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 다카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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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이고 다카모리의 탄생과 성장

문정(文政) 10년(1827) 12월 7일, 사이고 다카모리는 카고시마 성벽아래 카지야 마을에서 평무사 쿄쇼 조의 조장 키라베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난슈는 그의 호이며, 아명은 소요시, 통칭은 키치노스케로 통했습니다. 사이고 가문의 품격은 무사의 신분에서는 아래로부터 2번째의 신분인 하급 번사였습니다. 소년 시절, 싸움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완전히 오른쪽 팔꿈치를 굽힐 수가 없게 된 이후, 이때부터 무술을 포기해 학문에 열심히 하게 되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16세 때, 서향은 번의 군방서역조에 임명됩니다. 사츠마 번에서는, 무사의 가정의 자제가 어느 정도의 연령에 이르면, 가계의 도움이 되도록 작은 역할을 맡게 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사 인구가 많은 사츠마 번만이 가능한 관습입니다. 서향은 오른쪽 팔꿈치의 상처때문에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군방서역조(즉 농정을 주관하는 관공서의 서기관 보조)라고 하는 역할에 임명되었습니다. 군방은 연공(세)의 징수 등도 행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곳에 출장해야 하는 매우 체력이 있는 역할입니다. 서향이 군방에 임명되었을 때, 쿠니 토모유키라는 사람은 성벽아래에서도 유명한 경골의 무사로, 서향은 박전 후토시 지에몬에 매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서향은 이 박전으로부터 농정에 관한 생각을 처음부터 배웠습니다. 그로부터 배운 농정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후에 서향이 시마즈 나리아키라에게 찾아내지는 요인이 됩니다. 서향이 군방에 근무한 5년 후의 요시나가(嘉永) 2년(1849), 사츠마 번에 집안의 다툼이 일어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유라소동」이라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향의 부 길무관이 용무인에 근무하고 있어 서향가와 인연이 깊었던 적산도, 이 「유라소동」에 연좌해 할복 자살했습니다. 서향은 적산의 훌륭한 할복 자살의 모습을 아버지로부터 들어, 적산의 뜻을 잇기로 결의했습니다. 이 「유라소동」은, 젊은 날의 서향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요시나가(嘉永) 4년(1851), 제 28대 사츠마 번 주의 영주로 취임한 시마즈 나리아키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향은「나라의 근본은 농민이다」라고 하는 애농사상에 준거한 건백서를 번 청에 제출해 제빈의 눈에 띄게 됩니다. 농정에 관한 일 이외에도, 지난 해의 「유라소동」으로 처벌된 정의의 무사들이 아직도 처벌이 풀리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져, 그것도 의견서에 써 종종 제출했습니다. 이로써 서향의 존재를 알게 되고, 사츠마 번을 짊어갈 인물로서 가르치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반드시 된다」라고 확신해, 애정을 가져 서향을 한 사람의 인물이 되도록 교육했습니다. 사츠마에서는, 「제빈이 서향을 불러 이야기를 하실 때는, 담배추석 치시는 소리가 달랐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제빈의 훈도를 받은 서향은 당시 에도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미토번의 후지타 도코, 토다봉헌, 에츠젠 후쿠이번의 하시모토 사나이라고 하는 인물등과 교류 하게 되어, 점차 서향의 이름도 알려져 갔습니다. 이와 같이 서향은, 제빈에 의해 천하를 알고, 출세하게 됩니다.

2 활동 과정 및 일화, 업적

  • 아마미에서의 생활 

아마미오시마에서의 서향의 생활에는 수많은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의 아마미오시마라고 말하면 귀중한 설탕의 생산지이며 도민에게는 가장 엄격하고, 그리고 가혹한 징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섬의 농가에는 각 호 각각의 부담 생산액을 할당하고 할당량을 달성 할 수 없을 때는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 밭에서 만든 사탕수수인데 한입마저도 그 생산 농가의 사람들에게 들어오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 사탕수수가 흉작이었으므로 그 할당량을 달성 할 수 없었던 농민들이 많았고 공무원들은 그 일이 자신들의 실수가 되는 것을 무서워해 그 농민들에게 엄격한 고문을 더했습니다. 서향은 평소부터 그런 농민들의 궁상에 마음이 아파 공무원들의 비정한 방식에 분개하고 있었고, 어느 날 재방 공무원 사가라각 무관에게 면회를 요구해 농민들을 해방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평상시부터 도민에 대해 오만하던 사가라는 서향의 의견을 완전하게 무시했습니다. 그 사가라의 태도에 화낸 서향은 「 방침을 고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지방 영주에게 건의서를 쓰겠다.」라고 단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놀란 사가라는 많이 후회하고 태도를 표변해 서향에 대해 사죄, 농민을 해방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향의 주거가 있던 타쓰고 1의 명가인 용가의 일족의 낭애가나와 결혼도 했습니다. 서향은 여기서 3년의 사이 막간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게 되었습니다만, 시대는 또 서향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 봉토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

사이고등 일행이 도쿄에 도착한 것은, 메이지(明治) 4(1871)년 2월입니다. 신정부에 복귀한 서향은, 봉토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을 향해 순조롭게 준비를 시작합니다. 서향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는 우선, 사츠마, 조슈, 토사의 3번으로부터 천황 직속 군대를 내밀도록 명했습니다. 각지의 반란에 대비하기 위해서 입니다. 서향도 일시 카고시마에 귀국해, 상비대 4대대와 포병4대( 약5천명)를 인솔해 도쿄로 돌아왔습니다. 또, 사이고등은 천황 직속 군대 이외에 일본의 동서로 옛날 지방을 수비한 군대(군의 기관)를 두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만약, 봉토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에 반대하는 제영주가 무력 행동을 취했을 때, 신속히 진압 행동이 잡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메이지(明治) 4(1871) 년 7월 14일, 드디어 봉토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이 발포되었습니다. 각 번의 지방 영주나 번사, 일반의 사람들은, 이 봉토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에 깜짝 놀랐습니다. 또, 제영주는 이 발포에 격분했습니다. 지위와 재산을 조칙에 의해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츠마에 있던 시마즈 히사미쓰는, 이 봉토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을 들어 열화와 같이 화냈습니다. 큐우코우는 보수적인 성격이고, 일본의 정치 형태는 봉건제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이고등이 만들어낸 천황 직속 군대나 동서의 옛날 지방을 수비한 군대가 반란에 대비해 위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제영주는 반항하러 가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이 봉토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이라고 하는 일대 개혁은, 평화적으로 달성되었습니다. 여러 나라로부터 와 있던 외국의 사신이나 공사는, 이 봉토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이 평화적에 행해졌던 것에 경악 했습니다. 권리라는 것에 민감한 유럽 등에 있어, 이런 평화적인 해결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향의 덕망과 결단력으로 이 봉토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이라고 하는 일대 혁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서향의 정한론(征韓論)

1868년(고종 5) 일본정부는 그들의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조선정부에 통고하고 양국의 국교회복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 왔으나, 척왜정책(斥倭政策)으로 기운 대원군 집정의 조선정부는 서계(書契:外交文書)의 격식이 종전과 같지 않고 도서(圖書:符印)도 조선정부가 인각(印刻)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양국은 외교문서의 수리를 놓고 1년을 논박으로 보내다가 일본은 대조선(對朝鮮) 외교를 전담하여 온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소오씨[宗氏]로부터 그 직임을 회수하고 1869년과 1870년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조선측의 완강한 거부에 부닥쳐 타결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1872년에는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내도하였으나, 조선측은 '왜사(倭使)가 군함을 타고 오다니 상대해 줄 수 없다'고 냉대하여 수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돌아갔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일본의 조야에서는 정한론이 세차게 일고, 1873년에는 이것이 정치문제화하여 삿슈[薩州] 군벌의 거두이자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참의(參議)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및 이다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외무경(外務卿)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등 강경정한론자들은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이 해외시찰차 나가 있는 사이에 사이고가 스스로 견한대사(遣韓大使)가 되어 외교적 타결을 시도하고, 여의치 않으면 조선에 파병하여 무력행사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등 많은 각료들은 국력(國力)의 배양(培養), 내치(內治)의 선결을 들어 정한론에 반대하여 1개월여를 두고 논쟁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태정대신(太政大臣:首相)의 대행이 된 이와쿠라는 그해 10월 24일 정한(征韓) 반대를 결정하고 이를 상주(上奏)해서 견한사절건(遣韓使節件)은 무기연기되었습니다. 이로써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의 다섯 참의는 각료직을 사퇴하여 일본정계는 둘로 갈라지고 정한론의 후유증은 곧 이어 이른바 '서남(西南)의 역(役)' 이라는 사족(士族)의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 서향의 귀국과 사립학교 설립

이와쿠라의 음험한 술책으로 견한론을 잡아진 서향은, 메이지(明治) 6(1873)년 10월 23일, 사표를 제출해, 카고시마로 귀향합니다. 서향의 사직귀국은, 국내에 충격을 주어 서향을 그리워하는 육군 소장의 기리노 도시아키나, 시노하라 구니모토등 구사츠마 번 출신의 근위병이나 사관 등은, 잇달아 서향에 이어 카고시마에 귀향했습니다. 카고시마에 귀향한 서향은, 일절의 세상 일과 단절하고 밭을 경작하거나 낚시하러 가거나 수렵에 나오거나 농부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전원 생활을 하고 있었을 무렵, 일본 국내에는 사건이 연발했습니다. 우선, 메이지 7년(1874) 1월에는, 우의정 이와쿠라 토모미가 아카사카식위판에 대해 불평 사족 등이 습격 당해 부상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동년 2월에는, 에토 신페이가 사가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또, 같은 달에는 전술한 메이지 정부가 대만 정벌을 했습니다. 사이고가 떠난 정부는 이와 같이, 갑자기 국내외의 중대 문제가 빈발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에 대한 서향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컸는지가 이것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메이지의 지식인인 후쿠자와유키치도, 서향이 정치의 중심이 된 2년간은, 백성의 불평이 덜했고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자유 평등의 기풍으로 가득 찼다고 저작 안에 쓰고 있습니다. 메이지 7년(1874) 6월, 서향은 구사츠마 번의 거성츠루마루성의 구적에 사립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사립학교란, 포대 학교와 총대 학교 및 상전 학교로 되어 있었습니다. 서향의 뒤를 쫓아 귀향한 청년들의 교육기관을 만들자고 하는 것이, 사립학교의 주된 창립 이유였습니다.

  • 세이난 전쟁(西南戰箏)

사이고는 향리인 카고시마에서 사학교(私學校:일종의 군사학교)를 세우고 사족의 자제를 모아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러자 폐번치현(廢藩置縣) 후 영주제(領主制) 폐지 등 근대화의 정책 시행으로 봉건적 특권을 잃고 몰락일로에 있던 사족의 반정부 분위기가 사학교를 중심으로 조성되었습니다. 1877년 이 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사이고를 앞세우고 거병, 1만 3000여 명이 구마모토진대[熊本鎭臺]를 포위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사이고 등 지도자는 대부분 자결하였습니다. 이 싸움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초기 사족의 최대 최후의 반란이었는데, 정부는 이 반란을 제압함으로써 권력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후의 반정부운동의 중심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습니다.


3 다른 주요 인물과의 연관

ㅡ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카모토 류마 (신뢰라고 하는 정으로 연결된 두 명)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카모토 류마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겐지원(元治元)(1864) 년 8월 중순 무렵이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영웅서향과 풍운아용마의 만남은 이와 같이 극적인 개막을 했습니다.


문정 2년(1862) 3월, 용마는 코우치 성벽을 빠져 나가 토사 번을 벗어나 떠돌이가 됩니다. 그 무렵의 토사 번은 다케치한페이타가 인솔하는 토사 근왕당이 거번일치의 근왕 운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습니다만, 용마는 그 타케시의 생각에 찬동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각지를 여기저기 떠돌다 최종적으로 에도에서 막부의 신하인 카츠 가이슈를 만나 승에 입문 합니다. 그리고 겐지원년(1864) 5월, 용마는 승이 창설한 코베 해군조련에 들어가 승으로부터 해군방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해군 조련소는 막부의 신하 뿐 아니라 영주를 잃은 무사나 타번사의 학생도 있었기 때문에, 승은 막부의 고관으로부터 「승은 코베에서 섦길 영주를 잃은 무사들을 선동 하고 있다」는 혐의로 조련소는 폐쇄에 몰려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승도 에도로의 귀환 명령이 나왔습니다. 승은 용마의 장래를 염려해 당시 면식이 있던 사츠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용마의 비호를 요구했습니다. 서향은 그 의뢰를 승낙하고 서향과 용마의 본격적인 교류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65년 가메야마샤추를 세워 무역상사겸 사설 해군으로 활동하는 한편, 친교가 있던 기도 다카요시와 사이고 다카모리를 연결하여 1866년 역사적인 '삿초동맹'을 성사시킵니다.


용마가 서향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아는 용마의 한 통의 편지가 있습니다. 케이오(慶?) 2년(1866) 12월 4 일자, 용마가 누나 앞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서향에 대한 내용이 쓰여져 있습니다. 「사리를 꾀해 내어도 안심 되는 것은 서향 키치노스케의 아내나 키치노스케도 좋은 사람이며 이분에게 아내를 부탁해도 아무 걱정이 없다.」이것은 국사에 분주 하는 용마가 드디어 막부와 호우쵸가 싸움이 되었을 때, 아내를 서향가에 맡겨 두면 자신은 어떤 걱정도 없이 일할 수가 있다고 누나에게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편지는 얼마나 용마가 서향을 신뢰하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서향 그리고 용마. 두 명은 뜨거운 신뢰감에 의해 연결되어 에도막부 말기라고 하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 남았습니다.


(잠깐!삿초동맹에 대해..)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260여 년 간이나 막부로부터 감시의 대상으로 몰려 홀대를 받아왔기 때문에 뿌리 깊은 원한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두 지역의 번은 서로 정서가 맞지 않아 앙숙관계나 다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생산물도 각각 상대적이었다. 예를 들면 쌀,소금.소총 등의 경우, 어느 한쪽에서는 남아도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교류는커녕 사사건건 서로 대립을 반복하고 있었다. 번 끼리 교류를 못 하도록 바쿠후가 교묘하게 견제장지를 해놓은 탓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경쟁상태에서 사카모토가 나타난 것이다. 사카모토는 사쓰마와 조슈가 서로의 장점을 살려 힘을 합치면 막부의 군사력에 대항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제3자의 입장에서 양자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맡고 나섰다. 결국 사이고와 기도는 사카모토의 제안을 받아들여, 1866년1월 쿄토에서 사쓰마와 조슈는 서로 동맹해 막부를 쓰러뜨린다는 비밀협약을 맺는다. 바로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는 <삿초동맹>이 그것이다.


 


ㅡ 사이고 다카모리와 하시모토 사나이(영원한 우정)


하시모토와 서향의 최초의 만남은, 안정(安政元) 2년(1855) 12월 27일의 일이었습니다. 장소는 에도, 미토번사하라다8 무관의 저택에서 두 명은 처음 대면했습니다. 하시모토는 그 때의 서향의 인상을 「연조비가지사」란 중국의 고사로 시대를 강개하는 혈기 번성한 젊은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향과 하시모토가 손을 잡고 가장 활약했던 것이 장군 후계자 문제입니다. 에도막부 말기에 말하는 장군 후계자 문제라는 것은 에도 막부 제 13대 장군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상속인에 관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치하시파의 중심 인물인 요시나가는 하시모토를, 제빈은 서향을 호신용 칼로서 사용해 장군 후계자 문제에 분주 시켰습니다. 특히 하시모토는 막각 대책이나 조정 공작에도 종사해 다방면에 열심히 운동을 했습니다. 하시모토와 서향은 서로 서로 연락을 해 서로의 지방 영주의 목숨에 따라 요시노부 옹립에 노력했습니다만 두 명의 운동은 한사람의 거인의 등장에 의해 방해가 됩니다. 히코네 지방 영주로 취임한 이이나오스케입니다. 안정 5년(1858) 4월에 대노로 취임한 그는 독단으로 기슈번의 상속인을 결정해 요시노부 옹립에 움직인 영주나 번사들을 일제 처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안세이 옥사의 시작입니다. 사츠마 번에서는 제빈의 급사 후, 서향은 대옥의 영향으로 승려월조와 함께 경으로부터 무사히 달아나 카고시마에서 투신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시모토도 안정 6(1859) 년 10월 7일 죽을 죄를 명령 받아 감옥에서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하시모토 사나이, 향년 25세. 젊은 천재의 너무 빠른 죽음이었습니다.  전사한 서향이 휴대하고 있던 가죽 문고안에 한 통의 편지가 있는데 그것은 서향과 하시모토가 장군 후계자 문제에 분주 하고 있었을 때에 쓰여진 하시모토에게 받은 편지였습니다. 서향은 그 편지를 죽는 그 순간까지 떼어 놓지 않고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향에 있어 하시모토 사나이라고 하는 인물은 일생 잊을 수 없는 동지이며, 영원한 친구였습니다.

ㅡ 사이고 다카모리와 후지타 도코(잊을 수 없는 스승과의 만남)

미토번 제 9대 지방 영주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측근으로 근무해 그의 호신용 칼로서 활약했던 것이 후지타 도코입니다. 동호는, 문화(文化) 3(1806) 년 3월 16일에 태어났습니다. 동호는 아버지이며 미토가의 유신인 후지타 유코쿠로부터 훈도를 받고 자라, 학문에 정진해 번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문정 12(1829) 년에, 미토번 제 8대 지방 영주제수의 후계자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는, 동호는 제소(당시 케이조우 츠카사)를 옹립 하는 일파의 중심 인물로서 활약해, 제소의 제9대 지방 영주에게로의 습봉을 성공시켰습니다. 그 후, 동호는 지방 영주로 취임한 제소에 의해, 그 측근으로서 등용되어 미토번의 에도말기의 연호 개혁의 중심 인물로서 번정개혁을 추진하는 등, 그의 정치 수완은 타번에도 들리게 되어, 그의 명성은 한층 높아갔습니다. 전국의 번사지사들로부터 절대적 신뢰와 여망을 받았습니다. 각 번의 뜻 있는 젊은이들은, 에도에 왔을 때는 반드시라고 말해 좋을 정도로, 동호의 원을 방문해 그 훈도를 받았습니다.  사츠마 번의 서향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서향이 처음으로 동호의 원을 방문한 것은 안정원년(1854) 4월 10일의 일입니다. 서향은 친구이며, 동지인 카바야마와 함께 동호의 원을 방문했습니다. 카바야마는 요시나가 5년(1852)에 에도힐을 명령 받아 서향보다 한발 앞서 에도 영주의 저택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서향도 에도 영주의 저택에 근무하게 되어 카바야마에게 동호에 대한 것을 물어, 카바야마도 서향을 동호에 대조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동호와 처음으로 대면한 서향은 동호의 학식, 담력, 그리고 인품이나 태도에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안정원년(1854) 7월 29일, 외가의 숙부시바 요에몬 앞으로 보낸 편지 중에서 서향은 동호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 댁을 방문할 때는, 마치 시미즈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심중 일점의 운하도 없고, 다만 청정한 기분이 되어 귀가까지 잊어 버릴 정도입니다.」 「자화자찬 같아 타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동호 선생님도 나를 미워하는 모습은 전혀 없고, 언제나 양호라고 불러 주셔 과분의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서향은 후년, 동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선배로서는 후지타 도코, 동년배로서는 하시모토 사나이가 나의 가장 존경한 사람이다.」


4 메이지 유신의 3걸

막부 말기에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유신 정부를 세운 후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심 세력으로 활약했던 사이고 다카모리(1827-77), 오쿠보 도시미치(1830-78), 기도 다카요시(1833-77)를 일컬어 <유신의 3걸>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하급무사 출신이라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 사이고는 메이지 정부의 정한론을 둘러싼 정쟁에서 패한 뒤 탈락했지만, 오쿠보와 기도는 신정부의 핵심인물로 정부를 이끌어갔습니다.

  •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보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막부 말기에 고향 친구인 사이고와 함께 토막운동에 참가하고 삿초동맹, 그리고 왕정복고 과정에서 사쓰마번을 대표해 활약했습니다.

오쿠보는 조세제도 개혁, 식산흥업의 실시, 사족반란의 진압 등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오쿠보 정권><오쿠보 독재>라 불릴 정도로 목적 지향의 관리형 성격으로 유신 정부를 주도해 나갔습니다.

철권정치를 휘둘렀으나, 전형적인 절대주의 관료로서 과단성과 추진력을 발휘해 전제적 메이지 정부의 수립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오쿠보는 사이고가 자결한 다음 해인 1878년 도쿄에서 출근 길에 정치에 불만을 품은 옛 무사 출신의 시마다 이치로에게 암살되었습니다.

  • 사이고 vs 오쿠보

사이고와 오쿠보는 사쓰마번의 가고시마에서 세 살의 나이 차이를 두고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친구 사이로 유신혁명을 성공시킨 3걸 중 2걸 인데도 불구하고 인기 면에서 오쿠보는 사이고의 발끝에도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함께한 시대를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 일본의 장래를 생각하고 근대화를 강력하게 추진한 오쿠보의 선견성이 더욱 높게 평가 받기에 충분한데도 오쿠보가 사이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이유는 덕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성격과 스타일을 비교해 보면 사이고는 충의를 내세워 인간관계와 의리를 중시한 외골수인 반면, 오쿠보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권모술수의 화신으로 보스로서의 인간적인 매력이 결여되어 있는 냉혈인간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후일, 사이고는 친구인 오쿠보를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만약 한 채의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한다면, 나는 건축설계를 하고 토대를 마련하고 고조를 세우는 것에서는 그를 능가한다. 그렇지만 그 집의 내부를 장식하고 집다운 집으로 꾸미는 재능은 도저히 오쿠보에게 미치지 못한다"

  • 기도 다카요시

기도는 조슈 번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가쓰라 집안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처음의 이름은 가쓰라 고고로로 불렸습니다. 1849년 쇼카손주쿠에 들어가 요시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862년 번 내에서 정쟁을 벌여 정책방향을 존왕양이 쪽으로 돌려놓고 이어서 막부를 토벌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냈습니다.

1865년 성을 기도로 바꾸고 이름을 다카요시로 개명했습니다. 1866년 사카모토의 중개로 사이고와 비밀리에 삿초 동맹을 맺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조슈 번을 대표해 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정부수립선언문>의 기초를 비롯해 판적봉환과 폐번치현을 추진했습니다.


5 Ⅴ.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평가

  • 「일본인에서 존경 하는 인물은 누군가?」라고 물으면, 변함없이 상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이 사이고 다카모리입니다. 그것은 서향이 메이지 유신의 훌륭한 공훈자라고 하는 것보다, 오히려 삶의 방법 그것이 고결해 용감하게 마지막 국내전이 된 서남 전쟁에 자결한 “비극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한층 더 일본인의 근원적인 심정의 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메이지기의 크리스트교의 선구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대표적 일본인」이라고 하는 명저가 있습니다. 그는 필두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올려 「무사의 최대 되는 것, 또 마지막 것」으로써 서향의 기개, 생활모습, 인생관에 아깝지 않은 찬사를 주고 있습니다.

서향의 고결한 인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다음의 「경천 애인」이라고 하는 신조입니다. 이것은 「남주 노인 유훈」에 남아 있는 것이지만, 서향은 하늘을 존경하면서 사람을 사랑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무사 무욕의 신념을 닦아 올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서향의 상대는 항상 「하늘」이었으며, 하늘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 「남주 노인 유훈」의 가르침이라는 책입니다.

"제 3 개국"도시가 깨지고 일본인의 운명이 주장되고 있는 요즈음, 지도자층에 서향과 같은 걸물이 보여지지 않는 것이 불행하지만, 적어도(발췌)

서향의 근본적인 신조는 '지성'. 서향은 결코 편벽한 국수주의자는 아니며 문명 개화를 거부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서양식을 가지고 제일로 하는 경솔 경박인 풍조에 경고를 발표했던 것입니다.

  • 사카모토 류마는 처음으로 서향과 만난 감상을 사의 카츠 가이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서향이라고 하는 녀석은 이상한 녀석이었습니다. 범종에 비유하면, 작게 두드리면 작게 영향을 주고, 크게 두드리면 크게 영향을 줄 것이며 만약, 시시하다면 큰 바보로 영리하다면 크게 영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종을 치는 당목이 작았던 것이 유감이었습니다.」 서향을 범종에, 용마 자신을 당목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에도막부 말기의 풍운아인 사카모토 류마의 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용마의 서향평을 들은 승은 「평되는 사람도 평되는 사람. 평가하는 사람도 평가하는 사람」이라 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카츠 가이슈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굉장한 남자다. 내 인생에서 무서운 사람이 2명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사이고씨였다.」라고 말했습니다.

  • 군국주의와 천황주의의 상징이 된 사이고 다카모리

1882년 일본이 임오군란에 개입하면서 정한론자 사이고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며, 1889년 일본제국헌법 발포기념 정치범 대사면 때 正三位에 追贈되었습니다. 1898년 우에노 공원에 일본정신이라고 표현되는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의 상징이자 '의리와 인정'의 화신(化身)이 된 사이고 동상이 건립 (반관료적, 서민적, 인간적인 모습의 동상)되었습니다.

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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