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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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ridge[ | ]

 

신은 사자에게 강한 턱과 발톱을 주어 만물 위에 군림하게 하고, 사슴에게는 날랜 발과 허리를 주어 사냥꾼에게서 도망갈 수 있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시인이 그 앞에 서자 신은 그에게 결코 머무르지 않는 신발과 바람을 인 모자를 씌우고 비파를 들려 세상을 떠돌게 했다. 땅에 머리를 누이지 않아 곤고한 그의 영혼에서는 바람 소리가 났고, 그의 목소리는 새를 닮아 높이 울렸다.

1986년에 나온 앨범 [푸른 돛]에서 높게 우는 시인이었던 하덕규와 여백마저도 채워버리는 밀도 있는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듀오 시인과 촌장은 정갈하지만 때로는 ‘매’의 기타연주처럼 혹은, ‘고양이’ 에서의 날카로운 일성처럼 예리한 각을 갖고 있었다. 함춘호가 빠진 두 번째 앨범으로 보다 기독교적 색채가 짙어진 [숲] 이후 하덕규는 일련의 개인 작업물에서 본격적으로 종교에 귀의한 모습을 보여준다.

14년 만에 하덕규와 함춘호가 다시 만나서 시인과 촌장의 이름으로 낸 앨범 [The Bridge]는 86년까지 소급하는 감동을 가져다 주진 못하더라도 ‘깨끗하고 맑은 마음으로 평생 노래하겠다’ 는 하덕규의 목소리는 드물게 맑고 평안하게 들리며 함춘호, 조동익 등 최고의 연주인들의 참여는 흠잡을 곳이 없다. 명백히 가스펠적 분위기를 내는 ‘돌아보면’ 같은 곡들도 크게 거부감이 들진 않는다. 악마를 찬양하는 음악도 듣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들으면 안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웃음)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 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 진 듯한 ‘Mr. Dylan’ 은 아직도 하덕규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종교만이 아니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바람을 찾아 떠난 단 한 사람’ 인 밥 딜런처럼 자유롭기를 꿈꾸는 그의 목소리는 차라리 그의 독집 앨범 [쉼]에서 나는 자유를 찾았다고 외치는 환희의 목소리보다 훨씬 좋게 들린다. ‘출구 없는 극장’ 에서는 CBS 라디오를 진행하며 생긴 친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델리 스파이스의 김민규가 함께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스위트피로 활동하며 한국 음악에서 어떤날, 시인과 촌장 같은 소년 감성의 계보를 이었다고 말해지는 김민규의 여린 떨림은 하덕규와 비슷하게도 들린다.

아쉬운 것은 그의 노래가 선과 악, 혹은 시대와 젊음이 부대끼는 긴장감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동화적이고 은유적이면서도 날카로웠던 가사들은 더 없이 겸허해지고, 선하게 웃고 만 있는 그의 얼굴에 같이 웃어주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불가능해 보인다. ‘가시나무, 두 번째 이야기’에서 그는 아직 고통을 얘기하고 있지만 신앙인의 고백처럼 들리는 이 노래는 감동적일진 몰라도 예전의 전율을 불러일으키기는 부족하다.

책상 위 시인과 촌장의 앨범 옆에는 우연히도 한대수의 신보가 같이 꽂혀 있다. 어쩌면 하덕규는 한대수처럼 바람을 닮은 영혼을 갖고 쉰이 넘은 나이에도 ‘영원한 고독 (eternal sorrow)’을 노래했었을지도 모를 사람이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vanylla,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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