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1 개요[ | ]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예수의 마지막 유혹
  • 1988년의 미국 영화
  • 소설 《최후의 유혹》을 동명원작으로 하는 영화
  •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가면서도, 사랑하는 여성과 연애하고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는 장면 등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하는 내용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음
  • 상영시간: 164분
  • 청소년관람불가

 

 

2 줄거리[ | ]

목수인 나자렛 예수(윌렘 데포 분)는 로마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만든다. 한낱 목수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선천적으로 풍기는 고귀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3년 동안 악마의 유혹을 견디고 하느님의 시험에 들어야하는 공생활에 접어들기 전에 열혈당의 주목을 받는다. 열혈당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무력으로 쟁취하는 것. 이들은 가롯 유다(하비 키이텔 분)를 예수에게 보내 열혈당 가입을 권유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에 응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독립에는 찬성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독립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방법은 사랑이었다. 유다는 이러한 예수의 모습에 감동받아 그의 방식을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자 그의 제자가 된다. 3년 후, 예수는 성서의 기록대로 십자가에 매달린다. 이때 하나님이 보낸 수호천사라고 자칭하는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이라며 예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보통 인간으로 살아가라고 한다. 하늘의 천사들마저도 인간 세상의 삶을 동경한다고 하며, 예수를 유혹하자 천사의 말을 사실대로 믿은 예수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을 해 아이들까지 낳고 살면서 인간의 행복을 경험한다. 그러나 예수가 나이가 든 후, 죽어가는 병상에서 그제서야 그것이 악마의 유혹이었음을 깨닫게 되는데.

3 출연[ | ]

4 # Sonimage : OST[ | ]

Passion: Music for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Peter Gabriel

  영국 아트 록의 역사에서 70년대의 제네시스가 차지하는 영광은 피터 가브리엘, 필 콜린스, 스티브 해킷 등 멤버들의 활약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제네시스의 초반기,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이르는 피터 가브리엘이 재직했던 시기에 이 밴드는 초현실주의와 무대극의 드라마적 완성도를 지향하며 종합예술을 꿈꾸었던 실험적인 음악집단으로 여겨진다. 비록 당시에는 아트 록 씬의 대가들인 예스나 킹 크림슨 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제네시스는 상대적으로 주류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할지라도, 당시 피터 가브리엘의 넘치는 상상력과 예술적 야심은 제네시스의 전기작가들에게 상당한 자부심을 선사하였다.

제네시스의 여섯 번째 앨범으로 발표된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74)는 피터 가브리엘의 무대극에 대한 열망의 총화로서, 그 자신을 표상하는 라엘(Rael)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단편소설까지 앨범 내지에 수록되어있으며, 오늘날의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연극성과 록 음악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제시’(「Musical Box」)한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 앨범에 실린 단편소설을 토대로 영화를 구상했던 피터 가브리엘은 감독으로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를 내정했고, 실제로 조도로프스키와 시나리오 작업까지 들어갔으나 재정적 이유 등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피터 가브리엘의 영화와의 직접적 인연은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 사운드트랙 작업으로 이어지는데, 1985년에 발표한 「Birdy - Music From The Film by Peter Gabriel」은 깐느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받기도 했다. 이 사운드트랙은 U2, 밥 딜런 등과의 작업으로 유명한 다니엘 라노와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이며, 대부분의 곡들은 피터 가브리엘의 이전 앨범들 「Peter Gabriel(3)」(80), 「Security」(82)의 수록곡들에서 보컬 파트를 드러내고 리믹스한 재편집 버전의 곡들이다. 이 사운드트랙 앨범은 영화 에서 알란 파커가 선정했던 음악들이 가진 영화 내적 맥락과는 상당히 무관한 피터 가브리엘 자신의 자족적이며 도취적 작품에 가깝다. 그래서 이 영화를 기억하고자 하는 알란 파커 팬들에게나 음악평론가들에게나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다.

1975년에 제네시스를 탈퇴한 후의 피터 가브리엘의 진로는 비폭력적 정치적 이상주의의 설파와 범세계적 예술세계의 확립, 테크놀로지와의 친화로 나아갔으며, 그의 음악세계 역시 월드뮤직에 대한 애정과 서서히 구축하게된 자신의 음악적 지형도로 나타난다. 그는 솔로 초기의 세 장의 「Peter Gabriel」 앨범을 비롯하여, 「So」(86)나 「Us」(92)와 같은 국내 대중음악 팬들에게도 친숙한 앨범을 만들어냈고, 「Biko」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서방세계 뮤지션의 항의를 최초로 드러냈으며, WOMAD(음악, 미술, 춤의 세계)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서방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비서방국가의 음악 및 전통 예술과의 만남이 상호간에 이루어지기를 꿈꾸었고, 자신의 리얼 월드 레이블을 통해 비서구세계와의 만남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가 세우고자 했던 ‘리얼 월드 익스피리언스 파크’는 미술과 음악 등의 예술이 누구에게나 열려진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토로 한 것이다. 또한 그의 무대극에 대한 여전한 관심을 반영한 멀티미디어 이벤트였던 94년의 ‘시크릿트 월드 투어’에서 그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멀티미디어를 통해 ‘그 어떠한 의미의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 예술’이었다. 한편, 피터 가브리엘은 여전히 최고의 뮤직비디오로 손꼽히는, 실사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결합시킨 「Sledgehammer」(86) 뮤직 비디오와 같은 독보적 작품들을 통해 MTV 시대에도 앞서나가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피터 가브리엘이 마틴 스콜세지로부터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사운드트랙 작업의 의뢰를 받은 것은 1981년이다. 그리고 이 논란 많았던 영화가 개봉된 것은 1988년 8월이며, 이 사운드트랙인 「Passion: Music for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는 89년에 피터 가브리엘이 자신의 숙원이었던 리얼 월드 레이블을 설립한 직후 설립기념 발매앨범이 되었다. 리얼 월드의 두 번째 앨범은 「Passion」의 오리지널 음원들을 모은 「Passion Sources」였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55년에 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칼뱅파에 속하는 집안에서 자란 폴 슈레이더와 카톨릭 집안에서 성장했고, 한때는 성직자를 꿈꾸었으며 카톨릭의 코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영화들을 만들어왔던 마틴 스콜세지가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 소설은 교황청으로부터 금서로 분류되었고, 그는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예수가 신성과 동시에 인성을 가지고 있음은 성서에 나와있는 사실이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이단에 속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예수의 인간적 측면을 용인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가장 문제삼은 것은 최후의 유혹 장면에서 예수(윌렘 데포 분)가 평범한 남자로서의 삶을 살아 결혼하고 아버지가 되어 늙어가는 것을 꿈꾸면서 창녀였던 마리아 막달레나(바바라 허쉬 분)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장면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동료 이스라엘인들을 죽이는데 사용되는 십자가를 만드는 목수로 등장하여 그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그가 점점 카리스마적인 혁명지도자처럼 변해가며 격양된 어조로 선동하며,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마치 사병집단처럼 묘사되었다고 비난했다. 후일 폴 슈레이더는 사람들이 유다(하비 키이텔 분)에 대한 해석에는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고 섹스 씬만 문제삼았다고 말했다. 어찌되었던 모로코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마이클 발하우스의 촬영이나 영화 자체에 대한 비평적 관심과는 무관하게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에게 예술가에게 부여된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현할 기회와 지속적인 영광을 선사했다. 그리고 피터 가브리엘에게 이 영화는 자신이 WOMAD를 통해 만나왔던 세계 각지의 뮤지션들과 함께 그의 디스코그라피 중 가장 야심적인 작업이 될 「Passion」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기회를 부여했다.

「Passion(예수 수난)」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존 하셀 등의 피터 가브리엘의 이전 작업에 참여했던 뮤지션들을 비롯하여 지금은 사망하였음에도 파키스탄의 콰우와리 음악계의 거목으로 여러 서구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누스라트 파테 알리 칸, 그룹 샥티의 초기 멤버로 프랭크 자파, 얀 가바렉, 빌 라스웰 등과 공연했던 인도 뮤지션 엘 샹카, 역시 현재 서구 음악계에서 상당한 지명도를 가진, 터키 피리인 네이의 명인으로 16세기 오트만 제국의 고전음악을 되살리고자 한 음악적 야심을 가진 쿠드시 에르구너, 세네갈 출신의 보컬리스트로 이미 서구세계에 최고의 퍼포먼서로 정평나있는 유순 두르, 이집트 출신으로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의 투어에도 참가해 서구세계에 널리 알려진, 파라오 이집션 앙상블의 리더인 퍼커션 주자 호삼 램지, 아프리카의 퍼커션 주자 야쿠바 카마라에 의해 설립된 전통 북과 춤을 선보이는 집단 파탈라 등이며, 이들의 국적은 인도에서 터키를 거쳐 가나에 이른다.

「Passion」은 피터 가브리엘이 서구 아트록 뮤지션이라는 명백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범세계주의적 예술을 지향하는 태도를 드러낸 앨범이다. 예수의 시대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고자 한 그의 의도는 중동지역의 음악을 새롭게 해석해냈으며, 더불어 아프리카와 인도 지역의 스피리추얼리티를 리듬과 드론의 측면에서 받아들였다. 이 앨범은 비록 인도-중동-아프리카 지역의 최고의 뮤지션들이 함께 하였지만, 그들의 곡들을 다시 모으고, 그 음악들의 새로운 판본으로 만들어낸 사람은 피터 가브리엘이었고, 결국은 피터 가브리엘의 음악적 이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발췌할 수 있었던 음원들(「Passion Sources」)은 자신의 신디사이저를 통해 재통합된 셈이 되었고, 그는 그 음원이 되었던 뮤지션들의 음악적 직관과 즉흥성에 크게 빚진 셈이 되었다. 이 앨범의 트랙들은 서구적인 것과 비서구적인 것의 병렬조합이며, 그 이분법은 확실하게 발휘된다. 일렉트릭 기타, 아카이와 타블라의 조합, 콰우와리 보이스와 트럼펫의 조합, 하몬드 오르간과 아르굴 드론의 조합 등이 만들어내는 음색들은 차이를 기반으로 한 조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여기서의 차이는 비록 극복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으로 들려온다. 또는 그 차이들이 조화롭게 해소되는 음의 경연장으로 들려온다. 이 앨범은 비단 데이빗 번이나 폴 사이먼의 시도와 비교되는 것 이상으로, 사운드트랙으로서의 효과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가장 인상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육박하며, 또한 피터 가브리엘이 그 자신의 솔로 앨범 작업과의 명확한 연속성을 드러내어 이 음악들의 진정성을 더한다. 「A Different Drum」에서의 피터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에스닉 뮤직이라는 범주를 넘어선, 경계없는 음악에 대한 그 자신의 환희의 찬가로 들려온다. 이 앨범은 사운드트랙이기에 앞서 그에게 그의 디스코그라피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솔로 앨범 중 하나이다.

  • 최근에 멜 깁슨 버전의 예수 수난 영화가 또 나왔다고 한다. 나는 보지 않았지만, 상상을 해본다면, 어용노조의 영웅 만들기에 비유할만한 우익 반동 영화 <브레이브 하트>를 만들었던, 우익 반동 멜 깁슨이 만든 SM영화가 아닐까 한다. 내 생각에 예수의 생애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을 한 영화는 파졸리니의 이다. 이 영화의 예수는 진정한 서민 속의 혁명가다. 공산당에도 몸담았으며, 맑시스트로서 훌륭한 방언학자이자 문학가이며, 가장 뛰어난 이미지의 대가인 파졸리니가 풀어낸 예수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신약성경에 담긴 그 시대의 열망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이 작품도 나름대로 미온적이나마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기대고는 있지만, 그가 풀어낸 영상이 최소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명에 근접하는 수준에 올랐다고 보인다. 다행인 것은 과 <라스트 템테이션 오브 크라이스트> 모두 DVD와 비디오로 국내에 출시되었다는 것이다.

-- Sonimage 2004-5-2 2:32 am

5 # 박경호[ | ]

박경호 2002 01 30

스카라 극장이란 곳은 수없이 그 앞을 지나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안에 들어가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독특하게 원기둥 형태로 튀어나온 구조의 입구가 나름대로의 고풍스러운 멋을 지닌 이 극장의 내부 분위기는 몇년전까지만 해도 자주 드나들던 우리동네 극장이나 지금은 없어진 신림극장을 오랜만에 떠올리게 했다.

이 영화는 정작 영화의 완성도보다 이 필름을 둘러싼 기독교계의 보이코트 덕분에 더 유명해 보인다. 그 덕분에 만들어진 지 14년만에 단 하나의 스크린을 얻어서 조촐하게 국내개봉을 했을 것이고 말이다. 애초에 이 영화(또는 카잔차키스의 원작소설)의 의도 자체가 작가의 창작력을 빙자(?)해서 성경적 사건들에 새로운 해석을 가해 보자는 것인 듯 하므로 이런 논쟁들을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소위 미션스쿨을 나오긴 했지만 성경이나 기독교 정통교리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아서 이 영화의 어디까지가 성경에 충실한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어차피 다른 영화들에서 보여주는 예수의 삶들도 어느 정도는 허구적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을 텐데, 유독 이 영화만 말이 많은 것은 아마도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1. 일단 예수가 최후의 순간을 맞기 전에 유혹에 넘어가는 부분(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인)을 삽입함으로써 예수의 신성에 흠집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과
  2. 보통 성경 최대의 악역으로 간주되는 유다를 오히려 강한 신념으로 예수가 흔들리지 않게 도와주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

1번의 경우, 영화를 통해 내내 예수의 인간적인 갈등들이 묘사되고 있는데 사실 그 중 상당수는 성경에도 어긋나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아마도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사탄의 유혹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와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다가 막판에 '앗, 이게 아니구먼... All Reset!' 하는 부분일 것이다.(정확하게는 물론 그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고 예수의 환상에 불과함) 이런 전개는 상당히 코믹하기까지 한 발상이었는데, 마치 '런 롤라 런'이나 '웨인즈 월드' 같은 영화에서 보던 그것과도 흡사하다. 말하자면 A라는 길을 선택하면 결과적으로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으니까 B라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셈이다. 아울러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오히려 예수의 고통을 좀더 공감하기 쉽게 도와주는 이런 묘사들이, 신성에 중점을 두려는 근본주의적 시각에서는 발상 자체가 불경하게 보일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허구적' 표현 속에 담긴 의도를 충분히 포용할 수 있지 않을까.

2번의 경우, 유다의 역할에 대해서는 보르헤스의 한 단편소설에서도 유사한 해석(즉 모든 것은 어차피 처음부터 예정되어진 것이고 유다야말로 배신자라는 불명예를 짊어지는 최대의 희생양이라는)을 본 적이 있다. 그 이전에도 이미 그런 해석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되었다. 노먼 쥬이슨의 뮤지컬 영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도 유다가 막판에 나와 춤과 노래를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는 장면을 통해 그의 역할에 대한 비슷한 맥락의 해석을 하고 있다(더구나 그 영화에서는 의미심장하게도 유다만 흑인이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알기로 국내 교단에서 두 영화(즉 '유혹'과 '슈퍼스타')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인데, 이는 정작 영화 자체는 보지도 않고서 짐작으로만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아마도 후자의 경우 '슈퍼스타'라는 제목과 몇몇 삽입곡의 멜로디만으로 평가를 한 것이 아닐까) 내가 '유혹'을 보려고 한다는 말을 어제 주변의 기독교인 몇명에게 했을 때 대부분 영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슷비슷한 반응들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선입견이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관객의 종교 유무 여부와 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기존의 고정관념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논쟁거리를 제공하여 진정한 기독교(넓게는 종교)의 의미와 예술표현의 자유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 이 영화의 일차적인 의의가 될 것 같다. 게다가 기독교의 논리대로라면 이 영화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164분이란 짧지 않은 상영시간 동안 누구나 알고 있는 줄거리를 재구성해서 보여주는 데다가 왠지 빈티나는(?) 화면이 간혹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성경속의 시시콜콜한 사건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작가의 허구적인 삽입부분들을 균형있게 배치하여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아트락 애호가로서는 중간중간에 분위기에 어울리는 다양한 음악을 제공한 피터 가브리엘이라는 이름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겠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난데없이 튀어나온 데이빗 보위의 얼굴은 '듄'에서 스팅을 발견했을 때에 맞먹는 황당한 경험이었다. ^^

덧붙임: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은 영국의 코미디 집단 몬티 파이썬의 '브라이언의 일생(Life of Brian)'이란 영화를 한번 보시기 바란다. 예수 옆집에서 태어난 -_- 브라이언이란 허구적 인물의 일생을 풍자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정철 2002/01/30

더이상 토를달고싶지 않은 멋진 해설.

사실 이정도 영화를 가지고 신성모독이니 뭐니 해대는 개신교단은 이나라 최대의 교조적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 결여된, 정서적으로 상당히 심각한 불구자들.

6 # 진병관[ | ]

진병관 2002/01/30

영화 중간중간에 틱틱 화면과 대사가 끊어지는 게 눈에 거슬렸다. 특히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군중들에게 일갈했던 "내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치 말라. 평화가 아니요. 검을 주러 왔다." (마태복음 10장 27절) 부분이 팍 짤려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치 말라" 라는 한 마디로 화면이 끊어진것은 다분히 영화가 짤린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게 만들었다. (하긴 영화 도입부분에 '신학적인 새로운 해석이 아니므로 양해를 바란다는 둥' 우리나라 배급사에서 너었음직한 멘트가 보일 때부터 낌새가 이상했긴 하지만...)

해방신학과 교조신학이 첨예하게 부딪히며 다르게 해석하는 부분이 성서에 몇 군데가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마태복음 10장 27절이다. 성서를 은유적으로 해석해야한다고 하면 저 경구는 좀더 온화한 의미로 해석되겠지만 직접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을 뒤엎으러(?) 입성했다고 이야기한다. 예수가 핍박받고 고통받는 민중을 해방시키러 예루살렘에 들어갔다는 해석이 해방신학에서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바리사인과 율법학자에 대해서 탐욕과 위선, 착취를 경계하는 많은 말들(누가 11장 37절)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에 대해서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마태 22장 15절~)란 한마디로 화살을 겨누지 않았던 예수의 의도는 무엇일까. 게다가 이 질문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하냐고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우려던' 불순한 의도를 가진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원이었다.(마가 12장 13절)

예수를 죽일 음모는? 물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다(마가 14:2). 배반을 약속한 유다의 이야기(마가 14:10). 그리고 바리새인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잡아다가 모여서 손찌검하고 빌라도에게 고발한 일, 그리고 정작 빌라도는 군중들의 의견에 따라 살인폭도 바라빠를 풀어주고 군중들이 시기하던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일들.(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마가 15:10절)

바라빠는 이스라엘에서 로마인을 물리쳐내려는 열심당원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빌라도가 정작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어 체포했던 빈 라덴같은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를 매달아야했을까? 성경에는 빌라도가 재차 예수를 두고 '이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 라고 확인하는 데도 불구하고 군중들이 악을 써가며 십자가에 매달라고하자 빌라도가 바라빠를 놓아주고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으로 나온다.(마가 15:15) 바라빠의 이야기는 앤서니 퀸이 주연했던 영화 '바라바'를 보거나 김동리의 소설 '사반의 십자가'를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 옆에 매달린 두명의 도둑 중 왼쪽에 매달렸던(좌도) 사반이란 인물이 열심당원이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예수를 배반한 유다는 분명히 열심당원이다.(영화에서는 열혈당원이라고 번역했다.)

이런 관계들이 영화에서 초점되지 않았던 것은 스코시지의 다른 의도가 중요해서였겠지만 영화에서의 대부분의 전개와 갈등부분에서는 위에 열거한 요소들을 감안해야만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많다.(유다가 제자가 되기 전 예수를 죽이려는 임무를 띄었던 것 등.) 영화의 후반부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구원받아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갔고, 그것을 후회하고 참회하는 순간에 환상이었음을 깨닫게되는 설정은 오히려 더 교훈적이었지 논란이 될만큼 신성모독적인 내용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왜 도그매니아들은 이 영화에 분개한 것일까? (도그매니아= Dogma+nia or Dog+mania ^^;)

영화가 끝나고 객석 중간에서 박수를 치던 어느 한 사람의 손뼉 소리가 생각난다. 꼭 인민군 박수처럼 적당하게 느리고 적당하게 크고, 그리고 길게 이어지던 박수소리 말이다. 보통 감동의 박수는 주변 사람들과의 호흡과 함께 더해지고 이어지는데 그런 식으로 어느 한 사람의 고집스럽게 계속되는 박수소리를 듣는 것은 분명 징그러운 일이다. 솔직히 몇초만 더 이어졌으면 박수치던 인간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밖에 나와서 '이 영화 재밌는 걸~' 이라던 어느 목소리도 참 기분나쁘고 위선적으로 들렸다. 내가 위선적이라 주위의 모든게 위선적으로 들리는 것일까?

가브리엘 음악은 역시 가브리엘의 트레이드 마크같은 '둥두루둥 두루둥~' 하는 끝부분 톤이 올라가는 공격적인 비트였는데 웬지 영화하고는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꼭 이스라엘이 아프리카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보위 아저씨는 '참 안늙는군. 대단해!' 하고 있다가 경호님 글을 보니 이 영화가 14년 전 영화라는 걸 겨우 알았다는... TT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곧잘 물어본다. '무엇을 쓰고 싶습니까?' '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죠?' 스코시지한테도 물어보고 싶다. 왜 부담스럽고도 대빵 부담스러운 예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라고... 아마 우리나라에서라면 만들다가 테러를 당했을 것이다. 재미도 졸라 없는뒈~ 이유가 뭐였우? 마틴~ floycrim..

  • 빌라도

라틴식 이름은 폰티우스 필라투스이다. 성격이 잔인해서 유대인들을 탄압하였다.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의 고소로 그에게 잡혀 오자, 그리스도의 무죄를 인정하면서도 민중의 강요에 굴복하여, 그리스도 대신에 강도 바라바를 석방하고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후에 그는 사마리아인들의 학살사건 때문에 로마로 소환되어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 바라바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할 때, 축제일에는 죄수 한 사람을 특사한 당시의 관습에 따라,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와 바라바 중에서 어느 쪽을 용서할 것인가를 물었다. 군중의 요구에 따라 강도 살인죄로 붙잡힌 바라바가 석방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다. 바라바는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서 살인하고 포박된 자’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인하여 옥에 갇힌 자’ ‘강도’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아마도 반항운동 단체인 열심당(熱心黨)의 수령이었던 듯하다. 예수 처형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문학 ·영화 등의 소재가 되었다. 스웨덴 작가 P.F.라게르크비스트는 소설 《바라바》로 1951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장태순 2002/01/31

영화보다도 경호형과 병관님의 해설이 더 흥미진진합니다. 화면과 대사도 툭툭 끊어졌지만 중간에 깜박 졸아서 제 기억도 툭툭 끊어지고 말았네요. ^^; 제 체력도 문제지만 사실 중간 부분은 너무 지루해서 말이죠. 영화 후반은 그래도 좀 볼만했습니다. 피터의 음악은 '버디'에서와 닮은 느낌이었는데 병관님 말씀대로 영화하고는 왠지 어울림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박수 치던 인간은 중등 시절 람보2 보러갔을 때 이후론 처음이었습니다. 뭐, 칠 수 있죠. 람보2 보고도 쳤던 박수를... 하지만, 요즘 시대를 감안하면 그리 순수하게만은 다가오지 않더군요. 핀쿠션(?) 안맞는 스크린, 답답한 음향, 너저분한 분위기, 좌석번호 없는 티켓, 좁은 좌석(결국 제 부피를 못이기신 병관님은 중간에 자리를 옮기시더군요. ^O^)... 개봉관이라기엔 거의 최악에 가까운 관람 환경이었지만 엔딩 크레딧이 끝날 무렵까지 조명을 켜지 않은 건 맘에 들었습니다. 엔딩 크레딧을 보고서야 보위가 이 영화에 나왔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이 정도 영화가 소위 '문제작'의 대열에 끼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합니다. 당시는 물론 요즘 와서도 말이죠. 물론 그점이 이 영화에 있어서 '홍보 포인트'이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여러 얘기거리를 만든다는 점은 이 영화의 장점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담에도 종종 이런 기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7 # 심윤보[ | ]

심윤보 2002/01/31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영화를 시네마천국의 토토처럼 열심히 보던 대학시절에 영화동아리에서 지글거리는 화면으로 본후, 97년도에 이스라엘에서 다시 보았습니다. 히브리대학 도서관내에 비디오 라이브러리가 있었거든요. 깨끗한 화면으로 보니까 느낌이 많이 다르더군요. 예수의 고향 이스라엘에서 보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뭐랄까요, 색다른 기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 것과는 또다른 감흥이 있었지요.(아시겠지만, 반 유대주의자였던 바그너의 곡은 이스라엘에서 연주 금지죠.) 그리고, 이스라엘에 계신 여러 전도사님들께 (불경스럽게도) 저는 이 영화를 권하기조차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저의 그런행동을 못마땅해하셨었죠. 경호님이 지적하신데로 이영화는 기독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보이콧과 극장 상영장에 불을 지르는 등의 극단적인 행동까지 야기시켰던 영화입니다.

이태리 천주교신자인 감독 마틴 스콜세지와 네덜란드의 캘빈 주의자 폴 슈레이더(시나리오)은 결코 신성모독을 하여 논쟁많은 영화를 만드려고 했던 것은 아닐것입니다. 감독 마틴 스콜시지는 그의 카톨릭 사제 친구에게서 카잔차키스의 책이 신학교에서 복음서의 대용이 아니라, 참신하고 살아있는 '우화'로서 이용되어 토론에 활용된다는 것을 듣고 영화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우화로서의 영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에 대한 오랜 토론에 대한 드라마화. 이것이 감독이 희망하는 바였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삶에 직간접적인 체험할 수 있게하고, 하나님을 맹렬히 믿는 사람들의 믿음도 해치지 않기를 감독은 바랬습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신이다. 그는 아무도 속인 것이 아니다. 원작자 카잔차키스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인간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을 대신해 인간의 원죄를 두배,세배로 짊어져야 했던 그런 인간인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러한 이중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한 것은 나 자신의 종교적인 필링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많은 질문과 의심 끝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전반적인 포인트느 그 어느 누구라도 비난을 받아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로마인들 조차도. 이것 또한 이 영화의 주요 포인트인 것이다."(진병관님의 질문에 대답이 되기를 희망합니다만...^^)

영화를 보다 보니, 영화의 배경이 어쩐지 이스라엘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아서 알아보니, 모로코에서 찍었다고 하는군요.(마치 글레디에이터처럼요.) 원래 마틴 스콜시지는 일부를 모로코에서 찍고, 나머지 부분은 이스라엘에서 찍으려고 했지만, 제작비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하네요.(실제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예루살렘시장과 대통령에게 융숭한 대접과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피터 가브리엘의 음악이 이스라엘분위기가 아니라, 진병관님의 이야기대로 아프리카적인 이유는 아마 모로코에서 로케한 한 것이 이유가 된 것 같습니다. 감독이 영화를 찍으면서 모로코의 Nass El Ghiwane라는 그룹의 음악에 영감을 받았고, 피터 가브리엘이 그의 견해를 받아드린 것이지요. 피터가브리엘은 40분짜리 음악을 만드는데 보통 2년이라는 시간을 들이는데, 3개월만에 터키, 그리스,아르메니아, 북아프리카, 세네갈등의 음악에서 리듬을 끌어와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 내주는 성의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어쩌면 날림으로?) 중동의 악기인 샤커,스킨즈,수르두, 아르론드론, 쿠르리쉬 두둑등이 총 동원된 이 작품이 오히려 매우 이교도적으로 들리는 것은 아마도 헐리우드식 웅장한 사운드에 길들여져서 일듯 싶습니다. 허나 예수의 고향은 원래 중동지방일지언데....

여담입니다만, 빌라도 역에 데이빗 보위가 열연을 해주었는데, 원래 감독은 그 역으로 스팅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팅이 엠네스티 자선 공연때문에 바빠서 캐스팅에서 제외 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원작 소설과 폴 슈레이더의 대본에는 끝에 나오는 천사로 작은 아랍소년이 나오는데, 불필요한 함축을 전해 줄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감독이 어린 소녀로 대체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만들면서 가장 영향을 받았던 성경관련 영화로 감독이 파졸리니의 을 꼽은 것은 정말 이외였습니다.무지한 저로써는 이 둘은 정말로 상의한 느낌이었거든요. 미사루바와 바흐의 음악이 넘쳐흐르던 몽환적인 화면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이긴 하지만 약간 지루하면서 보았던 작품으로 기억하던 파졸리니의 이었거든요. 감독은 마르크스적 예수상이 맘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의 예수는 분명 혁명가적인 예수의 이미지가 있지요.

'유혹'이란 의지의 행위가 아니라 무의적 초대이기에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라고 누군가 이야기 했었지요. 그것 때문에 이 영화가 불경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인 일 같네요.

8 같이 보기[ | ]

9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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