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onos Quartet

1 Kronos Quartet[ | ]

1.1 # 크로노스 쿼텟 공연을 보고 와서[ | ]

[Neo-Zao, 김남웅]

안녕하세요? 지난 목요일부터 회사에서 때아닌 휴일을 갖게 되 이제서야 회사에 와서 예바동을 보니 별로 글이 없군요. 내일 프로젝트 발표라서 오늘은 좀 한가하길래 아침부터 글을 써 봤습니다. 써 놓고 보니 좀 기네요. 제 홈페이지에 사진이 티켓그림과 함께 링크 해놓았으니 즐기시기 바랍니다.
http://jean.iml.goldstar.co.kr/~zao/kronos/kronos.html 참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요. 혹시 제가 예전에 존 맥라플린 공연 리뷰한 글을 가지고 계신 분 계세요? 평소에 정리하지 않는 습관 때문에 글을 자꾸만 날려버리네요. 흑흑..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1997년의 ISCM 음악제라는 빅 이벤트를 앞두고 있는 한국의 음악계는, 지난주에(5.28.6.1) '96 현대음악주간'이라는 일종의 페스티벌 형식의 음악제를 가졌습니다. 이 행사는 미국의 현대음악이라는 메인테마로 열렸는데 그 레퍼토어도 아론 코플랜드에서 존 존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광범위하게 미국의 현대음악계를 조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 내내 열린 행사 중에 단 일회만을 참여하는 불운(?)을 겪었는데 그 공연은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라고 말할 수 있는 크로노스 쿼텟의 연주회였습니다. 크로노스 쿼텟은 금요일과 토요일 각각 예술의 전당과 토탈미술관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제가 참석한 공연은 금요일의 예술의 전당 공연이었습니다.

금요일 마침 연구소가 쉬는 날이었고, 별 할 일도 없는지라 일찌감치 점심때부터 예술의 전당에 갔습니다. 왜 이리 날씨가 내리 쬐는지 차 없는 인간의 오후란 이렇게 비참한 것인가를 절감했죠. 예의 한가람 미술과부터 들리고, 자료관으로 들어가 음악서적을 이 것, 저 것 뒤졌 는데 요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의 책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더군요. 사실 이 때 까지만 하더라도 크로노스 쿼텟의 연주를 구경 하겠다는 생각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아직 예매을 못 해서 6시가 넘어야 표를 살수있었기 때문에 그 기다리는 시간이라는게 매우 고달프 거든요.) 음악당쪽으로 올라가 무대를 몰래 엿보고 나서는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그들의 무대는 일반적인 순수음악공연의 무대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놀라왔던 것은 조명이 마련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무대자체의 컬러가 검은색으로 세심히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 또한.. 무대의 양쪽에 피에이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었죠. 그 더운 날, 서늘함까지 느껴지는 음악당에서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으로는 전혀 매력의 요소가 없는 무대에 홀린 저를 순간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음향체크 소리였습니다. 잔잔한 홀안데 울려퍼치는 음! 마치 나의 눈 주위로 형광색의 음파가 진행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더랬죠.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났습니다. 홀에서 외롭게 공연을 보기로 확정한 것이죠.

할까, 말까하는 순간이란 항상 짜릿한 것인데.. 자신의 결정을 굳히고 나면 저로서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정후에는 항상 기다림의 고통이 남아있으니까요. 그래도 예술의 전당은 좀 편안 한 곳입니다. 자료관의 3층에는 영상자료관이 마련되 있어서 200원만 내면 마음에 드는 영상자료를 나 혼자서 마음껏 볼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열려있습니다. 그 곳에서 마침 현대음악쪽의 엘디를 걸어 놓고 즐겼습니다. 존 케이지의 재미가 가득한 음향과 그 것을 잘 짜여진 콘티에 의해 표정으로 연결시키는 트롬본 주자의 익살있는 얼굴에 킥킥 웃고 있는데, 시간은 어느 덧 흘러 마감시간 퇴장명령을 받았죠.
"아! 이제는 정말 어디에 등을 붙이냐?" 한숨이 흘러 나왔지만 불굴의 의지로 앞뜰의 돌의자에 가 앉았서 가지고 갔던 책과 자료관에서 복사 한 이런, 저런 자료들을 읽었죠. 등받이는 없어서 허리는 아프고..
가끔씩 바람을 타고 날듯 말듯 향기가 날라와 고개를 돌리면, 커플들이 붙어있고.. 이래서 이 곳은 혼자는 안 올려고 했는데.. 후회가 갑자기 몰려 왔습니다.

잠깐 잡스런 이야기에서 빠져 나와 크로노스 쿼텟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크로노스란 그리스 신화의 신들 이전의 세상의 제왕으로서 그리이스 신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는 매우 흉포해게도 자식들의 반란을 염려하여 잡아 먹어버렸는데, 그의 아내 레아가 막내 제우스와 함께 탈출하여 이 후 제우스에 의해 타도된 존재입니다. 이 때 제우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성기를 잘라 바다에 던져 버렸는데, 이 때 잘린 성기와 바다와의 교합으로 태어난 것이 제우스의 여동생 아프로디테라고 하죠.
따라서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들의 영광된 아버지의 존재가 아니라 이성 의 세계 이 전의 암흑의 세계를 상징하는 존재로 야만과 혼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현악사중주단의 이름을 이러한 크로노스 로부터 따왔다는 것은 매우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음악의 가장 큰 아이러니 중 하나는 비 대중성에 대한 가장 큰 요소인 이성주의의 산물이라는 비판과 반감에도 (정감이 없다.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줄 곳 제기되어 왔던..) 불구하고, 그 음악적 이미지가 매우 불안정하고 심지어 괴기스럽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감상은 로고스중심의 이성주의에 빠진 사람들의 보수적 성향에서 나온 학습부족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만, 크로노스 쿼텟의 의도라는 것이 꽉 차여진 역사적 틀에서 일탈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면 매우 현명한 작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번 현대음악주간의 팜플렛에 실린 조단메이어스의 글에서 제가 동감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쨋건 크로노스 쿼텟의 매우 튀는 복장과 무대가 반드시 센세이셔널리즘을 앞세운 옐로우 저널리즘의 산물이라고만 얘기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시간은 흘러서 드디어 공연시간이 왔습니다. 아까 낮에 봐두었던 무대와 달라진 점은 조명으로 푸른빛이 가득하다는 것..
그들은 공연의 시작부터 달랐습니다. 여성 첼리스트인 조안이 하이힐을 신고 무대에 나와 혼자서 첼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악절이 반복되는 동안 청중들은 이 내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반복되는 악절을 중심으로 또 다른 악절이 연주되었습니다. 저는 이 첼리스트의 운지와 보우잉을 유심히 보았는데 그녀는 두개의 악절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소리는 우측 백스테이지로부터 들려나오고 있었 는데 자세히 보니 비올리스트인 행크가 숨어서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저처럼 앞자리에 앉이 않았던 사람들은 아마도 이 순간 상당히 신비로운 기분을 느꼈을 겁니다. 바짝 긴장된 순간 무대의 왼쪽에서도 바이올린의 하모닉스가 연주되었습니다. 두대의 바이올린이 좌측 백스테이지에서 숨어 있던 것입니다. 이윽고 숙연하기까지 한 분위기에서 첼로를 제외한 다른 악기들은 멈추고 나머지 멤버들이 조용히 무대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윽고 자신들의 악기를 들고 합주를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산뜻한 피치카토와 강렬한 포르테.. 첫 곡은 아제르 바이젠 작곡가 프랑키즈 알리 자데의 무감사야기라는 곡이었는데, 이 날 연주된 다른 대부분의 곡들과 마찬가지로 신빈악파의 전통을 이어 받되 추종하지는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이 곡은 이 날의 가장 신비로운 분위기의 곡으 로 현대음악의 정적인 미와 동적인 미를 보여주는 오히려 약간은 고전 음악에 가까운 분위기를 느낄 정도의 아름다운 곡이었습니다.

첫 곡이 진행되는 동안 정말로 크나 큰 음악적 감동을 받은 저는 이 날의 공연에 전적인 신뢰를 걸었는데.. 역시 훌륭한 공연이 진행되었습니다.
두 번째의 곡은 대중음악쪽에서도 비교적 친숙한 존존의 곡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그의 악보로 표현된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저로서는 매우 궁금 했던 곡이었는데 그는 대중음악이나 순수음악 어느 측에서나 자신의 색깔을 보였습니다. 이른바 꼴라쥬 음악의 특성이죠. 구조주의 이 후의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적 특성을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음악이었습니다. 완전히 해체된 악절과 주제 어느 테마건 30초를 진행 하지 않습니다. 비조성음악이 흐르는 가 싶으면 갑자기 민족적인 민요가 나오고 그 뒤를 따라 극장음악풍이 흐릅니다. 이 곡은 거의 50여개의 테마가 뒤 섞인 음악이라고 하는데 청중들을 정신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가 네이킷 씨티에서 보여준 것과 완전히 같은 방법입니다. 디터 바이스와 기젤러 슈베르트가 썼던 현대음악 전반에 걸친 글에 보면 존존의 음악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혼합작법의 방법이 나이트 클럽 디제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또한 제시했는데 그 것은 이른바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의 탈경계의 공헌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음악은 분명히 특이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감동은 주지 않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한가지 부연한다면 그의 음악의 제가 생각할 때 '화이트 노이즈'성의 음악이라고 표현하고 싶군요.
그가 보여주는 테마의 불연속과 독립성은 청중에게 자신의 모드(mode)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즉 특정 테마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체크해 볼 수 있는 있어서 자신의 음악적 성향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합니다. 바로 음악적 자아 식별(musical self identification)이라고 부르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존 존의 곡이 연주되고 나자 크로노스 쿼텟의 성향은 더욱 명확해 졌습니다. 이들은 이른바 십이음 음악의 후손격인 유럽적 성격의 음악보다는 보다 자유분방한 미국의 현대음악성격이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무대는 연극적입니다. 보통의 의자가 놓여진 밝은 무대가 아니고 갖가지 색깔을 면밀하게 시퀀스 처리한 조명이나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제단위의 검은 색 소파와 어두운 분위기에서 존 케이지가 자신의 음악을 음악계보다는 머스커닝햄의 무용 음악으로 발표했던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퍼포먼스적 성격을 가미한 무대였습니다.

세번째 곡은 이집트 작곡가인 함자 엘 딘의 곡이었는데 별로 길지도 않고, 민족적 성격의 선법을 사용한 정말로 듣기 쉬운 곡이었습니다.

드디어 공연 전반부의 마지막 곡이자 제가 기대해 마지 않던 우리나라 작곡가 진은숙의 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84년 최대의 현대음악단체 인 ISCM에 학생의 신분으로서 입선을 하여 당시 객석에 자신의 음악제 참관 소감을 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현대 음악계의 연주를 전문가답게 매우 날카롭게 비평했고, 무엇보다도 입선을 계기로 좌르쥬 리게티에게 사사를 받게 된다는 소식을 전해 매우 놀라움을 느끼게 한 작곡가입니다. 국내의 하노버 학파중 한사람인 강석희 교수와 리게티의 톤 클래스터 작풍을 이어받은 그녀의 음악은 어떨까 하는 것이 굉장히 궁금했었습니다. 이 음악은 일종의 전자음악이었는데 (현대음악으로 장르화되는 대부분의 전자음악은 우리가 상상하는 탠저린 드림이나 슐체 타잎의 것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 많습니다.) 이 날 최초로 피에이 시스템을 가동한 음악이었습니다. 잘못된 저의 음악지식이 아니라면 저는 4악장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음악에서 톤 클래스터적인 기운을 느꼈는데, 사실 그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보여주는 음향의 탐구 였습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어진 전자음향(현악기의 생소리와 위화 감은 전혀 없는 맑은 소리임.)에 맞추진 연주는 가령 현악기의 어택후에 딜레이 된 소리를 현악기 자체에 딜레이를 걸려서 내는 것이 아니라 구슬이 깨지고 구르는 듯한 전자음자체로 울려 퍼지게 하는 식의 독특한 음향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피에이 시스템으로 울려퍼지는 압도적 박력의 첼로의 저음은 그 외곡된 음의 성질을 떠나서 최고의 긴장감을 조성했습니다. 매우 기계적이고 정확한 음들의 시퀀스에서 비롯된 조성상실의 음향공간은 정말 모던하다고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었습니다. 특히 저에게는 4악장 부분에 이르러 이들이 연주하고 있다는 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착란현상을 보였는데 그 것은 바로 연주자와 음악의 분리감이었습니다. 이 들은 연주자가 아니라 바로 퍼포머였고 음악자체는 다른 제 3의 공간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이 곡의 감동은 최고의 박수를 이 사중주단에게 쏟아지게 했습니다.
멤버들은 진은숙씨를 객석으로부터 불러내어 박수를 공유했는데 그녀는 84년에 객석잡지의 사진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습니다.

공연의 후반부는 매우 친숙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곡이 연주되었습니다.
저 자신은 반도네온 연주자와의 합주를 기대했건만 그냥 평범한 현악 사중주곡이었습니다.

다음 곡은 퍼플헤이즈와 함께 이 날의 가장 큰 박수를 받은 마이클 도허티의 엘비스 프레스리 추모곡(?) 이었는데 존 존의 곡과 함께 가장 미국적인 분위기의 곡이었습니다. 말로 설명을 하자면 엘비스의 비바 라스베이가스, 하운드 곡 등 여러곡을 모창 가수와 여가수의 재미난 멘트와 노래로 엮게 하고 그 사이 사이의 반주를 크로노스 쿼텟의 조성적이지 않은 연주로 메우는 식의 곡이었습니다. 곡의 멘트도 상당히 유쾌했고 범상치 않은 반주에도 불구하고 미국적인 자유 분방함을 보여서 여러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했습니다. 역시 피에이 시스템을 통한 연주였죠.

다음 곡은 이 정규 셋 리스트의 마지막 곡인 고레츠키의 현악사중주 1번 이었습니다. 돈 업쇼가 노래했던 교향곡 3번의 유래없는 히트 후에 더욱 유명하게 된 이 작곡가의 현악 사중주는 타트라 족의 민족음악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곡이라고 하는데 저는 크게 민족적인 선율감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1악장의 하모닉스에 의해 전개되는 알 듯 모를 듯 한 테마이 후 빠른 2악장이 연주되는데 제 1 바이올린이 조성적 테마를 연주할 때 나머지 현악군이 비조성적 음군을 또한 첼로가 전면에 나설 경우 또한 나머지 악기들이 같은 식으로 연주하는 특색있는 곡이었지만 비교적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곡이었습니다.

정말로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한편의 종합예술을 감상하고 난 청중들의 감동은 끊임없는 박수를 터지게 했습니다. 이 날의 공연은 한국인인 조수미의 공연도 아이돌인 도밍고의 공연도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의외일 정도의 박수를 받았던 것입니다. 특히 이 날의 청중들은 젊은 대학생들이 많이 보이고 머리 긴 친구들도 꽤 보였는데 앞죄석의 몇명은 기립박수까지 하는 진풍경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상황에서 현대음악자체가 보통사람의 감성으로도 충분히 이해 되고 감동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제가 그 날의 증인이니까요.

앵콜요청이 거듭된 후 이들은 무대에 나와 공연도중과 마찬가지로 3배를 하고(꼭 3번씩 머리숙여 인사하더군요.), 리더인 데이빗의 곡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너무도 훌륭한 작곡가들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그 중 최근에 알게된 베트남 작곡가 피큐 펑(?)의 곡 트레제디 앳 디 오퍼라를 들려드리죠." 첫 앵콜곡의 선율은 민족적인 성격이 농후한 곡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곡을 들으면서 친숙한 동양의 악기를 모사하는 현악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곡이 끝날 쯤 청중들은 더욱 우렁찬 박수를 보냈습니다. 한 두명 차 시간이 걱정되는 사람들외에는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았어요. 다시 한 번 나와서 인사를 하고 들어간 이 들을 청중들은 기립박수로 불러 세웠 습니다. 다음 곡의 설명이 나왔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의 퍼플 헤이즈 입니다." 이 때 환호가 어느때 보다 강력했던 것으로 보아 청중들의 상당수는 순수음악만을 듣는 팬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다시금 피에이 시스템에 불을 집히고 퍼플 헤이즈의 강렬한 리프가 흘러 나왔습니다. 리더인 데이빗 해링턴은 어느때보다 강력한 보우잉으로 활줄을 하나씩 많이도 끊어지게 연주했고 비브라토도 기타의 수직적인 비브라토를 연상시킬 정도였습니다. 편곡이나 연주의 훌륭함을 제쳐 놓고라도 클래식 공연장에서 지미의 곡을 들을 수 있다는 기분은 그야 말로 만점이었습니다.

곡이 끝나도 몇 몇의 청중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앵콜을 다시 외쳤습니다.
저는 이 들이 더 이상은 앵콜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이 들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다시 무대로 나오는 순간 갑자기 이성을 잃고 미친듯이 박수를 보냈죠. 이들은 마지막 곡의 제목을 밝히지 않고 연주를 시작했습 니다. 조용히 흐르는 음들이 피에이시스템의 증폭을 받고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내 그 음들은 무수한 전자음으로 쏟아졌고 점점 엄청난 음으로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곡이 정점으로 달할 때 이들의 보잉은 현을 떠나 허공으로 마구 헤졌고 마임이 펼쳐졌습니다. 피에이 시스템이 부밍을 보일 정도로 큰 음이 무대의 바닥을 진동시키고 이윽고 조용히 곡은 끝났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인사를 하고 무대뒤로 사라졌습니다.

천장의 불이 하나 둘씩 켜지면서 저는 이 공연이 이제야 끝이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공연으로 저는 몇가지 느낀 점을 말한다면 첫째, 녹음매체로 듣는 현대음악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날의 공연을 TV에서 녹화하거나 영상으로 본다해도 그 감상은 절대 같을 수 없을 겁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에게 그렇게 흔하게 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본 공연중 가장 좋았던 카시오페아의 공연은 그 연주의 좋고 나쁨 혹은 열기를 떠나서 음반이나 공연에서 보여주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다만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지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크로노스 쿼텟의 공연은 음반과 공연의 느낌이 너무 달라 필설로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 것은 단순히 공연에서 들려오는 피치카토 음색이 오디오로는 낼 수 없다 따위의 시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날의 연주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것이고 연주자들은 마치 마임이스트였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둘째, 첫번째와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쇤베르크가 존 케이지에게 화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때 "그렇다면 나는 그 화성의 벽에 평생 머리를 박아 버리겠다"라고 대답한 유쾌한 말이 결코 우습게 보이거나 과장되게만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한마디로 미국의 뉴욕음악계에서 느낄 수 있는 고도의 사기를 믿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현대음악도 대중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흠잡을 것이 전혀 없었냐? 라고 물으면 어제 일요일 중앙일보에서 허영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가 말하기를 상업주의적 계산이 깔려있다고는 하지만, 그 강렬한 느낌은 이 모든 것을 상쇄하고 남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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