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록음악 비평의 철학적 조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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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록) 음악 비평의 철학적 조건들

- 음악을 듣는 귀, 음악을 보는 눈 --허경, 2001

'한국 록의 철학적 조건들'은 뮤지컬박스 1호에 실려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고 생각할 때
당신은 지금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 로버트 프립

"예술은 신과 예술가의 합작품이다.
예술가가 적게 일할수록 그것은 더욱 좋아진다."
- 앙드레 지드

1.1 # .

"작품이란 모름지기 기념비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 작품이란 그러니까 일차적으로는, 그 작가에게 기념비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가 도달한 지점에서 한 발자국 나아갔는가 제자리걸음인가 혹은 후퇴인가를 문제삼는 것이, 설사 매우 어려운 과제라 할지라도 불가피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작가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읽어야 비로소 이 감각이 길러질 것이다. 한편 작품이란 이 나라 문학 현주소에서도 기념비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그 감각은 문학사적 개입에서 길러지지 않을까 한다" - 김윤식, <선정 이유>, <<이청준: 날개의 집 - 1998년 제1회 21세기 문학상 수상작품집>>, 7쪽, 도서출판 이수, 1998.

"이 책을 계획하고 집필하는 가운데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미술의 세계에 이제 방금 눈을 뜨게 된 십대의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나는 젊은이들을 위한 책이 어른들을 위한 책과 달라야 한다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젊은이를 위한 책은 읽은 사람이 비평가라는 것, 그것도 가장 엄격한 비평가여서 유식한 척 전문용어들을 나열하거나 또는 느낌을 과장하거나 가장하면 이를 재빨리 간파하고 분개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전문용어나 감상(感想)이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일생 내내 미술서적은 모두 그따위 것이라고 의심하게 만드는 악덕(惡德)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함정을 피하고 지나치게 평범하고 비전문적으로 들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평이한 말로 설명하고자 진지하게 노력했다. 그러나 한편, 사고(思考)에 있어서는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피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미술사가(美術史家)들의 전문용어를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사용하기로 한 결심 때문에 독자들에게 일부러 '수준을 낮추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독자들을 일깨워 주기보다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려는 욕심에서 '학술적' 용어를 남용하는 사람이야말로 구름 위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일부러 '수준을 낮추어' 말하는 사람이 아닐까."(5쪽)

"더욱이, 내가 결심한 마지막 원칙은 어떤 원칙이라도 절대적 원칙으로 하지 않고 때때로 나 자신 그것을 깨뜨리기조차 한 것이다. 독자들은 내가 스스로 정한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되리라."(7쪽)

" <책 머리에>, <>(개정판 3쇄), E.H. 곰브리치, 崔旻 譯, 悅話堂 美術選書 1, 悅話堂, 1977/1994(개정판 3쇄), 5쪽.

"사실상 어떤 시기의 일부 미술가나 비평가들은 그들의 미술의 법칙을 공식화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같았다. 즉 보잘것없는 미술가들은 이 법칙들을 적용시켜 보았으나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반면, 위대한 미술가들은 이 법칙들을 깨뜨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일찍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조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29쪽)

"미술에 대해 배운다는 자세에는 결코 끝이 있을 수가 없다. 미술 작품에서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위대한 미술 작품은 대할 때마다 달리 보인다. 그것들은 인간 본연의 모습처럼 다함이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 같 (30쪽)/ 다. 미술품들은 각각 제 나름대로 불가사의한 법칙과 모험을 지닌 신비한 세계이다. 어느 누구도 미술 작품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사실상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 다음 사항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즉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암시를 파악하고 모든 숨겨진 조화에 감응하려고 하는 참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그 마음가짐이란 무엇보다도 상투적인 미사여구나 흔해 빠진 경구 같은 것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속물근성에 젖게 만드는 어정쩡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 전혀 모르는 것이 월등히 낫다. 이러한 위험은 매우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내가 이 장(章)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단순한 점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표현이나 정확한 소묘 같은 성질을 지니지 않은 작품 가운데 위대한 미술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에 자만한 나머지, 아름답게도 정확하게도 그려지지 않은 작품만을 좋아하는 체하게 되어 버린다. 그들은 항상 너무 유쾌하거나 감동적으로 보이는 작품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경우 무식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결국 미술을 감상하는 진정한 즐거움을 잊어버리거나, 진정으로는 다소 싫은 작품을 보고도 매우 '흥미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속물이 되어 버린다. 나는 단연코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다. 나 같으면 그러한 무비판적인 방식으로 신뢰받느니 전혀 신뢰를 못 받는 쪽을 택하겠다.
나는 다음 장(章)들에서 미술의 역사, 즉 건축, 회화 및 조각의 역사를 논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에 관해 안다는 것은 우리가 왜 미술가들은 독특한 방법으로 작업을 하는가, 왜 그들은 어떤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술 작품들의 독특한 성격에 관한 우리의 안목을 날카롭게 하고, 그렇게 하는 거이 미묘한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풍부히 하는 데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아마 그것은 혼자서 미술 감상의 방법을 배우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러나 위험성이 없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때때로 미술품 목록을 손에 든 채 화랑을 걷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매번 한 그림 앞에 설 때마다 작품의 번호를 열심히 찾는다. 손가락을 짚어 가면서 목록을 들여다보다가 작품의 제목과 화가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집에 머물러 (31쪽)/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림을 거의 보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목록을 검토할 뿐이다. 그것은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종의 지적(知的)인 장난일 뿐이다.
미술사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이와 유사한 함정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들은 미술 작품을 대할 때 작품 자체를 들여다보지 않고 그것에 적절한 레벨을 기억해내기에 골몰한다. 그들이 렘브란트의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빛과 명암에 대한 이탈리아의 기법적(技法的)인 용어-에 관해 들은 바가 있을 경우 그들은 렘브란트의 작품을 대할 때면 유식한 척 머리를 끄덕이면서 "음, 훌륭한 키아로스쿠스로군"하고 중얼거리고는 다른 곳으로 걸어간다. 나는 이 같은 어중간한 지식과 속물근성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와 같은 유혹에 굴복하기가 쉽고, 이러한 책은 그러한 속물들을 증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안(開眼)을 돕고 싶은 것이지, 입을 헤프게 놀리는 데 도움을 주고 싶지는 않다. 미술에 관해 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말들은 너무나도 서로 다른 문맥 속에서 사용되었으므로 그 정확한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참신한 안목을 가지고 하나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새로운 발견의 항해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힘든 일일지는 모르지만 더욱 값있는 일이다. 그러한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 가지고 돌아올지 누가 말할 수 있으랴." (30-32쪽)<서론: 미술과 미술가들>

음악 비평가 동료들이 보내준 잡지 [아트록 매거진: 예술대중음악] 14호를 읽다가 용기를 얻었다. 김상만이라는 그 친구는 입문자를 위한 10장의 아트록 음반을 고르면서 앞글에 이렇게 썼다: "한참 프로그레시브락을 듣던 시절, 친구들에게 소개하고자 테잎에 녹음해서 관심을 유도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선곡은 별달리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왜일까? 사람들을 유도하기 위해서 듣기 좋은 발라드 혹은 그 사람이 기존에 들어오던 것과 유사한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거부감을 줄여보고자 했던 나의 방법은 프로그레시락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것이었고, 프로그레시브락에서 참신함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이 지금 필자가 내린 결론이다. 그래서 여기서 제시하는 10장의 음반과 그에 대한 글은 입문자를 위한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구애의 달콤한 사탕발림이 아니라 폭압적인 언어로 점철된 가이드이다. 이 점 주의하시길."(17쪽, [아트록 매거진], 14호, 98년 8월)

1.2 # 인간의 지평과 근대성의 지평

1. 나의 생각에 철학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단 한 마디의 말이다: 네가 스스로 철학하라.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도 똑 같은 것이다: 당신 스스로 철학하라. 그리하여 나는 음악에 관련한 우리의 활동이 그러한 요구에 대해 예외적 경우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2. 음악 비평이 가져야 한다고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몇 가지 조건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음악을 누군가가 들어서 - 어떤 의미에서든 - 그것이 그에게 좋다면 그걸로, 최소한, 그에게는 끝이다. 내가 아바 혹은 비틀즈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혹은 전혀 관심이 없다면 그걸로 끝이다 - 이 점이 윤리적/도덕적 가치와 미적 가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이 음악을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이유 혹은 정당성에 대해 설명해야만 할 어떠한 의무도 갖지 않는다. 누구도 H.O.T.나 머라이어 캐리를 좋아하는 중학생에게 그 음악이 갖는 단순성 혹은 상업성을 잣대로 그의 음악적 취향에 대해 심판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근데 벌써 심판을 다 했다!).

3. 이러한 전제가 받아들여졌다면, 나는 이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록 음악 비평의 조건에 대해 이러한 제한을 두고 싶다: 누구도 자신의 취향을 기준으로 H.O.T.나 머라이어 캐리의 음악을 매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록 음악에는 록 음악의 자체의 문법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록 음악을 문학, 철학 혹은 클래식이나 국악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대중 음악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클래식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몇 가지 상식적인 논증을 해보자: 내가 베토벤의 8번 교향곡을 듣지 않고 그것을 평한다면 나의 논의는 구체성이 결여된 간접적 타당성 밖에는 지닐 수 없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다그마르 크라우제의 작업들을 모르는 사람이 그녀의 음악성과 가사 내용을 문제 삼는다면 우리는 그의 말에 귀기울여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클래식에 달통했으나 대중 음악을 모르는 한 클래식 애호가가 대중 음악에 대해 혹평을 가한다면, 그것은 평생 10여권의 소설책 밖에 읽지 않은 노벨상 수상 핵물리학자가 몰리에르의 희곡을 평가 절하하는 것과 똑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 물리학자가 가장 좋아하고 최고의 소설로 치는 작품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거나 [인간시장]이라면, 누가 그의 말에 단순한 유우머 이상의 의미를 두고자 하겠는가?

4. 김용옥 명언 시리즈 1: 김용옥은 자신의 책 『새츈향뎐』(1987)에서 우리나라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나라는 일본, 미국 등등에 대해 50년, 100년 뒤졌다"는 말에 대해 이러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에서) 서양이란 개념은 존재론적으로 전제가 되어 있고 동양이란 개념은 생성론적으로 전제가 되어 있다."(34쪽) 따라서 그는 우리가 이제 이러한 정태적 존재론에서 벗어나 양자 모두를 생성론적으로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 ... 역사의 판결은 궁극적으로 쌍방적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본다. 우리가 미국에 대해 무지했고 따라서 개화되지 않았다고 하는 한에 있어서는 미국도 우리에 대해 무지했고 또 개화되지 않았다."(193쪽) 이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피력하고 있다: "한국영화사나 일본영화사는 세계영화사의 보편적 흐름과 완전히 동일한 보조를 맞추면서 발전해 나왔다."(34-36쪽, 이상 강조 모두 인용자) 한국 예술, 혹은 한국 대중 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나의 사견으로는, 이 말은 정말 만고의, 지고의 인식론적 명언이다. 이러한 관점 아래 그는 『새츈향뎐』에서 "서구중심의 음악 개념 그 자체가 하나의 민속음악화하고 있다"(The Western music is itself an ethnic music, 141쪽)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 또한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다 - 적어도 (간접적 지식이 아닌) 직접적 경험을 통해 현대 (대중) 음악을 들어왔던 사람이라면, 만약 작가들의 '현실태가 그렇다'라는 말이 너무 강하다면 최소한 그들의 '지향점'으로서라도, 누구나 그의 이러한 말에 동의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지금 세계에 존재하는 현대 음악의 모든 진지한 작가들이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다.

6. 김용옥 명언 시리즈 2: 김병종의 『미술강의』(통나무, 1990)에 붙이는 소개의 글에서: "물론 김병종 선생님은 동양과 서양의 미술을 둘로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며 결국 그 양자는 그냥 "그림"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통합은 반드시 그 통합을 가능케 하는 인식의 틀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 동서양은 이미 대립적 타자가 아닙니다. 앞으로 한국화의 가능성은 오로지 서양미술의 강점이 대립적 타자로서가 아니라 소외되지 않은 나로서 초극될 때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대적 가치의 시인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너도 일리가 있고 나도 일리가 있다는 상대주의는 인식의 빈곤일 뿐입니다. 한국화는 인류미술의 모든 가능성을 정정당당히 싸워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22쪽) 꼭 김일성의 연두교시 같지만, 바로 이 말이다. 한국 가요와 미국 가요를 둘 다 아는 사람이 있을 때, 애국심과 정서에 호소해서 먹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국사람들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음악의 보편화라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말대로 그것에 성공한 유일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이들이 바로 '자본주의 이후의 서양사람들'이다 - 그리고 마르크스 바로 그 자신도 자신의 서구적 사유 방식인 변증법과 유물론을 모든 세계의 보편적(universal) 사유 양식, 운동 법칙으로 제시하였다.

7. 나는 오늘날 포스트모던의 문제 의식은 당시 해상 무역의 발달로 최초로 자신의 폴리스 이외의 문명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사유를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소피스테스들의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과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설령 당사자들은 동의 안 하더라도) - 당시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라는 걸출한 소피스테스가 다양한 현상에 대한 정의(定義)로서의 보편적 진리( pist m , 이 말이 바로 당시 용례로 sophia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러한 소피아를 좋아하는, 즉 추구하는 학문이 바로 필로소피아 philosophia, 즉 철학이다)의 개념으로 천하를 통일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기준의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두 가지 기준의 문제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좋은 음악과 그렇지 못한 음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에 따라, 둘째, 그에 대해 어떠한 답변이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어 있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나머지 경쟁 패러다임들 혹은 에피스테메들을 제압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주장하는 이른바 보편성의 문화적 상대성 혹은 그것의 제국주의적 함의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제시하는 우리의 답변이 갖는 또 다른 역차별 혹은 제국주의적 함의를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첫째,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가르는 기준 혹은 근거는 무엇인가? 나의 정의는 앞에서 말한 대로 '내가 좋으면 최소한 나에게는 그 음악이 좋은 음악이다'라는 것이다. 아무리 누가 명곡, 걸작이라고 해도 내가 안 좋으면, 내가 싫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 좋은 것이 너에게도 필연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좋으냐'라는 질문에 관해 이러한 논의가 갖는 전적인 무력성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좋다'(good)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분석철학적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에 대해 다른 방식의 답변을 시도했던 영국 일상언어학파의 G.E. 무어, 혹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적 문제의식을 이에 대해서도 역시 적용해 보아야 할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나의 글 [한국 록 음악의 철학적 조건들]을 참조). 결국 나의 답변은 내가 좋은 음악이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보편적으로 좋은 음악이라고 주장할 때, 내가 그 음악이 왜 좋은 음악이라고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 근거를 밝히지 않는다면 그 명제는 대화의 가능성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 물론 이 이유 혹은 근거가 반드시 이성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나는 이른바 인상주의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예술에 관한 모든 비평은 C.L. 스티븐슨이 말한 정의적(情意的, emotive) 의미 밖에 갖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좋은' 비평과 '나쁜' 비평을 나누는 본질적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비판적이냐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러한 말이 얼마만큼의 해석학적 개방성을 가지고, 주어진 작품과 향수자 그리고 이 양자간의 관계에 대한 심미적 향수 혹은 이해의 지평을 열어 주는가의 문제라고 믿는다. 이제 우리는 차라리 문제는 인상주의 비평 자체가 아니라, 오직 그것이 갖는 인식론적 심오성뿐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하나의 음악 혹은 보다 넓게는 하나의 문화가 보편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할 때의 기준의 문제이다. 이는 문화란 무엇인가, 혹은 칸트의 말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틀을 일차적으로 갖게 되겠지만, 21세기 직전의 오늘에 와서 이에는 몇가지 중요한 첨언이 가해져야 한다. 이 기준으로서 제시되는 언명 혹은 명제는, 푸코적으로 말해, 항상 일정한 공간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효과(결과)를 생산하는 하나의 담론 (생산) 장치이다 - 담론 장치에 대한 푸코의 이론 자체는 담론 정치학 혹은 문화 상대론에 대해 면책 특권을 갖는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 문화와 기준에 대한 국수주의적 호소는 국외에서 현실적으로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의 하나 그러한 논리가 먹힌다 해도, 이는 옛 일본제국주의의 大東亞共榮圈 논리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방식에 찬성하지 않는다. 나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것이다: 어떠한 인식론 혹은 존재론이 우리로 하여금 서구 문명의 보편적이며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제국주의에로의 길을 피하게 하는가? 나의 생각으로는 이 곳이 바로 곧 칸트와 헤겔 이래 베버나 마르크스를 거쳐 오늘날의 하버마스, 푸코 혹은 로티에 이르는 논의와 나의 일상적인 삶과 고민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다. 그것을 나는 근대성의 문제로 구체화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란 무엇인가? 근대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위에서 제기되었던 인간의 문제에 덧붙여 근대의 문제는 오늘날의 모든 문제에 반드시 부과되어야 할 오늘의 지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근대성의 문제가 인간의 문제와 분리되어 올바르게 질문되어질 수 없듯이, 인간의 문제 또한 근대성의 문제와 고립되어 탐구되어질 수 없다고 믿는다. 이 단까지의 논의를 거칠게 이를 정리해 본다면, 인간의 문제가 주어진 문제에 대한 보편적, 생물학적 지평을 구성한다면, 근대성의 문제는 그에 대한 구체적, 역사적 지평을 구성한다. 이는 음악과 철학뿐 아니라 윤리, 종교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관념, 실천 영역에도 사려 깊게 질문되어져야 한다(물론 나는 스스로를 옳은 것, 참인 것으로 주장하는 진리 자체가 갖는 딜레마, 혹은 모든 보편 이론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제국주의적(폭력적) 속성을 인식하고 있다. 나는 전자를 진리의 딜레마, 후자를 보편성의 제국주의적 함의라고 부른다).

8. 이러한 몇 가지 난제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나는 하나의 작업 가설을 채택하고자 한다: 그것은 윤리학에 있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제시했던 이상적 인간(ideal man)의 가설과 비슷한 것이다 - 따라서 밀의 논의가 갖는 한계 혹은 문제점도 나의 논의에 고스란히 따라올 것이다. 이상적 인간이란 밀이 두 가지 이상의 상충되는 (공리주의적) 쾌락들이 존재할 때, 우리가 두 가지를 다 경험해 보고 음미해 본 사람의 결론을 신용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밀은 저 유명한 배부른 돼지의 삶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삶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쾌락과 고통을 계량/측정 가능하도록 양화(量化)하는 문제도 문제이지만, 그 한계 안에서도 배부른 돼지를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엄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난점에 대해 토마스 쿤의 입장 혹은 지식 사회학적인 입장에서 향수자 집단 혹은 전문가 집단의 '대체적' 합의에 더 비중을 두고자 한다. 그리고 실상 우리가 좋은 음악,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음악성의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고민한다면 정말 합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 우리가 그것을 현실적으로 - 나는 이 말을 여기서 나이브하게 그냥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비반성적 수준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문제가 항상 거의 자명한 것으로 가정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H.O.T.와 서태지의 음악 중 어떤 것이 더 음악성이 높은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과 룰라의 곡은? 이에 대해 우리는 이론적으로, 좋은 음악이란 뭐냐? 그 기준은 뭐냐? 취향이 아니냐? 객관적 기준이 있냐? 누가 결정하냐? 음악성이 좋은 게 좋은 음악의 다냐? 등등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우리는 아무도 이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정답'은 서태지와 베토벤이 더 높다는 것이다. 일정한 심미적 기준이 주어진다면, 두 음악을 모두 들어본 향수자들은 99% 이 점에 합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과 니체의 철학 사이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칸트와 니체의 철학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고 두 사람 모두의 원전을 조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오늘날 칸트와 니체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칸트의 철학을 '읽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고 말하는 니체주의자에 대해 그의 자질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칸트 혹은 니체의 철학과 나의 철학 사이의 학문성 혹은 그 영향력에 대한 문제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베토벤과 모차르트 혹은 드뷔시 음악성의 우열에 대한 확정적 결론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나, 모차르트와 룰라 사이의 그것은 보다 명확할 수 있다 - 그러나 모차르트와 핑크 플로이드 혹은 서태지 사이의 그것은 여전히 애매할 수 있다.

9.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 음악의 보편화, 세계화의 문제에서 녹음과 테크놀로지의 문제는 차치하고 라도 - 녹음이 안 좋다고 그 음악도 무시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일단 무시하자 -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고, 또 던져 보아야 한다: 정말 우리나라에 킹 크림즌은 고사하고 마이클 잭슨 음악의 반의 반 정도라도 되는 연주 실력을 보여주는 앨범이 있는가? 하다 못해, 전정기의 지적대로, 쿨 앤 더 갱이나 머라이어 캐리 반만큼의 연주 실력을 과시하는 앨범이 있는가? 한국 음악과 서양 음악은 자기 나름의 기준을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 상대주의, 장르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예술의 보편적 격조에 대한 가치 판단은 우리에게 언제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전 우주에서 장고를 가장 잘 치는 사람은 김덕수인 것이다 - 누가 이에 대해 토를 달랴!(그러나 우리는 스티브 개드(Steve Gadd)가 이 우주에서 재즈 세션의 제일인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웃지 않는다. Alas!) 설령 그들이 각기 다른 종류의 음악성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김덕수와 스티브 개드 사이의 음악적 격조의 고하를 말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 스스로가 지향하는 바로 그 음악이 요구하는 완성도의 관점에서 그들의 음악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인들(혹은 우리의)의 대중 음악을 그들이 그들의(우리가 우리의) 음악에 있어 도달한 깊이, 그들이(우리가) 도달한 인간 이해의 깊이에 의해서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예술성이라 부르는 것의 실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은 결국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 표현 지평의 확대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깊은 예술성이란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일 것이다. 단순히 음악 기교적 녹음 혹은 테크닉, 매니지먼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이란 것이 지닌 인간의 자기 이해의 수준에 대해 말해 본다면, 우리나라에 핑크 플로이드의 [wish you were here]나 [animals], 혹은 헨리 카우의 [in praise of learning],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나인 인치 네일즈의 [downward spiral] 비슷한 판이라도 있었던가? 그 격차가 비교라도 할 만한 것이 있었던가? 음악적 완성도와 그 사회적 파급 효과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에는 서양인들이 도달한 자신의 이해의 깊이에 도달한 우리의 작품이 없다!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음악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이 이 세상엔 없는 줄 아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근대화에 따르는 전통의 절맥(絶脈)으로,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일상어로 이야기하는 우리의 철학자를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러한 것이 이 세상엔 없는 줄 아는 것이다. 실로 철학의 빈곤이며, 그 이전에 경험의 빈곤이다! Damned!

  • 뱀발 1 - 만약 누군가가 국악, 재즈, 프로그레시브 및 가요 사이에 존재하는 장르의 존재론적 우열 혹은 가치 등급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를 가련한 미소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영화는 철학보다 본질적으로 덜 심오한 장르라고, 연극은 시보다 무의미한 것이라고, 가요는 재즈에 비해 본질적으로 음악성이 없다고, 록의 음악성이 클래식의 그것보다 덜 심오하다고 오늘 누가 진지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장르들 사이의 존재론적 우위란 없는 것이다. 모든 장르는 그 나름의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고유한 기준에 입각한 예술적 판단만을 그것에 대해 내릴 수 있다. 아스토르 피아졸라 이전의 탱고를 누가 민속 예술과 현대적 감수성이 결합된 현대 음악의 아름다운 사례라고 했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그렇게 되지 않았던가!

10. 이에 부과하여 실제적 예술작품의 향수와 관념적 예술 이론의 괴리, 갈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예술 이론의 존재 이유는 어떠한 경우에도 예술 창작자와 예술 향수자 양자로 하여금 예술의 이해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시도함으로써 보다 좋은 예술을 만들어 내고, 또 그러한 예술을 향수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마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나오기 이전까지의 한국 민중문학의 논의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론이 아무리 당위적이고 옳다해도, 만약 그에 따르는 일정 수준 이상의 실제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허무한 공론에 불과하다. 이 말은 대중 음악의 향수에도 마찬가지이며, 아무리 예술비평가 혹은 예술가의 이론이 좋고 논리가 완벽해도 그에 상응하는 작품의 존재 혹은 수준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도 록음악계에 전근대적인 인상주의적 신비주의적 신화에 기초한 담론들이 많아서 진정한 음악 향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대 록 기타리스트, 3대 프로그레시브 그룹, 먼저 팦 듣다가, 얼터너티브, 헤비메탈 듣고, 이어서 프로그레시브 듣고, 아트록, 재즈 듣고, 클래식 듣고 ... 하는 속물 교양인들의 논리가 여전히 담론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나도 중고등학교때까지만 해도 3대 록 기타리스트라는 게 진짜 있는 줄 알았다! 나도 3대 록 기타리스트들 무지하게 좋아한다. 이미 대학교때 그 사람들판 거의 다 사고, 다 들어 봤다. 그리고 그들만큼 잘 하는 사람들, 그들만큼 록필드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연주를 못한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주어진 관념을 바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 그러한 고정 관념의 구분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삭죽이는 - 그 메카니즘은 보통은 무시하고, 종종은 고립시키며, 때로는 위협한다 - 썩어빠진 교양론자들의 철학적 안일함과 인식론적 무지를 탓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 인식론에 남아있는 구시대적 잔재다. 음악을 듣는 우리의 인식에는 아직 자기 왕의 목을 자른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이른바 다이애너 전(前) '황태자비'의 죽음에 대한 이상적 열기나, 망국의 당사자로서 마땅히 민중의 타도와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봉건왕조 고종, 순종, 명성황후 등에 대한 몰역사적 동정심과 똑 같은 인식의 논리가 적용되는 영역이다. 그들은 역사를 역사학을 위해, 윤리를 윤리학을 위해 공부할 뿐, 자신의 오늘과 자신의 시대를 현재화, 역사화시키며, 자신의 삶을 윤리의 생생한 장으로 만드는 것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아무리 이론이 좋아도 음악이 안 좋으면 꽝이다. 음악이란 노래가 좋아야 하는 것이다. 음악이란 교양을 쌓을려고 듣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그냥 듣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음악을 사랑하게 되는 제일 좋은 길이라고 믿는다. 위에서 언급한 3대 록 기타리스트 등등과 같은 말들은 마치 '20살에 공산주의자 아니면 바보고, 30살에도 여전히 공산주의자면 더 바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데올로기와 동일한 오류를 내포한다. 왜 그런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인간은 40살에 공산주의자가 되어서 3대 4대 공산주의 가문을 대대손손 지속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재즈 듣다 팝을 들을 수도 있는 것이며, 최건(崔健)처럼 클래식하다 (그는 중국국립교향악단의 정식 트럼펫주자였다) 조지 마이클과 폴리스의 음악을 듣고 록으로 전향할 수도 있으며, 3대 프로그레시브 그룹으로 예스대신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를 넣어 볼 수도 있는 것이며, 70년대의 신중현을 80년대의 스콜피온즈보다 위대한 음악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 왜 안 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리라 믿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물론 신중현이나 스콜피온즈나 99년 오늘에 음악만을 보여주기 시작한지 오래라는 점은 똑 같다).

  • 뱀발 2 - 얼마 전에 어떤 독일 미술 비평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라는 책을 읽었다. 나는 뭐 그렇게 그 책의 결론이나 방법론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책의 문제가 저자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문제제기란 이런 것이다: "현대 미술은 왜 그렇게 어린아이도 그냥 그릴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심오한 논증을 해대며, 일반 대중을 바보 취급하고, 자신들끼리만 철저한 예술 마피아적 아성을 지어가고 있는가?" 나도 역시 예술이 대중을 위한 것만은 아니며, 또 반대로 예술가 중에도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저자가 현대예술의 철학적인 근본 전제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현대 예술은 - 모든 참다운 위대한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 오늘의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개념 자체에 도전한다. 따라서 현대 예술은 정말 그 자체로 철저히 근대적이며 동시에 포스트모던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도해보고 난 다음에만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지 안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 즉 새로운 시도 자체를 본질적 예술 행위 자체로 간주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누가 그걸 정하나? 또 새로운 것은 항상 좋은가? 그것들은 50년, 100년 혹은 500년 후에라도 남을까? - 여기서, "내 예술은 오직 오늘을 위한 것이므로 그러한 문제는 내 관심 밖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그냥 애교로 보아주자. 그러한 시도는 모두 참다운 예술일까? 물론 아니다. 음악에 관한 나의 논의를 여기에 대입시키면 "봐서 좋으면 좋은 미술이다"라는 명제가 나올 것이다(이에 대한 각론은 오늘 이 자리의 내 능력 밖이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을 한계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한계를 조건으로 생각할 필요는 더 더욱 없지만). 현대 음악에도 무수한 음, 기법의 실험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한 실험이 '진정한 예술'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가 들어서 좋아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미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누군가는 그것을 볼 때 좋아야 하는 것이다. 그 주체와 그 구성원의 성격 그리고 숫자만이 문제가 될 것이다. 역시 예술과 그것의 향수 및 그에 따르는 비판의 장은 거시적이자 미시적인 권력 투쟁의 장이다.

현대 예술은 미학의 새로운 개념(?)을 찾아가는 하나의 모험 행위 그 자체가 되었다. 그러한 모험에의 시도는 결국 일반 대중이 갖는, 혹은 전문가 집단이 갖는 아름다움의 기존 관념들에 대한 도전의 행위가 된다. 아마도 1983년? 나는 서울에 온 존 케이지와 머스 커닝햄의 공연을 보았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자신이 꺽은 소나무 가지로 - 자신의 음악이 '협연'(!)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머스 커닝햄 무용단의 동작과는 그야말로 완전히 따로 놀면서 - 전자 현(絃)을 긁어대던 존 케이지의 그 소리, 혹은 그 불협화음,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그 끽끽거리는 잡음은 과연 '음악'이었던 것일까? 이 순간 현대 음악이 도전하고 있는 대상은 더 이상 미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뿐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향수하는 인간의 본성 혹은 능력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자 실험이 된다. 예술 혹은 음악에 관련된 모든 실천과 논의들에는 그것이 전제하는 인간 이해의 지평이 존재한다. 물론, 음악에 대한 이해란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정말 멋대가리 없는 말이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라 말이 지녀왔던 전제적 폭력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 단어를 인간주의와 동치시킬 수는 없다). 결국 그 소리는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11. 음악은 이른바 취미이며, 교양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취미야말로 칸트가 자신의 [판단력 비판]에서 탐구했던 철학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원래의 사회적 철학적 맥락과 유리되어 버린, 오늘날의 죽어버린 교양(敎養, Bildung)이야말로 우리가 오늘 생각해 보아야만 할 현대의 예술에 대한 철학을 가로막는 근본 장애물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이른바 자신의 일상은 바뀌지 않고 머리 속에 - 자기 삶, 몸과 따로 노는 - 지식만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으로서의 '교양'을 혐오한다. 현대의 예술이란 이른바 '행위 예술'을 지칭하는 토탈 아트(total art)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듯이 나의 삶 그 자체이며, 미셸 푸코의 표현대로, 우리는 왜 나의 삶 그 자체를 예술 작품의 한 대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아니 도대체 예술이란, 철학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식 혹은 창작 주관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기나 하단 말인가? 나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나의 삶, 나의 일상적 고민과 분리되지 않는다. 예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미켈란젤로나 고호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아마 어떤 위대한 예술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생각을 하며,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자기 삶을 살았다고 말할 것이다 - 이것이 아마도 러셀이 자신의 [서양 철학사] 도입부에서 '나는 철학자를 존경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동료로서 이해하고 싶다'고 말한 참뜻이었을 것이다. 예술과 철학에 있어 선천적 재능의 문제가 완전히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이제 말 그대로 가장 비-천재적이며 동시에 상식적이지조차 못한 전통적 천재론은 수정되어야 한다.

12.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의 차원이 이에 반드시 부과되어야 한다: 근대성의 기준 그 자체는 담론 정치학 혹은 문화 상대론적 함의를 전혀 갖지 않는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보편적 담론인가? 근대성의 물음 자체가 이미 철저히 근대적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행위 그 자체, 그것이 바로 근대의 특징인 것이다. 역시 근대성의 문제는 시대 구분의 문제이기 이전에 더욱 더 인간성의 기본 형식에 관한 물음이 갖는 역사적 차원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근대라는 문제틀 자체가 갖는 서구중심주의의 혐의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있다(예를 들어 위의 '근대성의 물음 자체가 이미 철저히 근대적이다'라는 문장을 '근대성의 물음 자체가 이미 철저히 서구적이다' 혹은 '서구성(서구란 무엇인가)의 물음 자체가 이미 철저히 근대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구성의 물음 자체가 이미 철저히 서구적이다'라고 바꾸어 보라. 실로 우리 나라를 포함한 모든 비-서구 문명권의 현실적 근대화란 실제로 서양화 이외의 도대체 무엇이었으며, 무엇일 수 있었단 말인가?).

1.3 # 킹 크림즌과 로버트 프립 - 이성 안의 광기, 광기 안의 이성.

1. 오늘날 현대 서양의 대중 음악에서 모든 전문가 집단이 중요시하는 몇몇 작가들이 있다. 그 범위와 외연을 명쾌히 결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거장 작가들을 드는 것에 대한 반대는 그리 심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와 로저 워터즈(Roger Waters), 초중반기의 예스(Yes), 킹 크림즌과 로버트 프립, 소프트 머쉰(Soft Machine)과 로버트 와이엇(Robert Wyatt), 제니시스(Genesis)와 피터 게이브리얼(Peter Gabriel), 피터 해밀(Peter Hammil), 브라이언 에노(Brian Eno) ... 또 너무 많이 있다 ...

2. 나는 여기에서 아-하(A-ha)나 스파이스 걸즈(Spice Girls)를 들지 않았다. 이들은 사회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나는 이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하도 좋아하고, 스파이스 걸즈도 나름으로는 훌륭한 상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혹은 서태지 역시 이러한 분류에 포함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대중성이 있다는 것이 음악성이 없다는 반증은 아니다. 이러한 선정의 기준이 무엇인가는 정말 애매하지만 그들의 음악을 실제로 그들의 판을 거의 전부 사서 꾸준히 들어온 사람들끼리는 별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본다. 또한 제퍼슨 스타쉽(Jefferson Starship) 혹은 예스(Yes)의 요즘 노래가 초중반기의 노래보다 음악성이 낫다고, 혹은 퀸시 존즈(Quincy Jones)가 프로듀스(제작)한 마이클 잭슨의 [오프 더 월](Off the Wall)이나 [쓰릴러](Thriller), [배드](Bad)보다 마이클 잭슨이 직접 프로듀스한 [데인저러스](Dangerous) 앨범이 음악적인 면에서 더 뛰어나다고 진지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 이는 뭐 이문열의 [선택]이 그의 [금시조]나 [사람의 아들]보다 문학적으로 낫다고 보기는, 혹은 현철의 노래들이 나훈아의 노래들보다 음악성이 뛰어나다고 보기는 일반적으로 좀 어렵다는 얘기다.

3. 내가 친구들로부터 받은 [아트록 매거진] 14호에는 'AR Guide for Beginners'라고 해서 잡지의 편집인 6명이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입문용 명반 몇장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개인별 5-8장 정도로 총 49장(복수 추천 포함)에 이르는 이 추천 목록에 킹 크림즌의 앨범은 69년의 데뷔 앨범 [진홍빛 왕의 궁전에서](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CK)이 3번, 73년의 [독사 뱃속의 종달새 혀들](larks' tongues in aspic)이 한 번, 74년의 [빨강](red)이 두 번, 82년의 [비트](beat)가 한 번의 총 7번이다. 킹 크림즌 이외의 그룹 혹은 아티스트로 2번 이상 추천받은 경우는 핑크 플로이드 7번, 제니시스 5번, 예스 2번뿐이다. 앨범으로 2번 이상 추천받은 경우는 킹 크림즌의 [CK]와 제니시스의 71년작 [너서리 크라임](nursery cryme)이 3번, 킹 크림즌의 [빨강]과 핑크 플로이드의 75년작 [네가 여기 있었으면](wish you were here)이 2번으로 모두 4장뿐이다. 6명의 평론가 중 킹 크림즌의 앨범을 한 장도 고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이다.

4. 위의 추천 목록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사정이 이러하다면, 나는 아마도 오늘 우리 모임의 성격상 제니시스의 [nersery cryme]이나, 핑크 플로이드의 [wish you were here], 혹은 킹 크림즌의 앨범 몇 장을 준비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다. 나는 이 중 오늘 로버트 프립(Robert Fripp, 1946-)과 그가 이끄는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킹 크림즌과 로버트 프립의 앨범 몇 장을 준비했다. 왜냐하면 내가 판을 이곳에 거의 다 가지고 왔고, 더욱이 내가 이 목록에서 그들과 피터 게이브리얼(제니시스의 이전 리더, 지금은 솔로 활동)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다.

  • 뱀발 3 - 위의 글에서 그룹명은 그렇다 치더라도 앨범 혹은 노래 이름을 원어 알파벳 등으로 그냥 표기할 것인가, 발음 그대로 한글로 적을 것인가,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의 경우처럼 완전히 다시 '우리 것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복잡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나는 이 자리에서 다만 일국어 사용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즉 나는 "king crimson의 robert fripp이 愛好하는 frippertronics야말로 그의 Weltanschauung을 보여준다" 같은 문장은 한국어가 아니라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글은, 그 반대의 결과가 의식적 혹은 전략적으로 의도되고 있는 경우만을 예외로 하고, 항상 읽힐 수 있기 위해서, 즉 이해될 수 있기 위해 쓰여져야 한다. 가령 프랑스 지식인들이 빠져 있는 최대의 문제점이자 약점인 불친절한 글쓰기 혹은 현학주의를 생각해 보자. 나는 푸코의 책들 같은 경우 거의 전부의 책들이 (자기는 노력도 안하고 앉아서 받아 먹을려고만 하는 게으른 독자들은 이 경우 제껴두고, 마음이 열린, 즉 성심 성의껏 주어진 텍스트를 읽고자 하는) 프랑스 일반 대학생은 고사하고, 철학 전공이 아니라면 설령 인문대 영문과나 심리학과 교수라도 제대로 이해 못 할꺼라고 본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이해는 고사하고 누가 [말과 사물]이나 [지식의 고고학]같은 책을 단순히 단 한 번이라도 다 읽을 수 있었겠는가! 지식인 혹은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 영역을 끊임없이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이해 가능한, 쉬운 용어로 번역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푸코나 하버마스도 그런 점에서 아직 진정한 계몽이 안된 것이거나, 혹은 그러한 사태의 중요성에 대한 근원적인 무시 혹은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본다.
  • 뱀발 - 그러나 이 경우, 그룹명이나 아티스트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고 괄호에 원어를 적는 것, 앨범 타이틀 혹은 곡명을 번역하여 쓰고 괄호에 넣는 것까지는 현재의 일반적인 관행적 지향대로 좀 더 철저히 지켜지기만 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번역이 어려운 경우, 한글로 쓰는 문제는 음악비평가들의 개방적인 논쟁과 이에 따르는 시행착오를 거쳐 정착되어야 할 일일 것 같다 - 예를 들어 킹 크림즌의 데뷔 앨범의 다섯 번째 곡 크레딧은 이렇게 적혀 있다: 5.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including THE RETURN OF THE FIRE WITCH and THE DANCE OF THE PUPPETS. 이를 적을 수 있는 가능한 방법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① 원어(이 경우 영어) 그대로 적는다 ② 번역하여 적는다: '불의 마녀의 귀환'과 '인형의 춤'을 포함한 '진홍빛 왕의 정원' ③ 영어 발음을 한글로 적는다: '더 커트 어브 더 크림즌 킹' 인클러딩 '더 리턴 어브 더 화이어 위치' 앤드 '더 댄스 어브 더 퍼펫츠'. ③번에 동의하는 사람은 이 경우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에서 록을 듣고, 친구와 이야기할 경우에는 ③번의 방법만을 쓴다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딜레마에 있다(더구나 록카페에서 신청을 할 경우에는 원어, 즉 이 경우 영어를 쓴다). 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이 음악이 우리나라 (혹은 그러한 말로 된) 음악이 아니라는 사실이 놓여 있다. 나는 현실적으로 ②와 ③은 혼용하여 적절히 쓰되, ①은 공적 잡지 등의 경우에는 가급적 줄여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록 음악, 특히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을 듣는 주된 수용자들의 사회적 계급 혹은 계층 분포는 최저 고등학교 이상의 영어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이 록이 우리 음악이 아니며, (이른바 '국경이 없다'는 음악의, 그것도 '젊은이의 음악'이라는) 록의 정서와 문법이 결코 보편적이지도 일반적지도 않다는 것, 또한 무엇보다도 록이 우리에게 그 말의 1차적 의미에서 '자생적인 것'도, '우리 것'도 아니라는 엄정한 자각을 요청하는 것이다.

5. 록(Rock), 록큰롤(Rock and Roll 혹은 Rock 'n' Roll)에서 롤(구르다)가 떨어져 나간 이 단어는 강조점을 댄스에서 연주가의 음악 혹은 그의 내면 세계에로 바꾸었다(엘비스 프레슬리와 레드 제플린의 차이. 중간기로서의 비틀즈). 이는 우리의 머릿속에 강력한 드럼 비트와 찢어지는 듯한 기타의 굉음, 무엇인가를 외치는 샤우트 창법의 보컬, 음악 외적으로는 히피적, 반사회적 이미지, 머리를 늘어 뜨리고 셔츠를 입지 않거나 혹은 풀어헤친 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 등으로 쉽게 표상된다. 록 음악의 사회사는 복잡하고 중층적이며 이미 많은 이론적 테제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주관적으로 혼자 이렇게 생각한다: 록 음악 정신(rock spirit)의 본질적 테제는 "좆까!"(Fuck You!)라는 단 한 마디로 표상될 수 있다. 내 생각에 그 이상은 없다. 내가 "저는 그것을 반대합니다"라든가 "아니예요"라는 어법대신 "좆까!"라는 말을 선택한 것은 록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 내가 생각하기에 - "좆까!" 바로 그 것이기 때문이다. 록의 정신은 부정의 정신이다(따라서, 반농담삼아 얘기하자면, 록에는 결코 그냥 '좋은'(good) 음악이란 없으며, 오직 '좆나게 좋은'(fucking good) 음악만이 존재한다). 이 말은 록이 그러한 부정을 가능케 하는 현실적인 사회적 조건의 성숙 혹은 그러한 과정과 함께 나아간다, 혹은 서로 피드백한다는 말이다.

6. 나는 좋은 대중 음악의 3대 조건을 나 혼자 이렇게 생각한다: ① 대중성, ② 음악성, ③ 저항성.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보자: 이 구분에 따르면 서태지는 3가지를 다 만족시킨다. ① 대중성이야 말할 것도 없고, ② 음악성도 전문적으로 듣는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한국에서 이 정도의 음악성을 가진 그룹은 결코 세 개를 넘지 않으며, 더욱이 제도권 안에서 그러한 작업을 수행했다는 사실에 토를 다는 사람은 적어도 내 주변 전문인들 중에서는 아직 한 명도 못 봤다 - 물론 서태지의 음악 수준이 그렇다고 세계적 1급 수준인 것은 아니다. 서태지와 킹 크림즌은 고사하고 솔직히 말해서 내 생각에는 서태지와 에어로스미쓰의 연주실력도 하늘과 땅 차이이다(그러나 99년 오늘 그들의 음악을 거칠게 평해본다면, 킹 크림즌은 대가들의 너무도 안정된 실험 정신으로, 에어로스미쓰는 안정된 자신들이 연주력과 작곡 실력을 바탕으로 미국 여대생을 중심 타겟으로 삼는 얼터너티브 록과와 비데오적, 팝적인 요소의 적절한 혼합으로 70년대를 뛰어넘는 제2의 전성기를, 서태지는 대중적 성공에의 집착이라는 한 요소만 적절히 음악적으로 제어할 능력이 그에게 획득된다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동양의 한 젊은 록 뮤지션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정도의 음악성을 가진 그룹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세계에 1,000개 이상은 족히 될 것이다. 그들의 현장성과 가능성이 그들의 음악성을 평가하는 주요 요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음악비평가들이 -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영화인들보다 더 - 참으로 좋은 우리나라 음악의 탄생을 위하여 아쉽지만 좋은 그룹과 그들의 소중한 시도를 높이 사주고 있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③ 서태지는 어떤 저항성을 갖는가? 물론 그들이 '교실 이데아'에서 보여준 가사는 저항적으로, 사회 비판적으로 참 좋았다. 그러나 나는 뭐 솔직히 그런 걸 그렇게 높이 사지 않는다. 사회 저항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것을 담는 그릇, 형식, 즉 노래가 좋은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화인이 시대에 대한 저항을 하고자 한다면 지식인 시국 선언에 도장을 찍으면 된다. 그러나 그가 만약 자신의 영화로 시대에 대해 발언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 영화 자체의 미학적 완성도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교실이데아'에서는 모두가 좋았다. 그러나 그는 같은 앨범에 실린 '발해이야기'는 너무도 순진한, 거의 이데올로기적인 심정적 통일주의의 이상을 노래한다). 이야기는 똑 같다: 음악가는 그의 음악으로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서태지를 저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음악과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음악적, 사회학적 효과가 저항적이었기 때문이다(아니 정확히 말해 그것은 해방적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이데올로기적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음악들은 본질적으로 저항적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그의 음악이 우리 90년대 남한 사회의 대중 음악에 가져온 효과는 실로 혁명적이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나는 그의 3집이 그중 가장 저항적인 음원들을 담고 있다고 본다 - 그러나 그 자신 매니지먼트의 귀재이며, 바로 그러한 자신의 재능 때문에 대중성과 음악성 사이에서 언제나 위험한 줄타기를 하기 때문에, 이 판도 역시 잡다한 짬뽕적 성격을 갖는다. 이 면에선 차라리 신해철이 낫다. 그는 확실한 자신이 매니아만을 키워 신해철(해철님!) 사단으로 세뇌(?)를 시키기 때문이다 -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파시즘의 대중 심리학을 아주 잘 보여주는 한국적 예라고 본다. 다시 서태지로 돌아가면 최근에 98년에 삼성 나이세스에서 발매된 그의 독집은 음악적으로는 그의 최고 명반이다. 기존 앨범들이 보여주었던 참신성은 떨어지지만(우리 똑똑한 태지님은 그 정도는 看破!), 그는 이제 눈치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한다. 특히 트랙 3-6에 이르는 곡들은 이전 한국 (아니면 일본?) 데쓰 메탈의 독보적 존재였던 크래쉬조차도 들려주지 못했던 - 적어도 오늘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 충격적 사운드를 들려준다(뱀발 - 소리가 크고 시끄러워서 충격적이란 말이 물론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주어진 텍스트가 속해 있는 해당 문화의 코드와 맥락을 타고 (혹은 안 타고) 들을 때만 들리는 그런 소리인지도 모른다).

7. 킹 크림즌으로 돌아가자. 이런 위의 기준을 킹 크림즌에 적용시키면 그들은 대중성 매니아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 음악성 일급, 저항성 일급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새로운 소리, 새로운 음악을 창조할 뿐이다. 그러나 프립이 개인적으로 20세기초의 러시아 사상가 구르지예프가 창조한 신비주의적 생활공동체의 회장까지 지냈음을 상기해 본다면 ...

8. 위의 [아트록 매거진] 14호에 실린 '아트록 입문'에는 유지훈, 전정기, 맹경무, 이진욱, 김상만, 이경숙의 6명의 비평가가 글을 실었는데, 초심자에 대한 형평성의 유지를 위해 나의 소개 이전에 그 책에 실린 평론가들의 글들을 먼저 소개해 본다(모두 전문):

  • [진홍빛 왕의 궁전에서]에 대해 - ① 맹경무: "팦 팬들에게도 유명한 "Epitaph"가 수록되었던 이들의 1969년도 데뷔작이다. 설명이 필요없는 명반으로써 이들 초기 사운드의 정수를 들을 수 있다. (후세의 많은 후배 그룹들이 이들의 중반기 사운드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데, 이들의 중반기 작품들도 적극 권장한다.) 이 앨범에서는 말 그대로 밀려드는 멜로트론의 홍수 속에서 애절한 보컬과 특유의 서정성, 완벽한 곡의 구성이 빛나고 있으며, 수록된 모든 곡들이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지고 서정적인 면에서부터 실험적인 요소까지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앨범이다." ② 이진욱: "어디서 들은 풍월로 완벽한 프로그레시브 록이란 이 판을 사서 들어 봐써니 어? 이거 많이 들어 본 곡? . 그 곡을 제외하곤 충격적인 커버만큼의 느낌은 없었지만 어느 순간 뒤에서 울려 퍼지는 멜로트론 음색에 반하게 되었고 특히 맨 끝에 자리한 타이틀 곡에서 심포닉 록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1년 정도 반복해서 들어본 결과 본작의 음악성의 완전히 빠져들게 되었고.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킹 크림슨의 음반은 따로 있다. 뒤에 얘기하자." ③ 김상만: "그 다음 이 음반을 다시 꺼내 들어보자. 위의 내용을 고스란히 그리고 보다 완벽하게, 그리고 더 먼저 만들어낸 음반이다. 의 서정성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 서정성은 전후관계의 탐색 이후에 더욱 빛을 발한다. 음반 전체의 흐름-내용이 아닌 음악 자체의 컨셉트-이 어떻게 조절되어 있는지 주의해서 들어보자."(인용자주 - 김상만은 이 앨범 앞에서 크레시다와 제니시스의 음반을 소개했다. 김상만의 이 입문은 비평가 자신이 아트 록 지향 그룹의 베이시스트라는 전문적인 구체성과 더불어 아트록 자체에 대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해석의 방법론을 갖는 탁월한 글이다. 이 앨범 소개가 갖는 탁월성은 전후 관계의 탐색 이후에 더욱 빛을 발한다 - 복사물 참조.)
  • [독사 뱃속의 종달새 혀들]에 대해 - ① 김상만: "그러나 자칫 이 완결성이 프로그레시브락의 전형으로 오해되어서는 않된다. 이른바 심포니락에서 보여주었던 멜로디에 의존한 기승전결의 구조는 곡에 완결성을 부여하기 쉬웠지만 그것은 그로 인해 전형적인 형식이 되기 쉬웠고 실제로 그렇게 된 경우가 많았다. 이 음반은 그러한 전형성을 탈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트를 내세운다. 그것은 단순한 박자의 변화가 아닌 전통적 락비트에서의 탈피이며, 파괴적 형식미를 통해 '락에 반역하는 락'을 보여준다."
  • [빨강]에 대해: ① 유지훈: "영국 프로그레시브계의 최전성기 시절이었던 70년대 중반에 발표된 King Crimson의 명작 [Red]는 Robert Fripp(기타), John Wetton(베스트, 보컬), Bill Bruford(드럼) 등 3인조 라인업에 의해 완성되었던 앨범이다. Crimson Family였던 Ian McDonald(앨토 색소폰) David Cross(바이얼린) 등이 게스트로 참여해준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마지막 곡 가 될 것이다. John Wetton의 애절한 보컬로 시작되는 이곡의 후반부에서 Robert Fripp의 복잡한 기타 프레이징이 전개되며 Crimson의 진짜 실력이 나온다. 아마도 일반 팝팬이라면 의 후반부를 들으며 고통을 느낄지도 모른다. 너무도 복잡한 정신적 혼란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의 데뷔앨범 [In The Court of Crimson King]이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은 앨범이었다면 본작 [Red]는 헤비 프로그레시브의 전형을 보여준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② 이진욱: "킹 크림슨의 음악은 데뷔작이 좋아진 이래로 한두장씩 모아 왔지만 이 'Red'를 사고 나서야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그룹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 자리한 타이틀곡의 박력, 그리고 맨 마지막에 자리한 숨막히는 명곡 . 너무나 구슬픈 전반부와 로버트 프립의 기타가 도도히 흐르는 중반부, 멜로트론과 다른 악기들이 터져 나오며 절정을 향해 치닫는 종결부에까지 이렇게 완벽한 명곡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향후 미래에 아트록이 그 진보성과 완성도를 의심받아 외면당한다 해도 끝까지 살아 남을 음반, 킹 크림슨의 이다."
  • [비트]에 대해 - ① 전정기: "브레히트는 작가의 글쓰는 자세에 관한 글에서 "작가가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어떤 생생하고 음미할 만한 것을 쓸 만큼 자신을 제어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경탄할 만한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로버트 프립은 아마도 필자가 접한 록 음악 작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기 제어력을 보여준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생생하고 음미할 만한 것'을 음악으로 들려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 정상과 광기, 서정성과 광폭함 그리고 이완과 긴장은 뫼비우스의 띠의 안과 겉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킹 크림즌의 작품에 있어서 탁월한 점은 곡의 종결 방식에 있다. 다른 많은 아트 록 작가들도 위와 같은 두 양상을 적절히 조화하는 방식을 채택한 바 있지만, 대부분 종결부에서 전자로 끝나거나 어정쩡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연극의 종결부에 나타나 그간의 긴장과 갈등을 해결하는 신)를 신봉하는 듯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크림즌의 곡들은 타협없이 후자로 끝을 맺는다. 필자는 이런 그의 방식을 지지하며 공감한다. 세상은 많은 경우 불필요한 화해에 의해 변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9. 이 글들을 읽고 어떤 생각이 먼저 드셨는지? 위의 비평들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이다: 첫째, 맞춤법과 띄어쓰기 같은 문법적 문제, 혹은 외국어 표기의 문제 같은 형식적인 것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위의 음악평들 중 일부는 - 몇 개의 고유명사를 우리가 적절히 대치해서 읽는다면 - 어떤 그룹의 어떤 곡에 대해서도 맞게 되는 말들이다. 예를 들면, "그의 드럼은 환상적인 전율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너무도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 듯한 서정성을 보여주는 몽환적인 기타 ..." 같은 하나마나 한 말들이 그것이다. 나는 그러나 이른바 '인상 비평'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필연적이며, 또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글 안에 오직 그것 밖에 없을 경우에는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들은 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언표들은 우리에게 대화의 장, 곧 비판의 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 말하자면 그것은 오직 비평가와 청자 사이에 맹목적 공감의 장만을 열어 놓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탓할 의도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그들의 음험한 권력 지향적 의도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그들이 음악을 바라보는 인식 그 자체 안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무지 혹은 아마추어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능력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추어(amateur)란 애호가(愛好家)란 뜻이며, 그 자체로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나는 음악이란 모름지기 '지가 좋아서 그냥 듣는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만 위의 경우 아마추어성이란 그것을 넘어서 진정한 대화와 비판의 장으로 나가고 싶어하지도, 하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근원적 무능력 같은 것이다.

10. 킹 크림즌, 나는 그들이야말로 '이성과 광기는 처음부터 구분되어질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우리가 분리한다면 그것은 항상 자의적이며 정치적인 실천에 따른 것'이라는 푸코적 테제를 가장 잘 입증해 주는 음악을 들려준다고 생각한다. 그룹명 킹 크림즌(King Crimson), 진홍빛 왕? 이는 무엇인가? 이는 피비린내 나는 왕, 즉 마왕(魔王)을 가리킨다. 이는 영어 비엘즈버브(마왕, Beelzebub)의 별칭으로서, '목적을 지닌 자'라는 뜻을 갖는 아랍어 빌 사바브(B'il Sabab), 즉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의 신 바알 세불의 영역이다.

11. 서구 록 음악, 아니면 일반적으로 예술, 문학에는 왠 악마주의, 위악주의, 이단주의가 그렇게 많단 말인가? 심지어는 록 음악을 악마의 음악으로 규정하는 책들도 꽤 있다. 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그 말은 다 맞는 말이다. 꼭 다 그렇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록 음악은 확실히 신보다 악마를, 선보다 악을, 정상보다 비정상을, 이성보다 광기를, 세련된 인위보다 거친 자연을, 규범보다 일탈을 더 좋아한다. 왜인가? 예술이란 현실에 대한 완벽한 적응보다는, 이 현실, 이 세계에 대한 또 다른 해석, 또 다른 세계를 꿈꾼다. 결국 한 사회의 예술가는 자신의 전통을 완전히 떠날 수도 없지만, 그것에 온전히 머물러서도 안 되는 존재이다. 그는 전통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거나, 전통에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전통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 그것이 찬이건 반이건 말이다. 결국 예술가는 전통과 놀이를 하는 사람에 비유될 수 있겠다. 모든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예술가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기 시대의 전통 혹은 주도적 패러다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유사한 패러다임, 에피스테메를 공유하는 이들의 입장은 유사한 입장을 보이기 마련이고, 이를 밖에서 보면 이는 곧 한 시대가 자신의 전통과 투쟁하는, 이 말이 너무 강하다면 관계맺는 일반적인 예술적 전략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12. 그래서 서구의 록 아티스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신본주의와 근대적인 이성주의적 인본주의의 결합에 도전하는 것이다. 왜? 그것이야말로 나를 살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나를 죽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이 바로 전통이다. 초기 원시 기독교이래 장작불에 올라 자신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인본주의자들이 된다. 나는 장작불을 지피는 자와 장작불 위에 올라 있는 사람 중 불 위에 오른 자에 더 가깝다. 나나, 아니라도 오늘날 한국 혹은 프랑스 교회의 당연한 신앙적 상식을 가지고 있는 평균적 신앙인은 중세 카톨릭 교회에서 화형 당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전통에 대한 복고와 퇴행(regressive)이 아닌 진보(progressive)를 외치는 것이다. 프로그레시브 록이란 전통에 대한 회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재해석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음악적 형식의 창조이며, 동시에 전통의 파괴이다. 그들은 결코 타협주의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까지 이어지는 모든 현대 예술의 참다운 경향과 마찬가지로 그 주종은 음악의 제반 형식들에 대한 형식 미학적 실험의 행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들은 앞으로 우드스탁으로, 그리고 그 이후의 참담한 패배로 이어질 거대한 문명의 파고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13. 그 길은 아직 인간이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이다. 진보주의란 미래를 바라보는 길이다. 미래(未來)란 미(未) + 래(來), 즉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만큼 묵시론적인 것이다. 묵시론을 거부하는 묵시론적 예술, 프로그레시브 록 자체에 내재하는 이러한 인식론적 모순을 그 시대의 파도가 지나 간 후에도 지켜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진보가 아니라 차라리 '인디'(indi, independant)의 정신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위에 적은 작가들은 바로 그러한 모습을 그들이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에 록 신에 나타났던 60년대 말 이후 30년이 흐른 1999년의 오늘까지 그러한 정신을 지켜왔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음악이 아니라, 그들의 음악을 통해 수 십 년의 거리를 넘어 오늘 우리에게 때로는 포효하듯 때로는 나직하게 말 거는 그들의 정신을 들어보자.

1.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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