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긴 하루

(가장긴하루에서 넘어옴)

2002 09 25 水 : 가장 긴 하루[ | ]

눈을 떠보니 7:28이다. 알람을 7:30에 맞추고 잤으니 정확하다. 곯아떨어지면 이렇게 일어나기는 힘들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이정도로 맞는거보면 생체시계라는 것도 대단하긴 하다.
이렇게 일찍 아침밥을 먹어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양식, 일식중에 일식을 먹었다. 그냥 백반이었는데 반찬이 조금씩 여러개 나오는 것이 전형적인 일본 스타일이다. 김 포장이 한지로 되어있는 것이 특이했다. 호텔이라 그런지 고급스러운 뽀대가 생명인듯. 우메보시를 하나 먹었는데 시다못해 쓰기까지 했다. 2200엔.
밥먹으면서 사람들이랑 여러가지 얘기를 했는데 어제의 그 화끈한 처자는 냉장고를 비우고 거기에 영국으로 들고갈 김치를 넣어두었다고 한다. 흠 나는 냉장고에 있는 것을 들기만해도 카운팅되는 것으로 알고있어 열어볼 생각도 안했는데 여튼 대단하다.
세면대에서 몇가지 가져가기로 했다. 손바닥만한 수건과 기타 도구들. 훔쳐가는 것도 아니니 이정도로 어글리 코리언이 되진 않을게다. 이후 이 손바닥만한 수건은 꽤 요긴하게 쓰였다. 처음엔 그냥 수건으로 나중에는 발수건으로. ^^
심심해서 방재방범 안내서를 읽었는데 지진 대피법이 적혀있다. 일본이 맞긴 한가보다. 엘리베이터를 타지말고, 유리창에서 떨어져있으며 전원을 뽑으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호텔의 로비에는 라쿠라쿠귀국이라는 브로셔가 놓여있다. 이건 여러나라의 특산품을 택배로 배달해주는 서비스였다. 괜히 들고오지 말고 이것으로 집에 쏘라는 얘기다. 참이슬 한병 8000원, 컵라면 하나 6000원. -_-

출국심사 할 때 배낭이 커서 왠만하면 들고타는 것을 허용해주지 않아 애먹었다. 나는 히드로 국제공항에 가자마자 바로 개트윅 공항으로 가야했기 때문에 배낭을 부치면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타야한다고 말을 했지만 영 설명이 전달되지 않는다. 내 잘못은 아니라고 굳게믿고싶다. -.- 그래서 도표로 그려서 설명을 했더니 간신히 넘어갔다. 영국가면 나의 이 저질영어가 통할지 심히 걱정스럽다. 여튼 그덕분에 어제 만났던 친구들과는 거리가 떨어졌다. 12시간을 심심하게 보내게 되는 위기상황이다.

런던행 비행기가 이륙했다. 이륙할 때는 조금만 눈을 떼면 사물이 금방 조그맣게 된다. 어제 착륙할때는 고도가 높을때 컴컴하던 것이 고도가 낮아지면서 빛이 조금씩 보여 나중에는 대도시의 야경이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간사이는 정말 바다에 떠있다. 용하네 거.

Tep:P9250219.jpg
작아지는 도시

바다는 색깔이 다르다. 청남색 바다와 청록색 바다가 있다. 아마도 심해와 천해가 구분되면서 색깔이 달라보이는 것이 아닌가싶은데 그렇게 선명하게 색이 바뀌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물론 자신없는 이론이다. 이제 배들이 물고기처럼 보이는데 하얀 물살이 꼬리같다. 머리 바로 위에 구름이 있는 느낌도 괜찮구나.

또 기내식 퍼레이드다. 어제의 오츠마미와 함께 음료수를 권한다. 우유에 설탕을 달라고 해서 타먹었더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난 당뇨로 가지 않을까 싶다. -.-
이번에도 역시 일식을 시켰다. 특이한 춘권 몇개, 메밀국수, 밥 그리고 찹쌀모찌 하나다. 밥 밑에 뜨듯한 돌을 놓아 밥이 빨리 식지 않도록 배려를 해둔 것이 훌륭하다. 이런 섬세함은 확실이 일본적이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나오는지 누구 KAL이나 아시아나 타본 사람은 말해주오.
술을 권하기에 난 못먹어본 아사히 맥주를 마셨다. 맥주맛이 뭐가 다른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국내 맥주도 구분 못한다. -.- 그리고 와인도 고를 수 있더라. 화이트와 레드. 술권하는 비행기로구만. 빨리 마시고 자버려라라고 하는 배려인지도.

고도가 높아지니 별로 볼것도 없고해서 솔리테어를 좀 했다. 여기는 카드게임과 몇개의 단순하면서도 머리쓰는 게임들이 있는데 뭐 좀 할만하지만 하다보면 얼마 안가 지루해진다. 하지만 나중에 심심해지면 그나마 그거라도 하게된다. 이럴때 책이 너무 아쉽다. 맥주에 약을 탔는지 졸리다. 기압이 낮기때문에 빨리 흡수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시안 바이브레이션이라는 프로를 듣고있는데 중국애들 노래가 한참 나오다가 우리나라 애들이 나온다. 신화다. 그런데 말만 다르지 중국 노래랑 크게 다르지도 않다. 그넘들이 따라하는건가. 당대의 음악 패턴에 대해 이해하려면 일단 한중일의 음악은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그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파악해야 할 것 같다.
맥주때문에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일어났지만 시간은 그리 많이 흐르지 않았다. 이제 러시아 영공을 지나는듯. 아직 멀었다. 잠시 밖을 내다보니 작렬하는 태양아래 아무것도 없고 바닥에는 구름 카페트가 깔려있다. 깔끔한 청정상태. 하지만 그 청정상태는 매우 위험하다. 오존으로 가득찬 공간. 오존은 멀리하면 인간에게 도움을 주지만 가까이하면 유독가스다. 반응성이 매우 높기때문이다.
아마 천국이란 이런 공간인지도 모른다. 토킹 헤즈TalkingHeads의 Heaven이라는 곡의 후렴구는 이러하다.

Heaven is a place where nothing ever happens.

그리고 프라도미술관에서 본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중에 천국, 연옥(현재? 지상?), 지옥으로 이어진 제단화가 있는데 여기의 천국부분은 깔끔하지만 겁나게 심심한 그런 곳으로 묘사되어있다. 이 그림이 14세기의 그림인 것을 보면 사람들의 상상이라는 것은 다들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뒷자리 일본인으로 보이는 여자애에게 양해를 구하고 등받이 부분을 조금 기울였다. 내가 멋모르고 한국말로 했는데 역시 당황한다. 다시 영어로 했지만 잘 통하지 않는다. 여튼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조금 후에 필담을 시도했고 그 필담(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때 여자애들이랑 수업시간에 주고받던 쪽지에 가까운)덕분에 지루한 비행시간이 그래도 좀 재미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호주넘이다. 일본 경유로 영국에 가서 이미 영국에 가있는 여동생 집에서 삐대다가 컴퓨터쪽의 일을 구해서 일하고 싶단다. 이미 열시간짜리 비행을 하고 또 열두시간짜리 비행을 하는거다. 지겹겠다. 여튼 호주 출신들이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닌다. 그러고보니 여행자 가이드의 바이블인 론리 플래닛 시리즈도 호주인이 처음에 만든거라 하더라. 이후 호주인 여행자들은 심심찮게 만났다.
아 영어로 말하는 것이 너무 힘겹다. T_T 언어가 프로토콜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로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에 찬성표를 날렸을 것이다. 당신 아이에게 모국어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영어를 골라주겠수, 아니면 조선말을 골라주겠수? 라는 질문에 단호하게 조선말요!라고 답하기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지금 시베리아 위를 날고있는데 아래는 꾸불꾸불한 강이 있는 녹지뿐이다. 우각호가 되기 직전의 강인가보다. 인간의 흔적이란 찾아볼 수 없다.

Tep:P9250220.jpg
시베리아

그나저나 지구 자전속도로 계속 걸어가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것인가라는 질문이 갑자기 생겼다. 비행시간이 기니까 별 쓸데없는 생각이 다 든다.
이제야 상뜨 페테르부르크를 지났다. 시베리아 넘어가는데 6-8시간은 걸린거 같다. 넓다.
출발할때까지만해도 멀쩡하던 시계가 그새 맛이갔다. 이따위 비매품을 믿은것이 실수다. 고치려고 여러가지 쇼를 해봤지만 승무원에게 삑삑대지 말라는 쿠사리만 먹었다. 시계가 없다니 큰일이다.

저녁식사를 했다. 이번엔 선택의 여지를 안주고 이태리식 리조또와 빵, 과일을 주었다. 이번에는 백포도주를 골라봤다. 뭔지 몰라 궁금해서 시켜봤는데 이거 상당히 독하구먼. 조금 마시다 포기. 비행기 자주타면 알콜중독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스톡홀름 근처의 발틱해 위이다. 아주 촘촘한 다도해다. 이동네는 섬들사이에 바다가 있고 또 바다사이에 섬들이 있어 생활양식이 독특할거 같다. 다들 수영 하나는 끝내줄 듯 싶다. 그나저나 자기 위치가 어디쯤이고 고도가 얼마나 되는지 친절하게 보여주는 점이 맘에든다. 밖은 보통 영하 5-60도, 고도는 1,2000미터. -_-

Tep:P9250221.jpg
발틱해 위

구름을 뚫고 내려오니 바로 영국이 보인다. 흠 영국이군. 락의 나라 영국.

Tep:P9250222.jpg Tep:P9260223.jpg
레고마을 비슷하게 느껴진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의 입국심사 줄은 엄청나게 길었다. 오우 이러다간 개트윅 공항에서 더블린행 비행기를 놓치는거 아녀 싶었다. 이거 기다리다간 3박 4일은 걸릴듯 하여 인도계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개트윅으로 가니 시간이 없다라고 말했다. 용케 알아들어주어 나는 맨 앞으로 갈 수 있었다. 더블린행 비행기표를 보여주니 15초만에 통과. 입국심사 어렵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라더니 나는 정말 순식간에 끝났다.
나오자마자 정신없이 영국 관련 브로셔를 몇개 집고 개트윅 공항까지 가는 버스정류장을 찾아헤맸다. 표지판들이 있는듯 하긴 한데 영 못찾겠다. 물어물어 버스정류장까지 왔는데 버스비가 17P. 난 12P로 알고있었는데 17P란다. 나중에 버스를 타고보니 좀 황당했다. 오자마자 3만원이 넘게 뜯긴거다. 이건 내가 더블린 가는 비행기표보다도 비싼 가격이다. 무서운 영국.
여튼 버스를 탔는데 여기는 테이블이 가운데 있고 서로 마주보도록 좌석이 되어있다. 앞에 할머니가 있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친구가 노르웨이에 살아 5일간 다녀오는거라고 한다. 어쩌다보니 휴일에 관한 얘기를 하게되어 나는 우리나라의 추석과 음력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음력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엄청나게 어려웠다. 험난한 한달이 될거같다. 할머니는 그리고 튜브(영국의 지하철)가 파업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 나는 실례를 하나 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내가 2차대전시 있었던 독일의 런던 공습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그때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으 조심하자.

개트윅 공항은 히드로보다 깔끔했다. 주로 먼 곳이 아닌 외국행 비행기가 이용하는 곳이다. 런던에는 히드로, 개트윅, 루튼, 스탠스테드 그리고 런던 시티 에어포트까지 용도에따라 5개의 공항이 있다. 나는 히드로와 개트윅이 근처일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시간쯤 걸리는 거리다. 참고하시라.
물어물어 라이언에어를 찾았다. 일본에서는 다들 친철했는데 여기는 캡 불친절하다. 3국인을 위한 배려따위는 없다. 하긴 그놈들이 내가 외국인인지 아시안계 영국인인지 알게뭐냐. 요즘 세상은 영어잘하는 놈이 깡패인데. 여튼 라이언에어에 티켓을 내밀고 보딩패스를 받았다. 이거 좌석도 없고 탑승 게이트도 나중에 정해지는 것이 완전 버스 분위기다. 부친 짐은 과연 받을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럽다.

기다리는 시간에 면세점을 둘러보았다. 음료수 1.5P, CD 12P라. 역시 비싸군. 소비수준을 한국에 맞추다간 귀국일을 땡겨야 할거 같다. 나왔다는 소식만 들었던 피터 게이브리얼PeterGabrielUP을 결국 여기서 보다.
네시간이나 있어야 텔아비브로 떠나는 뚱보 아주머니가 나에게 전광판을 읽어달란다, 허허. 친절히 읽어주었다. 이후 나에게 뭔가 물어보는 여행자들을 의외로 많이 만나게 된다.
이 공항 운영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대기실에서 탑승지까지 가는데 20-25분 걸리는 곳도 있건만 그 게이트는 고작 30분전에야 모니터에 뜬다. 즉 그 전에는 다들 게이트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즉 다들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꽤 무책임한 서비스다. 그런데 알고보니 나중에 마드리드 공항에서도 그랬다. 많이들 그러나보다.
비행기에서 내릴때 들고내린 에비앙 생수를 마시다가 좀 어이가 없어졌다. 이 생수는 알프스의 광천수를 일본에서 포장해 일본 비행기에서 받고 런던에서 내 뱃속에 들어갔다. 이게 정상일까? 현대 자본주의의 엽기성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닐까? 나는 마빈 해리스의 책에서 패스트푸드가 얼마나 엽기적인 유통경로를 통해 지구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낭비하고 있는지 읽은 적이 있다.

더블린 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왜 이리 피곤한지 알게되었다. 지금은 한국시간으로 새벅 5시이다. 난 밤샘이란 모르는 인간인데 이시간까지 깨있으니 당연히 졸리지. 죽갔다. 앞으로 이렇게 좀비 될 일이 많이 생기겠지. 초췌한 자화상을 하나 찍다.

Tep:P9250225.jpg
맛이 간 거북

오호 그래도 애기있는 사람들부터 먼저 태우는 것을 보니 매너가 있긴 있구먼. 비행기를 타자마자 쓰러졌다. 널부러져있는데 다들 박수를 친다. 왜 박수를 치는지도 모르고 나도 좀 쳐준다음에 옆에있는 피어싱 뚱보 양키 녀석에게 물어봤더니 여승무원 둘중 하나가 이번이 마지막 비행이라고 하는군. 이륙도 못느끼고 잠들었다. 이 보잉 737 비행버스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면 아마도 다시는 못탈거 같다. 죽어도 자다가 죽는게 행복하지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졸도(?)했다.
다행히 살아서 내렸다. 짐도 제대로 찾았다. 나와서 친구넘을 찾아봤는데 안보이네. 전화기로 갔는데 전화카드 사용법도 모르겠다. 국제전화 카드에 아일랜드의 번호는 인쇄되어있지 않았다. 뭔가 다른 전화는 없나 하고 헤매다보니 친구넘을 만났다. 그넘은 라이언에어가 연착될줄알고 널널하게 있다가 제시간에 도착해서 당황했다고 한다. -_-

이층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길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길이 좁다. 러시아워시간에는 아주 죽여준다고 한다. 더블린은 수도 주제에 지하철도 없다. 2013년에 완공한다고 정치인들이 떠들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이녀석이 더블린은 구리시정도 분위기라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보다.
꽤 좋은 집을 얻어 살고있어 놀랐다. 방세도 400E라고 하니 괜찮다. 같이 집얻어 사는 친구가 넷이 있고 방이 세 개 있어 방세를 쪼개어 낸다고 한다. 유학와서 이렇게 사는 것은 꽤 좋아보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되려면 짬밥이 좀 필요하다는군.
씻고 쓰러졌다. 32시간의 긴 하루였다.


안설레는출발 <= 가장 긴 하루 => 어털리버털리

거북이유럽서부여행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