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 01학번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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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연구

1 성장배경 및 서양문명과의 접촉[ | ]

유교주의(문명 최대의 적으로 간주)의 산물 봉건문벌제도는 어린 후쿠자와에게 있어 족쇄보다 더한 고통을 주었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늪과도 같은 존재였다(일종의 강박관념).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의 위계질서는 당시 정치․사회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던 주자학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대부분의 도쿠가와 사상가들은 각각 다른 사회적 기능을 갖고 공헌을 하는 데 네 계급-士․農․工․商-으로 사회를 나누는 것이 만물의 질서에 걸 맞는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17세기 후반의 한 사상가는 이를 설명하여, 「농민은 경작함으로써 백성을 먹여 살리고, 공인은 물품을 만들어 이를 이용케 하며, 상인은 필요한 사람에게 물자를 공급함으로써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사무라이는 지배함으로써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각각 그들의 직분만을 행한다 해도 실로 서로 돕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더 유용하다고 인정되는 사회적 기능에 따라, 그리고 사회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네 계급의 순위는 정해졌다. 즉 사무라이는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제일 중요한 봉사를 하면서도 개인적인 이득에는 가장 무관하기 때문에 최상위에 놓였으며, 농민은 필수적인 식량을 생산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위치하게 되었고, 보다 덜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수공업자, 그리고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상인이 차례로 그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자연히 도덕적인 면에서 책임이 덜 하다고 여겨진 하위계급은, 개인적 이득보다는 언제나 도덕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사무라이 계급에 복종해야 했다.

신분은 관습상 세습적인 것이었다. 계층간의 이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800년대 초반까지는 사무라이 자손은 사무라이로, 평민의 자손은 평민으로만 이어졌다.  이 점은 신분이 능력이나 덕행과 어느 정도 연결되었던 중국과 다르다. 그곳에서는 과거를 거쳐 특권적인 관리층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일본의 유학자들도 말로는 업적을 중시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일본사회라는 것이 중국보다는 훨씬 폐쇄적이고 귀족적이며 사회규율이 보다 엄격하여 지배층으로의 상승 가능성은 그만큼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조건은 어떠한 신분에 속하더라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강한 자극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었다. 보다 나은 신분을 얻기 위해 계층을 뛰어넘을 수는 없어도 자기 계층 내에서는 최소한 가장 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본분을 지켜야 하는 것은 가정에서부터-특히, 사무라이 층에 있어서- 강조되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세분된 지위․권한의 차이를 분간하도록 교육받았다. 이러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변하던지 아니면 후쿠자와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노력했고 그 노력처럼 사회 또한 변해갔다. 급 물살을 타기 시작한 후쿠자와의 인생 여정은 그렇게 나아갔다. 막말의 시대적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이 후쿠자와를 더 크고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후쿠자와는 서양을 무조건적으로 흠모해 기회가 되는대로 서양을 배우고 익혔다. 그 학문의 힘은 곧 사상으로 확립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만큼, 서양 문화를 전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를 설득력 있게 또는 영향력 있게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 페리 함대의 도전과 항구를 열라는 강압적인 요구에 일본이 무릎 꿇은 것은 처음에는 德川 정부가 비판의 대상이 된 정치적 실패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군사적인 우월의 실상을 차츰 이해하게 됨에 따라 그 실패는 전체적이며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문화적인 것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후쿠자와는 이 주장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1835년 1월 10일 오사카 도지마(堂島)에 있는 나카쓰번(中津藩)의 낮은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후쿠자와는 어렸을 때 봉건적 위계 질서의 제약하에서 분명히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성장한〕나카쓰라는 마을에서 나를 가장 불행하게 한 것은 관직과 신분상의 억눌림이었다. 공식적인 경우 뿐 만 아니라 개인적인 만남에서, 또는 어린이들 세계에서조차 높고 낮음의 구별은 뚜렷이 규정되었다. 우리와 같은 낮은 사무라이 집안 출신 어린이들은 높은 사무라이 집안 출신 어린이들에게 공손하게 말해야 했지만 이들은 늘 우리에게 오만한 언사를 쓴다.”  후쿠자와는 그답게 겸손하게 계속 말을 잇는다. “학교에서 나는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고 어떤 어린이도 그 곳에서는 나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교실 바깥에서 그들은 나보다 윗 계급으로서의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육체적인 힘에서조차 조금도 처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나는 어린아이였지만 이 모든 면에서 불만을 아니 가질 수 없었다.[1]

19세기가 되었을 때인 1854년에 그는 나카쓰를 떠날 기회를 얻었다. 그해 페리가 왔었다. 후쿠자와는 나가사끼로 가서 이른바 “화란학(蘭學)”을 가르치는 오사카의 오가타(緖方塾)학교에 들어갔다. 4년 뒤 영지 관리에 의하여 에도로 파견되었고 같은 영지 출신 사무라이들이 다닐 수 있는 화란학을 위한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이 학교가 후에 게이오(慶應)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곧 영어를 배우고 1860년 해리스 조약 비준을 위하여 미국으로 가는 사절의 한 사람으로 샌프란시스코로 갈 기회를 얻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동안 후쿠자와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기술상의 업적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화란학 공부에 몰입했던 시절에 이미 과학적인 원리를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를 맞은 분들은 근대 산업의 본보기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열중하였다. 아직 도시 사이를 뻗는 철도도 없고 전등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보 시설과 갈바니(Galvani,Luigi)[2] 의 전기 도금 기술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제당 공장으로 안내되어 제당 원리에 대한 아주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내가 확신하건대 우리를 맞은 분들은 아주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어 우리가 놀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새로운 것들이란,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가타 학교에 입학한 이래 나는 줄곧 그러한 과학적인 원리만을 배워왔었다.[3]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사회 관습과 제도, 이를테면 이성 관계, 가족 제도, 생명 보험, 우편 및 은행 제도, 병원 및 정신병자 수용소 따위였다. 이 때의 여행과 뒤이은 1862년의 유럽 및 1867년의 미국 여행에 대해서도 자신이 본 바를 세밀히 기록하였다. 후쿠자와는 일본 근세에 출판된 중요 저서 가운데 하나인 「서양사정」(西洋事情)을 펴냄으로서 1866년에 첫 명성을 얻었다. 이 책은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서양 여러 나라의 일상 생활에 관계된 사회 여러 제도들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간격으로 그는 계속 수많은 글을 발표하여 서양에 관한 정평있는 권위자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유신 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 명치 정부가 개혁 문제에 호의적임을 알았을 때 그가 쓴 책의 전체 논조는 변하기 시작했다. 서양 사회에 관한 정보를 단순히 기술하는 대신에 서양의 가치,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용감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후기의 저작에서는 전통의 가치나 사회 관습을 보존하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사쿠마 쇼오쟌등[4]의 개혁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후쿠자와는 유교 원리가 과학적인 사회 습성과는 융화될 수 없는 자연관과 사회를 보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교 원리에 매달려서는 서양 과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대 문명의 본질은 개개인의 독립 정신, 독창력 및 자립성을 길러 가는 풍토 속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봉건 제도나 유교의 가치 체계가 이러한 자질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는 전통적 일본 문화를 전면 공격하게 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논문가운데 하나인 “학문의 권유”(學問のすすめ)[5] 에서 그는 그 유명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있게 하지도 않았다” 는 말로 글을 시작했으며, 도쿠가와 시대 후반기부터 움터온, 단단하기 그지없었던 세습 신분 제도에 대한 분명한 반론을 주장하며 끝을 맺었다. 그는 계속하여 공리적인 지식 습득 여부에 따라 젊은이의 사회적인 지위가 결정되어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문명론의 개략”(文明論の 槪略)[6] 에서 그는, 일본 문화의 근본적인 결함이 기본 제도인 가족 제도에 있다고 말하였다. 가족 제도는 한쪽으로는 절대적인 권력 의식을, 다른 한쪽에서는 의심할 수 없는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서양 문명을 낳게 한 독립 정신을 파괴하여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글을 통하여 유교, 전통 교육 제도 및 권위주의적 정부를 공격하였다. 교육자로서, 신문 편집인으로서 또는 정치인들을 자문하는 지식인으로서 그는 나라를 활짝 열고 여러 제도들을 만들어 가는 세대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 문명론(文明論)[ | ]

후쿠자와는 일본개화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사상적인 기반과 실천적 기반을 다진 지식인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의 문명개화의 초점은 구체제하의 학문의 유한성과 폐쇄성을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후쿠자와가 실학(實學)을 제창한 것은 도쿠가와(德川) 시대의 유학(儒學)에서 노출되는 실용성이 없는 허학(虛學)의 배격이며, 학문과 생활을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후쿠자와의 실학실천은 곧 중국사상의 배격이며 서구사상의 수용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사회관계에 순응하는 역할을 하는 비속한 실용주의로부터 학문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비로소 학문은 실생활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 후쿠자와의 실학의 의미이다. 이는 곧 문명개화의 근간이며 문명론의 본질인 것이다. 후쿠자와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서구문명의 도입을 추구하고 발전시켰다. 그의 저서「서양사정」「문명론의 개략」「학문의 권유」는 이런 그의 사상 문명론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후쿠자와가 생각하는 문명론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미개나 반개 단계에서 문명단계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구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유교주의와 그것에 기초한 사회질서를 개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서구의 합리주의와 그것에 의한 사회질서를 확립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정신주의에서 물질주의로의 변화이다. 즉 정신적 풍요보다는 물질적 풍요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셋째는 일본국가 독립주의이다. 초기의 후쿠자와는 개인의 독립을 강조하고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였지만, 점차 변하여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즉 자주성을 가진 국가를 상정하였다. 그는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을 강조하였다. 넷째는 서구국가처럼 국가 팽창주의 또는 민족 팽창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후쿠자와는 서구 열강처럼 일본이 성장하기 위해서 청일전쟁과 같은 국가 팽창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것은 서구열강에 지배되지 않는 일본을 만들려는 의도도 있지만, 약육강식의 국제관계 논리를 통해 아시아를 지배하여 강대국으로 성장시키려는 일본 중심주의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3 탈아론(脫亞論)[ | ]

후쿠자와가 인식하고 있었던 문명개화가 중요한 국내과제였다면, ‘조선문제’[7]는 가장 중요한 대외과제였다. 그는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조선 땅을 밟아보지 않았으나, 메이지 일본의 조선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한반도를 어떠한 형태로라도 일본의 영향권 하에 두지 않으면 일본의 안전이 위태롭다고 믿고 있었던 그는 이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활동했다. 한편으로는 한말의 개화파 인물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게이오 대학에서 개화를 지향하는 조선의 많은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일본식 근대화의 길을 주입하였다. 그리고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던 그는 조선 안에서 언론을 통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개화파와 협력하여 언론사를 창간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조정안에서 친일세력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정변을 배후에서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많은 논설을 통하여 국민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일본정부의 조선정책에 직․간접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럼, 탈아론의 전문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얼마나 과격해지고 단호해졌는지 살펴보겠다. 그리고 그의 중심 사상이라고 하는 문명론과의 괴리는 어느 정도인지 인식해보자.

세계교통은 편리해져서 서양문명의 바람이 동쪽으로 점점 불어와 이르는 곳마다 풀과 나무도 이 바람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없다. 생각하건대 서양의 인물, 고금에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 그 거동이 옛날에는 느렸으나 이제 와서는 활발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교통의 이기(利器)를 이용해 기세를 타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 동양에 있는 나라 사람들은 이 서양문명의 동점(東漸) 기세에 놀라 이를 어떻게든 막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세계정세를 살펴볼 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파에 밀려 문명의 바다에 함께 뜨고 내리면서 더불어 문명의 파도를 타고 고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문명은 곧 홍역의 유행과도 같다. 현재 도쿄(東京)의 홍역은 서쪽 나가사키(長崎)로부터 동진(東進)해서 봄기운과 함께 갈수록 만연하고 있다. 이런 시기를 맞아 이 유행병의 해악을 막으려 해도 과연 막을 방법이 있을까. 결코 그럴 수단은 없다. 그저 해로울 뿐인 유행병이라 하더라도 그 기세에 놀라지 말아야 할 일이다. 하물며 이해상반이 따르고, 항상 이익이 많은 문명에 있어서랴. 단지 이것을 그냥 막지 않는 데 그칠 일이 아니라 그것이 만연하도록 힘써 돕고 국민으로 하여금 빨리 그 바람을 쐬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들이 할 일이다.

서양문명이 일본에 들어온 것은 가에이(嘉永)개국에서 시작되었다. 국민들은 마침내 그것을 취해야 할 필요를 깨닫고 점차 활발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진보의 길에 걸림돌이 되는 고풍노대(古風老大)한 정부가 가로누워 있어 이를 어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대문명은 일본의 낡은 구각(舊殼)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투(舊套)를 벗으려면 동시에 정부도 갈아치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곧 문명바람을 막아 그 반입을 금지할 것인가, 그리하면 일본은 독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문명의 기세가 동양 고도(孤島)를 홀로 잠자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일본의 지사들은 국가를 중히 여기고 정부를 가볍게 보는 대의에 기초하여, 또 다행히 황실의 신성존엄에 의뢰하여 마침내 구 정부를 무너뜨리고 신 정부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조야(朝野) 구별 없이 모두 서양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오로지 일본의 낡은 틀을 벗는 것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축으로 하여 주의(主義)로 내세워야 할 것이다. 주의로 하기 위해서는 오직 ‘탈아(脫亞)’라는 두 글자에 있을 뿐이다.

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 동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국민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固陋)함을 벗고 서양문명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불행한 일은 이웃에 있는 나라이다. 하나는 중국이고 또 하나는 조선이다. 이 두 나라는 국민도 고래 아시아 류(流)의 정교풍속(政敎風俗) 아래 자라온 배경은 우리 일본 국민과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인종의 유래가 다른 것일까, 아니면 같은 모양의 정교풍속 속에 살면서도 유전교육(遺傳敎育)의 취지가 같지 않은 점일까. 일․지(支)․한(韓) 삼국을 비교하여 중국과 조선의 서로 닮은 상황은 조선과 중국이 일본보다 가깝고 이 두 나라 사람들은 한편이 되어 나라에 관해 고쳐 나아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교통 편리한 세상에 문명의 사물을 못 듣거나 못 보았을 턱이 없는데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고풍구습에 연연한 정은 백년 천년의 옛날과 다름이 없다. 이 문명 일신(日新)의 활극장(活劇場)에 교육은 유교주의를 부르짖어 인의예지(仁義禮智)만을 칭송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외견상 허식에 구애되어 진리, 원리를 가르치지 않고 도덕마저 땅에 떨어져 지독한 불염치(不廉恥)가 극에 달해도 거만하게 자기 반성의 빛이 없다.

우리들이 이 두 나라를 보면 지금처럼 서양문명이 동쪽으로 밀려들고 있는 때에 독립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다행히 그 나라에 지사들이 나와 우리의 유신 때처럼 큰일을 꾀한다면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년 안에 망하여 국토는 세계문명 제국이 분할하게 되리라는 예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홍역과 같은 문명개화를 맞으면서도 조선․중국 두 나라는 그 전염의 순리에 역행하여 무리하게 이를 피하기 위해 방안에 틀어박혀 공기를 차단하고 질식 상태에 빠져드는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수레와 수레바퀴, 입술과 이빨 관계인 이웃 나라는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이 보통의 예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중국․조선은 일본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서양문명인의 눈에는 세 나라가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어 동일하게 보고 중국과 조선을 평가하는 데도 일본과 같이한다. 중국과 조선 정부가 전제(專制)정치를 행하고 법률에 따르지 않으면 일본 또한 무법 국가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중국과 조선의 인사(人事), 과학을 모르니까 일본도 음양오행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비굴함과 수치를 모르므로 일본인의 의협심도 함께 매도당하고, 조선의 형벌이 참혹하면 일본인도 무정하다고 단정해 버린다. 이를 마을에 비유하면 한 마을 한 고을이 어리석게 무법(無法) 잔혹(殘酷)할 때는 설령 그 마을 안의 한 가족이 정당한 일을 해도 다른 많은 사람들의 잘못에 가려 묻혀버리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그 영향이 간접적으로 우리들의 외교에 장애가 되는 일이 적지 않다. 일본의 일대 불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늘의 꿈을 펴기 위해 이웃 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시간이 없다. 오히려 그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과 진퇴를 같이하여 중국․조선을 접수해야 한다. 접수 방법도 인접 국가라는 이유만으로 사정을 헤아려 줄 수 없으며 반드시 서양인이 접하는 풍에 따라 처분해야 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친하게 하는 자와 함께 악명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885년 3월 16일, 후쿠자와가 자신이 창간한《지지신보(時事新報)》에 실은 탈아론[8]

이처럼 탈아론의 내용은 강경성으로 보아ꡐ아시아 침략론ꡑ이라고 말을 바꾸어도 결코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탈아론 전반부는 문명화-서양화를 강력히 추구하여 구미 여러 나라에 대해 독립을 달성하려는 일본의 자부심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과 조선을 가리켜 문명화를 이룰 수 없는 나라로 낮추어 보고 이러한 비문명화가 일본 외교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멸시와 실망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ꡒ일본은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여 이들과 함께 아시아를 분할 점거해야 한다ꡓ는 논리에서는 그의 사상이 얼마나 격하게 변화하였는지 알 수 있다.

4 동아시아 정세[ | ]

1870년대 조선은 구미열강의 세력권밖에 있었다. 영국은 인도, 프랑스는 베트남, 러시아는 시베리아, 미국은 국내문제와 남미․필리핀 등 그들이 획득했거나 획득하려는 지역에 골몰하였기 때문에 조선에 관심을 돌릴 틈이 없었다.

이런 국제 여건을 적극 이용한 것이 일본이었다. 1860년 일본은 ‘존왕양이’를 기치로 내걸어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하여 천황제 국가를 세웠다. 아울러 ‘화혼양재(和魂洋才:일본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라는 구호 아래 서구의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 식산흥업과 부국강병 정책을 폈다.

1868년 11월 일본은 조선정부에 왕정이 복고되었음을 알리면서 새롭게 수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양이 정책을 펴고 있던 조선정부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9]’의 입장에서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은 1874년 4월 대만을 잠시 점령하여 얻은 자신감에 힘입어 1875년에 조선을 강제로 개방시키려는 치밀한 계획을 짰다. 일본은 그 해 5월 부산항에 군함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고 8월에는 이른바 ‘운요호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를 강요하였고, 민씨 정권은 이에 굴복하였다.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강화도조약’으로 부르는 이 조약은 치외법권인 영사재판권, 조계 설정, 무관세무역, 일본화폐의 유통허용 등 일본의 일방적인 특권만을 규정하였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부산을 비롯하여 인천과 원산을 차례로 개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은 비로소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었고, 그것은 우리 나라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어 조선은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조선은 저율의 관세나마 관세권을 처음으로 인정받게 되었지만, 미국에게 ‘최혜국 조관’을 인정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정부는 구미 자본주의국가에게 문호를 활짝 열어 젖혔다.

1882년 9월에는 청의 강요에 못 이겨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0]’에 굴욕적으로 조인하였다. 이 장정은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명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치외법권 확대, 서울 양화진 개시(開市)와 내지 통상권 허용, 연안 무역권 허용, 홍삼수출에 대한 고율 관세(30%) 부과 등 조항 하나 하나가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뒤 조선정부는 1886년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구미 열강과 이와 비슷한 내용의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봉건 모순이 심화되어 나타난 여러 개혁과제를 추스르지 못하였다. 게다가 구미 자본주의 국에게 받은 경제손실을 조선에서 메꾸려던 청과 일본이 경제․군사 면에서 드러내놓고 침략하여 조선정부는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렸다.

한편 개항 뒤 민씨 정권의 부패와 외세 침략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양반유생의 저항이 높아 가는 가운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임오군란은 1882년 6월 개항 뒤 새로 만든 신식군인인 별기군과의 차별, 민씨 정권의 부패로 제때에 정해진 월급을 받지 못한 것이 동기가 되어 일어난 군인폭동으로 일시 왕궁을 점령하고 민씨 정권을 내쫓지만 민비의 요청으로 출병한 청의 무력개입으로 진압된다. 갑신정변 또한 1884년 10월 마침내 정변을 일으켜 성공시키지만 철저한 사전 준비 미흡으로 3일만에 정변의 막을 내린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것은 이들이 개혁운동을 추진하면서 일본을 지나치게 신뢰한 반면, 민중을 자신들의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화파 인물 대부분이 양반출신의 관리와 일부 중인출신의 선진적 지식인들로 구성된 부르주아적 개혁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개화파의 개혁구성은 지주제 존속을 바탕으로 조선사회의 식민지화를 꾀하던 외세와 이해가 일치되어 있었고, 또한 외세에 철저하게 대응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략성을 간과하고 침략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근대주의의 성향을 띠었다. 개화파의 이러한 한계는 정권탈취와 개혁에 일본을 이용하려던 자신들의 주관적 의도와는 달리 침략자를 원조자로 잘못 파악하여 일본에 이용당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후쿠자와가 개화파를 대륙침략의 통로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강한 자주 근대국가건설’을 목표로 한 개화파의 집권을 바랄 리가 없을 것이다. 개화파의 집권은 또 하나의 경쟁국이 생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조선의 독립을 바란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내막은 달랐던 것이다.

한편 중국은 1860년대 초 태평천국난(太平天國亂) 진압 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우수함을 본 회국번(會國藩)․이홍장(李鴻章) 등은 군수공업, 외국어 교육 등을 통한 자강(自强)의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은 막말시기로 유신의 조짐을 안고 불안한 사회를 유지해가고 있어 국내의 안정 도모가 우선시 되고있었다. 일본이 문호를 개방한지 6년이라는 시간밖에 안된 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벌써 중국에 의해 자강의 모범이 되고 있었다. 이는 일본의 간헐적인 모습, 즉 신식 기선(汽船)을 조정하고 대포 등 무기를 만들고 조직하며, 외국에 많은 유력자의 자제를 유학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변하는 시대상을 잘 읽었는지는 모르나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자강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들(日本)은 중국을 넘볼 것이라 이홍장은 경고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운 국내 사정 속에서도 일본은 위에 언급한 것 이외에도 개국이전인 1853년 이미 반사로(反射爐)를 건설하여 용광로를 만들고, 더 나아가 양식선척(洋式船隻)도 만든 살마번(薩摩藩)이라는 봉건제후가 있었다.

이렇듯 일본은 중국이 근대화에의 길을 자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에 그 모범이었고 또한 경계할 상대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가위 숙명적인 대결은 19세기, 20세기의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개의 주축이고 중국이 극복해야할 과제였던 것이다. 이시기 젊은 중국인들은, 일본에서 하나의 기이한 현상을 본다.「脫亞」라는 것이 그것이다. 일본은 아시아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서양의 대열에 끼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탈아 주장은 청․일 및 러․일 양 전쟁후의 승리감과 이중적으로 습합(習合)되어 아시아인의 멸시, 일본인 우수론(優秀論)이라는 그 단적인 현상으로 발전하였다. 청일전쟁 직후 일본이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아시아인끼리의 단합」을 내세웠고, 러일전쟁에 승리함으로써 필리핀․중국․인도․월남 등 피염박(被壓迫) 민족으로부터「아시아인의 가능성」의 구현자로서 칭송 받았던 그 일본이, 자기 스스로는 탈아를 자랑하고, 실행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일본인의 탈아를 목도한 중국 청년들은 또한 일본의 근대화가 서양제국주의 수법을 모방한 타자(他者)에의 침략을 그 기초로 하고 있음도 인식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중국의 진정한 자강은 무엇보다 민족적 내지 국민적 자주라는 반제국주의의 노선을 달려가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정부 즉 청정(淸廷)은 반제국주의운동을 영도할 능력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에 청 정부 타도의 필연성을 느끼고 혁명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일본은 이와쿠라(岩倉)견미구사절단(遣美歐使節團)[11]의 파견으로 서양의 개화를 직접 목격하고 돌아온다. 그리고ꡐ일본 부강의 실질ꡑ을 동남아시아의ꡐ자원ꡑ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후 후쿠자와는 10년쯤 후(1882년 12월 11일) 구미제국을 체류하고 영국의 식민지 지배(동남아사아 지역)를 실제로 보고 그는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ꡐ인도, 중국의 토인 등을 다스리는 영국인에게 배울 뿐 아니라ꡑꡐ동양의 권력을 우리가 혼자 장악 할ꡑ것이라고 포착한다. 이로부터 2년후 1884년 6월 26일부 런던발신(日原昌造)으로「일본은 동양국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시사신보」논설(11월13일부)을 게재한다. 청․불전쟁(1883-85)의 귀추가 확실해진 1885년 3월 16일부「시사신보」는 후쿠자와의 「탈아론」을 게재한다.ꡒ우리 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렸다가 함께 아시아를 일으키는 유예가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대오를 떠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고 , 저 중국․조선과 교제하는 법도 이웃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정을 봐 줄 필요도 없이 바로 서양인이 그것과 교제하는 식에 따라 처리하여야만 할뿐이다.ꡓ라고 강조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청일전쟁마저 승리한다. 이러한 일본 근대의 동아시아 인식은 분명히 산업자본주의 단계에서의 유럽의 그것(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을 계승하였던 것이다.

5 같이 보기[ | ]

6 주석[ | ]

  1. 근대 일본의 사회사, 케네스 비.파일, 1985, pp97(후쿠옹 자전)
  2. 의학자․생리학자․물리학자로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볼로냐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이 대학의 해부학교수를 지냈다. 해부실험중 개구리의 다리가 기전기(起電機)의 불꽃이나 해부도(解部刀)와 접촉할 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고, 그 현상을 연구한 결과 이것이 전기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작용하는 전기는 공중전기(空中電氣)와는 관계가 없고, 전기가 뇌(腦)에서 발생하여 동물의 근육에 흘러 들어간다고 생각하여 ꡐ동물전기(動物電氣)ꡑ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이 동물전기설은 후에 A.볼타에 의해 수정되었다.
    1791년 발표한 갈바니전기에 관한 논문은 당시의 학계에 큰 자극을 주었으며, 전기생리학․전자기학(電磁氣學)․전기화학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3. 윗글, pp98.
  4. 다카시마 슈우한(高島秋帆, 1798-1866), 다카노 죠오에이(高野長英, 1804-1850), 사쿠마 쇼오쟌(佐久間象山, 1811-1864)등 난학자들인 이들은 서양에 비해 일본의 군사적 낙후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쇄국론자들처럼 배외적이지도 않았으며 일본의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도 갖지 않았고 따라서 도덕 또는 정치적 방법으로 독립을 지킬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물론 이들도 내부개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했으나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주된 일은 서양의 과학․기술․총포를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 없이는 아무리 일본인이 용감하고 굳은 각오를 가졌다 해도 나라를 지킬 수는 없다고 하였다. 특히 사쿠마 쇼오쟌은 「어찌하여 중국과같이 고상하고 정의롭고 위대한 나라가 영국과 같은 무례․불의하고 타기할 나라에 패했는가? 그것은 지배자들이 우월감에 빠져 바깥 세계를 무시한 결과 외국에서의 기계발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설명한 다음 결론적으로, 서양도덕은 못마땅하다 해도 일본의 정신과 동양의 도덕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양과학을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5.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초기의 가장 유명한 계몽서로서 초판이 1872년 발행되어 대단한 평판을 받으면서 1876년 제17판까지 시리즈로 간행하였다. 간행 부수 340만 부에 이르는 당시 최고의 베스트 셀러로 계몽사상의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저자의 그때까지 저술의 주요내용은 서양 문명을 수입,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이 책은 처음으로 자기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초판의 첫머리에 있는 인간평등선언ꡐ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도 않았다ꡑ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하늘에서 사람을 만들 때 만인은 모두 같은 위치에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상하귀천의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누구나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세상의 많은 사물을 취해 의식주에 사용하며 서로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각자 편안하게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봉건적 신분제도를 비판하고 인간의 평등과 독립을 주장하면서ꡐ한 몸의 독립을 기초로 하여 한 나라 독립을 이루자ꡑ라고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ꡐ인간의 보편적 일상에 가까운 실학ꡑ을 서양에서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책은 일본에서의 근대적․합리주의적인 인간관, 사회관, 학문관의 출발을 보여주는 책이나 학문에 의한 차별을 낳았다는 비판을 받았고, 봉건도덕을 배척하여 수구적인 사상가들의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6. 그러나 후쿠자와는 여기 〈문명론의 개략〉(1875)에서 서구 열강의 식민 논리를 그대로 내면화했다. 그는 세계를 ꡒ문명, 반개, 야만ꡓ의 단계로 구분하는데, 서구 열강이 문명이라면,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중간인 반개 또는 문명이고, 중국․조선 등 이 야만으로 떨어진다.
    결국 이런 식민 논리 수용은 일본인에게 ꡐ식민지적 무의식ꡑ을 형성했고, 이런 치욕을 봉인하고 서구 열강의 반열에 올라서려는 욕망은 ꡐ식민주의적 의식ꡑ을 만개 시켰다. 제국주의의 시대, ꡐ문명국ꡑ이 ꡐ야만국ꡑ을 착취하는 것은 허울좋은 국제법 아래 제멋대로 정당화됐다. 따라서 서구 열강에 의해 ꡐ야만ꡑ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는 조선에서 상대적 ꡐ야만ꡑ을 발견하는 것으로 출구를 찾은 것이다.
  7. 후쿠자와가 1882년 창간한 『時事新報』에 기고한 그의 사설 및 평론은 『福澤諭吉全集』8권에서 16권 사이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최소한 1/3 이상이 조선과 관련된 것임을 볼 때 조선문제를 얼마나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8.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론(脫亞論)을 어떻게 펼쳤는가, 정일성, 2001, pp.18-21.
  9. 1876년 일본의 압력으로 강화도 조약의 체결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일본과의 조약 체결은 서구의 자본주의 침략 세력이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 나라에 침략하는 것으로 보고 일본과의 수교와 개항을 반대하는 논리로 제기된 척사론이다, 이 주장은, 강화도 조약을 반대한 최익현의 상소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최익현은 조약 체결의 불가함을 오불가소(五不可疎)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첫째,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정치적 자주의 위기, 둘째,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조선의 전통산업의 파괴, 셋째, 일본은 서양의 적과 같으며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예의의 위기, 넷째, 일본인에 의한 재산과 부녀자에 대한 약탈의 위기, 다섯째, 일본은 금수와 같으므로 문화 민족인 우리가 그들과 교류할 때에 도래할 문화의 위기 등이다. 이는 일본과의 조약 체결로 우리에게 닥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의 위기를 통찰한 주장이며, 한편으로는 조선의 우월한 문화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최익현의 왜양 일체론은 단순히 일본과 서양이 동일하다는 각도에서 나타난 배타적인 척사론이 아니라, 일본이 서양의 침략 세력과 동일하게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므로 이에 대해 그들보다 우수한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함께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10. 주요 내용을 보면 "조선은 오랜 인방(隣邦)이므로 법전(法典)과 예식(禮式)에 관한 일체는 모두 정제(定制)가 있으므로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고 오직 현재 각국이 이미 수로(水路)로 통상(通商)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급히 항해금지를 폐지하여 양국의 상민(商民)으로 하여금 상호무역에 종사케 하여 한가지로 이익의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이 마땅한 바 그 경계선과 호시(互市)의 예도 또한 수시(隨時)하여 변동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1. 1871년 12월 23일 요코하마를 출항하여 미,영, 불,독,이 로 등12개국을 역방하고 1873년 9월 13일 귀착-이와쿠라 토모미 岩倉具視(1825-83), 오오쿠보 토시미치 大久保利通(1830-78), 이토오 히로부미 伊藤博文(1841-1909) 등에 의한 해외 시찰

7 참고 문헌[ | ]

  • 한국근대사, 강재언, 한울, 1994
  • 후쿠자와 유키치, 정일성, 지식산업사, 2001
  • 후쿠자와 유키치, 가와무라신지三村眞二, 다락원, 2002
  • 후쿠자와 유키치, 사사가와 고이치, 학문의 권장, 소화,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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