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 근현대사

ISBN:8974740281 얼마전에도 풀빛에서 나온 책들을 여러권 샀는데 그것들은 언제나 읽으려나...휴우.


봉화 제 2차 '95 공식 세미나 발제문
'강좌 한국근현대사'
1부 근대:제4강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95학번 정철

  1. 일제의 '문화정치'와 식민지자본주의의 전개

3.1운동에서 드러난 조선민중의 저항에 놀란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고 기만적인 유화정책을 펴나갔다. (*왜 문화'통치'가 아니라 문화'정치'인가)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었지만 오히려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였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나 극히 일부였을 뿐이고 그나마 일제를 인정하여야 가능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기만적 문화통치로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상층부를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그들 민족 개량주의자들은 이에 발을 맞추었다. 이런 문화통치의 본질은 "조선은 당장에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항일투쟁을 포기하고 일제의 보호아래 먼저 실력을 쌓은 뒤에 독립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조차도 일제가 인정할 때라야 가능하다"라는 마루야마의 망언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이후 자국의 부족한 식량난 타개를 위해 독점자본을 침투시켜 쌀을 공출해갔다. 또 회사령으로 민족자본을 억제시킨 일제는 회사령을 철폐함으로서 독점자본 침투를 더옥 용이하게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더욱 궁핍하게 하여 노농운동이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148페이지의 첫째줄)

  1. 부르주아 민족주의운동의 분열과 쇠퇴

3.1운동 뒤 부르주아 민족주의세력은 민족개량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나뉘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통하여 민족 독립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친일적 타협노선을 걷기 시작했다(동아일보 계열). 반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일보(지금은 어용인 ^^;)계열을 중심으로 문화정치의 기만성과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일제와 투쟁하였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실력을 양성한답시고 물산장려운동을 벌렸다. 이 운동은 처음엔 대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점차 그 피해가 민중에게 돌아가고 일본상품 배척으로 이어지지 못해서 곧 흐지부지 되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도 민족 지도자 양성을 주장하며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벌렸다. 처음엔 민중의 지지가 있었으나 고등교육은 소수의 계층만이 누릴 수 있었기에 대중교육주창자들의 비판과 대중의 외면으로 실패하였다. 실력양성운동은 일제의 속셈과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운동이었다.(*실력 양성운동의 한계)
3.1운동이후 임정 수립문제가 대두되어 대한국민회의, 한성정부, 상해임정 등이 구성되었다. 곧 이의 통합문제가 생겨 결국 외교독립론을 노선으로하는 상해임정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외교독립론은 실망만 안겨주었고 이에따라 통제력도 상실하였다.(*이승만에 대하여)
임정은 외교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식민지 재분할에 급급한 제국주의자들의 '파리 강화회의'나 미국등에 외교력을 부었기에 결과는 실패였다. 그리하여 임정의 성격을 바꾸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양측의 의견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임정의 지위는 나라밖의 수많은 독립운동단체의 하나로 격하되었다.
만주지역의 항일독립군은 이주 동포사회를 기반으로하여 성장하였다. 특히 대한독립군의 봉오동 전투와 북로군정서의 청산리 전투는 독립전쟁사에 남을 대첩이었으나 일제는 독립군 소탕을 구실로 간도지역의 3만여 동포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여타 독립군부대는 통합과 분열을 거듭하였다. 이들 독립군 단체들은 일종의 자치정부였으나 노선 분열과 파벌 대립, 교포 현실과의 괴리, 일제의 토벌 등에 의해 힘을 잃게 되었다.
의열단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테러단체인데 이들은 후에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노농운동에 힘쓰게 된다.

  1.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과 민중운동의 발전

제국주의 열강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운동은 모두 민중의 요구를 저버렸고 그에따라 사회주의사상이 대두되게 되었다. 사회주의사상은 빠르게 그 세력범위를 넓혀나가 민중의 계급의식을 높여갔다.(*계급의식) 그러한 와중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여러차례 해체되면서도 또다시 결성되어 민족해방운동에서 큰 몫을 차지하게된다.
노동운동이 활발해짐에따라 점차 노동조직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가장 강렬한 파업은 원산 총파업이었는데 합법투쟁만을 고수하던 원산노련이 끝내 일제의 무력탄압에 의해 진압됨으로서 실패하였다. 농민운동도 처음엔 계몽적 성격을 지니다가 차츰 농민조직으로 바뀌어갔다. 대표적인 투쟁방식은 소작쟁의였는데 이를 통하여 일제의 식민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이 외에도 6.10만세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으로 대표되는 학생운동과 여성운동 등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주의, 노동, 농민, 대중운동들은 일제의 억압과 수탈구조하에서 반일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는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 신간회 운동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은 단일한 반일전선구축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의 결과물이 신간화 운동이었다. 신간회는 지회별로 활발한 한일투쟁을 벌렸다. 특히 화전민 추방에 대한 항의와 민중대회 개최모의등이 주요 활동이나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점차 지도층이 우경화하면서 이에 반발하여 신간회 해소가 나타나게 되었다.
코민테른이 노선변화함에따라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를 개량주의적 단체로 규정하고 반발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신간회는 해소하게 되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해체가 되었다. 지도부의 우경화는 활동의 침체를 가져왔지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함께 합법적으로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을 스스로 해체한 것은 잘못이었다. 이는 개량주의자들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항일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진영의 구심점을 잃게하였다. 그러나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노선과 사회주의 세력이 모여 결성한 최초의 반제민족통일전선이라는 점에서 중요한의의를 지닌다.


'95 제 4차 교양세미나 발제문

                       간추린 한국 근현대사
                                               발제자:정철

1.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은 그동안 누적된 봉건 지배계층의 수탈을 견딜 수 없게된 농민들이 봉기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비록 외세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우리 민족의 집결된 역량과 우리 민중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폐정개혁요구가 갑오개혁에 반영됨으로서 나타났는데 이것은 여권신장을 포함한 상당히 진보적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

  • 왜 갑오농민전쟁은 '전쟁'이라는 명칭이 쓰이는가.

2. 3.1운동 3.1운동은 일제의 폭정에 항거한 거족적 민중항쟁이었다. 이는 전 세계적인 반 제국주의적 조류와 우리 민족의 민족해방욕구 표출이 맞물려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가지는 의미는 민족해방은 민중의 결집된 기반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 것과 대중적 기반을 확립시킨 것에 있다.

3.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은 해방 직후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서 우리에게 온 미 군정의 학정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운동이었다. 비록 미군의 무력적 탄압에의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러한 과정속에서 민중의식이 고양되기에 결코 실패로 끝났다고만 볼 수는 없다.

4. 2.7구국투쟁 2.7구국투쟁은 남한 단독선거는 바로 분단의 고착화와 이어진다는 걸 아는 학생,노동자,농민이 전국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이는 뒤이어 생길 이승만정권의 정통성에 먹칠을 한 사건이었다.

  • '인공 수립을 원조할 것'?!

5. 남북연석회의 남북연석회의는 미국의 남한 단독선거를 막기위한 남북한의 지도자들이 평양에 모여서 한 회의이다. 이는 분명히 우리민족이 분단의 고착화를 원치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지만 미 군정이 끝내 5.10단독선거를 강행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우리민족이 처음으로 이념을 넘어 통일을 위한 단결을 했다는 점과 해방은 스스로의 힘으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깨우치게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 이것이 성공적이었다해도 과연 우리가 이념의 벽을 넘을 수 있었을까.

6. 제주도 4.3항쟁 4.3항쟁은 미군의 남한단독정부수립 기도를 분쇄하고 점차 강화되는 미국의 탄압에 항거하기 위한 제주도민들의 봉기였다. 이는 미군의 무차별적인 살상으로인해 진압되었지만 주민과 유격대와의 연대, 국방경비대의 지원등 단결된 역량을 보여주었다.

  • 이정도면 내전의 성격을 띠는것은 아닌지.

7. 여순항쟁 여순항쟁은 제주도로 진압작전을 펴라는 미군의 지시를 거부하고 '봉기'를 택한 제 14연대 장병들이 여수,순천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일으킨 항쟁이다. 이는 민중들의 호응을 얻어 순식간에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규모의 진압군이 투입됨에따라 실패하였다. 여순항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이승만 정권의 반민중성을 그대로 노출시킨 사건이었다. 후퇴한 봉기군은 산으로 들어가 유격대가 됨으로서 4.3항쟁의 불길을 전국에 퍼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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