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Jmnote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7일 (화) 00:4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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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마을

1 # 시집 '내 무덤, 푸르고[ | ]

 

1.1 # 下岸發[ | ]

그는 안에서 열고
밖에서 잠근다.
혹은 밖에서 열고
안에서 잠근다.

그는 밖으로 나가며 안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가며 밖을 잠근다.

그에겐 안이 온 세상,
밖이란 온 세상 안에 널린 모래알들 중의 하나,

그는 더 안으로 들어가며 또 밖을 잠근다.
그는 더 더 안으로 들어가며 또 또 밖을 잠근다.

1.2 # 근황[ | ]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1.3 # 마흔[ | ]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1.4 # 참, 소나 나나[ | ]

댓 마리의 소가 하루종일 씹고 있다. 먹이가 없는데도 무진장 씹고 있다. 하릴없이 창가에 턱 괴고 앉아 나도 정처없이 씹는다. 소들이 반추로써 풀이하는 세계를 나도 열심히 씹어 풀이해볼 수 있지 않을까 반추하면서

가엽기도 해라. 되씹기는 게으른 자들의 그림자 밟기 놀이 아니겠는가. 참, 소나 나나.

1.5 # 서역 만리[ | ]

우린 마치 저 쇼 윈도에 보이는
줄줄이 꿰인 채 돌아가며 익혀지는 통닭들 같아.
우린 실은 이미 죽었는데, 죽은 채로
전기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회전하며 구워지는 거,
그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지. 죽음은 시시한 것이야.
왜냐하면 우린 이미 죽어있으니까.
이미 죽어 꽂혀져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기가 막히게 그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야.
삶이 이미 죽어 있는데, 죽음이란 얼마나 시시한 것이겠어?
그건 하나님이 전기 콘센트에서 플러그를 배버릴 때
우리 모두가 무표정하게, 일동 멈춰섯! 하는 것 뿐이야.

이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역 홍대 입구에서 문지사까지
걸어가는 그 거리가 얼어붙은 서역 만리로구나.

1.6 # 未忘 혹은 備忘 15[ | ]

이미 지나왔던 이 길, 이제 비로소 선택하리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길.

망막의 뒤편에 쌓인 응집된 추억들은 다시 한 올씩 풀려지고 기억 속의 들꽃들이 저 혼자 흔들리는 곳,

이제 처음으로 시작하는 길, 되돌아가는 길.

희망은 길고 질기며 절망은 넓고 깊은 것을……

1.7 # 未忘 혹은 備忘 4[ | ]

넘치는 현존의 거리,
그만큼 또한 넘치는 부재적 실존들이여.
그 모든 부재들 중의 부재로서
나 피어났네.
검은 독버섯처럼.

뛰기 싫어 내 인생은 지각했고
걷기 싫어 내 인생은 불참했지.

오 그 모든 빛나는-
내가 불참했던,
오 그 모든 빛나는-
내가 부재했던,
그 자리들이여.
이제 내가 내 부재의 그림자로서
전세계 위에 뻗어 누우려 하네.

2 # 시집 '이 時代의 사랑'[ | ]

 

2.1 # 너에게[ | ]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2.2 # 청계천 엘레지[ | ]

회색 하늘의 단단한 베니아판 속에는
지나간 날의 자유의 숨결이 무늬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청계천엔
내 허망의 밑바닥이 지하 도로처럼 펼쳐져 있다.
내가 밥먹고 사는 사무실과
헌책방들과 뒷골목의 밥집과 술집,
낡은 기억들이 고장난 엔진처럼 털털거리는 이 거리
내 온 하루를 꿰고 있는 의식의 카타곰.

꿈의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돼지처럼 살찐 권태 속에 뒹굴며
언제나 내가 돌고 있는 이 원심점,
때때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튕겨져 들어와 돌고 있는 원심점,
<그것은 슬픔>

2.3 # 장마[ | ]

넋 없이 뼈 없이
비가 온다
빗물보다 빗소리가 먼저
江을 이룬다
허공을 나직이 흘러가는
빗소리의 강물
내 늑골까지 죽음의 문턱가지
비가 내린다
물의 房에 누워
나의 꿈도 떠내려간다

2.4 # 일찌기 나는[ | ]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2.5 # 내 청춘의 영원한[ | ]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2.6 # 비오는 날의 재회[ | ]

하늘과 땅 사이로
빗줄기는 슬픔의 악보를 옮긴다
외로이 울고 있는 커피잔
무위를 마시고 있는 꽃 두 송이
누가 내 머릿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현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흙 위에 괴는 빗물처럼
다시 네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너는 생생히 웃는데
지나간 시간을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네 입맞춤 속에 녹아 있던 모든 것을
다시 만져 볼 수 없다.

젖은 창 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기울고 있다
이제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2.7 # 비, 꽃, 상처[ | ]

하늘에서 푸른 물의 상처가 내린다.
떠도는 스물 넷의 이마 위에,
하나씩 버리며 벗어 버리며
내가 마지막으로 눕는 꿈 위에
쏟아지는 비의 푸른 채찍질.

꽃잎에서 슬픔의 수액이 돋는다.
부끄럽게 비어 버린 알몸에
죽은 꿈의 문신이 돋아난다.
시간이 황량하게 고인다.

누가 열렬한 슬픔의 눈을 뜨고
꽃의 중심에서 울고 있나
하나씩 꿈을 떠나보내며
누가 빈 몸으로 울고 있나

허리에 감기는 비의 푸른 채찍
꽃. 상처. 스물 넷.

2.8 # 올 여름의 인생 공부[ | ]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x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x x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2.9 # 삼십세[ | ]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이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2.10 # 무서운 초록[ | ]

땅이 비밀의 열기를 뿜는다.
새 소리가 허공에서 시든다.
흰 하늘이 가만히 물러나고
몸 저린 잎잎이 뒤척인다.
갈증난 푸르름이 점점 커진다.
마침내 초록의 무서운 공황이 쏟아진다.
모든 것은 끝나리라.
시간은 멈추리라.
공중에서 불타는 초록의 비웃음.

땅 밑으로 밑으로 수액이 빨려들어간다.
빈사의 공간이 너울거린다.
태양이 영원히 정지한다.
세상엔 귀신 같은 푸르름만 남는다.

'이 時代의 사랑' 중에서, `94. 7. 13. 초복 무더운 밤. --LaFolia

3 # 시집 '즐거운 日記'[ | ]

 

3.1 #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 ]

많은 사람들이 흘러갔다.
욕망과 욕망의 찌꺼기인 슬픔을 등에 얹고
그들은 나의 창가를 스쳐 흘러갔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래, 끊임없이 나를 호출하는 전화 벨이 울리고
나는 피해 가고 싶지 않았다.
그 구덩이에 내가 함몰된다 하더라도
나는 만져 보고 싶었다.
운명이여.

그러나 또한 끊임없이 나는 문을 닫아 걸었고
귀와 눈을 닫아 걸었다.
나는 철저한 조건반사의 기계가 되어
아침엔 밥을 부르고
저녁엔 잠을 쑤셔 넣었다.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물론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내가 당신을 창조했다는 것까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그 전화선의 마지막 끝에 동굴 같은
썩은 늪 같은 당신의 口腔이 걸려 있었다.
어느 날 그곳으로부터 죽음은
결정적으로 나를 호명할 것이고
나는 거기에 결정적으로 응답하리라.
타들어가는 내 운명의 도화선이
당신의 썩은 口腔 안에서 폭발하리라.
삼십 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완성하기 위하여.

늙은 니힐리스트, 당신은 피묻은 너털웃음을 한번 날리고
그 노후의 몸으로 또다시 고요히
허무의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리라.
몇 천 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 위하여

3.2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3.3 # 폰 가갸 씨의 肖像[ | ]

9시, 사무실 출입문이 폰 가갸 씨를 기운차게 연다.
의자가 걸어와 폰 가갸 씨 위에 앉는다.
볼펜이 그의 손가락을 꼬나쥐고
활자들이 그를 꼬나보기 시작한다.

12시, 점심이 그를 잘도 먹어 치우고
때가 되면 오줌이 유유하게 그를 갈긴다.
때때로 심심해서 전화가 자꾸 그를 걸어 본다.
여보십니까? 여보십니다! (존재의 딸국질)
시간이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면서
이윽고 월급 봉투가 그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6시 반, 54번 버스가 다시 폰 가갸 씨를 올라탄다.
원효대교가 다시 홀라당 그를 넘어간다.

현관문이 그를 열고 집어 넣는다.
따뜻한 방바닥이 그를 때려눕힌다.
잠이 아작아작 그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윽고!
꿈 속에서 대한민국이 열렬하게 그를 찬양하고
여의도 광장 한가운데에 그의 기념비를 세운다.
코러스도 웅장하게 울려 퍼지며
우러러 찬미할지어다!

3.4 # 언젠가 다시 한번[ | ]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舞蹈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즐거운 日記' 중에서, 오늘도 어제에 이어 서울 최고 기온을 경신하다... '94. 7. 23. --LaFolia

 

1952년 충남 연기 출생
고려대 독문과 수학
1979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이 시대의 사랑〉 외 4편을 발표, 등단
시집 :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등 ||


시인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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