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 이야기

 

한국어로 된 가우디 관련 문헌은 그 유명세에 비해 의외로 적다. 년도는 완성 년도를 뜻한다. 성 가족 성당처럼 죽어라 오래 걸린 것들도 있고 2-3년 만에 끝난 것들도 있다.
그 외에 몇가지 인상깊은 것들을 정리해본다. 참고:아가우디 판돌이 각종 기행문

1 # El Capricho, 188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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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으로 준비하지 못한 탓에 가우디 특유의 유기체적 양식이 드러나기 전의 작품들을 보지 못했다. 사진으로 판단해보면 초기 작품들 중에 가장 걸작은 이 작품 변덕El Capricho가 아닌가 싶다. 동화적인 색체감각이 잘 살아있는 건축물이다.

변덕이라는 제목은 고야가 만년에 그린 세개의 판화집 중 하나의 제목이기도 하다. 고야는 변덕이라는 제목으로 도저히 이성을 가진 종자들이 하는 짓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작태들을 판화로 남겼다.

이 외에 가우디의 작품 연대기 상으로 보아 특이한 건물들로는 아스토르가 주교관(1887), 구엘 성지 교회(1917)를 들 수 있다.

2 # Casa Batllo, 19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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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돌이참조

3 # Casa Mila, 1910[ | ]

아가우디참조

4 # Parc Guel, 1914[ | ]

아가우디참조

5 # La Sagrada Familia, ? -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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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우디참조

6 # 몇가지 인상적인 멘트[ | ]

  • 조화는 예술작품의 본질이다.
  • 곡선은 한정을 의미하고 직선은 무한의 표현이다.
  • 현명한 사고는 과학보다 우수하다.
  • 자유로운 사고는 자유가 아니라 진실의 노예이다. 자유는 사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의욕에 속한다.
  • 즉흥곡은 결코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평론가는 힘겨운 노력을 통해 얻어진 생각만을 말해야 한다. ..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질과 용기가 결여되어 죄절한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다. (허걱...-.-a)
  • 민주주의는 무지하고 우둔한 지배형태이다.
  • 아름다움은 진실의 광채이다.
  • 조화, 즉 균형에는 대조가 필요하다.
  • 반복
  1. 과학은 성실에 기초하고 있다.
  2. 성과가 나타나는 유일한 길은 반복이다.
  3. 세상에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실수를 적게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반복하는 사람이다.
출처는 ISBN:8989348145 이다.

7 # 훔쳐온 가우디 글[ | ]

본문은 여기에서 훔쳐왔다.

안토니오 가우디 코르네(1852-1926)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그의 작품이 단지 건축 분야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이 이해하고 있는 건축이라는 분야와 그의 건축 작품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그의 작품은 어느 특정한 분야나 양식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전통적인 체계로서는 분류하기가 힘들며,어느 특정한 스승으로부터 사사 받은 제자라고 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가우디의 작품은 시대와 양식 그리고 작품이 이루어진 시대 그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그의 놀랄 만한 관찰력과 자연에 대한 대단한 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늘, 구름, 물, 바위, 나무, 동물이나 산과 같은자연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해서 관찰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직접 배우곤 하였다.그의 가족 중에는 건축가라곤 없었으며 단지 구리를 다루는 공원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다시 말해서 건축가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적인 교육환경에서 자란것은 아니라고 할수 있다.게다가 가우디는 매우 소박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대단히 명석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배제하지 못한다.그는 보통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와는 거리가 멀 정도로 사물을 아무 편견 없이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수년간 가우디와 같이 일한 화가인 후안 무네르네에 의하면 가우디는 '확실한 생각을 가진 사람' 이었다고 한다.그의 일생 동안 실용적이고 매우 간단하며 기능적인 해결책을 추구하였으며 놀랄 만한 결과를 이룩하였다.

가우디 건축 형태를 관찰해 볼 때, 그의 정신 상태가 복잡하거나 좀 뒤틀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그의 건물의 들쭉날쭉한 정면은 바로크식의 건축 개념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한편 불합리한면도 다소 있다.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사실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의 자연에 대한 영감에의한 건축구성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서평면에서 나타나는 선으로서 추상적인 형태에 기초를 둔 간단한 기하학을 처음부터 사용하고 있는데,이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가우디의 결론은 매우 간단하였다. 만약 건축가가 그의 작품에서 기능성을 추구한다면 그는 미를 찾게 될 것이다.반면에 직접 아름다움만 찾는다면 예술 이론이나 미학 혹은 철학만을 깨닫게 될 것이며,이러한 추상적인 생각들은 가우디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분야이다.가우디의 모든 건축은 독창적이고 기본적인 방식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자연에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준 그것과 매우 유사한 균형된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는 소위 밀폐된 천장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석고나 석회 멧돌로 된조그만 형태로 결합되어 있는 벽돌 2-3개 정도로만 이루어진 가느다란 형태의 천장 양식으로 15세기 이후로 매우 보편화된 양식이다.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쌍곡선의 포물체 천장을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조각 방식을 창조해내기도 하였다.난로나 환풍기 Mila 저택의 계단 출구는 조각의 측면에서 대단히 아름다운 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모두 카탈란 방식의 천정으로 되어 있으며 Bellesguard와 빠티요 집의 지붕과 동일한 양식이다.그는 건축에 대한 천직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전 일생동안 건축 이외에는 한 것이 없었다.결혼도 하지 않았고 글도 많이 쓰지 않았으며 여행도 별로 하지 않는 편이었다.정치 에도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건축에만 관심이 있었다.가우디에 의하면 지중해 사람들은 종합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북쪽 사람들은 분석적이라고 한다.이 세상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 분석력은 필요하지만 예술적인 창조는 종합적인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그의 지중해의 풍경과 그 지역 국가들의 땅이 지니고 있었던 크나큰 열정은 가우디의 종교적인 정신에 의해서 더욱 커져만 갔다.자연이 신의 작품이라고 간주하고 그곳으로부터 건축 양식을 얻게 된다면 조물주의 작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우디는 신은 인간을 통해서 창조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고 믿고, 품위가 있는 예술 창조활동을 계속하였다.그의 신앙심은 대단하였고 신부들의 충고를 따르는데 그치지 않았다. 여러번 그들과 논쟁을 벌인적도 있지만대체로 빅, 마요르까, 아스토르가의 주교 등 교회의 지도자들과 친분이 있었다.그는 기도나 예배 의식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것을 즐겼으나 신학에 관한 논쟁은 원하지 않았다.그는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였다.

그의 건축양식은 매우 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시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항상 건축을 통해서표현되었다. 대만의 건축가인 호테치엔(Hoh Teh-Chien)은 가우디에 관한 그의 박사 학위논문에서 주장하기를가우디는 형이상학적인 건축을 실현하였으며 그는 건물을 지으면서 자기의 생각을 밝히는 철학가나 다름없다고 주장하였다.가우디 자신이 즐기는 건축학 이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는 그의 스튜디오 창문 밖을 가리키면서,저기 보이는 나무가 자기의 제일 좋은 건축 교본이라고 말하였다.그가 건축한 작품은 얼마 안되는 건물이지만 성가족 성당 자체로서 건물 한 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1969년 이후 그의 17가지 작품이 스페인의 국립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가우디는 그의 작품을 계속적으로 완벽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고 그는 자기의 작품이 완성 되었다고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다.또한 시멘트로 완벽하게 건물을 지었으며 아주 미세한 부분 즉 장식이나 보조에 이르기까지 구조에도 치밀하였다.가구나 유리창, 단철된 일부분 등 모든 종류의 보조 요소까지도 설계하였으며 모델을 반복하는 적은 결코 없었다.가우디 건물 하나하나가 제각기 특징을 가지고 있고 다른 것과 유사한 면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때문에 하나의 단위를 이루게 되며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으며,하나의 건물에서만 오로지 존재하게 된다.Walter Gropius가 설계한 Bauhaus 신건물이 Dessau에 들어설 무렵, 가우디는 1926년 사망하였다.그 당시에는 Le Corbusier, Siegfried Giedion등이 주창하는 합리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다.이러한 추상적 개념의 단순 기하학적인 건축 형태는 가우디 작품과는 대치되는 것으로서,그들은 가우디의 작품을 바로크 양식이나 비합리적이라고 간주하였다.

그 이후의 건축가 세대들은 가우디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1952년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 가우디 전시회를 계기로많은 건축 평론가와 이론가들이 가우디 건축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으며논문 전시회, 연구과정, 강의가 개최되는 등 가우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나 건축가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 이유는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저명한 스승의 모델을 그대로 답습, 그들의 해결책을 반복해오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가우디의 작품은 모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수많은 모방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가우디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어떠한 사람의 해결책을 모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대자연에서 영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자연적인 형태에도 다양한 해결책이 있기 때문에 결코 반복될 위험이 없다.가우디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을 추구함에 따라 경이적인 구조를 발견하였는데 재래의 건축 양식과는 달리,그는 시간을 초월한 자연 속의 그 무엇인가를 추구하였다.가우디의 건축은 항상 자연 속에서 직접 해결책을 찾았기 때문에 결코 피곤하지 않으며그가 살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그의 건축은 시간을 초월하였으며 그 이유는 예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기능적이고 유용한 형태를 만들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가우디의 유명한 말 중에"독창성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든 것의 근원은 신이 창조한 자 자연이라는 것을 의미한다.우리 나라에는 그의 사후 60년이 지난 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작품의 강렬한 개성과 독창성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곡선을 다양하게 이용하고 사이사이에 오브제와 같은 기묘한 형의 장식이 붙여지고,컬러플한 모자이크나 스테인드 글래스가 색채를 더해준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독창적인 건축물은그 당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 빼어난 기발함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가우디 하나만을 보기 위해서라도 얼마든지 바르셀로나를 찾을만한 가치가 있다.또한 그렇지 않더라도 거리를 거닐다 보면 가우디 작품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눈길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가우디의 개성과 사상

가우디를 이해하려면 건축분야에만 국한하여 평가해서는 안된다. 건축사가들은 건축사에 입각하여다른 건축물과 그의 건축물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일직선상으로 동일시하며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어느 스승에게서 사사 받은 일도 없고, 특정집단에서 일을 한 적도 없으며,가족 중에 누구도 건축가가 없었다는 점이다.또한 그의 작품은 어느 시대의 건축양식 및 특정분야로 분류하는 데는 난해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양식과 형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무런 편견없이 사물을 관찰하고 이를 작품화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그는 매우 소박했다. 그러나 대단히 명석했다.가우디와 수년간 작업을 함께한 화가 후안 무네Juan Munn의 말에 의하면"가우디는 확고하고 명석한 생각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그러나 가 우디의 작품을 살펴보면 선은 곧은것이 없으며, 입면은 들쑥날쑥 하고,바로크양식으로 보이는 외관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나 불합리한 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이로 인해 그의 정신상태가 좀 괴팍한 면과 마음이 뒤틀려 있지 않았나 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판단이다.이 시대의 건축가는 논리성을 갖는 미학과 추상화적인 과정을 거쳐 설계를 하며, 보조적인 수단으로 자와 콤파스를 사용했다.건축자재를 자르거나 형태를 만들 때에도 이를 활용하여2차원의 평면과 직선, 원과 다면체에서 5각형의 12면체인 3차원으로 바뀌어 갔다.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에서는 기하학적인 형태에 얽매이기 보다는자연적이며, 변형이 많고, 쉽게 인지되지 않는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이는 플라톤이 주장하고 이론화 된 제5의 원과 같은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따라서 가우디의 작품은 이론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형태이다.이는 처음부터 기하학을 사용한다면 아주 단순한 기하학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그가 사용한 것은 통제기하학regulated geometry을 응용하여 많은 부분 사용하였다.가우디의 작품을 여러 건축가가 응용하여 모방하려고 했으나, 가우디와 같은 건축물이 완공된것은 지금까지 없는 것으로 보아가우디가 설계한 건축 물들은 그의 상상력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가우디는 말한다."건축가는 균형에 대한 타고 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건물의 형태를 디자인하고,그것을 구조전문가(구조기 술사)에게 구조에 대한 수학적 안전성을 검토 받는다.그 후 구조전문가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건축가로서 자질이 있는 것이다.그러나 구조전문가가 이상이 있다고 한다면 건축에서 손을 떼는 것이 현명하다."이러한 면에서 그 자신에 대하여 엄격한 면이 있다.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la(성가족 성당)의 종루는 포물선이면서 젖은 모래를 떨어뜨릴 때 나타나는 형태이다.이를 시행할 때 가우디는 '중력의 법칙'을 업격히 따랐다. 가우디는 설계도보다는 모형을 중요시 했다. 그 모형을 만들기 전그는 실을 천장에 매달고 탑부분과 전체적인 모습을 모래 주머니 혹은 납을 중간중간에 매달아 그 휨의 강도를 측정해 나갔다.그리고 최상의 곡선과 아름다움이 나오면 이를 스케치했다. 여러 번에 걸친 반복 스케치와 묘형작업 을 했다.그런 다음 건물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한다.이렇게 한 건축구조형태에 대해 가우디는 자기 자신이 구조 계산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그러나 현대의 첨단 장비를 동원한 구조계산에서 오류가 발견 된 것은 없다. 그가 말하는 완벽한 균형감각이다.

가우디의 건축형태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할 상황에서 만들어 졌으며, 가히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그의 작품은 가우디가 말했듯 이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연이 베풀어 주는 매우 균형된 자연적 구조"인것이다.가우디는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나 큰 동물에서는 얻은 것이 별로 없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용의 형상이 있으나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에서 나왔다.그는 아주 조그마한 곤충 (파리,모기, 들벌레따위)과 들에 많이 나는 잡초와 나무 잎 등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또한 동양의 미에서도 영감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심성에서 울어 나오는 형태를 표현해 나갔다.가우디의 건물구성을 보면 동물의 뼈, 야자수Palmera, 곤충, 사람의 해골 등의 모습을 자주 사용했다.그는 나무의 줄기와 해골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구조는 없다고 할 정도였다.아무리 아름다운 돔이라고 할지라도 해골의 내부에 비할 수 없으며,산이 가지고 있는 완벽한 안정성에 어떠한 건물도 따라 갈 수 없다고 가우디는 생각 했다.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건축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추구한다면 미를 잃게 될 것이다.또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미학,예술 이론 또는 철학만을 깨닫게 될 것이다.이렇게 추상적인 이론들은 나에게는 사치이며 관심도 없는 분야이다."

○ 자연환경을 사랑한 가우디

가우디는 환경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건축가이다.조그마한 식물이나 지형이라도 될 수 있는 한 보존하는 범위에서 설계와 시공을 했으며, 이를 존중했다.그는 비록 환경운동가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건축자재의 재활용에서 볼 수 있듯이 환경을 생각하는 바는 남달랐다.그가 사용한 세라믹 제품(타일, 도자기, 벽돌)들은 재활용품이다. 완제품을 구입하여 깨뜨려 사용한 것이 아니라타일공장이나 도자기공장에서 잘못된 제품을 깨서 버린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 버리는 물건을 수집하여테라코타형식과 꼴라쥬형식으로 시공을 했으며, 작품도를 높이기 위해 철저한 감독을 병행했다.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에는 인건비가 저임금시대 였기에 가능했지만, 그 반대로 고용창출은 대단한 것이었다.아무튼 전체 건축비는 많이 절감되었으며, 건물은 아름답게 시공되어졌다.

그가 자연과 함께 했다는 것은 그에 관한 일화 에서도 잘 나타내 주고 있다.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에게 기자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 의 스승이 누구냐"고 이때 가우디는 대답 대신 창 밖을 가리켰다.창문밖에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해송과 자연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때 " 내 스승은 바로 저것들이요"라고 말하며"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연과 함께 살아가도록 했으며, 생활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스승은곧 자연이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것 중에는 인체구조에 바탕을 둔 것이 대부분이다.건물 뿐 만이 아니라 가구들은 더욱더 여기에 충실했다. 그것은 가우디의 청년시절에 사귄 친구들이 의사가 된 사람이 많았다.그들을 통하여 정형외과 의사들과 친분관계를 가질 수가 있었으며 교류도 활발했기 때문이다.이때 그는 해부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졌으며, 그 의사들을 통하여 인체에 대한 의문들을 풀어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인체구조에 맞는 디자인이 되어 있어 사용자에게는 안락하며, 편안함을 안겨 주고 있다.

○ 에우세비오 구엘 바시갈루피Eusebio Guell Bacicalupi와의 인연

1878년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박람회가 개최되었다.이 박람회에는 가우디가 설계한 곤잘로 꼬메야의 장갑전시장이 출품되어 있었다. 이를 본 구엘은 매우 감탄하였다.바르셀로나로 돌아 온 구엘은 가우디의 절친한 친구인 후안 마르토렐Juan Martorell에게 부탁하여 가우디를 만나게 된다.이 때부터 이들의 친분은 시작된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건축주 건축가의 사이를 뛰어 넘어 예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며'예술을 위한 절친한 친구' 로 발전한다.구엘은 쿠바Cuba 와 산또 도밍고Santo Domingo에서 사업에 성공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며,프랑스에서 경제와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의 아버지 사업인 섬유산업을 이어받아 그 사업을 더욱 발전시켰으며,시멘트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업 못지않게 학문과 예술에도 감각이 깊었으며 뛰어났다.또한 라틴계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라틴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866년 미생물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 하기도 했다.그리고 바르 셀로나의 모든 문화, 학술단체의 회원이기도 했으며, 1898년 이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또한 정계에도 진출하여 1875년 바르셀로나시의원을 거쳐 1877년 보수당의 국회의원에 당선된다.그는 1910년 알폰소Alfonso 13세로부터 구엘백작Conde Guell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 생을 마감한 가우디

가우디는 새벽미사를 위하여 성당에 가다 기차에 치어 생을 마감한 1926년까지 전 생애에 걸쳐 혼신을 다하여 건축예술에 바쳤다.그의 모든 작품에 신의 영광을 드러냈으며, 자연과 환경을 소중히 생각하는 예술가였다.또한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그는 기차에 치어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남루한 옷차림 새로 인하여누구도 그가 가우디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다.그가 작업장으로 돌아오지 않자 함께 일하던 인부들이 수소문하여 숨을 거둔지 2일만에 병원 영안실에서 찾아냈을 정도였다.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은 동양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 바로크 양식과 고딕 양식 및 신고딕 양식이었으며,그만이 갖는 자연주의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언어를 구사하고 있다.1882년에 시작하여 100년이 넘게 지금도 건축중인 성가족 성당은 현세의 조급함보다후세에 길이 남을 건물을 완성하기 위한 마음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프랑스의 건축가 르꼬르뷰제(Le Corbusier/현대건축의 거장)가 1928년 이곳을 방문하여 감탄을 금치 못했다.그는 가우디를 이렇게 표현했다. "가우디의 건축관은 놀라운 것이었다."

○ 낭만주의로 본 안토니오 가우디

우리는 근대적이고 강력한 표현주의와 결합된 고딕 부활의 궁극적인 의미를 스페인의 안토니오 가우디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삶과 작품은 '진정한 고딕 건설자'가 행했던 것, 그리고 정열과 독창적인 예술적 천재성 바로 그것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최후의 고딕 건설자'로 찬양될 수 있었으며, 그의 삶은 자본주의적 물질주의가 발전하는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의 작품에 비하면, 오블리치나 호르타의 작품과 생애는 '너무 문명화되었고' 너무 부르즈와적이어서 위대한 열정과 행위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결론일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가우디를 평범한 인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의 독창적인 천재성 그 자체이며, 그 자체의 완성이요, 모방이 불가능한 것으로써, 그의 작품은 열정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천재성과 과감함의 표상인 것이다.

가우디의 인생과 작품은 매우 복합적인 것으로 이는 구조적이면서 불규칙하고 보편적이면서 지방적인 것이어서 이를 아카데믹한 견지에서 파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우디의 건축은 마치 지적으로 쇠약해가는 대중에 대해 준엄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강력한 감정의 폭발과도 같은 것으로 그들에게 있어 가우디는 편견을 지닌 종교적 민주주의적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강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띠고, 순수 인종적 전통의 고향인 카딸로니아 출신이 아닌 돌연변이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이러한 이중적 상황하에서 (이는 스페인의 전반적인 문화상황이었음 ) 가우디의 활력있는 건축적 상황이 자라난 것으로, 건축을 합리적 도그마나 학문주의에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 여긴 사람들에게 있어 가우디 건축의 모호성과 합리적 구조 그리고 가우디의 나름대로의 독창적 어휘의 복합은 매우 흥미롭고도 아연실색케하는 것이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삶은 19c 작곡가인 안톤 부루크너와 비슷하다. 가우디와 마찬가지로 부루크너는 매우 소박하고 겸손하고 종교적인 인물이었으며, 말년에 비엔나에 작곡과 교수로 취임하였으나 비엔나의 지식층으로부터 소외되어 불안함과 고독함을 느껴야 했다. 따라서 그는 그 어떠한 사회적 명성도 얻지 못하고 영원히 지방색에 머물렀다. 그러나 바로 이런 지방색을 통해 부루크너는 그 자신의 때묻지 않은 신념의 힘과 독창성과 일관성을 지닐 수 있었다. ( 그의 음악이 매우 강력한 것이 그 증거이다. ) 프랑스 대혁명 기간동안 아보트 세이스는 세계의 대도시들로부터 하나의 양식이 나올 수 있으나, 그 성격은 지방적인 고립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로 그러한 경우가 가우디와 부루크너의 경우인 것이다. 가우디 자신의 생각 ( 그의 친구인 마르티넬 브루네트에 의하여 정리되어 '가우디와의 대화'라는 스페인어 책자로 발간되었다. ) 아마도 그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므로 여기 그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은 진실의 광휘이다. 따라서 진실 없이는 예술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요사이 근대 회화에는 감정은 있으나 진실이 없으므로, 이는 예술 작품일 수 없는 것이다. 풍부함과 복합성 속에는 우아함이나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모호함이 있을 뿐이다. 과장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며, 이는 아름다움에 위배되는 것이고, 부족한 수단을 정확히 사용한다는 우아함에는 특히 위배되는 것이다. 색채는 생명이며, 죽음의 가장 명확한 증거는 바로 색채의 부족인 것이다.

투명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니며, 설탕과 같은 대리석 결정과 대리석으로 지어진 신전을 갖고 있는 그리이스인들은 그것에 그림을 그릴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았다. 왜냐면 순수한 색채 그 자체가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하려면 이러한 요소를 망각해서는 안된다. 색채를 탄생시킴으로 빛은 모든 장식의 기초이고 모든 조형예술을 지배하는 것이다. 직선은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나 곡선은 신에게 속하는 것이다.

나는 기하학적이다. 즉, 이는 종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구인들은 종합을 이해하지 못하며, 점의 기하학인 분석적 기하학을 이룩하여 모든 것을 점으로 해결하려 한다. 지중해인만이 기하학을 이해하고 있다. 연속적인 형태가 가장 완벽한 형태이다. 형상의 가장 명료한 표현은 골격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그 이외에 모든 것은 골격을 덮기 위한 장식인 것이다. 즉 이들 디테일의 대부분은 멀리서 보았을 때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결점을 지니듯 건물도 틈새를 지니는 것이다. 건축은 조형적인데 이는 마치 정치나 상업처럼 적소에 적절한 것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은 힘을 전달하는 구조적 매스를 배치하는 것이고, 상업은 상품을 필요치 않은 곳에서 끌어내어 판매조건이 더 좋은 곳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상업적 문제를 이해하는 사람은 건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역주의의 원인의 하나이다. 즉, 정부는 획일성을 옹호하나 자연은 나름대로의 길을 간다는 사실 말이다. 지중해 연안 국가의 사람들은 북구인보다 더 강렬하게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 북구인들은 풍부성을 사랑하는데, 그들은 이것을 지적인 노력을 통하여 얻는다. 이들은 우리가 매우 수월하게 이해하고 있는 삶에 대한 융통성있는 비젼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풍부성을 갈망하는 것인데, 이러한 비전은 풍부성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다. 거대한 사원을 건축하는 것 이상으로 건축가가 지닐 수 있는 소망은 없다. 아름다움은 어떤 특정한 양식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훌륭하고 그 어떤 것보다 우수한 것처럼 과장하고 있다. 우리는 독창적이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은 이미 이룩된 것에 의존하여야 하며 이렇게 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또한 수백년간 행해온 실수를 되풀이할 뿐이다. 우리는 과거의 가르침을 무시할 수 없다. 종합은 공간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오로지 평면만을 연구할 뿐이며, 분석적인 사람은 그저 점을 연구할 뿐이다. 과학은 분석인 동시에 종합이다. 분석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나 불완전한 것이다.

가우디의 건축 작품을 잘 아는 자만이 이러한 그의 언급이 얼마나 대립성을 띠고 있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가우디는 아름다움의 표현으로써 진실을 이야기하는 북구인 퓨긴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지역주의와 민족주의가 자연의 선택이요, 궁극적으로는 작업할 수 있는 양식을 선택하는 데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역주의와 민족주의를 가장 타당한 선택 조건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우디는 사회적인 이슈를 강조하고 마치 러스킨과 같이 역설하기를 "흠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건물도 틈새가 없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퓨긴과 러스킨과는 달리 그는 고딕을 남유럽적인 의구심을 갖고 이야기하고 있다. "고딕은 불완전한 예술이다. 이는 앞으로 해결되어야 할 산업 예술인 것이다. 즉, 고딕은 산업예술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비례를 생각하지 않고 요소를 반복하며, 허구적인 구조 형태를 은폐하고, 관심의 집중을 미혹케 하여야 할 곳에 장식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곡선이 신성함의 표현이라 이야기하면서, 그리이스 예술만이 이제까지 존재한 것 중에 가장 세련된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고색창연한 지중해 지방의 우아함을 이야기하고 단순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으며, 북구인들은 사물을 너무 복잡하게 만듬으로써 모호성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자신은 난해하고 환상적이며 거친 환경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우디가 이처럼 모호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마도 그가 고독한 삶을 보냈고, 다른 문화와의 접촉이 부족했다는 사실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으나, 우리는 여기서 갈수록 증대하는 북부 문화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긍지에 찬 남부의 민족주의를 볼 수 있는 것이며, 그 자신이 '지적으로 게으르며' 나름대로의 혼란된 비젼의 영향하에 행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 자체가 불가사의한 존재를 범주에 집어넣으려는 시도인 것으로, 가우디의 메시지는 그의 말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 나름대로의 근거하에 평가되어야 한다.

가우디를 볼 때, 우리는 비올레 딕과 같은 위대한 공학자의 면모와 초현실적인 성격을 지닌 예술가의 면모가 이상적으로 배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공학이라는 합리적 측면과 융통성 있는 비젼의 비합리성과 창조성을 공유하므로, 가우디는 최후의 수공예자 혹은 최후의 고딕 건설자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둔 것은 구조였지, 그의 특징처럼 여기고 있는 외적인 장식이 아니다. 즉, '형상의 가장 명확한 표현은 골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 이외의 것은 이를 포장하기 위한 디테일에 불과한 것이다.'

산타 콜로마의 토굴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같은 종교 건물에서, 가우디는 자신이 고딕양식의 계승자임을 의식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불완전하고 비예술적'이라고 표현한 양식을 왜 사용했을까? 사실상 19c 당시 고딕은 유럽에 있어서 유일한 기독교 양식으로 여겨졌으며, 천주교 신자인 가우디는 이 전제를 따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아마도 고딕 양식은 그에게 있어서 더 이상 개선될 여지가 없는 위대한 기술적 발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가우디는 볼트의 추력( thrust )을 지지하는 고딕의 버트레스는 매우 보수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우매하다고 보고 그의 기술적 천재성을 이용하여 이에 도전하며, 그것을 초월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고딕의 3분할 구조는 플라잉 버트레스를 꼭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비논리적인 것이라 결론내리고 버트레스나 두꺼운 벽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하중을 흡수할 수 있게끔 배치된 구부러진 기둥과 포물면, 쌍곡면을 이용하여 추력을 흡수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가우디는 혁명을 일으킨 것이며, 유기적인 공학을 이용함으로써 그는 최대한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이룩하기 위한 유기적인 인장력과 쉘구조를 발명한 20c 발명가와도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구조 지지체의 필요한 강도와 치수를 계산하기 위하여 가우디는 추력의 각도를 결정해 주는 축소모형을 사용하였다. 그는 모형 사진을 찍어 이를 설계에 반영하였다.

그러나 그와같은 혁신적인 과정에도 불구하고 가우디는 재료의 사용에 있어 보수적이었으므로, 북구에서 그로피우스, 르꼬르뷔지에, 그리고 멘델스존 등이 이미 첨단의 현대건축개념하에서 작업하던 시기에도, 그는 돌, 벽돌, 나무 등의 재료를 사용하였다. 아마도 가우디가 진실설,무놔적 연속성, 그리고 영원성 등에 대하여 깊은 종교적 신념을 지녔으므로, 이러한 보수성을 지닌 것 같다. 1883년에 그는 사그라다 파미리아 교회를 설계하는 건축가로 지명되었는데, 이는 1882년 프란체스코 데 파울라 델 빌라르에 의하여 신고딕적 구조로 출발한 것이다. 1914년 이후 가우디는 이 교회의 건설에 전념하게 되어 모든 것에서 자신을 격리시키고, 마치 중세 건설자처럼 공사 현장에서 생활하였고 그 후 그 근처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여기서 그는 버트레스를 없애고 추력을 더욱 논리적으로 흡수하기 위하여 기둥을 구부림으로써, 고딕 시대의 실수를 교정하려고 하였다. 그는 단순히 천박하게 어떤 양식의 원리를 모방하기보다는 양식의 의미를 더욱 넓힐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교회 단면 모형에서 우리는 추력을 흡수하도록 의도된 가지를 지닌 나무 모양의 기둥을 볼 수 있다. 즉, 이는 우리로 하여금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측면을 지닌 인간 신체 골격을 연상케한다. 1926년 가우디는 예배소와 주요 출입구 그리고 4개의 치솟는 탑을 완성하였으나, 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작업이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이 건물은 프로그램과 건축가, 수공예 그리고 건설자간의 완벽한 종합하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본보기인 것으로 최후의 진정한 유기적 고딕인 것이다.

까사 바트로, 까사 밀라 등과 같은 주거건물에서 가우디는 연속적 형태의 우수성, 조형성, 그리고 곡선형의 신성한 형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 건물은 내부와 외부 형태가 하나의 진실한 연속성을 이룩하고 직선이나 각진 구석을 전혀 지니지 않은 형태를 조각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완벽한 예이며, 오로지 그 주변을 돌아다녀야만 그 진가를 인식할 수 있는 동적인 건축의 진정한 예라 할 수 있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돌을 깎아서 이루어진 것처럼 여겨지게 하기 위한 형태의 연속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가우디는 북구의 표현주의 (스위스의 철학이며, 아마츄어 건축가인 루돌프 슈타이너가 설계한 도르나흐의 사원이 그 좋은 예이다.) 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거 건축에서 삶에 대한 그의 직관적인 이해가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의 극적인 지붕 경관과 건물 표면 장식, 빛의 완전한 사용 등에 의하여 나타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환상은 삶의 폭발적인 감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가우디는 쌍곡면을 연속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역동적이고 생명력있는 관계성을 이룩하고 있으며, 공간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역동적이고 불규칙적 형식으로 시도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매너리스트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우디는 고딕 역동주의의 계승자이며, 불굴의 정력으로 이를 헤쳐 나갔다. 그 후 르 꼬르뷔지에나 알토와 같은 건축가만이 이와 비슷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현대적이고 또한 기술적으로 보편성을 지니는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8 # 가우디의 따뜻한 문화사랑 이야기[ | ]

■ 양성혜(《어머니 품을 설계한 건축가 가우디》 역자) 원문 ◀ 카사 바트요(왼쪽)와 엘 카프리초.

● 인간미 있는 20세기 건축의 아버지

내가 가우디를 처음 만난 것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째 되는 1995년 여름이었다. 처음 떠나는 장거리 여행지로 주저 없이 택한 곳이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는 1992년 올림픽 개최도시로 우리에게 친근한 이름이지만, 도시 전체를 둘러보고 난 후 내게 남은 느낌과 영상이 ‘가우디’라는 한마디로 압축되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마치 동화 속 요정 나라의 거인이 공작 시간에 찰흙을 주물러서 형태를 만들고 형형색색 물감을 칠해놓은 듯한 건축물을 보았을 때 어릴 적에 읽고 들었던 재미있고 기괴한 이야기가 기억 한편에서 실타래처럼 풀어졌다.
단 한 번이라도 가우디의 작품을 마주한 사람이라면 그를 결코 잊지 못하리라. 명지대 건축학과의 김석철 교수는 김중업 선생님 설계실에서 가우디의 작품집을 보았던 날,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건축가들에게 있어 가우디는 자신의 건축적 상상의 한계를 느끼게 하여 숨겨진 창조력을 자극하는 생명력이 넘치는 세계다. 피카소, 달리, 미로와 동시대에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활동했던 그를 20세기 건축의 아버지라 부른다.
그러나 비단 건축을 잘 알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이 보았을 때도 가우디는 생명력을 발휘한다. 나는 구엘 공원(Park Guell)의 아라비아 타일로 만든 구불구불한 다채색 벤치에 앉아 어린 시절의 꿈과 잃어버린 사랑을 떠올리며 행복해했다. 다른 이는 동일한 벤치에 앉아 저마다 자신의 인생의 가장 아스라한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처럼 가우디의 건축은 만인을 위한 예술이며, 바라보고 있으면 행복하거나 놀랍거나 엄마 품처럼 아늑하다. 한마디로 인간미가 있는 건축이다.
◀ 벨예스구아르드와 입구 모시리를 활용하여 아라비아 타일로 장식한 벤치.
◀ 구엘 궁전의 굴뚝 장식. 트렌카디스 기법이 유연한 아름다움을 발한다(왼쪽). 카사 밀라의 볕이 가득한 안뜰.

● 20년대 이미 보행권을 주장

가우디(Antoni Gaudi)의 건축은 보는 이를 따스하게 하지만, 정작 본인의 삶은 유복하지만은 않았다. 1852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한 마을에서 대장장이 수공업 가문에 태어난 가우디는 출생 전에 이미 형제 둘을 잃었고, 대학 시절 바르셀로나에서 의과대학을 다녔던 형을 잃고, 곧 이어 어머니를 잃는다. 하나 남은 누나마저 이후 알콜 중독으로 일찍 죽는다. 가족 운이 없는 사람이다. 또한 평생 제대로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짝사랑만 하다가, 결국 독신의 삶을 걷는다.
자식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1926년 칠순을 넘긴 나이에 전차에 치어서 죽음 저 너머로 사라져 갔으니 인간적으로 보아서는 불운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졌을 때도 그 남루한 행색 때문에 아무도 그가 그 유명한 성가족 대성당(Sagrada Familia)의 건축가 가우디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인간적인 잣대에서 불운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건축 세계에서 그의 영혼은 밝게 빛났다. 가우디가 자신의 건축 언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배후엔 건축 경비를 걱정하지 않게 후원한 바르셀로나의 부호 에우세비 구엘(Eusebi Guell)이 있었다. 또한 관능미가 풍기는 건축물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에게 저속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은 가우디가 또 다른 후원자인 하느님을 의지한 엄격한 카톨릭 신자이며 채식주의자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가우디는 종교적 신념으로 ‘창조주와 협력하는 사람은 위대한 창조적인 작품을 남기지만, 모사꾼들은 창조주와 협력하지 않는다’라고 예술 작품의 독창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가우디의 건축은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오늘날 더 사랑을 받아 바르셀로나에 가우디를 보기 위해 밀려드는 관광객은 매년 200만 명에 달한다. 특히 가우디 탄생 150주년인 2002년은 ‘국제 가우디의 해’로 지정되어 100개 이상의 이벤트가 기획되고 있다. 왜 우리는 이처럼 가우디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까? 산업 유토피아를 꿈꾸던 1920년대에 가우디는 벌써 보행권을 주장했다. 늘 차보다 보행자 우선을 주장하며, 길을 건널 때 기사더러 전차를 세우라고 큰소리쳤던 가우디. 당시엔 죽음을 담보로 한 헛소리였는지 몰라도, 오늘날 20세기를 다 보내고서야 ‘차 없는 거리’, ‘걷고 싶은 거리’ 운동을 통해 보행자를 위한 거리 문화를 만들어가는 우리에게는 감회가 새롭다.
가우디의 시대를 앞선 감각은 그가 깨진 타일 조각, 질그릇 조각, 공장에서 쓰다 버린 바늘, 용수철, 용광로 조각 등을 모아 건축물 창작에 재활용했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환경보호주의자인 셈이다. 이 중 깨진 타일 조각을 이어 붙어 장식 효과를 내는 것은 ‘트렌카디스(trenca- dis)’라는 가우디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발전되어 그의 건축물을 다른 건축과 구별지어 주는 상징이 되었다.
가우디 건축이 따뜻한 것은 가우디가 건축물을 별개로 취급하지 않고 환경과의 조화 속에서 건축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가우디가 구엘 성지(Colonia Guell)의 예배당을 설계할 당시 200년 된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이 소나무를 베지 않기 위해 설계도를 수정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때 가우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계단을 만드는 데는 3주밖에 걸리지 않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소나무가 자라는 데는 30년이 걸리지…….’그는 자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건축물 속에 자연을 담을 줄도 알았다. 가우디는 건축 설계를 맡으면, 항상 그 전에 부지를 탐색하여 자연 환경을 살펴보고, 그 땅에 얽힌 전설 및 역사를 통달하고서야 건축물 설계를 시작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예를 들면 해바라기 숲이 있던 자리에 만든 집의 담벼락엔 해바라기를 그려 넣었고, 중세의 역사적인 이야기가 깃든 곳엔 그 설화가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착안해 건축했다고 한다.

● 독창성은 기원으로 가는 것…자연을 닮은 건축

가우디의 말년의 자서전이라고도 불리는 호화주택 카사 밀라(Casa Milia)는 건축적 기원이 없는 건물이다. ‘인간이 손으로 만든 거대한 산’ ‘빵틀 위로 부풀어 오른 케이크’ ‘아주 조용히 숨을 내쉬는 돌로 된 폐’ ‘깃대만 없는 환상적인 깃발’ 등이 이 건축물에 대한 분분한 묘사다. 직선 없이 유기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건물 내부의 계단이며 내부 공간은 거품을 기대어 놓은 듯한 모양이다.
가우디의 이 역작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이 건물은 사실 거대한 ‘산’의 이미지에 따라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산은 자연의 일부지만 전체를 대변하며, 신의 창조 이전 모습이다. 산을 좋아하는 산 사람들은 산에서 자기 자신의 가장 본연의 모습을 만나게 되지만 산이 다 감싸주는 것을 느낀다고 말하곤 한다. 가우디가 만든 이 건축물은 도심 한가운데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인간 본연의 철학적 의문을 던지게 하고 자유로운 해석의 물길을 열어주지만, 이를 넉넉히 감싸준다.
가우디 건축의 위대함은 가우디가 건축에서 자연과의 조화뿐 아니라 다른 주위 건물과의 조화도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도 한층 더 빛을 발한다. 바르셀로나 시내 중심가에 1900년대 초 유명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지은 건물 여섯 채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이 중 제일 마지막 집인 카사 바트요(Casa Batllo)는 가우디의 작품으로 뼈 모양으로 되어 있어 ‘뼈로 된 집’이라고도 불리는 독특한 건물이다.
이 바트요 씨의 주택 건축을 맡은 가우디는 자신의 건물이 바로 옆에 붙은 건물과 일직선상에 놓았을 때 어울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건물 꼭대기 탑 높이를 한 단계 줄이고 왼쪽으로 약간 옮겨 만들자 작은 발코니 공간이 생겼고, 옆 건물과 일직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건축에서의 진정한 매너’를 보여준 좋은 예로 기록된다.
이 예화는 오늘날 우리의 주택건축문화를 되돌아보게 한다. 도시 경관 및 다른 주위 건물들과의 조화를 염두에 둘 수 없을 만큼 건물은 제각각 우후죽순으로 솟아난다. 건축주는 옆 건물이 자신의 건물에 의해 죽든지 살든지 관심이 없다. 같은 건물에 붙은 간판만 보아도 들쭉날쭉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아름다운 건축이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성 프란체스코처럼 누더기를 걸친 모습으로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우리를 행복하고 경이롭게, 또는 엄마 품처럼 아늑하게 만드는 불후의 건축물을 남긴 가우디를 그려보는 것으로 족하리라. ‘독창성은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창조주의 작품인 대자연의 일부분인양 건축물을 만든 가우디.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의 돌은 오늘 말없이 건축가의 아름다운 정신을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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