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

1 # 눈오는 밤[ | ]

편지를 쓴다.
모처럼 하얀 종이 위에 써보는 편지.
사각거리며 걸어가는 연필심 따라
어디선가 환하게 눈 내린다.
미끄러지는 사람 있는지
까르르 입을 막은 여자들의 웃음소리 들린다.
검은 세상의 하얀 약속들.
누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에 몸을 담그는 거라
너는 가르쳐주었다.
어느새 눈 그치고
사각거리던 편지도 마침표에 닿는다.
지치도록 걸어가도 집이 보이지 않던
젊은 날의 시간
아무도 몸 담그지 않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편지의 말미에 얼른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는다 추신한다.

2 # 그 무엇이 더[ | ]

자다가 깨어날 때 있다.
깨어나 앉아 다시 잠 못들 때 있다.
머리 속으로 끊어지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의 포로가 되어
새벽 두 시나 세 시쯤.
혼자서 오락가락할 때 있다.
어릴 적 골목길을 다시 걷거나
텅 빈 운동장에 혼자 서서
아버지, 아버지…하고 불러볼 때 있다.
떨어지는 감꼿을 하나씩 줍거나
찌르르, 녹슨 바퀴 굴려 멀어져가는
자전거 뒤를 헐떡거리며 따라가본 적 있다.
가방에 끌려 걸어가던 등교길
꺾어든 꽃송이 입에 물고
하염없이 앉아 있던 강가
누구는 변두리의 공동묘지에
또 누구는 저수지에 뜬 채 퉁퉁 불어
그래, 천안 지나 국도 달리면 생각난다.
싸움도 없는 전장에서 전사한 고종사촌은
이 어딘가 묻혀 있을 게다.
한바탕 휭, 돌아가버린 시간.
인생은 일장춘몽이다. 닳고 닳은 그 한마디밖에
더 보탤 무엇이 있겠는가. 자다가 깨어
곰곰이 생각한들 그 무엇이 더…

3 # 밤이니까[ | ]

울어도 돼, 밤이니까.
울긴 울되 소리 죽여
시냇물 잦아들듯 흐느끼면 돼.
새도록 쓴 편지를 아침에 찢듯
밤이니까 괜찮아 한심한 눈물은 젖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넋 나간 모습으로 앉아 있거나
까마득한 벼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아아, 소리치며 뛰어내리거나
미친 듯 자동차를 달리거나
무슨 상관이야.
사람들의 꿈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문득
부러진 연필심처럼 버려진 채
까만 밤을 지샌들 무슨 상관이야.
해가 뜨면 그뿐.
밤이니까 괜찮아.
말짱한 표정으로 옷 갈아입고
사람들 속에 서서 키득거리거나
온종일 나 아닌 남으로 살거나
남의 속 해딱해딱 뒤집어놓으면 어때
떠나면 그뿐.
가면 그뿐인데.
밤에는 괜찮아, 너 없는 밤엔 괜찮아.

4 # 친구[ | ]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 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털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5 #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 ]

별에서 소리가 난다.
산 냄새 나는 숲 속에서 또는
마음 젖는 물가에서 까만 밤을 맞이할 때
하늘에 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자작나무의 하얀 키가 하늘 향해 자라는 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겨울은 더 깊어 호수가 얼고
한숨짓는 소리,
가만히 누군가 달래는 소리,
쩌엉쩡 호수가 갈라지는 소리,
바람 소리,
견디기 힘든 마음 세워 밤하늘 보면
쨍그랑 소리 내며 세월이 간다.


Expected "=" to follow "img"| align="center" | <html><img src=" " width="100" height="130" border=0></a></html>

계명대 음악대학을 졸업
197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와 "월간문학", 1978년 "시와 의식"지에 당선되면서 데뷔
'오늘의 시' 동인으로 활동 중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작가세계 중편소설이 각각 당선
시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한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연어가 돌아올 때>, 어른을 위한 동화 <어느 시인 이야기> 등 ||


시인의마을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