賊)』 필화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받음, 7월 무기징역 감형
1975년 2월 출옥후 옥중기 「고행―1974」 발표, 재차 투옥됨
1975년 <로터스 Lotus> 특별상 수상, 노벨문학상 후보 추대됨
1981년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수상
1999년 율려학회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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