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학교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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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부터 3월 1일까지, 존 폰 노이만 연구소가 매 년 개최하고 있는 겨울 학교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겨울 학교의 주제Quantum Simulations of Complex Many-Body Systems : From Theory to Algorithms도 주제려니와 화려한 강사진의 위용 덕분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므로, 참가하는 것이 결정된 후 출발 직전까지도 줄곧 들뜬 기분이었다. 배용준과 최지우의 환송을 뒤로 하고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 흥분의 여운이 남아 있었으니, 감정의 지속에 익숙치 않은 나로서는 출발 전부터 이미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凡音之起 由人心生也 人心之動 物使之然也 感於物而動 故 形於聲 聲相應故 生變 變成方 謂之音 比音而樂之 及干戚羽旄 謂之樂 (禮記, <樂記 第十九> 樂本 中)

유럽통인 실험실 선배와 동행한 덕분에, 뒤셀도르프 공항 도착 직후부터 겨울 학교 시작 전까지는 도이치 구루메를 즐기며 한껏 흥분을 고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겨울 학교 참석을 위해 안내문에 나와 있는 기차역에 내렸을 때의 그 휑한 느낌이란! 한국에서도 비둘기호나 타야 겨우 볼 수 있을 그런 간이역에, 텅 빈 주차장. 동행한 선배와 나는 일주일 간의 수도원 생활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같이 내린 참석자들이 있어 최종 목적지까지 그리 헤매이지 않고 도착했다. 그리고 목적지인 롤뒥 컨퍼런스 센터의 입구에 다다른 순간 나는 다시 내가 유럽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색창연한 마리아상이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정문을 지나자 모습을 드러낸 중세의 성당(롤뒥 컨퍼런스 센터는 이 고성당을 그대로 국제 회의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은 여느 관광 명소에 뒤질 것이 없었고, 한적한 호수와 곳곳에 서 있는 조각상들은 그것만으로도 컨퍼런스 센터를 훌륭한 공원으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약간의 흥분과 함께, 역에서부터 동행한 일행들과 간단한 등록을 마치고 나자 500쪽이 넘는 강의 노트와 일정표, 그리고 조그만 쿠폰 몇 장을 나누어 받을 수 있었다. 그 쿠폰은 롤뒥 성당의 지하 바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대략 하루에 맥주 두 잔 정도를 그냥 마실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것이 다양한 배경의 참석자들이 하루 일정을 끝낸 후에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인간적으로도 친해질 수 있도록 배려한 존 폰 노이만 연구소 측의 오래된 전통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는 이들의 여유와 저력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학내 면학 분위기 조성이랍시고 기숙사 매점에서 맥주조차 없애버리는 천박한 "단무지"식 발상과는 아예 인식의 지평이 다르지 않은가! 단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지만,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 인간적으로 서로 친해질 수 있고 그것이 학문적 견지에서 바라보아도 긍정적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 믿음은 겨울 학교 기간 내내 실천적으로 검증될 수 있었다.)

겨울 학교의 강의는 오전 9시부터 12시 반까지 3개, 그리고 오후 2시 반부터 6시까지 3개의 강의로 닷새동안 진행되었다. 그 중 하루는 오후 시간에 율리히 연구소를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고, 포스터 세션도 한 시간씩 이틀이 할당되어 있었다. 강의는 크게 3가지 주제로 분류되어 각 분야별로 번갈아가며 진행되었는데, 물리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귀를 기울이는 몬테 카를로 방법에 대한 강의, 화학 쪽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분자 동력학에 관한 강의, 그리고 공통적으로 흥미있어 하는 수치적 방법에 관한 강의가 그것이다. 몬테 카를로 방법의 경우 첫 날 강의를 맡은 제임스 앤더슨이 자기 자랑만 늘어 놓는 바람에 김이 새버리긴 했지만, 충실한 강의 노트와 곧 이어진 세플리의 강의, 그리고 주위에 널려 있는 "박사"들 덕분에 그 정도는 가뿐히 웃어 넘겨 줄 수 있었다. 분자 동력학에서는 역시 명불허전이라, 듣던 바대로 달변인 터커만의 강의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번 겨울 학교의 주된 목적은 새로이 연구를 시작하는 대학원생들에게 고전적인 모의 실험 방법과 경로 적분법을 접목시켜 활용하는 분야를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짧은 강의 일정과 다양한 주제가 접목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이번 겨울 학교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애초에 너무 큰 기대를 한 데다, 도착한 날의 그 강렬한 인상에 기대가 증폭되어 강의 자체에 대해서는 약간 실망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의 내 경험상, 포스터 세션이란 전혀 기대나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고. 하지만, 일정 내내 매일같이 자정이 넘도록 술자리를 함께 헸던 빠리넬로 그룹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런 학교의 가치는 강의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중 특히 친하게 어울렸던 한 박사분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 "여러 저명한 학자들의 다양한 강의를 한 자리에서 들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학교 수업이나 그룹 간 세미나 혹은 대학원에서의 특강 등 다소간 공식적인 학제를 통해 새로운 기법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강의를 듣고 내용을 배우는 목적이 전부라면 구지 이런 기회를 찾지 않아도 된다. 연구를 하는 데 가장 근간이 되는 지식과 기술들은 강의만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습득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최신 정보에 관한 강의나 세미나가 마련되어 있어도 스스로가 동기 부여를 할 수 없으면 그러한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 또래 집단의 연구를 보고 그들과 이야기하며 자극을 받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내가 과학자로서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그를 통해 나 스스로 발전의 동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분 이외에도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 대다수가 자신이 과학자로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혼재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유럽에서도 컴퓨터 공학과 의학 이외의 이공계는 인기가 시들한 것이 사실이라고는 하지만, 개별 국가의 노력뿐만 아니라 EU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기초 과학에 대한 투자가 어느 정도 여유롭고 즐거운 연구 생활을 보장해 준다고 한다. 단순히 많은 논문을 내는 것보다 자신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만한 완결성을 갖는 "작품"을 추구하는 그들의 삶과 자세는 사회적 지원과 자신감을 모두 갖춘 자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이, 부러움과 뒤섞인 채 겨울 학교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동안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성당 본관에서 있었던 파이프 오르간 리사이틀의 잔향은 이제 내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지만 겨울 학교 기간 동안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는 아직 내 머리에 남아 있으니, 다행히도 나 역시 그들에게서 한동안 써 먹을 수 있는 자극을 챙겨 가지고 온 셈이다.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周易, <繫辭 上傳> 券七 中)

긍정적 생산은 이종 교배를 통해서 가능하고 그 전제는 종의 다양성과 소통을 위한 공간이라고 할 때, 우리의 처지가 그네들과 비교해 다소간 불리한 상황임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는 인프라 구축의 문제도 크지만, 실은 아직도 우리들의 머리 속에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까지의 과학과 과학자가 일종의 전형으로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찌보면 과학의 중심부에서보다 주변부에서 더욱더 완고한 모습을 보인다는 아이러니가 재미있지 않은가. 조금만 떨어져 바라보면, "소통과 연대"야말로 단순히 사회학의 한 테제가 아니라 20세기 중 후반 이후 과학자 집단이 취해온 연구 방식에 있어 불가결한 "Ansatz"로 자리 매김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기존의 학제를 통한 최신 정보의 교육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좀 더 유연한 방식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마련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지금보다 여유롭고 풍성한 생산이 가능하리라 보는 것은 너무 낙관적인 생각일까?

아무튼, 강의에서만큼이나 또래들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이번 겨울 학교는 그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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