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사/해방이전

제 목:[해방이전의 노래사] 관련자료:없음 [7] 보낸이:진병학 (fgjin ) 1997-11-13 12:18 조회:95

  1. 해방 이전의 노래사

한국 전쟁을 통한 한반도의 분단 고착화는 남한 사회를 이전까지의 많은 진보적 움직임들과 단절하도록 만들었고 노래운동에 있어서도 오늘날에 이전 시기의 많은 자산을 남 겨 주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각 시기별 주요한 음악적 흐 름을 민요, 창가, 예술가곡, 유행가, 독립군가, 해방공간의 노래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특히 이 중 민요와 독립군가와 해방공간의 노래들에서 오늘날의 노래운동과 연관시켜 볼 수 있는 긍정성들을 찾고자 한다.

1.1. 민요에 대하여 이땅에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있어 온 이래, 다른 모든 문화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문화도 지배자 와 피지배자와의 문화로 나뉘어져 왔다. 지배자들의 시와 노래가 세련된 선율에 자연예찬이나 임금에의 충성이라는 내용을 담았다면 민중들의 민요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담고있다. 일반적으로 민요의 특징이라 하면 내용의 일상 성과 구체성, 집단 창작 등을 들 수 있다. 집단 창작은 민 요의 메기고 받는 형식에서 두드러지는데 한 사람이 개인적 염원을 선창하면, 집단이 그 내용을 받아 제창함으로서 공 동체로서의 인식을 두터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열린 구조로서의민요는 개항이후 봉건적 농촌 공동체의 파 괴, 서구 문물의 유입등으로 토대의 변화과정을 겪으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에는 물론 일제의 용 의주도한 문화침탈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오늘날 우리가 왜곡된 노래문화를 바로잡는 데 중요한 전거로서 민요를 바 라보는 이유는 바로 민중들이 자신들의 생활세계를 '의미화 '하는 지각체험방식에 있다. 즉, 자본주의적 대중음악에서 보이는 의미와 일방적 전달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공동체 적이고 주체적으로 노래라는 문화형태를 통하여 형상화하는 방식이야말로 오늘날의 노래가 회복해야 할 참된 의미일 것 이다. 그리고, 이것을 내용적, 음악적으로 구체화하는 것 이 현재의 노래운동이 추구해야 할 하나의 발전적 목표인 것이다.

1.2. 창가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 창가의 시작은 곧 서양음악의 시작을 의미 하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전통적 노래양식의 쇠퇴를 의미 한다. 창가는 188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퍼지기 시작한 찬 송가의 여양으로 시작되었다. 찬송가의 대중화란 서구의 근대적 생활양식의 일반화를 뜻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찬 송가의 형태적 충격이 근대롸르 찬양하는 개화사상과 결합 하면서 애국독립가류의 노래들이 생겨났다. 독립협회 계열 의 지식인들에 의해 보급된 초기 창가는 현실인식은 결여한 채 '자주독립' '부국강병' '문명개화' 등의 관념적 구호만 을 되풀이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상적 허약성 은 초기의 창가들이 후에 퇴폐적 유행창가로 변질 될 수 있 었던 기반이 되었다. 애국독립가류의 창가는 민요와는 달 리 개인 창작품으로서 전문적인 예술창작의 형태로 발전하 고 있으나, 이는 내용적으로 민요의 집단성과 즉흥성이 제 거된, 노래가 민중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분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창가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수입 된 것으로 1906년부터 보편화된 것이다. 원래 창가는 명치 유신 이후 국민을 계도할 목적으로 유행된 것이었으며 한국 에 수입될 때의 성격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계몽창가라 불 리우는 이들 노래의 대표자는 최남선이다. 그의 노래에서 볼 수 있는 주요한 주제는 '소년예찬'이다. 이것은 소년들 의 기상을 북돋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 문인데, 이 경우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예찬에만 머물러 버 림으로써 국권회복의 의지는 관념상의 유희로만 머물고 만 다. 최남선의 계몽창가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일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나 저항적 태도를 거의 나타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음의 최남선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관왕묘과 연화봉을 돌아보던 중 어느새 용산역에 다다럿도다. 새로 이룬 저곳은 모두 일본집 이천여명 일인이 여기 산다네 ([경부철도가] 중에서)

여기에서는 '일, 청국을 제압하고' 라 했던 애국 독립가 류의 관념적 의식에 서조차 후퇴한, 일본식의 신문물을 발 전시키자는 이념적 혀약성만을 드러내 주고 있는데, 이러한 주제의식들은 당시 계몽운동이나 3.1운동 이후 타협적인 민 족개량주의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한편 음악적으로 볼 때, 계몽창가에서부터 전통운율인 3.4조 시조가 사라지고 일본 의 영향을 받은 7.5조가 많이 쓰이게 되는데, 이로부터 일 제의 문화적 영향이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창가의 영향아래 이루어졌던 최남선의 계몽창가가 [소년]지에 발표되고 있을 즈음, 전국에 산재한 사학들에서 는 독립가류의 전통적을 계승한 창가들이 불리어지고 있었 다. 윤치호, 안창호 등의 주도하에 찬송가 등의 서양음악 의 곡조에다 민족정기를 배양시키려는 내용을 담았던 이들 학교창가들은 국권침탈을 계기로 일제의 간교한 탄압을 받 으면서 점차 자연예찬등의 소시민적 정서를 담은 관인창가 들로 변하면서 황국신민화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일본의 오음계 '요나누게부시'(도레미솔라)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인데, 학교에서 강제로 보 급되는 이 관인창가들로 인해, 오늘날의 노래문화에까지 일 본문화의 잔재를 남기고 있다. 3.1운동 후 일제의 식민지 정잭은 소위 '문화정치'라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애국적 창가의 전통은 공개적으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워 졌으며 대신 절망과 좌절의 정서를 담은 위로음악으로서의 우행창 가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 유행창가의 보급은 주로 일본 신파극의 영향을 받은 신극운동에서 이루어 졌는데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장한몽]의 주제가 [이수일과 심순애]였 다. 이 노래는 일본의 신파극 [곤지끼야사]의 주제곡을 번 안한 것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다. 유행창가는 주로 이 룰 수 없는 애정, 이별, 삶의 비애와 절망, 혹은 전혀 반대 로 소시민적 향락이나 희화된 애정을 그리면서, 일제 식민 통치에 지친 조선민중을 마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다음 의 작품은 그러한 폐해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내몸은 강언덕에 시드른 방초 어여쁜 너도 또한 시드른 방초 너와 나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다시 피여 보지 못할 시드른 방초

흘러가는 물결 좇차 돛을 달고서 무정한 이세상을 등에 버리고 죄악과 법률도 볼 수가 없는 죽음의 저 나라로 저어가 보자 [시드른 방초]

요나누키의 퇴영적 선법과 맞물린 이러한 20년대 유행창 가의 정서는 그대로 한국대중가요의 원형으로 자리잡게 되 었으며 이로부터 왜곡된 음악적 정서가 오늘날까지 자리잡 고 있다.

1.3. 예술가곡에 대하여 1920년 홍난파의 [봉선화]가 발표되면서 학교 창가를 중 심으로 예술가곡의 탄생을 보임으로써 대중적인 유행창가와 예술가곡이 분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서구 유학의 경험 을 가지고 있는 문화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된 예술가곡들은, 처음에는 서양음악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종의 태도에서 벗 어나지 못했다. [봉선화]는 본디 바이올린을 위한 감상적 기악곡이었고 그 수준도 초보적인 서양음악의 단순한 모방 에 지나지 않았다. 또, 홍난파와 더불어 당시 서양음악 도 입의 선구였던 현제명의 [니나]는 음악 비평가 김관으로부 터 '노골적인 표절'이라는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식민지 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이들의 말로가 일 제말 적극적인 친일행위로 귀결괴었던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서양음악의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반성은 전통민요 에서 새로운 음악언어를 찾아내려 노력한 안기영에 의해 제 기된다. 그의 가곡 [그리운 강남]은 '조선의 특유한 멜로 디를 넣어 가지고 된 독창성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 다. 안기영이 민요적 감상恝岳【 새로운 음악언어를 찾아내 려 노력한 안기영에 의해 제기된다. 그의 가곡 [그리운 강 남]은 '조선의 특유한 멜로디를 넣어 가지고 된 독창성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안기영이 민요적 감상을 예술가곡에 불러넣은 시도를 한 최초의 음악가라면 '민족 음악'의 수립이라는 원대한 노력은 뒤이을 해방공간에서 더 욱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김순남에게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다.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한 후에, 현제명과 같은 사람들 이 매국음악단체에서 친일행위를 하고 있을 부렵 귀국한 그 는 역사와 현실을 자신의 음악에 담기 위해 고민하는데, 우 리말에 대한 탄압이 심하던 1942~43년경에 한글 가사로 된 [상렬]을 발표하는 등 후일의 활발한 활동을 위한 준비를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술가곡에 대한 비판에서 흥미로 운 것은, 홍난파와 KAPF계열의 음악비평가 신고송의 계급음 악론을 둘러싼 지상논쟁의 내용이다. 신고송이 부르조아 음악가를 '상아탑속의 우상이며 프롤레타리와는 몰교섭의 유한계급'으로 몰아붙인 뒤 그들의 음악은 부르조아의 향락 적 기분을 만족시켜 주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의 평론을 발표하자, 서양음악진영의 대표격인 홍난파는 즉시 반박을 개시하여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고송의 이러한 평가는 확실한 실천적 대안으로서의 프로음악작품을 내세울 수 있는 실제적 창작이 부족했던 까닭에 계급성의 존재에 대한 강력적인 언표에만 머물고 말았다. 이 헛점을 간파한 홍난파는 재반박문 말미에서 '프롤레타리아 음악의 정의나 실례를 확정해주지 못함은 무슨 이유인가'고 묻고는 '하등의 이론적 진전이 없는 말꼬리잡기식의 논전은 끝내기 로 한다'고 선언하게된다. '악곡 자체만으로서의 계급성은 없다'는 그의 주장은 음악을 악곡=형식, 가사=내용으로 이 분화시켜놓고는 자신의 음악적 지향인 서구 기악음악을 '순 수한 중립'의 영역에 올려놓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 나 음악에서의 계급성이라 한다면, 음재료 자체를 놓고 판 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계급적 의식으로부터 비롯하는 예 술가의 세계관이 작품에 투영되며 그의 작품이 사회에 유통 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의미를 띄게 되는데에 있 다. 홍난파와 같은 당시 서양음악가들의 음악적 지향이 전 세기 여러 대가의 음악에만 고정되어 있는 한계를 지녔다 면, 이를 나름대로 올바른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했던 이들 에게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음악적 역량의 부재라는 한계 가 있었기에 이 논쟁은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오늘 날 음악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과제로 껐保側 되었다.

1.4. 유행가에 대하여 유행가는 일단 레코드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1894년 축 음기가 들어온 이래, 음반의 상품가치를 인식시키고 이 땅 에 상륙한 일본의 레코드 자본을 결정적으로 고무시킨 노래 는 1926년에 취입된 윤심덕의 [사의찬미]였다. 이를 계기 로 일본의 레코드 자본이 속속 진출하여레코드 산업을 시작 함으로써 바야흐로 우행가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된다. 이미 유행창가로서 널리 불리던 [황성옛터] [타향살이]등의 초기 유행가들은, 감상적이긴 하지만 경박하지는 않은 오히려 시 대상황에 충 산업을 시작함으로써 바야흐로 우행가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된다. 이미 유행창가로서 널리 불리던 [황성 옛터] [타향살이]등의 초기 유행가들은, 감상적이긴 하지만 경박하지는 않은 오히려 시대상황에 충실한 서정적인 측면 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이러한 면들도 사라지고 2.4박자 계열의 세칭 '뽕짝'이라 불리는 전형적인 왜색가요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눈물젖은 두만 강] [번지없는 주막] 등의 노래가 바로 그것들이다. 한편 이른바 '신민요'라고 이러한 면들도 사라지고 2.4박자 계열 의 세칭 '뽕짝'이라 불리는 전형적인 왜색가요가 주류를 이 루게 된다. [눈물젖은 두만강] [번지없는 주막] 등의 노래 가 바로 그것들이다. 한편 이른바 '신민요'라고 하는 새로 운 양식의 노래들이 생겨나는데 이는 전통 민요의 박진감과 건강함이 거세된 채로 퇴폐적이고 유행적 가사들로 조선의 강산과 풍속을 희화 하였다. 왕수복의 기생출신 가수들이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다. 신민요로는 [닐니리야] [대한팔 경] 등의 노래들이 있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 일본의 침 략전쟁과 더불어 모든 문화예술이 이를 정당화하는 관제 선 전도구로되는데, 오늘날 가요계의 원로가수들로 대접받고 있는 백년설, 남인수 등은 이 당시 [아들의 혈서]등의 전쟁 참전을 선전하는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고, 대륙침략을 합리 화하는 [복지만리]등의 경쾌한 장조풍의 노래들이 유행하고 있었다.

달실은 마차다. 해실은 마차다. 청대콩 벌판위에 휘파람을 불며 가자. 저 언덕을 넘어서면 새 세상의 문이 있다. 황색기층 대륙길을 어서 가자 방울소리 울리며 [복지만리]

1.5. 독립 군가에 대하여 만주를 중심을 한 무장독립투쟁은 국내의 독립운동이 위 축될 수록 더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장투쟁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투쟁가요들이다. 이 노래들은 전사들 의 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것이다. 국내의 진보진영에서 단 한 곡의 투쟁가요도 생산하지 못했 다는 점을 볼 때 이들 노래가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대단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초기 투쟁가요의 특인은 대부분이 외국노래들의 개사곡들이었다는 점이다. [독립군가]는 찬송 가, [혁명군 행진곡]은 프랑스의 라 마르세이유, [봉기가] 는 일본군가에서 각각 선율을 빌어온 것이며, [스텐카라친] [기러기] [출정가] 등은 러시아의 민요들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각지의 독립군들이 점차 조직화되고 임시 정부 산 하에 광복군이 창설되면서, 외래군가에서 창작군가로 점차 발전된 모습들이 나타난다. 광복군은 직접적인 항일 전선 에 있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와의 조직적 연계 때문에 광복 군은 많은 창작 군가들을 보존할 수 있었는데, [선봉대가] [앞으로행진곡] [광복군 제2지대가] 등이 그것이며 한유한, 이두산 등의 작곡자들이 활동했다. 한편, 동북만주지역의 투쟁가요들은 그 담당자들이 북한의 주도세력이 되었던 탓 에 자료를 입수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 독립군가 는 국내의 노래문화가 일제의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찌들 어갈때, 생산과 투쟁의 현장에서 제작, 보급된 노래들이기 때문에, 그 내용의 건강성과 함께 형식적인 면에서도 서양 음악과 전통리듬을 잘 조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는 등, 오 늘날 왜곡된 노래문화를 바로잡는데 중요한 음악적 유산 중 의 하나이다.

1.6. 해방공간의 노래 민족의 자주적 힘으로서가 아닌, 외세 -- 그것도 체제를 달리하는 두 강대국에 의해서 주어졌던 8.15해방은 한국을 그야말로 '해방된 식민지'로 남게 하면서 엄청난 혼란을 예 고하고 있었다. 이른바 해방공간이라 불리는 1945년에서 1947년까지 2년여의 짧은 시기에 창출되었던 음악문화는 가 히 혁명적이었다. 일제에 깊이 협력하였던 우익예술가들이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일제시대의 정치 적 굴레에서 자유로왔던 좌익진영은 신속히 예술계를 재편, 최고도의 조직적 탄력성을 발휘하게 된다. 이 중 주목할 만한 것은 김순남, 강장일 등이 주축이 되어, 좌우익의 무 원칙한 통일체엿던 조선음악건설본부(음건)을 지양해 내고 민족문화 건설과 음악운동의 대중화 전선구축이라는 뚜렷한 목표하에 건설한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의 활동이다. 이들 은 최오의 조직적 틀안에서의 음악 운동이라는 성과 뿐만이 아니라, 김순남, 이건우, 안기영 등 뛰어난 작곡가들도 보 유했던 관계로 작품생산에 있어서의 뿌리깊은 아마추어리즘 을 일거에 청산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 민족문화의 건설이 라는 대명제 아래 진행되었던 이들의 활동을 '민족음악의 수립'이라는 음악 자체에 대한 성찰과, '인민을 위한 음악' 이라는 또 하나의 대의 명제인 대중화 운동으로 나누어 살 펴보자. 첨예한 정치적 대립의 연속이었던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이들은 각종 운동단체 결성에 대한 문화 지원, 쟁의 중인 노동현장에서의 문화 공작대 역할수 행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해방가 요, 투쟁가들이 생산 보급된다. 특히 김순남의 [해방의 노 래]는 좌익진영의 국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을 정도였고, 그 외에도 [인민 항쟁가] [농민가] [건국행진곡], 이건우의 [여명의 노래], 안기영의 [해방전사의 노래] 등이 널리 불 리었던 곡들이다. 이들 노래들의 특징은 보수진영의 김성 태가 지은 [해방가]가 일본군가의 답습이라고 비판받는 것 이었음에 비해, 서양음계 속에서도 전통적인 장단들을 많이 되살려놓으려 했다는 점이다. 민족음악 수립과 음악의 대 중화라는 두 명제는 이렇게 통일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한편, 음악 연구 및 실내악 운동을 보다 특화시킨 음악가의 집이 음악동맹의 주도하에 생겨난다. 여기에서는 이념을 불문하고 많은 우익음악인사들과의 교류를 꾀하였는데, 김 순남의 [산유화] [자장가], 이건우의 [금잔디] 등의 가곡집 이 나온 것도 이맘때 쯤이다. 이 중 김순남의 [산유화]는 '시대적 감각을 자유로이 형상화했으며 조선가곡의 위치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되는데, 여기에서는 일 본의 요나키(도레미솔라) 음계가 아닌 '도레파솔라'라고 하 는 조선의 고유의 5음계를 찾아내었다는 역사적 성과를 거 두고 있다. 1947년에 들어서면서 단정수립 기운이 노골화 되는 가운데 미군정의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속에 서도 음악동맹은 전예술운동단체가 결집한 사상 초유의 종 합예술제를 기획하는가 하면, 기층 민중의 음악 생산력을 고취시키기 위해 근로자 음악 경연대회를 갖는 등 최후의 불꽃을 태웠다. 그러나, 47년 8월을 넘기면서 좌익인사들 에 대한 대량 검거령으로 인해 김순남 등 많은 음악인들이 월북하면서 남한에서의 음악운동은 그 전사를 마감하게 된 다. 이상의 활동으로 볼때, 음악동맹은 활동가의 양적, 질 적 수준에 많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전선동의 가 장 직접적인 기제인 노래들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과 무엇 보다도 그러한 변혁의 시기에 음악이 복무해야 할 대상이 어디인가를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문화예술운 동사에 남을 획기적인 조직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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