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의마을

1 # 未知에 대하여[ | ]

어느 날 아는 얼굴을
눈부시어 바라볼 수 없었다.
눈부신 것은 죄를 짓고 눈부시므로
앞산이나 오래 산 곳이
스스로 빛이 되어서
얼굴에 내 마음을 앞세운다.
그 뒤로 물결이 많은 물에서
다만 아는 얼굴이
아는 듯 모르는 듯 번쩍인다.
앞산을 떠나고 내가 물을 떠나서
어느 때든지 때는 마지막이므로
돌아가는 새소리가 박힌다.
이 세상은 소리로 깨닫는가.
아무도 없는 저녁 무렵을
내 마음이 물러선다.
아는 얼굴은 이 세상이며
다른 세상에서는 새로 인사한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서
그곳은 어제도 오늘이므로
밤에 자다 깨일 때도 있고
모든 모르는 얼굴이
무덤과 무덤 사이로 첩첩하다.
어느 날 그 얼굴들을
내가 새소리로 만난다면
어떻게 죽음이 삶을 앞서는가.
혹은 만나지 못해서
아주 모르는 얼굴로
이 세상에 들어오고 나가는가.
앞산도 흐르는 물도 모르는 것으로
마음에 담을 수 있다면
내 마음에도 담고 싶다.
그러나 죽은 뒤에도 세상이므로
그곳에도 얼굴이 있고
아직 이 세상에도 있다.
깊은 밤 모든 모르는 얼굴에
차라리 눈부시어 눈감고
이 세상에서도 다른 세상에서도
아는 얼굴이 되어
하루 이틀 사이 헤어지고 싶다.

2 # 긴 겨울에 이어지는 봄이 우리인 것을[ | ]

우리나라 사람 여싯여싯 질겨서
지난 겨울 큰 추위에도 얼어죽지 않고 무사히 보냈습니다
그러나 삼한사온 없어진 그런 겨울 백 번만 살면
너도 나도 겨울처럼 산처럼 깊어지겠습니다
추위로 사람이 얼어죽기도 하지만 사람이 추위에 깊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 좀더 깊어야 합니다
드디어 묘향산만큼 깊어야 합니다
장마 고생이 가뭄만 못하고
가난에는 겨울이 여름만 못한 것이 우리네 살림입니다
이 세상 한 번도 속여본 적 없는 사람은 이미 깊은 사람입니다
그런 순량한 농부 하나 둘이
긴 겨울 지국총 소리 하나 없이 살다가
눈더미에 묻힌 마을에서 껌벅껌벅 눈뜨고 있습니다
깊은 사람은 하늘에 있지 않고 우리 농부입니다
아무리 이 나라 불난 집 도둑 잘되고
그 집 앞 버드나무 잘 자라도
남의 공적 가로채는 자 많을지라도
긴 겨울을 견디며 그 하루하루로 깊어서 봄이 옵니다
봄은 이윽고 긴 겨울에 이어지는 골짜기마다 우리인 것을
누가 모르랴 동네 어른이며 날짐승이며
봄이 왔다고 후닥닥 덕석 벗지 않는 외양간 식구며
나뭇가지마다 힘껏 눈이 트는 봄이
이미 우리들의 얼굴에 오르는 환한 웃음입니다
깊은 겨울을 보낸 깊은 충만으로
우리들의 많은 할 일을 적실 빛나는 울음입니다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소설·수필·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전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1998년 시집 『속삭임』간행
1999년 시집 『머나먼 길』간행
미국 하바드대학 하바드옌칭 연구교수.
버클리대 개원교수 역임.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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