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Gabriel - (car)

Pinkcrimson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4월 27일 (금) 09:56 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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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Peter Gabriel
Peter Gabriel (1977)

2 거북이[ | ]

재능 있는 프로듀서인 Bob Ezrin을 초빙하여 완성한 게이브리얼의 첫 번째 솔로 앨범. 이 앨범부터 4번째 솔로 앨범까지 그는 앨범에 특별한 제목을 별도로 달지 않았는데 대신 앨범 자켓의 그림으로 각 음반을 별칭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킹 크림슨의 리더 로버트 프립이 몇곡에서 기타를 연주해 주었고, 이후 오랫동안 그의 앨범에 참여하게 되는 뛰어난 베이시스트 토니 레빈과 키보디스트 레리 페스트가 참여했다. 문제는 음반의 완성도.
최근에 와서 그 평가가 조금은 달라지고 있지만 그래도 그가 제네시스 탈퇴 직전에 만든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를 생각한다면 이 앨범은 무척 실망스럽다. 이 앨범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어떤 음악을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저런 시도의 나열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으며 이것은 바로 앨범의 일관성 부재로 나타난다. 이러한 일관성의 부재는 단순한 개인적인 실험으로서의 의미는 있을지언정 70년대 초반의 음악계를 거치며 높아져 버린 당시 청자들의 귀를 충족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제네시스가 Trick of the tail 이나 Wind and Wuthering과 같은 음반으로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시점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앨범에 대한 아쉬움은 더욱 크다.
이 앨범의 전체 분위기를 가장 잘 전해주는 곡은 다름아닌 첫 곡 Moribund the burgermeister. 부분적으로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의 수록곡들을 연상케 하며 분위기의 변화가 심한 곡인데, 결정적인 느낌이 없고 분위기가 바뀔때 마다 그 부분이 전체와 어울리지 못해 따로 노는 듯 어색한 느낌을 준다. 거의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이러한 느낌은 그대로 유지된다. 어색함의 느낌이 발전적으로 새로운 어떤것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면 좋았겠지만 게이브리얼은 아직 그러한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7번째 곡인 Waiting for the Big one은 앨범 전체에서 느껴지는 어색함이 가장 극대화된 곡. 스탠더드 곡을 부르는 블루스 가수 같은 느낌의 게이브리얼은 듣는 사람이 무안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혹평 일색인것 같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보이는 몇 가지 수확물이 있는데, 하나는 이후 그의 영원한 싱글이 될 Solsbury Hill로 가사중 일부에는 제네시스의 남은 멤버들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와도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take your things, I've come to take you home") 또 다른 하나는 기존 아트록 방법론을 따른 마지막곡 Here Comes The Flood로 앨범 전체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정리하는 뛰어난 곡. 그가 아직까지 나름의 감각을 잃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네시스와 차별화된 음악을 추구한 그의 첫 음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곡이 전통적인 아트록 성향의 곡이라는 점은 이 앨범이 가지는 한계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두세곡의 괜찮은 곡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 대부분은 나름의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핵심에 도달하지 못하고 떠돈다. 제네시스 탈퇴후 그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는 팬들에게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으나 그외에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음반. -- 거북이 2003-2-5 11:36

3 신인철[ | ]

[Fish, 신인철 mailto:icshin@chiak.kaist.ac.kr]

오늘은 Peter Gabriel의 첫번째 solo album을 소개드릴까 해요.. Peter Gabriel 의 본작과 두번째 solo album은 Melting face(녹는 얼굴)과 Security 에 비해 별 로 국내에서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사실이 예전에 예 음에서 발매된 Nursery Cryme의 해설지 인가 아님 Peter Gabriel의 세번째 아님 네번째 앨범의 해설지에 한때 우리나라 소수 prog fan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던 성시완씨가 쓴 글에 기인하지 않나 싶어요... Peter Gabriel의 첫째와 두 째 앨범은 너무나 졸작이라는... :-(

하지만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본 앨범에는 Gabriel의 영원한 pop classic인 _Solsbury Hill_ 도 들어있구요.. 감동적인 melody의 마지막곡 _Here comes the flood_ 도 좋습니다. 그리고 정말 특이한 곡이 한곡 있습니다. _Here comes the big one_ 이라는 마치 Gabriel meets B.B. King이라는 말로밖에 표현 할 수 없는 Blues Rock number가 7분 26초 동안 듣는이를 묘한 기분으로 이끕니 다..

이 Gabriel의 solo debut album은 그당시 Alice Cooper의 producer로 한참 잘나 가던 Bob Ezrin 이 produce를 담당하고 있구요. Crimson의 Fripp 박사가 guitar 를 맡고 , progressive 계의 대머리의 제왕 Tony Levin이 bass 를 연주하고 있읍 니다.. 하지만 제게 내재된 Fripp 탐지기를 최고성능으로 가동시켜서 주의깊게 들어보아도 Fripp의 냄새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Fripp은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지.. :-) Fripp은 정말 어떤때는 단 한소절의 riff 만으로 그라는 것을 나타 낼 때도 있지만 또한 어떤 앨범에서는 그가 줄창 guitar를 치고 있지만 아무리 들어보아도 잘 모를 정도로 자기 자신의 개성을 숨기는 능력도 가진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Gabriel의 fan이라면, 그리고 그의 세번째와 네번째 solo album을 좋 아하시는 분이라면 만족하실 만한 앨범입니다.. 한가지 불만족 스러운 것은 CD의 음질이 별로라는 사실인데.. 조만간 digitally remaster되겠죠...

4 허경[ | ]

1977년 2월 스물 일곱 살을 맞은 게이브리얼은 애틀랜틱 산하의 앗코(Atco) 레이블에서 자신의 첫 솔로 작 <Peter Gabriel>를 발표했다(미국의 배급은 메이저 레이블인 애틀랜틱이 맡았다). 앨범은 캐나다의 프로듀서 밥 에즈린(Bob Ezrin)에 의해 제작되었다. 당시 에즈린 역시 게이브리얼과 동갑내기인 약관의 청년이었지만 이미 앨리스 쿠퍼, 키스 등 거물 아티스트들의 앨범을 제작하는 등 실력 있는 중견 프로듀서로 인정받고 있었다(이후 79년 에즈린은 저 유명한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앨범에 공동 제작자로 참여하게 되는데, 당시에도 에즈린은 겨우 29세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은 77년 2월 게이브리얼의 솔로 1집을 구입해 집으로 돌아와 LP를 플레이어에 걸고 그 안에 담긴 음악을 듣는 순간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앨범을 여는 첫 곡 'Moribund B rgermeister'는 물론 수록곡들의 전체적 기조에서 그것은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이라기보다는 한 장의 리듬 앤 블루스 + 록 앨범이었던 것이다. 게이브리얼은 당시의 가장 기본적인 제작 방침을 후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를 '피터 게이브리얼'이라는 한 사람의 솔로 싱어라기보다는 '기괴한 분장과 의상을 입고 노래를 했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제너시스의 이전 리드 싱어'로 바라보았어요. 당시 저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 특이한 복장과 분장이 아니라 - 음악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었고, 또 무엇보다도 제너시스의 음악과는 다른 음악을 하는 것이었어요."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론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프로그레시브와는 거리가 있는) 보다 미국적 방식의 록 음악 제작자를 맞아들여 제너시스와의 음악적 차별화를 꾀한다. 둘째 이를 위한 구체적인 음악적 지향으로 자신이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미국적 리듬 앤 블루스 + 록적 감성의 기타를 앨범의 전면에 배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선택은 미국 상륙을 본격적으로 꿈꾸었던 70년대 초 이후 그가 행해왔던 일관된 음악적 지향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면에서도 앨범의 중심 전략은 이미 단순한 제너시스와의 차별화를 넘어선다. 우리는 이를 일단 '미국 주류 취향의 젊은 제작자를 통한, 미국적 록, 리듬 앤 블루스 감성의 강조'로 정리해 볼 수 있다 - 한편 이런 기본 전략에 따라 앨범 역시 밥 에즈린이 선택한 캐나다 토론토의 '사운드스테이지'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게이브리얼이 이전의 왕성한 '실험' 정신을 완전히 상실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게이브리얼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 1집은 위에 적은 두 가지 기본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미 충분히 '실험적'이다(물론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 탈퇴 이후의 솔로 활동에서도 여전히 이전 제너시스 취향의 곡들을 얼마든지 '재생산'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오늘 우리가 아는 '존경받는 거장 작가'로서의 게이브리얼은 물론, 그가 당시까지 누리고 있던 나름의 '대중적 인기'마저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특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주, 장난스러운 보컬 등이 등장하는 'Excuse Me', 'Down The Dolce Vita' 같은 곡들은 기존의 어떤 장르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게이브리얼적 유모어 감각'이 넘치는 독특한 곡이다.

본 작의 음악적 핵심은 실상 - 앨범이 자신이 구체적 방법론으로 선택한 리듬 앤 블루스적 감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 그러한 지향의 기저에 깔려있는 실험과 모색의 정신, 즉 이전까지의 정통 영국 프로그레시브적 감성을 뛰어넘으려는 '음악적 다변화 실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는 1집의 리듬 앤 블루스적 감성을 포기한 다음 해의 2집에 의해서도 분명히 증명된다).

한편 이러한 '미국적 감성의 도입'은 그 자신이 이전부터 꾸준히 추구해오던 보다 세계적이고 국제적인 (상업적) 감각의 획득을 위한 노력과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도 다시 한 번 앨범의 음악적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앨범 '소유주' 피터 게이브리얼 자신이 아니라, 그러한 기획을 구체적으로 수행하고 현실화한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제작자' 밥 에즈린이다. 한편 앨범의 사운드는 기술적 완성도의 측면에서 무척 뛰어난 성과를 들려주는데 이 또한 명백히 밥 에즈린의 공로이다.

그러나 문제도 없지 않다. 1집에 세션 기타리스트로 참여했으며, 이후 2집의 제작을 맡게되는 로버트 프립은 보다 솔직하게 1집 녹음 당시의 상황을 밝히고 있다: "3일을 일해 보고 나니까 전 저의 참여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떠나버리고 싶지 않았다는 거예요. 전 진퇴양난에 빠져있는(ravaged) 제 친구를 버리고 혼자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게이브리얼은 당시까지 앨범 제작자로서의 경험은 물론 아직 '음악성 있는 싱어·송 라이터'로서의 권위조차도 인정받지 못한 단지 유망한 솔로 싱어에 불과했을 뿐이다. 따라서 레코드사와 게이브리얼의 위임을 받은 제작자 밥 에즈린은 '전권'을 행사했으나, 결과는 두 사람 모두가 불만을 느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요소들 사이의 생경한 결합으로 나타났다. 사실 앨범의 소리와 성향은 많은 면에서 에즈린이 제작한 70년대 중후반 키스와 앨리스 쿠퍼의 사운드를 연상시킨다. 이는 어느 모로 보나 게이브리얼의 목소리와 성향에 그리 어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특히 앨범의 리드하는 두 악기, 드럼과 기타 사운드가 어울리지 않는다(물론 우리는 이후 게이브리얼의 작업들, 특히 80년 3집 이후 그가 자신의 제 빛깔을 찾은 이후의 작업들과 비교해, 그에 따르는 '사후적 결과론'으로서 77년 당시의 이 앨범을 비평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연히 '80년의 성과란 77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심지어 게이브리얼 자신조차 그것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에즈린을 선택한 게이브리얼에게 그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이처럼 1집은 게이브리얼보다는 에즈린의 공과(功過)가 겹쳐져 드러나는 앨범이다.

앨범에서 음악적으로 주목할 만한 곡은 첫 싱글 'Solsbury Hill', 'Humdrum' 그리고 단연 'Here Comes The Flood'이다. 실상 앨범을 들어본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겠지만 우선 자신이 자라난 워킹 인근의 솔즈베리 힐의 어린 시절을 노래하고 있는 'Solsbury Hill'은 음악적인 면에서 앨범의 전체적 흐름에서 이탈하는 곡이다(이 곡의 비디오 클립에는 그의 부모와 두 딸이 등장한다). 심플한 어쿠스틱 기타와 드럼, 신서사이저가 리드하는 이 상쾌한 팝적 감각의 곡은 원래 앨범 수록곡 리스트에 속하지 못했으나 최종 순간에, 그것도 첫 싱글로 실리게 되었다(아마도 레코드사의 강권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여하튼 이 곡은 차트에서 영국 13위, 미국 68위를 기록하며 게이브리얼의 솔로 데뷔를 성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 이는 당시까지 제너시스의 곡들이 기록했던 순위와 비교해 볼 때도 결코 '나쁘지 않은' 순위였다. 그러나 두 번째 싱글 'Modern Love'는 영미 어느 쪽 차트에도 전혀 진입하지 못했다. 한편 앨범 역시 영국 7위, 미국 38위를 기록해 '무난한'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앨범에서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곡들을 '이 곡들을 제외한 앨범의 모든 곡들'이라 말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머지 곡들이 '리듬 앤 블루스 + 록'의 감성이 주도하는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고 있음에 비해, 이 곡들은 실제로 이러한 앨범의 일관적 흐름에 대한 '이질적' 요소들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세 곡은 다른 곡들에 비해 게이브리얼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노래하는 곡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본 작에서 이후 살아남게 될 요소는 바로 이러한 앨범의 '이질적 + 정신적' 요소들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해 본다면, 'Solsbury Hill'의 팝적 감수성과 'Here Comes The Flood'의 새로운 프로그레시브적 감성이 그러한 요소들이다. 특히 '영혼에 불어닥친 홍수'를 의미하는 'Here Comes The Flood'는 이후 최근까지 그의 작업을 면면히 관통하는 '인간의 내면적인 영적 위기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평화의 갈구'라는 테마가 최초로 나타난 곡이었다.

한편 앨범은 그의 첫 솔로 앨범답게 여러 면에서 앞으로 몇 년 동안 그의 앨범들을 특징지울 많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앨범은 마틴 홀(Martin Hall)과의 공동 명의로 된 'Excuse Me' 한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의 곡들로 채워져 있다. 그가 말하고 있듯이 우선은 '싱어·송 라이터'로서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게이브리얼로서는 최우선의 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앨범에는 가사가 실려 있지 않은 데, 다음 해 2집 발표시 게이브리얼은 이를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 1집을 우선 좀 심플하게 보이고 싶었고, 때론 가사를 싣는 것이 좀 '잘 난 척' 하는 것 같다는 기분도 있었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어를 쓰지 않는 거의 대부분의 제 팬들이 가사를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명백히 제 실수였지요. 이 번 2집에는 영어 가사는 물론 싣고, 또 가능하면 (각 나라 라이선스에) 번역문도 실어보려고 해요."

게이브리얼은 이후 자국어 중심주의, 혹은 영어 중심주의를 벗어나 보다 '제3자적 입장에서' 자신의 팬들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이후 3집, 4집 앨범을 아예 독어로 다시 한 번 취입한 사실, 2집 이후 이제까지 발표된 그의 모든 앨범에는 가사가 실려있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한편 앨범의 전체적 이미지 측면에서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디자인 팀 힙그노시스의 뛰어난 커버이다(이에 대해서는 본 지에 실린 게이브리얼의 커버 아트에 대한 임근영의 글을 참조할 것). 더구나 특이한 것은 그의 앨범에 별 다른 제목이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이 실려 있는 앨범의 앞 커버에는 왼쪽 윗 부분에 그의 이름만이 작은 글씨로 쓰여있다. 이는 그의 4집 앨범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1-4집에 이르는 그의 앨범들의 제목은 모두 동일하게 <Peter Gabriel>이다 - 나는 이 글에서 편의상 관례를 따라 이를 각기 , , , 등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는 물론 게이브리얼의 의도적인 선택인데, 그 자신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제 아이디어는 앨범을 일 년에 한 번씩 간행되는 일종의 음악 잡지처럼 만들자는 것이었지요. 제 생각엔 대부분의 그룹들이 자기들의 새 앨범이 '깜짝 놀랄 만큼 새롭고 다른' 앨범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걸로 보였거든요. 꼭 뭐, 다른 제품들하고 별로 다른 것도 없는데, 항상 그렇게 보이도록 광고하는 세제 선전들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전 제 앨범들을 전부 다 비슷하게 보이도록 만들려고 마음먹었지요."

두 번째로 특기할 만한 요소는 그가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위해 구성한 백 밴드와 게스트 뮤지션들의 면면에 있다. 77년 당시 '피터 게이브리얼 밴드'의 기본 진영은 기타의 스티브 헌터(Steve Hunter), 베이스의 토니 레빈(Tony Levin), 키보드/신서사이저의 조젭 치로프스키(Jozef Chirowski), 래리 패스트(Larry Fast), 드럼의 앨런 슈워츠버그(Allan Schwartzberg), 퍼커션의 짐 멜렌(Jim Maelen) 등이다. 여기에 게이브리얼이 키보드, 플롯을 종종 연주하고 있으며, 그 외 두 명의 게스트 기타리스트 딕 와그너(Dick Wagner)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 중 특히 언급되어야 할 사람은 82년의 4집 앨범까지 그의 밴드에 머무른 키보드의 패스트, 그리고 폴 사이먼 밴드 등에서 일했던 스튜디오 전문 세션 맨이며 이후 킹 크림즌의 정규 멤버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게이브리얼의 앨범·라이브 등에 참여하고 있는 베이스의 레빈, 당시 킹 크림즌을 해산한 후 다양한 실험을 모색 중이던 기타의 프립 등이다.

한편 게이브리얼은 77년 2월 앨범의 발매에 맞추어, 한 달 후인 3월 약 20일간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기'(Expect The Unexpected)라는 역설적 제목으로 자신의 첫 솔로 북미 투어를 실시했다. 우리는 당시의 소중한 공연 실황 부틀렉 <Peter Gabriel - Recorded Live In Cleveland 1977>(Welfare Pig·92)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데, 우선 여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연주 곡목의 선정이다.

모두 7곡이 수록된 이 부틀렉 중 1집 앨범에 실린 곡은 'Waiting For The Big One', 'Excuse Me', 'Slowburn'의 단 세 곡에 불과하며, 나머지 네 곡 중 두 곡은 마빈 게이(Mavin Gay)의 'Ain't That Piculiar'와 킹크스(The Kinks)의 'All Day And All Of The Night', 나머지 두 곡은 어느 앨범에도 실리지 않은 게이브리얼 작사·작곡의 미발표곡들인 'A Song Without Words', 'Why Don't We'이다 - 행복하게도, 앨범 미수록들을 실어야 값이 올라가는 부틀렉의 '미덕'이 십분 발휘되어 있다. 관중들의 분위기는 무척 흥분된 듯한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으며, 연주 곡목의 주된 기조 역시 리듬 앤 블루스 + 록적 필의 헤비한 기타 사운드가 리드하는 강력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게이브리얼은 이 공연에서도 이전 제너시스 시절과 마찬가지로 곡과 곡 사이에 여러 가지 재미있는 '멘트'를 넣고 있다.

한편 같은 해 4월 게이브리얼은 런던 데뷔 공연을 가졌는데 당시 공연에는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로버트 프립이 더스티 로즈(Dusty Roads)라는 가명으로 무대에 드리워진 천막 뒤에서 기타를 연주해 주기도 했다. 그 해 10월까지 게이브리얼은 전 유럽을 순회하는 투어를 계속했으나 결과적으로는 10만 파운드의 적자를 보게 되었다. 1977년 말은 바야흐로 '디스코와 펑크의 시대'였던 것이다. --사용자:허경,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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