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라는 사상 -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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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國語」という思想―近代日本の言語認識
'국어'라는 사상 -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

2 # 거북이[편집]

이 책은 오래간만에 접한 박력있는 책이어서 책 내용에 대해 흠잡을 것은 없다. 불가피하게 제국주의자가 된 듯한, 다소 우직한 언어 정책론자 호시나 코이치를 이연숙이 치밀하게 파헤치고 들어갔다. 또 이 책을 읽으면서 남측(5천만?), 북측(2천만?), 중국(2백만?), 러시아(20만?), 일본(?), 미국(2백만?) 등 5-6개의 국가에 거짓말 조금 보태서 얼추 1억 근처의 인구가 사용중인, 이 언어의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나에게 적어도 국어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내가 아쉬운 것은 비교적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눈에 걸리던 바로 그 '일본어'였다. 조선은 근대화과정을 일본의 폭력 아래에서 겪는 통에 상당히 많은 일본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상당수가 고스란히 한국어에 남았다. 그래서 한자를 잘 아는 한국인이라면 한자가 노출된 일본어 책을 보고 대충 무슨 말인지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어휘상의 유사점이 많은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어 한자어를 한국한자음으로 읽어도 된다는 것은 전혀 아닌데, 일본어 번역자들 중에 상당수는 그런 오류를 범하곤 한다. 이 책의 역자들인 고영진, 임경화는 내용상으로 매우 정확한 번역을 했고, 문장도 비교적 매끄럽게 번역했지만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눈에 걸리는 것들 몇가지만 적어본다.

  • 언어 정책에 초려의 염을 품으면서 ... (p 207) → 초조한 마음을 품고 (?)
  • 착목한다 (p 274) → 주목한다
  • 다대한 고심을 (p 275) → 깊은 고심을
  • 실패로 끝나는 것이 상례라고 ...(p 284) → 것이 일반적이라고 ...

어쩌면 역자들은 전공자라서 이런 오류에 더 잘 빠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어에서는 흔한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것들은 한국어가 아니다. 두산 일한사전을 보면 '역방'이라는 말이 있다. 한자로는 歴訪이라고 쓰고 '레키호오'라고 읽는 일본어이다. 한국에서는 순방(巡訪)이라는 말을 쓴다. 이런 역방과 같은 말이 안되는 한국어가 한일사전에는 수도없이 실려있다. 실로 한심한 노릇인데 이런 오류는 사전 뿐 아니라 역자들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실은 전후의 국어 개혁의 퍼스펙티브의 협소함 그 자체가 ... (p 204)

좀 더 큰 문제는 이와같은 문법적인 요소이다. 일단 한국어에서는 '의'를 여러차례 쓰면 나쁜 문장으로 본다. 반면에 일본어에서는 '의'에 해당하는 の가 수차례 연속으로 쓰이는 일은 흔하다. 그렇다면 '의'를 세번 쓰는 번역문은 피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게다가 퍼스펙티브의 협소함이라니, 시야나 비전 정도로 써도 좋을텐데 말이다.

  • 이 책은 근대 언어학 비판과 국어 정책 비판이 하나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 (p 255)
  • 이 책에서도 이미 국어라는 말은 사용되어 있는데, 그다지 중요한 내용을 부여받고 있지는 않다. (p 278)

되어 있다는 분명 ~ている를 직역한 것인데 이런 문장이라면 '이 책은 근대 언어학 비판과 국어 정책 비판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정도로 고쳐쓸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수동이나 피동 표현은 일본어에서는 흔히 쓰이지만 한국어에서는 되도록 피하는 편이니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운 문장인가를 검토하지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나는 정말 최악의 번역도 본 기억이 있다. 예를들어 '나무쥰 파이쿠'를 보고 도대체 이게 뭐야 했었는데 백남준이었다.

  • 백남준 → Nam June, Paik → ナムジュン・パイク → 나무쥰 파이쿠

이렇게 된 것이다. 이것과 유사한 사례로 '한친톤'이 있었다. 이 한친톤은 책 절반을 읽을 때까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보니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었다. 이 두가지 사례는 모두 넥서스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에서 겪은 것이다. 나는 이제 넥서스를 교정에 신경쓰지 않는 출판사라고 낙인찍었다. 이쯤 되면 거의 민폐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사실 나도 가끔 번역을 해보면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지 뻐저리게 느끼곤 한다. 내 번역은 아마 원저자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난, 창작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고 유려하게 번역하는 것은 어쩌면 창작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나는 역자들이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전의 경우는 더더욱. 원문대조를 철저히 하고 주석을 달아주는 것은 역자들로서는 번역 못지않게 피곤한 일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더 많은 보상이 돌아가야 하고 대신 그들에게 그만큼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번역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한국 출판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다고 하지만, 그것은 소설이나 자기계발서 등이 많다. 고전은 번역되지 않는다. 고전을 잘못 내면 본전도 못찾기 때문이다. 일본이 그렇게 급격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것도, 그리스 문명이 유럽의 중세로 이어진 것도, 불교가 중국에서 그렇게 융성한 것도 모두 번역때문이 아니었던가. 언제나 아시아 1등, 세계 1등을 얘기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 운운하는 나라지만 지적 토양은 척박하기 이를데 없다. 그 토양을 기름지게 만드는 것은 문화에 대한 사랑이겠고 그 첫걸음은 바로 번역이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할 수는 없는거니까, 일단 남들이 해놓은 것을 먼저 번역해서 그들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먼저다. 번역은 그만큼 중요하다.

가끔 미려하게 번역된 역서들을 보면 기분이 너무 좋다. 그만큼 희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번역가들의 노고에는 언제나 고마울 뿐인지라 감사히 책을 구매하곤 하는데 기왕 감사하는거 조금만 더 부탁하고 싶다. 자기 이름을 걸고 나오는 것이니까, 좀 더 줏대있는 번역을 해주시라.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 현대문학을 규정할 정도의 대가가 되기 전에 영국에서 2년간 유학을 했는데 거기서 얻은 네글자가 자기본위(自己本位)였다고 한다. 이국땅에서 그들과 부대끼다가 얻은 결론이 스스로 중심에 서야한다는 사실이라는 것은 참 인상적이다. 번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번역은 그들의 문화를 우리에게로 이식하는 과정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맞춘 번역을 해야하는 것이다. -- 거북이 2009-7-26 4:24 am

3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