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김승희

1 # 밥과 잠과 그리고 사랑[ | ]

오늘도 밥을 먹었습니다. 빈곤한 밥상이긴 하지만 하루 세 끼를. 오늘도 잠을 잤습니다. 지렁이처럼 게으른 하루 온종일의 잠을. 그리고 사랑도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식은 숭늉처럼 미지근해서 버린 그런 서운한 사랑을.

인생이 삶이 사랑이 이렇게 서운하게 달아나는 것이 못내 쓸쓸해져서 치약튜브를 마지막까지 힘껏 짜서 이빨을 닦아보고 그리고 목욕탕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봅니다. 자신이 가을처럼 느껴집니다. 참을 수 없이 허전한 가을 사랑 하나로.

그래도 우리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영원의 색인을 찾듯이 사랑하는 사람 그 마음의 제목을 찾아 절망의 목차를 한 장 한 장 넘겨보아야 할 따름이 아닌가요.


2 # 없는 사람[ | ]

문밖엔 아무도 없는데 자꾸만 초인종소리가 울린다--- 아무도-없다-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도-보이지 않는다-

별들의 저울은 生死의 두 세계를 뚫고서 수심의 흰 피를 달아보고 있다--- 구천으로 뻗은 어둠을 뚫고 그리움의 根은 하염없이-가고-있다---

燐光 묻힌 날개를 단 새들이 문밖에서-날고 있다- 하염없이 부풀어터지는 백혈구처럼 영원한 極光들의 나라로 가는 흰 길-위엔-죄악 같은 추억들이--- 하나씩-서-있었다---

문밖엔 아무도 없는데 자꾸만 초인종소리가 울린다--- 아무도-없을까- 아무도-없는데-그리움의 根은 또 어디서-한없이-오고 있을까......


3 # 미완성을 위한 연가[ | ]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려는

저물 무렵 단애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에게 깊이 말하고 있었네

하나의 손과 손이

어둠 속을 헤메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스치기만 할 때

그 외로운 손목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무엇인지 알아?

하나의 밀알이 비로소 썩을 때

별들의 씨앗이

우주의 맥박 가득히 새처럼

깃을 쳐오르는 것을

그대는 알아?

하늘과 강물은 말없이 수천 년을 두고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네

쳐다보는 마음이 나무를 만들고

쳐다보는 마음이 별빛을 만들었네

우리는 몹시 빨리 더욱 빨리

재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어디에선가, 분명,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네,

수갑을 찬 손목들끼리

성좌에 묶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그리움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긴 그리움이 시작되려는

깊은 밤 단애 위에 서서

우리는 이제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필요치가 않다고

각자 제 어둠을 향하여 조용히 헤어지고 있었네.....

4 # 양수리에 가서[ | ]

가을이면 양수리에 닿고 싶어라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양수리에 가면 가을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장 차갑고 가장 순결한 물과 물이 만나 그저 뼈끝까지 가난하기만 한 물과 물이 만나 외로운 이불 서로 덮어주며 서러운 따스함 하나를 이루어 다둑다둑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난한 것을 왜 그저 외롭다고만 하랴 외로운 것을 왜 그저 서럽다고만 하랴

양수리에 가면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가을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헐벗은 가을나무들 제 유언을 풀듯 조용히 물그림자 비추어 스스로 깊어지는 혼자 외로움 거울같이 전신으로 대면하고 있으니

가을이면 양수리에 가고 싶어라 어디선가 나뉘였던 물과 물이 합하여 물빛 가을이불 더욱 풍성해지고 가을나무 물그림자 마침내 이불 덮어 추위롭지 않으니

홀로 서 있다 하여 어찌 외롭다 하랴 하늘 아래 헐벗었다 하여 어찌 가난하다고만 하랴


5 # 시계풀의 편지 4[ | ]

사랑이여.

나는 그대의 하얀 손발에 박힌 못을 빼주고 싶다. 그러나

못박힌 사람은 못박힌 사람에게로 갈 수가 없다.


6 # 쌍봉낙타[ | ]

해인이와 왕인이가 내 등 위에 올라타 앉아 있다 엄마는 낙타. 목이 말라도 몸이 아파도 뜨거운 모래 위를 무거운 짐을 지고도 걸어가야만 한다.

[낙타의 등에는 큰 혹인 육봉이 있는데 거기에는 수일 동안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지방과 영양분이 저장되어 있답니다. 이 혹이 하다 있

는 것은 단봉낙타라고 하며 두 개 있는 것은 쌍봉낙타라고 합니다 쌍봉낙타는 단봉낙타보다 힘이 세서 250kg 정도의 짐을 지고도 시속 4km로 하루에 40km를 살 수 있답니 다. (<엄마랑 아기랑> '88년 7월호 33~34면)

우울증에 신경질에 죄악망상 파라노이아 증상까지 겹쳤어도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죽지 않고 가는 것은 내 등 위에 짐 지워진 두 개의 육봉 때문일까. 오, 라후라라고 부처님께서 부르신, 부처님께서 버리신 피의 인연으로

나는 힘센 쌍봉낙타가 되어 뜨거운 사막 속을 가고 있다. 다락처럼 무거워도 야근처럼 피로해도 엄마는 낙타. 쌍봉낙타는 더 힘이 세다.


7 # 장미와 가시[ | ]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 서강대 영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당선, 등단.
  •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 서강대 국문과 교수
  • 시집으로 《왼손을 위한 협주곡》 《태양미사》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이 있고 산문집으로 《33세의 팡세》 《바람아 멈춰라 내리고 싶다》 등이 있다.

8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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