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사전심의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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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가요 사전심의] 위헌결정과 정태춘. 관련자료:없음 [424] 보낸이:나일정 (il11 ) 1998-10-03 07:52 조회:92

   가요 사전심의 위헌결정.

해금가요란 말이 있고보면 금지곡이었다가 풀린노래가 있다는 말인데 지금도 금지곡이 다수 있지요?

"독도는 우리땅"
이 노래 경쾌하고 재미있는 곡인데 금지곡이었었는데 지그은 해금 되었나요?
지난번 송해가 진행하는 노래자랑프로에서 어떤 사람이 멋지게 부르던데...

금지문화 금지인생 정태춘.
저는 정태춘하면 "떠나가는 배"라는 가요를 생각 합니다. 같은 제목의 가곡 이 있고 제가 두 노래 모두를 좋아하고 간혹 부르기도 합니다.

  • 가곡 "떠나가는 배"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바다로 따나는배
  • 가요 "떠나가는 배" 저기 떠나가는배 거친파도 헤치고

그런데 그 정태춘이 결국 사전심의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받아 냈다는 사실은 아래 기사를 보고 저도 지금 알았습니다.

의미있는 위헌 결정이지요.
이미 96년 6월 내려진 결정이라는데 저는 금시초문이었으니 역시 쏟아지는 정보속을 살아가면서 정보가 중요하긴 하지만 또한 정보가 공해가 된다는 것 을 실감 하겠습니다.

가수 정태춘의 사연들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가수 정태춘

─────────────────────────────────── MSEARCH MBC 뉴스/시사 기사검색 #5/9 ━━━━━━━━━━━━━━━━━━━━━━━━━━━━━━━━━━━ 제목 : 가수 정태춘의 사연들 서울신문 (SEL) 자료 : 98.09.12 본문 : 1/3 ───────────────────────────────────

78년 데뷔곡들로 성공한뒤 국악을 도입한 80년의 새 음반 2·3집에서 거푸 외면당한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거듭된 심의싸움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던 중 예상외의 반응에 부닥쳤던 것이다.결국 관객들 과 직접 마주치고 싶어 85년부터 3년에 걸쳐 전국순회공연에 나섰다.‘鄭泰 春 朴恩玉의 얘기노래마당’이 바로 그것이다.제도권 음악에 대한 회의를 벗 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나 할까.

93년 두번째 비합법 음반 ‘92년 장마,종로에서’를 낸 뒤엔 더욱 실의가 컸다.불법 테이프이기 때문에 합법적인 판매가 막힌데다 운동권 진영의 판매 망이 거의 사라져 테이프 판매는 사실상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여기에 공륜과의 외로운 싸움이 너무나도 힘들었다.가요 사전심의에 대한 헌법 재판 소의 결정이 계속 미루어진 채 결과에 대한 긍적적인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90년 비합법 음반 ‘아 대한민국’의 노래말들은 그래서 절절하기가 말할 수 없다.기득권의 비리와 정부의 폭력성을 꼬집은 ‘아 대한민국’,87년 조 선대생 李哲揆군 사망사건을 담은 ‘일어나라 열사여’,기성제도권 문화의 허위의식과 비열한 사치성을 꼬집은 ‘인사동’,지하 전셋방에서 화재로 질 식사한 두 어린이의 죽음을 묘사한 ‘우리들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모두 구체적 현실에 대한 고민이 각인된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을 주는 것들이다.

오히려 93년 발표한 두번째 비합법 음반 ‘92년 장마,종로에서’는 90년의 ‘아 대한민국’ 보다는 훨씬 서정성이 짙은 편.갓 시집온 새댁의 심정을 담은 ‘양단 몇마름’,소시민들의 메마른 모습을 관조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늙은 농부의 모습을 통해 고향의 한가로운 모습을 담은 ‘저 들에 불을 놓아’ 등 언더그라운드 포크계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 첫 비합법 음반을 냈을 때 보다 93년 두번째 비합 법 테이프에 대한 관계당국의 압박이 훨씬 컸던 것은 심의의 일관성 결여와 시의에 치우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 MSEARCH MBC 뉴스/시사 기사검색 #6/9 ━━━━━━━━━━━━━━━━━━━━━━━━━━━━━━━━━━━ 제목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가수 정태춘 서울신문 (SEL) 자료 : 98.09.12 ───────────────────────────────────

지난 96년 6월 어느 날 서울대 문화관에서는 특별한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결정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출연한 가수 20 여명이 모두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특히 90년도부터 공연윤리위원회(공륜)와 정면대결을 벌이며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던 가수 鄭泰春씨(44)의 감흥은 남 달랐다.

78년 ‘시인의 마을’‘촛불’로 데뷔한뒤 인기를 끌었던 鄭씨는 시골 아 저씨처럼 편안한 분위기의 가수겸 작곡가.그러면서도 시적인 언어구사와 현 실에 대한 직설적 묘사로 왜곡된 대중문화의 모습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게 특징이다.절실한 삶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내온 만큼 ‘노래하는 음유시 인’‘운동권 가수’ 등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도 다양하다.지난 4월 제9집 ‘정동진’을 낼 때까지 어느 것 하나 평탄하지 않았다.그중에서도 외로운 투쟁 끝에 얻어낸 가요 사전심의 철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90년과 93년 두차례에 걸친 사전심의 거부 운동은 공륜을 상대로한 전쟁이 었고 이 과정에서 음악 포기를 생각하기도 했다.90년 사전심의 거부 운동은 사실상 하루아침에 불거진 것이 아니다.두차례나 비합법 음반을 내고 사전심 의 거부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자청한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은 첫 음반을 낼 때부터 쌓였던 불만의 결과였던 것이다.

78년 낸 첫 음반에 대한 공륜의 심의보류 조치는 그 단초다.음반자체가 통 째로 심의보류에 걸렸다.노래 ‘시인의 마을’중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라는 대목이 부정적이라는 인식을 받았다.이미 발표된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는 핑계였다.시 확인이 안되자 ‘전면개작지시’로 돌아섰다.사실상 의 심의 탈락이었다.결국 레코드 사장이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 로 바꿔 심의에 통과할 수 있었다.鄭씨는 문제의 음반에 실린 노래 ‘촛불’ 로 그 이듬해 문화방송 10대가수상 신인상을 받았다.

이후 88년 합법음반 6집 ‘무진 새노래’를 낼 때까지 전면개작지시를 받 은 것이 10곡,부분개작 지시를 받은 것은 20여곡이나 된다.음반을 낼 때마다 공륜과 끊임없는 실랑이를 벌였다.심의에서 본래의 의도가 거듭 좌절되면서 방송에서도 멀어졌고 차츰 소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85년부터 부인 朴恩玉 씨와 함께 ‘鄭泰春 朴恩玉의 얘기 노래마당’이란 타이틀로 전국을 돌아다 녔다.

운동권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것은 87년부터.“당시 청계피복노조 젊은 노 조원들과 어울리면서 좀더 실천적인 활동을 찾았지요”.87년부터 시작한 현 장운동은 6·29이후 운동권 진영으로 치달았고 89년엔 전교조 지원을 위한 노래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를 갖고 전국을 순회해 20만명 이상을 만났다.이미 대중가수의 이미지는 멀어져 있었다.“물론 내가 직접 선곡해 수록한 2집음반과 국악풍의 노래만 실은 3집 음반의 반응이 실망스러웠습니 다.하지만 격변기 민주화운동의 거센 물결속에서 내가 거들 수 있는 몫이 무 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리고 90년 마침내 정면대결로 들어간다.사전심의 철폐운동이 그것이다.
당국의 사전심의에 통과되지 못한 반민족·반민주 세력에 대항하는 노래들을 묶은 비합법 테이프 ‘아 대한민국’을 내고 심의거부와 판매에 들어갔다.

“가요사상 첫 사전심의 거부였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정부의 간섭이 별로 없 었어요.지금 돌이켜 보면 89년 이후 해금의 분위기에서 큰 제재를 받지 않았 던 때문인 것 같습니다”

93년 또 한차례 정면투쟁.‘92년 장마,종로에서’라는 제목의 불법 테이프 발매가 그것이다.이때는 90년과는 달랐다.문화부 지시에 따라 각 시도 경찰 서로 “鄭泰春 朴恩玉 음반을 회수하라”는 공문이 돌았다. KBS 지방홀과 서 울 새마을체육관 등 공공성격이 짙은 곳에선 여지없이 판매저지가 있었고 제 지가 들어왔다.“테이프를 팔면서 ‘창작표현의 자유만세’란 문구를 붉은 스탬프로 찍었는데 ‘왜 빨간색이냐’면서 파란색 스탬프로 다시 찍는 해프 닝도 있었습니다.93년 음반은 자극적이고 직설적인 사회비판을 담았던 90년 음반에 비해 오히려 평이하고 서정성이 짙은데도 상황은 더욱 급박했습니다”

93년말 문화부의 고발이 있었고 그 이듬해 1월 ‘음반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서울지검 형사6부에 의해 불구속 기소됐다.그리고 세차례 의 재판이 이어졌다.鄭씨도 맞대응했다.그해 3월 서울형사지법 담당 재판부 에 위헌법률심판 신청을 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5월 위헌제청이 됐다. 그로 부터 2년 1개월만인 96년 6월 마침내 위헌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지난해엔 부인 朴씨와 함께 그렇게 별러오던 첫 공식 콘서트를 ‘사랑하는 이에게’란 타이틀로 6개 도시에서 열수 있었다.

[金聖昊기자 mailto: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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