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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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 저자 : 사까이 나오키
  • 원제 :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2003) : 1999~2001년 사이의 논문 모음 + 2003년의 대담
  • ISBN 8936485180

 

2 책소개 (알라딘)[ | ]

사카이 나오키는 미국에서 활동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일본 지식계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친 일본의 지식인이다. 그의 주된 작업은 '국민'이란 개념을 낳았던 '도착된 논리'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지식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건전한 시민사회 형성을 통해 천황제 파시즘 같은 제도가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반성인데, 이는 일본의 동질성에 바탕을 둔 '국민'의 개념이다. 그런데 사카이 나오키에 의하면 이러한 동질성을 깨지 않는 한 일본 지식인사회 내의 식민지 인식과 '타자'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것.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만남과 교섭을 추구하기 위해 국민국가의 함정을 예의 주시하는 그의 비판적인 견해는 '열린 민족주의'를 둘러싸고 논쟁 중인 한국 논단에 대한 날카로운 도전이 된다.

3 # 거북이 : 완독하지 못한 서평[ | ]

결국 이 책의 완독은 포기했다. 제일 먼저 저자가 쓴 지적 편력을 읽었고 그 다음 대담을 읽은 것 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정작 핵심인 논문 부분들은 현학적인 문체와 내 배경지식의 한계로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특히 민족성과 종'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벙쪄버렸다.

사까이 나오키는 국어와 국민국가에 대해 그것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며 근대화라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 온 것임을 말하고 있다. 동시에 국민어를 넘어서 보편어로 접근하려는 태도 또한 경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어로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으니 약간은 자기모순이긴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국주의의 역사를 역이용'하려는 것 뿐이라는 조금 견강부회적인 얘기를 하고있기도 하다. 그는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국어 잡지 '흔적'을 발행하고 있다. 낭만적인 시도라고 할까나. 기본적으로 그의 생각들은 모호하며 무정부주의적이다. (나에게 이 책을 빌려준 총각은 '자율주의자'라는 표현을 썼는데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는 푸코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푸코의 원저작을 하나도 읽지 않은 나이니 사카이의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자도 모르겠다. 어쨌든 학문적 지식의 생산 그 자체가 권력의 구성에 가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으로 고뇌를 했다고 하는 그는 대학 졸업 후 생활의 고통속에서 시달리다가 학문을 버릴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미국에서 영어가 아닌 언어를 모국어로 삼고있는 자신을 반추하면서 서양중심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확보하게 된다. 일본은 서구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아서 성립된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에밀 방브니스트와 토키에다 모토키라는 두 언어학자를 언급하는데 이들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은 대담의 내용이다. 단순한 인간인지라 도식화라도 하지 않으면 이해를 잘 못하니 이해하시라.

  • 번역 : 커뮤니케이션
  • 외부성 : 주체를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설정된, 내가 아닌 무엇인가
  • 일본의 내셔널리즘, 국민적 나르시시즘 : 일본인들이 서구라는 외부성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려 드는 시도 : 서구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일본 제국주의와 아시아 식민지의 관계로 인식하여 자기긍정을 가능케 하여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심리 : 열등감의 전환
  • 식민지 문제 : 메이저/마이너, 가학/피학의 구도에서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가학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인식하려는 심각한 문제에 빠져있음
  • 마이너리티가 메이저리티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한 마이너/메이저 구도는 더욱 확고해진다. 마이너리티는 민족주의적, 메이저리티는 국민주의적이라는 느낌이 일본에는 있다. 과도한 보편주의는 폭력적이다.

기타 말이 더 많은데 더이상 정리해보기도 쉽지가 않다. -_-
결국 그가 얘기하는 것은 상당히 자극적인 책 제목이기도 했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와 타자를 구분하여 양자가 서로 기대는 것은 미국이 공산권 붕괴 이후 끊임없이 적을 만드는 것과, 남북이 서로를 적대시하여 정권을 유지해왔던 역사적 실례에서 이미 드러난 의존적 실존 내지는 애증관계라고나 할까 뭐 그런 것이다. 나를 주장하는, 순수를 주장하는 그런 것들은 결과적으로 피곤하다. -- 거북이 2004-8-5 11:34 pm

4 # 거북이 : '포이에시스'와 번역의 문제[ | ]

이 책에 대해 느낀 점은 나중에 적어볼란다. 이 책과 씨름하며 지금 나에게 든 생각은 '번역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이 책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든 생각이다. 어지간하면 추상적인 말을 현란하게 써서 또다른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일은 자제해주었으면 하는데 식자층은 그런 것의 자제가 쉽지 않은가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템포를 놓치고 앞뒤로 허우적거린 순간이 참 많았다.

의문은 포이에시스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무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라는 제목은 이 책에 실린 사카이 나오키와 이연숙의 대담 제목이다. 대담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서술되어 있는데 문제는 대담 어디에도 포이에시스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포이에시스가 도대체 뭘까. 인따넷을 뒤적뒤적해본 결과 여기에서 겨우 포이에시스라는 단어의 구체적 용례를 찾아볼 수 있었다. 뭐 선수들 사이에서는 얼마만큼 공감이 되는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감각으로는 굳이 여기에 '포이에시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된다. '국민주의와 외부성'이라거나 '국민주의의 재발견' 혹은 '국민주의의 폭로' 등 여러가지 다른 형태로 표현이 가능했다.

포이에시스는 미메시스, 프락시스, 아우라 등의 단어들과 자주 함께 쓰이는 개념인듯 한데 도식적으로 이해한다면 프락시스는 본질성, 포이에시스는 본질성을 (예술이라는) 매체에 담는 행위 혹은 숨겨진 것을 꺼내난 탈은폐, 미메시스는 모방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거 같은데, 쉽게 쓰여진 해설을 찾지못해 전혀 자신이 없다.
포이에시스라는 말이 번역불가능한 말로는 보이지 않는데 왜 굳이 외래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이런 일은 주로 번역에 의한 왜곡을 피하기 위한 학자들의 소심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기획자중 한명인 임성모씨는 번역과일본의근대를 번역한 사람이고 역자 후기등을 통해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가를 절절하게 적었던 사람이다. 그는 왜 포이에시스라는 말을 다른 말로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다.

번역은 지식을 소화하는 방식이 그대로 반영되는 행위이다. 포이에시스라는 개념을 굳이 외래어로 표기한다면 그것은 포이에시스라는 단어가 가진 역사적 맥락'만'으로 해당 글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때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이해로서는 이 대담에서 포이에시스라는 단어는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포이에시스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사카이 나오키의 생각은 탈은폐가 아닌 포이에시스/프락시스의 대립항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행위이다. 책 내용이 정말 그런 것일까? 나는 확언할 수 없다.

이 책을 내놓은 창작과 비평사는 자신들만의 외래어표기로 악명높다. 여기 사용된 일본어 표기는 적어도 표준 일본어 표기에 비해서는 일본인들의 발음에 가깝긴 하다. 하지만 외래어를 외국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다는 생각은 종종 사대적인 것에 가깝다. (왜 그러한가는 외국어사전에표준표기를넣자한글기계화를 읽으면 되리라 본다.) 표준화라는 것도 내재화라는 면이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번역과 유사한 행위이다. 즉 어떻게 내재화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문제이지 외국어 발음에 일치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접근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조금 삐딱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지적 속물주의에 가까울 수도 있다.

번역은 '그들'의 맥락을 '우리'의 방식으로 이해하겠다는 주체적인 행위이다. 그렇기때문에 일본인들은 civillian이라는 단어 하나를 번역하기 위해 그렇게 고심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너무 소흘한 것이 아닐까. -- 거북이 2004-8-4 2:25 am

5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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