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1 개요[ | ]

강은교(1945~)
  • 시인
  • 68년 순례의 잠으로 등단
  • 동인 '70년대'에서 활동
  • 71년 허무집
  • 허무를 밀어붙여 근대를 초극하려 했다는 평가

2 참고[ | ]

3 # 우리가 물이 되어[ | ]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4 # 사랑법[ | ]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뒤에 있다.

- 시선집 '풀입' (1974) 中

5 # 파도[ | ]

떠도는구나 오늘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서편에서 동편으로
물이 되어 물로 눕지 못하는구나.
꿈꿀 건
온몸에 솟아나는 허연 거품뿐
거품 되어 시시때때 모래땅 물어뜯으며
입맞추며 길길이
수평선 되러 가는구나.
떠돌며 한 바다
막으로 가는구나.

누가 알리
엎드려야만 기껏 품에 안아보는 세상
날선 바람떼 굽은 잔등 훑고 가면
쓰러져 내리는 길, 길 따라
사랑이 얼마만 하더냐, 묻는 먼지알 신음 소리
목숨의 길이 얼마나 하더냐, 묻는 먼지알 신음 소리
등덜미에 철썩철썩 부서져

떠도는구나 오늘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서편에서 동편으로
물이 되어 물로 눕지 못하는구나.
아, 이 벽에서 저 벽
저 벽에서 이 벽

끝내 거품 피 넘쳐 넘쳐
수평선이 흐느끼는구나.
흐느끼며 한세상
세우는구나.

6 # 비[ | ]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7 # 당신의 손[ | ]

당신이 내게 손을 내미네
당신의 손은 물결처럼 가벼우네.

당신의 손이 나를 짚어보네.
흐린 구름 앉아 있는
이마의 구석구석과
안개 뭉게뭉게 흐르는
가슴의 잿빛 사슬들과
언제나 어둠의 젖꼭지를 빨아대는
입술의 검은 온도를.

당신의 손은 물결처럼 가볍지만
당신의 손은 산맥처럼 무거우네.
당신의 손은 겨울처럼 차겁지만
당신의 손은 여름처럼 뜨거우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
누워 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
당신이 슬픔의 살을 만지니
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기쁨의 살이 되네.

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
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당신이 내게 손을 내미네
물결처럼 가벼운 손을 내미네
산맥처럼 무거운 손을 내미네.

8 # 벽[ | ]

벽이 젖고 있다
벽에 걸린 액자에도 이제
거뭇거뭇 곰팡이가 피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젖어온 것이다
그래서 젖음에 익숙해온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벽을 고치지 못한다
젖고 있음을 알면서도
문득문득 벽이 무너지는 공포에 떨면서도
그럼에도 왜 나는 저 벽을 고치려 들지 않을까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저 벽을 의심하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는 모두
저 벽에 등을 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몇 년 전부터
우리의 등도 젖어 있다
거뭇거뭇 곰팡이가 핀 채.


 

연세대 영문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 등이 당선되어 등단함.
1971년 첫시집 『허무집』 간행 후, 『풀잎』(1974), 『빈자일기(貧者日記)』(1977), 『소리집』(창작과비평사 1982), 『붉은 강』(1984), 『바람노래』(1987),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1989), 『그대는 깊디깊은 강』(1991), 『벽 속의 편지』(창작과비평사 1992) 『어느 별에서의 하루』(1996) 등의 시집과 산문집 『허무 수첩』(1996) 등을 간행함.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상 수상.
1992년 제37회 현대문학상 수상.
현재 동아대 국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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