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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3일 (토) 13:02 기준 최신판

1 Fred Frith인터뷰 발췌본[ | ]

FredFrith는 현재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잠시 고민(?)을 좀 하다가... 결국 이 부분에 넣게 되었습니다. 이 인터뷰들은 80년대 초반 그리고 90년대 초반에 있었던 인터뷰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의 사정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Fred Frith의 앨범에 대한 소개들이나, 그의 음악관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장신고

1.1 # ?[ | ]

이 글들은 Fred Frith의 인터뷰 몇 개의 발췌 본 인데, 내 생각에는 1982년경의 것 같다. 그리고 "The Complete Music Magazine"이라는 잡지에서 본 것들이다. nm-list mailing list에 있었던 메이저 레이블과 라디오 같은 음악 비즈니스에 대한 토론부분의 편지에서 몇 개의 부분을 가져다 적었다.


Q : 대부분 오늘날의 음악이 발전하는데 있어 그 환경의 특징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major factor)를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FF : 일반적으로 음악계의 형편은 단지 사람들이 연주하고 듣는 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이 시스템 속에서의 복잡한 관계들과 비즈니스의 압력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레코드 회사, 잡지들 그리고 라디오 방송들은 유행을 위해서 음악의 모든 아이디어를 판매촉진을 위한 수단으로 계속 사용한다. 비즈니스는 언제나 - 매주마다 독창적이고 새로운 어떤 것이 등장하도록 - 구성물의 빠른 전환을 요구한다. 레코드 회사들은 특히 많은 양의 상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고, 그리고 거기서 누가 뜨는가를 보는 식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이 증명된 시장으로 자리를 잡으면, 시장에 딱 들어맞는 그 상품만 판매한다.

요즘은 돈이 없기 때문에 예전처럼 무식한 방법을 쓰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성향은 계속 남아있다. 대부분의 professional음악들은 완전히 이러한 형태다. 청부업자 같은 사람들의 손에 잡혀있는 꼴이다. 그런 사람들이란 바로, 에이전트나, 출판관계자, DJ, 평론가 등이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사이에 끼어 들어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분해시키려 한다. 가령 예를 들면, 평론가들은 메이저 레이블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절대 쓰지 않는다. 가끔 마이너 레이블에서 나온 판이 있더라도 그들은 거의 - 아니, 확실히 - 취급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새로 나온 David Bowie앨범은 듣고 또 듣고 하면서 확실한 평을 탈 때까지 듣는 것이다.

Q : 당신은 이런 일반적인 인식부족을 유감스럽게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 것일 생각하는 건가?

FF : 내 생각에는 당신이 더 많은 주의력(attention)을 갖지 못한다면, 그런 사실을 운명이어야만 한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사람들 거의 대다수가 대안적 음악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통해 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 사람들이 대안적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민주주의 국가 국민들의 25% 미만이 위험한 미치광이(dangerous loony)를 권력자로 선출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런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만일, 당신이 난 외의 음악(marginal music)을 만든다면, 가능한 한 정보를 알리는 (informative) 것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조금이라도 주목받을 만한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조리에 대해 불평할 권리도 전혀 가지지 못하게 된다. 내 말은, 음악 비즈니스는 음모(conspiracy)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은 음악 비즈니스 방법 속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부터 당신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많은 뮤지션들이 이 두 가지 극단점 사이에서 비틀(vacillate)거린다. 그러한 뮤지션들은 유명해지길 바라고, 게다가 종종 "매진"을 보기 위해 초초해 하기도 한다. 내 생각에 이건 바보 짓이다. 만일, 그 음악이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 그 음악을 하면 된다. 왜 그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가? 대중적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매우 좋은 동기로 음악을 했다. 문제는, 어떤 뮤지션들은 진실로 그들이 무엇을 왜 하는가를 찾기보다는 "음악 만들기"를 위한 전략을 발전시키는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Q : 이런 모든 것들 가운데서 당신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무엇을 찾았는가?

FF : 1977년 이후 더 많은 뮤지션들이 그들 스스로를 위해 행동하기 시작해 왔다. 그런 사실이 내게는 기쁜 일 이다. 미국 내에 단독으로, 현재 수십 개의 대안적 레이블과 음미할 가치가 있는 대안적 그룹들이 있다. 뮤지션들은 기존의 전달시스템(communication system)과는 별도로, 서로간의 의사전달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이 대중의 입맛에 거의 영향을 주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이후 매우 중요하게 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transcriber's note
거의 1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의 마지막 말을 주목해 보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된다. "이후 매우 중요하게 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의 시작"이었나? 아니면, 메이저 레이블이 단지 indie출신의 주역들을 데려가서, 판매를 위한 새로운 상품시장을 찾은 것인가? 제반상태들은 그들이 10여년 전에 겪었던 것과 똑같고, 더 커졌다. 왜냐하면, 많은 indie배급 채널들은 소멸했거나, 메이저 회사에 병합되고, 융합되어졌으며, 메이저 회사들은 팔릴만한 것에 대한 더 넓은 정의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소견 : 음악계의 상태는 산업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규정되어진다는 Fred Frith의 처음 말에 대해 - 본인은 이 말이 음악을 포함하여 메이저 레코드사, 잡지 그리고 라디오 방송 너머에까지 팽창했다고 생각한다. - 우리의 음악티켓이 산업의 압력을 받는 것처럼, "창조적"인 것이 되어야 할 악기의 제작도 그렇게 되었다. 장비들 역시 "유행하는(fashionable)"것이 되었다. 이후 FF의 몇 가지 얘기는 여기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high-tech 장비의 사용에 대한 대답부분들에서)

FF : ... 언제나, 장비작업으로 만들어진 trick은 당신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장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떠한 장비가 잘못된 형태로 '오동작(malfunctions)'하는 것도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때만큼이나 즐거운(interesting)것이다.

Q : 대체로 장비에 대한 편견(preoccupation)이 그 문제점을 피해갈 수 있는 중용으로 유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당신의 생각인가?

FF : 그렇다. 경쟁적인 운동경기에서 파생된 것처럼 음악에 접근하려고 하거나, 최신 테크놀러지적 발전의 꼭대기를 지켜야만 한다는 구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오늘날의 뮤지션 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것이다. - 아마도, 특히 미국 뮤지션 들에겐 더 그럴것이다. 미국인들은 흔히, 매우 어린 나이때 부터 그들 스스로 선택하고, 대단히 진지하게 그들의 성취를 위해 열심이다. 현재에 있어, 이러한 점은 정신적 강인함과 독립성의 온당한 중요성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긍정적 영향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세는 상황의 해학을 은폐하고, 강박적 자기독단으로 갈 수 있다. 그러한 자기 독단은 전 미국사회에 침투해 있다. 미국의 외교정책을 보라.

1.2 # 1993 : Long Beach Union[ | ]

by Sander R. Wolff (1993년(?) circa의 Long Beach Union 신문에 쓰여진 원문)

Fred Frith는 그의 작업이 그리 쉽게 분류되어질 사람은 아니다. 즉흥연주자로써의 그의 재능은 다중악기주자(instrumentalist)로써의 재능을 넘어선 것이고, 작곡가로써의 재능은 이 둘 모두를 초월한 것이다. 다른 그룹과 아티스트들과 함께 한 작업은 (그의 작업을 분류함에 있어)혼란만을 가중시킨다. 그는 지금 jazz/bebop/hardcore cut-up 밴드인 John Zorn의 Naked City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The Residents, Brian Eno 그리고 The Violent Femmes 같은 많은 이들에게 그의 독특한 기타연주를 제공했었다.

회고적 성격(retrospective)의 그룹인 그의 밴드 Keep The Dog 부터 시작한다.

"그 그룹은 계속적으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상황으로 발전해 갔다. 소위 말하는 traditional group인데, 베이스, 기타, 드럼 그리고 키보드와 마찬가지로 그 악기들 위에 아코디언이 있었다. 이건 그룹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우린 때때로 Cajun영향을 받은 고풍스러움을 가졌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겪고서, 나는 Gravity와 Speechless부터 이런 오래된 노래들에 적합한 모든 사항을 써내려 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공연해 왔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지금 신경 쓰고 있는 사항들은 내가 최근에 썼던, 특히 춤곡들, 내가 Bebe Miller를 위해 썼었던, 그리고, 레코드를 만들기 위해(결국 레코드는 만들어졌다.) Ferdinand Richard와 함께 썼었던 예전의 곡과 같은 부분이다. 우리는 2-3주전에 Switzerland에서 몇 차례 gig를 했고, 그 그룹은 내가 밴드를 위해 작곡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밴드였다고 느꼈었던 최초의 것이었다."

Frith는 최근에 동명영화의 사운드 트랙인 Step Across The Border를 내놓았다. 여기에는 지난 10여년 동안의 작품들을 모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앨범을 위해 쓰여진 곡들도 들어있다.

"영화라는 것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 사운드트랙을 위한 곡을 만든다는 것, 그것들을 CD속에 끼워 넣는다는 작업이 그냥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느끼게 해주었다. 다른 부분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영상과 함께 음악을 들을 때와 영상 없이 음악을 들을 때의 작용은 전연(very, very)다른 것이다. 여러 경우중 한가지로, 나는 특히 영화를 찍던 그 장소에서 채취한 그대로의 사운드 - 사탕 만드는 기계 소리 같은 - 에 곡을 써 입혀 그들과 함께 연주하는 것이 즐거웠다. 어느 곡이든 전적으로 영화의 문맥(context)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곡들은 스스로의 논리(logic)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코드에서 그러한(영화음악이주는) 효과가 갖는 것은 음악적 수단을 사용하여 영화가 담고 있는 느낌과 같은 것을 떠오르도록 계속 노력하는 병렬적 네러티브(narrative)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CD가 매우 강한 네러티브적 성질을 가졌다고 본다.

"영화 안에서, 사탕 만드는 기계가 나올 때, 당신은 그 기계가 만들어 내는 소음을 들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거기에 어떠한 것도 더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한 것이었다. 레코드에서는 기계가 작동할 때의 사운드를 붙여 넣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Frith는 계속 얘기했다.

S.A.T.B에서의 두곡은 거대한 guitar quartet(사중주곡)의 부분인데, 'The As Usual Dance Toward The Other Flight To What Is Not'이라고 명명되었다. Frith는 특별한 종류의 melodic movement를 창조했다.

"음... 나는 분열(fragmentation)을 아주 좋아한다. 내가 작업하는 요소를 분해하고 재구성할 수 있다는 '확대(extent)'라는 점에서 분열은 작곡가로써의 내게 영향을 준 것 중 중요한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특히 지금은 우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연주하기 위한 곡을 작업하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작곡방법을 매우 좋아한다. 우선 먼저 뭔가를 써놓고, 그 다음에 그걸 완전히 분리 시켜서 다른 연주자들 사이에 그 분리된 부분을 흩어놓고, 다른 연주자들이 그것들을 다시 함께 되돌리는 방법을 통해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나는 최근에 The Rosa's를 위한 saxophone quartet을 쓴 적이 있고, 이 guitar quartet은 Montreal에서 한 그룹을 위해 썼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Curlew의 George Cartwright를 위해 'Person to Person'이라는 saxophone quartet을 썼다. "그는 그 곡을 혼자서 연주했다. 그 연주는 내가 Rosa를 위한 곡을 쓸 수 있도록 실제적인 영감을 제공했다." size="2">고 Frith는 말했다. Frith는 많은 다른 프로젝트에 열중해 있다.

그는 프랑스 정부가 의뢰한 오페라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막 끝냈다. 나는 그에게 그 오페라는 어떤 것인지 질문했다.

"음... 매우 와일드하다! 그것은 오직 프랑스 정부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프로젝트다. 그들은 내게 6개월 동안 Marseilles에서 생활하며 작업할 수 있는 경비를 지원했고, 그 다음 15명의 20에서 23세 정도된 rock musician들이 매일 9시에서 5시까지 와서 나와함께 작업할 수 있도록 경비를 지원했다. 이것은 결국에, 프랑스 정부측은 나를 그 뮤지션들의 음악과정(課程)을 지도하는 선생으로 데려온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Marseilles의 theater company, 3명의 숙련된 가수들, 8명의 배우들, 그리고 이 젊은 뮤지션들과 연합하여 오페라를 완성시키게 하고자 한 아이디어였다."

"감독(director)는 가극대본(libretto)을 썼고, 나는 곡을 썼다. 그건 이미 상연되었다. 지금은 Europe의 다른 도시들에서 상연되고 있으며, 6개월 동안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 오페라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오페라에 대해 하나 얘길 해 준다면, 전곡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장면은 막이 올라가고 무대 위에 걸린 조명 중 하나가 실제로 무대에 떨어져 박살 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배우들이 등장해서 히스테릭한 광란을 보여주며, 무대세트를 철거하기 시작한다. 그게 오페라의 시작이다!" {Note : 이 프로젝트의 음악은 Helter Skelter란 제목의 CD로 발매되었다.}

The ArtBears의 마지막 두 앨범인 Winter Songs와 The World As It Is Today에서 Frith는 그의 오랜 동료인 ChrisCutler가 연주한 drum을 제외한 모든 instrument들을 연주했다. DagmarKrause는 어려운 보컬파트를 명인의 솜씨로 소화해 냈다.

"The World As It Is Today는 믿지 못할 만큼 빨리 만들었다. 뒤돌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참 희한한(extraordinary)일 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막 Speechless를 끝낸 상황이었다. 덧붙이자면 나는 프랑스에서 EtronFrouLeLoublan과 2주 동안 작업하고, 스위스로 가서 2주 동안 모든 것을 리믹싱했다. 우리는 한달 꼬박 작업을 했고, 겨우 끝냈다. 우리는 같은 스튜디오에서 World As It Is Today를 바로 시작하게끔 스케줄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Speechless를 끝낸 그 다음날, Chris는 나에게 T.W.A.I.I.T의 가사를 건네주었고,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피아노에 앉아 2일만에 모든 곡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우리는 1주일만에 그 곡들을 녹음했고, 그럭저럭 모든 일들을 한번에 처치해 냈다. 모든 것을 over-dubbing했고, 모든 일들이 빨리 지나가서, 솔직히 어떻게 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Fred에게 전체적으로 음악을 구상함에 있어서 힘들지 않았냐고 물어 보았다.

"당신이 노래를 쓸 때 당신은 그것이 어떻게 들릴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들은 당신이 기대한 소리를 내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레코드의 뭉탱이(totality)는 당신이 그 작업을 시작할 때 당신이 상상하던 능력을 벗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각각의 요소들은 이러하였든 저리하였든 대부분 명확하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진 것은 어떤 꽤나 신비스러운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에 Gravity가 있는데, 마침내 몇 개의 extra 트랙과 함께 CD로 재발매 되었는데, 그 앨범은 아름다운 멜로디 라인들이 여러 다른 민속음악문화(different folk music cultures)에서 나온 복잡한 리듬구조와 얽혀있다.

나는 그에게 모든 부분을 직접 썼는지, 아닌지를 물어보았다.

"음,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상당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는 Zamla의 경우에 그들이 음악을 읽지 않는다(악보를 보고음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었다. 그래서 스웨덴의 Uppsala에 나의 괜찮은 Chart들을 가지고 갔을 때 그들은 나를 비웃듯 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우리에게 그냥 연주로 들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연주해 줬고, 그들은 귀로 듣고 따라서 연주를 했다. 그것이 그들의 전통이다."

"나는 그들이 내가 쓴 특히 리듬에 대한 세부사항들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귀로 들어내는 능력에 경직될 정도였다. 많은 뮤지션들이 4/4박자나 3/4박자로 연주하는 것을 상당히 어려워 한다. Gravity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은 15/8박자로 쓰여있어서, 그렇게 어렵게 만들려고 한 의도는 아니었는데,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Gravity에 사용했던 박자기호(signature)는 folk music문화에서 따온 것이고, 이런 박자들은 folk song에서는 보통의 것이기 때문이다. Zamla가 아무 문제없이 그것을 곧장 듣고서 이해해 낸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반례를 들자면, 내가 1978년 처음 New York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마주친 사람은 BillLaswell이었다. 그의 그룹은 내가 공항에 도착한 당일에 지하에서 연습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Art Bears의 앨범에서 작곡한 곡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든 15/8박자를 4/4박자로 무난하게 변조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봐서는 어떤 업적(achievement)을 이룬 것 일지는 몰라도 Zamla의 경우 같은 정도의 업적(achievement)은 아니었다."

Frith의 개인적인 업적(achievement)중 하나는 그와 cellist Tom Cora로 구성된 밴드 SkeletonCrew였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기타와 바이올린, 첼로, 베이스와 드럼을 한꺼번에 연주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Rock의 요소를 improvisation과 뒤섞었다(blend). 그 그룹은 원래 quartet 으로 시작하려 했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멤버가 2주 차이로 폐가 악화되어 병을 앓게 되었다.

"첫 번째 멤버가 처음에 병원에를 가고 그리고는 또 다른 멤버도 곧 이어 병원에 갔다. 먼저 간 멤버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병이 재발해서 또 병원에 들어가고, 거의 2 ~ 3달 동안 그 두 명이 (계속)아팠기 때문에 우리는 리허설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쯤 Tom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엉뚱한 제안을 했는데 그것은 그냥 우리가 스스로 드럼을 연주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훨씬 빨리 진행될 거라고, 그때 우리는 생각했다. "안될 것도 없자나?" 그래서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ZeenaParkins가 합류하고 나서, 우리는 좀더 유능하게(competent) 되었다. 그것은 마치 책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것이었다.(which was kind of a turn up for the books). 그때쯤 되자 우리의 음악은 평범한 Rock and Roll 밴드와 다를 것이 없어졌고, 더 이상의 목표가 없어졌다.(kind of pointless to go on at that point.)"

Frith의 big picture중 또 하나는 그의 solo와 duo improvised work이다. 그는 다양한 background의 아티스트들과 팀을 이루었다. 색소폰 주자 Loi Coxhill, 전-Henry Cow의 드러머였던 Chris Cutler, 기타리스트 Renec Lussier, Henry Kaiser등이 그 중 몇 명이다.

나는 궁금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과연 Frith가 무엇을 의도하고 그의 improvised작업을 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과연 언어(language 역자주:음악적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위하여 힘쓰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즉흥음악은 많은 직관을 포함시키고, 나 또한 직관력을 키우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것의 시간적인 면을 좋아한다. 나는 duo로 연주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정제된 의사소통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정말로 상대방이 무엇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떠한 면에서 마치 연극의 형태와 유사한 것이다. 그것에는 많은 연극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민첩한 감각이 필요하다. 당신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당신이 곡을 컨트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뮤지션이 수많은 세월동안 배워왔던 모는 것들 - 그들의 technical resources의 모든 것들 - 이 그들이 매 순간마다 발견하는 새로운 것들과 함께 Dialogue에 들어있으며, 그 들어있는 형태는 마치 처음으로 접하는 것처럼 되어있다. 그러므로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생기는 이러한 종류의 지식과 발견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예를 들자면 Chris와 나는 다른 문맥(context)으로 연주를 했다. 우린 멜로딕한 음악도 연주하고, 모든 종류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즉흥연주를 할 때 당신은 단순하게 여러 가지 언어들을 못 들어오게 해서는 안되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굳이 하나의 공연에서만 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당신이 그것을 사용하려고 할 때 거기에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즉흥연주 공연에서 당신이 끌어다 쓸 수 있는 요소들은 정말로 엄청나게 많다."


Editor's note : 이 인터뷰가 끝난 후에, Fred Frith는 Venice, Southern California에서 콘서트를 했고, 다큐멘터리 필름인 -Step Across The Border-는 Santa Monica에서 상영되었다. 나는 인터뷰 속에서 이것과 관련해 이야기한 두개의 마지막 문단을 제외시켰다. 또한 나는 문법적으로 보다 읽기 쉽게 글을 재구성(reformat)했다. 이 인터뷰는 Sander R. Wolff에게 허락을 받고 여기 다시 옳겨적은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인터뷰 특성을 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 Malcolm Humes


1.3 # 1998 : Paris Transatlantic : global coverage of avant-garde music & art[ | ]

100% 정확한 해석이라고는 장담 못합니다...--;;;
원문은 http://www.paristransatlantic.com/magazine/interviews/frith.html 입니다.


작곡가 인터뷰 전설적인 70년대 progressive rock그룹 HenryCow의 결성자-멤버로, BrianEnoRobertWyatt의 협력자로, 1980년대 부터는 (Material, Massacre, SkeletonCrew, NakedCity 등으로) New York scene에서 두각을 보였던, 영국 태생의 기타리스트 Fred Frith가 최근 파리 북서부의 황량한 교외지역에서 개최된 new music and art를 위한 행사인 Laboratoires d'Aubervilliers 행사장에 두차례 방문했다.

프랑스인들이 "지역적으로" 좋아하는, 요구하는 것에 상관하지 않는 그들을 위한 일정은 네개의 뛰어난 콘서트(duo 셋과 trio하나)였고, Frith는 첼리스트 Tom Cora[그는 이 기사가 만들어질 즈음 애석하게 도 암으로 사망했다. - 편집자. 1998. 4.9.]그리고, 퍼커셔니스트 Chris Cutler와 그의 새로운 친구들, 체코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보컬리스트 Iva Bittova(독자들은 "cult"와 Frith의 다큐멘터리 영화 "Step Across The Border"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구적인 improvising 그룹 AMM(Cornelius Cardew와 Eddie Prevost가 함께한)의 창단멤버인 영국태생의 기타 파이오니어(지금은 프랑스에 거주한다.)Keith Rowe같은 옛 친구들을 초청했다.

콘서트는 모두 녹음되었지만, Frith가 그것들을 음반으로 낼 계획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작년에 Jean-Pierre Drouet와 함께 했던 이와 비슷한 duo는 발매되었지만)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은 Fred의 website인 www.fredfrith.com으로 가서 더 많은 정보를 체크해 보라. 우리의 인터뷰는 Laboratires의 dressing room에서 있었고, 지붕위에 둥지에서 짹짹거리는 새끼 비둘기 소리는 옆방에서 들리는 Chris Cutler의 사운드체크로 울리는 쿵쾅거리는 충돌음 만큼이나 짜증나게 했다.

Fred Frith와의 인터뷰(by Dan Warburton)

Q: 이번과 같은 콘서트를 위해 리허설을 하나요?
f: 아뇨. improvising으로 연주해요. 리허설 이라는 건 평소에 하는 것들 모두가 리허설인거죠. 우선 중요한건 당신이 연주를 위한 기술적인 측면을 확보하고, 각각의 파트를 제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함이 필요합니다. 그다음, 사운드가 좋으면, 그것을 해나가는거죠.

Q: 전에 Keith Rowe와 연주해 본적이 있나요?
f: 한번 있었죠. 제생각엔 1986년경 같은데..., 그래도 그 이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죠. 처음 제가 그의 연주를 보았을때는 그가 "정치적으로 적합한"것이 아닌 경우의 모든 improvising을 배제 했을때였죠. 그땐 Cornelius Cardew가 작곡을 담당했던 시기로 그는 혁명적 노래를 연주 했었죠. 그들은 좌익성향의 곡을 연주 했었고, 저는 모두가 이야기하는(그 기타리스트의 뛰어난 실력: 역자주)것들에 대해 이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보길 원했기 때문에 매우 실망했었죠. 그는 C, F, G(이런 코드만)연주했죠. 그것이 약간은 이상한 것이었죠. 하지만, 그건 제가 기대했던 그런방식이 아니었던 거예요. AMM의 첫번째 음반이 나왔을때, 그걸 들었죠. 그때 까진 Elektra가 신생레이블이었거든요. 그 레이블에서 나온 첫번째 레코드는 제가 들었던게, the Paul Butterfield Blues Band 였고, 전 그 레코드를 정말 좋아해요. 그 당시엔, 다음에 뭐가 발매될지 알수 없었던 시절이어서, 전 Elektra에서 다음에는 뭐가 나올건지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가졌죠. 그 다음 발매된 음반은 The Doors였죠... 전 그들이 꽤 난해하다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그다음 갑자기 AMM이 나온거에요! (웃음)

Q: 그 당시에 당신은 어떤 음악들을 들었나요?
f: 거의 모든걸. 당신이 말할수 있는것들! 그 당시 발매된 어느것이든지...

Q: 제가 읽었던 최근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그 당시에 "평범한(normal)" 블루스를 기반으로한 기타리스트가 되려고 노력했다고 하던데... 당신 생각대로 되었다면, 그 sense에서 당신이 정말로 성공할 수 있었을거라고 생각하나요?
f: 제가 지금 그 기사를 볼 수 있다면, 그 질문에 보다 더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답변할 수 있을것 같은데,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Henry Cow는 블루스 밴드로 시작했죠. 그게 우리가 했었던 거구요. 전 어느 블루스 클럽에서 Tim Hodgkinson을 만났죠. 우린 다른것 들을 쉽게 발전 시켰었죠. 왜냐면, 그당시 그런장소에서는 매우 많은 것들이 계속되었고, 우린 거의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발견했죠. 저는 The Band의 "Big Pink" 그리고 Beefheart의 첫번째 레코드, 그리고 Frank Zappa의 모든것을 오후 한나절에 들었던 날을 기억할 수 있어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것은 많은량의 입력이죠. 그리고, 이 모든 세가지 종류의 것들은 제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죠. 모든게 어느 오후 한나절에 벌어졌고, 많은 오후들이 그와 같았지요....

Q: 당신은 전통적인 음악교육 같은걸 받아 본적이 있나요?
f: 반정도는요.(Semi-traditional.)저는 비교적 음악적인 집안에서 자랐죠. 제 아버지는 피아니스트였죠.-프로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많은 걸 연주했고, 우리는 모두 음악을 좋아했죠. 그래서 저는 다섯살 때,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했어요. 제가 전학을 가고, 새로운 선생 님으로 바뀌던-전 그를 좋아하지 않았어요.-열세살 되던해에 거의 그걸 포기해 버렸죠. 그 즈음에 저는 기타에 더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죠. 제 큰형은 jazz에 푹 빠져 있어서, 저는 집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던, Django Reinhardt를 들을 수 있었죠. 제 둘째형(Simon Frith 가 맞겠죠?: 역자주--;;)은 모든 pop음악의 열성적인 팬이었고,- 지금도 그래요 - 그래서 저는 Johnny Ray난 50년대 pop음악은 무엇이든지 들을 수 있었죠. 그리고 제 아버지는 Bartok, Delius그리고 Debussy를 들었죠. 아버진 20세기초 클래식 음악을 무척 좋아하셨을 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계가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셨죠. 저는 제가 아주 어렸을때, Yehudi Menuhin을 접하게 되었고, York Minster 에서 Britten의 "War Requiem"역시 보았죠. 그건 제게 깊은 감동을 주었죠. 그런 세가지 극(極)들 사이에 있으면서, 저는 모든것을 조금씩 가지게 되었죠.

Q: 그 이후 당신의 음악적 발전에 가족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f: 가족들은 항상 전적으로 지원적이었죠. 전 그들이 아마도 제가 약간은 무모하다고 - 제 아버지는 저의 직업에 대해 걱정하셨었죠.- 생각했었 다는 걸 알았었죠. 하지만, 식구들은 제 콘서트에 왔었고, 지금도 그래요. 전 제가 저의 가족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식구들은 저에게 어떤 자기과시나 자만심을 가지지않고 전적 으로 제 뒤에서 저를 지원해 주었죠. 제 누이는 빈정거리는 유머를 무척 좋아했죠. 누이는 저의 레코드들을 재떨이로 쓰죠!

Q: Robert Wyatt의 "Rock Bottom"마지막 트랙에서 비올라를 연주했었는데, 어떻게 연주하게 되었죠?
f: 우리가 Virgin레코드에 함께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참가했었죠. 전 Robert를 그전부터 알고 지냈죠; 제 학창시절때, 전 그에게 자주 전화했었지요. - 그의 옆집에 사는 어떤학생과 알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Robert의 전화번호를 알수 있었죠. - 전 그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얘기했죠. "제가 졸업하고 Soft Machine에 들어가면 안될까요?"(웃음) 그는 약간은 조심스러웠었는지 아닌지 잘모르겠지만, 저에게 언제나 친절했죠. 그래서 우린 서로 알게되었죠. 그는 수차례의 gig를 보러 왔었고, Henry Cow에 매우 큰 관심을 가졌죠. 그래서 우린 둘다 Virgin 레코드와 계약하게 되었죠. 그리고, 음. 그 비올라 세션은 저의 많은 소질이 나오도록 이끌어 주었죠. Robert와의 세션결과 때문에, Ivor Cutler는 그의 레코드에서 제가 연주해 주길 요청했고, 그 다음에는 "Guitar Solo"앨범을 녹음하고, 그 이후에 Brian Eno는 그의 작품에서 연주해 주길 요청했죠. 음악계의 길이 저를 위해 열리기 시작한 시기였죠.

Q: 그 Eno와의 세션에서 어떤 다른 부분적인 기억이 또 없나요?
f: 그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나는 것이었죠. 저는 Phill Collins와 함께 리듬파트를 하면서 드럼스틱으로 기타를 부숴버렸던게 생각나네요. (웃음). 저는 그가 그것전부를 다 기억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게 궁금하네요! 매우 wild했었다고 생각돼요.

Q: 당시 Eno는 매우 세부적인 것까지 이미 콘트롤하고 있지 않았나요?
f: 아뇨. 전 연주함에 있어서 전적으로 자유로웠죠. 제 의미는 Eno의 studio에 대한 접근 그 모든것이지(그러한 것을 에노는 콘트롤하는 것이지: 역자주) 그가 연주하는 사람의 전부를 콘트롤 한다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우리들의 최고장점을 그가 볼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다 보고, 우리가 했던 것을 할수 있도록 상황(situation)을 창조하죠, 그리고 그것들을 배후에서 작업하는 거죠. 저는 그가 저의 연주를 사용하는 방법이 뭔지,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 혹은 그가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건지, 하는 모든 것 전부를 콘트롤 하지는 못했죠. 그러나 studio세션에서 문자그대로 제가 원하는 것을 정말로 할 수 있었죠. 저는 최근에 1981년 Downbeat매거진에 실린 Bill Laswell의 인터뷰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궁금증이 하나있죠;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함께한 연주자(원문은 고용자: empolyer 입니다. 적당한 우리말을 못찾아서... 그러니까 빌 라스웰이 세션으로 참여 했을때란 얘기겠죠...)는 누구죠?"라는 질문에 그가 "Fred Frith와 Brian Eno는 저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에 좋아하죠." 라고 대답했더라구요. 제 관점으로는 Eno가 정확히 그런 경우인거죠. (겸손한척 하면서 자기자랑을 하는 잔머리...입니다:역자주...) 문맥상으로 어느정도는 좌익적이었고, 표면상으로는 팝음악의 종류를 하던 저의 작업을 누군가각 믿어주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죠.

Q: 하지만, 당신은 Henry Cow에서 그와 같은 자유를 가지지 않았나요...
f: 그러나, Henry Cow는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는 매우 달랐죠. 그것은 하나의 집단이었고, 모든것들은 토론되어졌죠. -저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많은 Henry Cow의 작업은 선천적으로 나약했죠. (물론 힘이 있었죠. 전 그것들을 부인하려고 노력하진 않아요.) 모든것이 보다 강해지기 보다는 좌절이었고, 그런것들로 인해, 그 집단의 진행결과로써 그룹은 침몰의 끝을 맞이하게 되었죠. 거기에선 토론이 우선되지 않고서 뭔가를 시도한다는걸 허락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거죠. 제가 아마도 나중에 생각난 묘안으로 이 사실을 과장하고 있는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러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생각해요. 저의 정말 좋은 아이디어들은 아마도 그러한 결과로 완전하게 실현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죠...

Q: Sex Pistols까지 재결성한다고 하는 지금상황에서, 우린 Henry Cow의 재결합 콘서트를 학수고대하고 있는데요...
f: (웃음)잊어버리세요! 우린 모두 너무 바빠요.

Q: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그당시의 멤버들 모두와 함께 활동하고 있자나요.
f: 네, 우리는 실제로 수년동안 함께 모여 연주를 했었죠. 몇년전에는 저와 Lindsay Cooper, Gianni Gebbia 그리고 Lars Holkmer와 함께 quartet을 했었고, Tim과는 함께 투어를 한적도 있었고, Chris와는 여러가지 형태로 많은 양의 작업을 함께 했죠. Lindsay가 다발성경화증(병명인가 봅니다. 역자 주)에 걸렸다는게 매우 슬퍼요. 이 사실이 결국 우리에게는 가장크고 중대한 걱정거리가 되었죠. 그녀가 그것을 고치겠다고 결심한 이후에, 그녀는 균형을 잡아갔고, 아무튼 말할수 있게 되었죠... 저는 그녀가 그병을 너무도 멋있게 이겨낸 것에 감동했죠.

Q: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중에 아직까지 공동작업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죠? 제 말중에 "아직까지"라는 말을 하지 않는게 좋겠죠? 그 말을 넣으니 이제 당신이 음악을 그만 두는것 같은 느낌이 드든데요!
f: 네, 이제 저 그만둡니다(웃음). 네, 많은 사람이 있죠. 저는 많은 위대한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을 했죠. 전 매우 운이 좋았었죠. 전 제생애 중에 Robert와 다시 한번 작업해 보고 싶어요. 저는 Henry Treadgill 혹은 현재의 jazz가 무엇인가에 대해 - Marsalis 같은 사람과는 반대되는 - 그러니까 계속해서 저와함께 매우 급진적으로 전방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Oliver Lake같은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해보고 싶어요. jazz뮤지션이 아닌것 처럼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은 매우 흥미있었던 걸로 생각해요.

Q: 만일 당신이 New York으로 건너가지 않았었다면, 당신은 음악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요? 당신은 무엇을 했을까요?
f: God knows. 그런 생각은 해본적 없어요. 제가 아는 한도내에선, 전 New York으로 건너가서 확실히 자유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죠. 우선 첫번째로 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는 상상같은 걸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는걸 느꼈죠. 이건 분명히 저의 문제였어요 - 저를 도왔던 영국인들로 부터 벗어났을 때, 이 문제가 끝났죠; 전 더이상 저를 짖누르던 압박감을 느끼지 않아요. (잠시 있다가). 전 영국에 있을때 항상 중압감을 느꼈죠. 영국에 있는 많은 뮤지션들이 그런 압박감을 느낄거라고 생각해요. 어느정도는 문화적 으로는 영국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인색하기 때문이죠. 물론 영국에는 매우 중요한 음악 scene이 있죠 - 상업적인 음악의 견지에서 그건 환상적 으로 활기차죠. 그 이유는 그렇지 않은 전체적인 많은 지역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인거죠. 활기넘치는 pop음악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은 명백하게 pop음악을 전세계로 수출해 왔던거죠, 그건 매우 성공적이었죠 - PRS(이게 뭔지 잘모르겠습니다. :역자주)는 매우 커다란 협회죠. - 그런 걸로 당신이 "영국의 음악계는 성공적으로 조성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약간은 비꼬는 투로 들릴거에요. 하지만, 다른 모든 유럽국가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에서 저는 다른 음악종류들도 인정하고 지원하는 고른 수준을 보았고, 그런것은 확실히 영국에는 없는것 이였죠.

Q: 당신이 Stuttgart에 정착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f: 그건 제 부인의 가족들이 거기 출신이어서, 그래서 거기가 편해서요. (그는 공처가 인가 봅니다...--;:역자주). 무슨 문화적인 이유로 거기에 사는건 아니에요. 정확하게는, 전 제 자신이 유럽인 이라기 보다는 미국인인것 같아요.

Q: 정말로요? 무슨의미죠?
f: 전 미국으로 이주해와서, 14년동안 거기서 살았고, 매년 그곳으로 돌아가죠. 거기엔 제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전 그 공동체의 부분이라고 느껴져요... 전 제 자신이 애국심없는 미국인이라고 생각되죠. 전 그곳에 확실히 틀어박혀 있는 제 자신을 보죠. 완전하게...

Q: 요즈음의 New York scene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Tzadik에서는 매주 새로운 음반들이 나오는 것처럼 보여요...(웃음). 80년대 초반과 똑같이 활기넘치는(vibrant) scene인가요? 아니면, 성숙기에 접어든 건가요?
f: 성숙되었다는 의미가 뭐죠? 더 좋아졌다는 건가요? 아니면, 늙어버렸다는 건가요?(웃음)

Q: 아마, 후자의 의미겠죠...!
f: 제 생각엔 아직도 유동적인 상태라는 거죠. 확실히 그건 저의 세대가 그 scene이 활기넘쳤다, 아니다, 를 결정할 수 없다는 거죠. 어느정도는... 80년대가 시작되면서 활동한 많은 사람들이 모든것을 발전시키고, 강화시켰으며, 중요하고 흥미로운 작업들을 하여, 그곳이 위대하고, 에너지가 충만한 혁신적인 scene이 된것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이루어 져야 하겠죠.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마침내 그들의 그늘아래(에서 안주하지않고)부터 뛰쳐나오고 있으며, 그래서 우린 무엇이 벌어질건지를 보게 되겠죠.

Q: draughty lofts에서 John Zorn과 함께 No pangs of nostalgia를 연주했었죠?
f: 전 아직도 draughty lofts에서 연주해요!(Laboratoires d'Aubervilliers 의 주변을 가리키며) 이게 뭐죠?(웃음) 아무것도 아녜요. John과 함께 그의 아파트에서 5명의 사람들 앞에서 연주했었던 생각이 떠오르니, 그때가 너무 웃겨서요. 그 시절동안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뮤지션들은 제가 미국으로 건너간건, 많은 돈을 벌고, 크게 성공하려고 그랬다고 불평했지만, 제가 영국이 아닌 New York에 있었다는 걸 제외하면,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걸 한거고, 전 단지 제가 하고 싶은걸 한거죠.

Q: Bill Laswell과 Fred Maber와 함께 결성했던 당신은 그룹 Massacre는 왜 그렇게 일찍 해산했죠?
f: 계속해서 밴드를 유지해 나가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당신에게 말해줄 만한 사실이 세부적으로 생각나는게 없군요.

Q: 아무런 후회없나요? "Killing Time"은 이미 전설적인 앨범이 되어 버렸는데...
f: 네, 우리는 가끔씩 작업하려고 했었지만, 그렇지 못했죠. 전 그것이 정말로 행복하지 못했죠. 실제로 한달전에 Bill, 저, 그리고 Charlie Hayward는 트리오 레코드를 녹음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때(Massacre 당시)레코드를 만들기 위해 편집하고 선택했던 재료들 중에서 나온것 들이죠. 그것이 결국에는 나온거죠. 비록 그사이에 12년하고 몇년이 더 지나서, 다른 느낌이 남에도 불구하고, 그때 이후 제가 느껴왔던 것 중에서는 Massacre에 가장 가까웠던것 같아요.

Q: John Zorn은 왜 당신을 Naked City의 베이시스트로 선택했나요, 기타리스트가 아니구요?
f: 음... 우선은 Bill이 저보다는 더 뛰어난 기타리스트니까요!(웃음) 그것에 대해선 의문이 없겠군요!

Q: 그럼 다른 베이시스트도 있는데, 왜 당신을 베이스로 기용했죠?
f: 왜냐하면, 그의 밴드내에서 실제로 매우 흥미롭게도 rock의 백그라운드에서 나온 사람은 단지 저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Kramer는 아마도 그것을 전부 할 수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John은 pop과 rock 뿐만아니라, jazz나 filmmusic까지의 매우 방대한 문화적 영역의 탐험적인 음악을 원했죠. 그런데 그가 알고, 함께 연주한 사람들은 jazz로 부터 나온 경향이 강한 뮤지션들이죠. rock음악류를 해본 수완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거죠. 결과적으로 전 그 포지션에 밀려들어가 생전 해본적 없는 walking bass를 연주해야만 했죠. 그리고 Mungus의 cover곡과 다른 곡들을 연주했었죠. 정말로 겁먹었죠...!

Q: Naked City가 Mingus의 곡을 커버했나요?
f: 네, 원곡과 똑같이 연주하진 않았지만, Mingus tribute음반에서 연주했었죠. 하지만, 전 그당시에 멤버들은 전엔 그렇게 해본적이 없었던 rock heaviness의 느낌을 그들에게 줄수 있었죠. 그건 매우 즐거운 일이었죠.

Q: 1992년 있었던 Zorn의 "Houdini/de Sade"에 대한 질문을 해야겠어요. 파리사람들에겐 악명으로 살아있을 그날밤에 대해서 당신에게 꼭 물어봐야만 겠어요.[이건은 고(故) Marquis-Ed에게 깊은 존경의 뜻으로 바쳐진 Zorn의 "오페라"로 New York 다운타운 올스타들이 대거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두 대의 비디오 모니터에서는 무삭제된 hardcore porn가 상영되었다.]
f: No comment!(박장대소하며)

Q: 그 비디오 스크린에서 뭐가 나올건지 당신은 미리 알고있었을거 아니에요?
f: No comment!(웃는다고 정신을 못차리면서)John한테 물어보세요!

Q: 무슨소리하는거에요? 그가 인터뷰하는게 아니자나요!
f: 네, 계속하세요...!

Q: 전 Bill Frisell이 "Zorn이 이번에는 너무 심했어..."라고 말하는걸 우연히 들었던게 확실히 생각나요. 그는 확실히 그 사건이후에 얼마동안은 빠리에 발도 붙이지 않았자나요!
f: 전 그 공연이후에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요. 아마도 이태리사람들 이 말하듯 "비난의 시기"였겠죠.(웃음) 그것은 Naked City투어의 시작 이었고, 그 공연 이후에 우린 몇 개의 또 다른공연을 했죠. 근본적으로 그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는 John의 것 이었죠. 그리고 "Houdini/de Sade" 는 실제로 Naked City의 투어부분은 아니었어요. 우린 우연히 그 공연이 적합한 시기와 장소를 만난거였죠. 그건 일회용 공연이었어요.

Q: 전 제 여자친구가 되려고 하던 사람과 그 공연을 보러 갔었던게 기억나는군요...
f: 얼마나 오래 사귀었나요?

Q: 여하튼, 다른얘길 해보죠... 새 밴드에 대해 애기해 주시죠.
f: Tense Serenity요? 그건 사실 string트리오와 trombone을 위해 제가 썼던 곡의 제목이었고, Arditti Quartet과 Ensemble Modern의 Uwe Dierksen에 의해 연주되었죠. 그 연주는 제가 좋아하는 중요한 미감(aesthetic)을 저에게 의미하게 되었고, 그래서 전 그이후 밴드를 Tense Serenity라 부르기로 결정했죠. 본질적으로 평온함을 가진 그런 improvising그룹을 구성하는데 관심이 있었죠. 기본적으로는 정적으로 연주하는(잠시있다가) 그리고 공연을 볼수도 있을 거에요. Ensemble Modern의 경우 기보된 cell들을 사용하기 위한, 만일 연주자들이 곡을 모른다거나, 혹은 cell이 발생했을 때, 이런 것 들을 지휘하기 위한 시도를 했죠. 그것은 performance를 위한 중요한 칼날과 같은 것이었죠. 제가 Ensemble Modern과 함께 했었던 structure(위에 설명된: 역자 주)들과 동일한 종류의 작곡을 할 수 있다면요. 무엇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것은 그것이 발생하는 그 순간 전까지는 실제로 아무도 모르는 거죠. 전 스무명의 사람과 함께 연주하는 것 대신에 작은 ensemble과 함께 제가 그것을 연주할 수 있게 된다면 하는 생각을 했었죠. 우린 지금까지 한번의 콘서트를 했었고, 우린 투어를 하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약속했죠.

- Q: Ensemble Modern과의 현황은 어떻죠? 아직도 그들과 함께 작업하나요?
f: 6월달에 벌어질 big project를 준비하고 있죠; "Traffic Continues" 라는 곡을 네곳의 도시에서 연주할 예정인데, 이것은 우리가 이미 해 왔던것을 연장하여, 꼼꼼하게 네개의 다른 개념들(world;원문에서는 界라는 단어를 사용했슴; 역자 주)을 섞어 연출한 연주가 될거에요. 그 네 개념은, 완전한 improvising, 완전히 기보된(scored), 나머지 두개는 둘다 이미 고정된 악절재료들을 구성해나가는 것과, 고정되지 않은 나머지 요소들을 수용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은 sign들을 익히기 위한 많은 리허설이 필연적이죠. improvising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빨리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빠르게 반응하여, 뭔가를 정확하게 연주한다는 것은 언제나 쉬운일이 아니죠.

Q: sign을 배운다... 이건 Butch Morris의 수신호(hand language)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f: 네, "연결, 결합"("connection")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때는 확실히 그렇죠. - 물론, 말을 사용해서 이렇게 할 수는 없죠 - 하지만, 사실 전 꽤 오래전부터 이러한 cued language종류로 작업해 왔었죠. 리허설에서 graphic 스코어를 사용한다거나, workshop 도구로도요. 그리고, 실제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Frank Zappa는 60년대 에 그의 밴드 Mothers에서 hand signal들을 사용했었고, 전 그걸 그때 처음 보았죠. 수신호들은 다양한 context들 이곳 저곳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rock context에서 시작된 그 생각이 저에겐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죠. 비록 이것들이 현재는 완전히 잊혀져 버렸지만은. 제가 New York으로 건너 갔을때, 전혀 다른 sign language version인 Zorn의 game pieces가 작업되고 있더군요. Miya Masaoka는 sign은 동일한데, 그 의미가 틀린, 서로 다른 작곡가 들과 작업하면, 너무 혼란스럽다고 제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녀는 표준화된 system을 제안하길 원했죠! 전 그녀가 성공하지 못하길 바래요!

Q: 당신의 가장 최근앨범은 Cage와 Feldman을 포함해서... 더 나은 음악적 언어를 원했던 현대 "클래식" 작곡가들에 대한 경의의 형태로 만들어 졌죠. 당신은 그런 종류의 음악을 많은시간 들으며 지냈나요?
f: 지금은 그 음악들을 많이 듣진 못해요. 하지만, 60년대, 70년대에 많이 들었죠. 그것들은 제 기질(my blood)의 부분을 아주 많이 차지하죠. Feldman이 타계한 이후, 매우 많은 량의 그의 레코드를 (사람들이) 입수할 수 있게 되었죠. 그래서 전 전에는 들어본적이 없었던 곡들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매우 흥미로웠죠.

Q: 이 곡을 씀에 있어서, 당신은 당신이 말하듯 Cage의 열려진 불확정성을 수용한 것 인가요? 혹은, 여전히 중심구조의 중추에 작곡 콘트롤을 위한 요소들을 선택하여 곡을 만든건가요?
f: 음, 이 세곡들은 이런 작곡가들이 창조해낸 soundworld들을 매우 풍부한 조화를 지향하게 하고자 한 것들 이었고, 게다가 그런 작업이 그들을 위한 저의 급선무라고 생각했죠. 비록, 제가 쓴 곡들이지만요. 하지만, Cage의 곡 "The Previous Evening"의 구조는 chance method 들에 의해 거대하게 만들어졌죠, 예를 들어, sturcture 속에 있는 다량의 재료역시 무작위적인 거죠.

Q: 당신은 음악을 시작하던 초기시절부터 스스로 experimental음악을 연주했나요?
f: 전 Cardew의 장대한곡 "Treatise"에서 연주했었죠. 그후 전 언제나 graphic score 界에 매료되어 왔었죠.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학창시절부터 전 Terry Riely, Steve Reich에 매우 많은 흥미를 가지고 유대관계를 가졌죠. Cage는 작곡가로써 보다는 작가로써 더 많은 흥미를 발견했죠. 히지만 그것 역시 그의 음악을 들을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그 시절 제가 그의 책을 읽었던 때 Cage의 많은 콘서트에 대한 건 없었어요. 전 런던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죠. 모든것이 벌어지는 그런 곳에서 살지 못했죠. 전 시골에서 살았거든요... 거기서 그런 곡들을 듣기는 쉬운일이 아니었죠.

Q: 현재 음악감상을 위해 할당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f: 요즘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전 라디오 프로그램의 프로듀스를 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요즘 곡들을 접할 기회를 얻게 되었죠. 제 자동차에 CD player가 있어서, 새로운 곡 같은 것도 들을수 있죠. 그런데, 이건 사실이에요. 만일 당신이 단지 작곡이나 편곡 혹은 다른 어떤이유로 인해서, 당신이 직접 작업한 음악을 엄청나게 많은 시간동안 듣게되면, 그 작업이 끝났을때, 마지막으로 당신이 원하는건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 다른사람의 음악을 듣는 것을 거에요. 아무것도 듣기 싫게 되죠.

Q: 당신의 옛날 레코드가 아니라도 그런가요?
f: 거의 안듣게 되죠. (Rarely)

Q: 작업한 것들중 특별히 좋아하는 음반은 뭐죠?
f: "Winter Song"은 매우 즐거웠죠, 작곡의 측면에서 그걸 매우 좋아하죠. "Gravity"도 역시... "The Technology of Tears"도 좋아하죠. 그것들 모두 그들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죠. 제가 너무 조금 얘기해서 후회스럽네요. 이런게 평소 좋은 표상으로 남아있죠. 제가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만, 그것에 대해선 얘기하지 말죠!(웃음)

Q: 레코드 수집을 많이 했나요?
f: 몇번의 많은 수집기회가 있었지만 포기했죠. 아미 지금은 대략 500장 정도 아니면, 그이상 그정도의 CD가 있을거에요. 미국으로 오면서 300~400장 정도의 LP를 포기했죠. 그리고, 미국에 정착했을때도 적어도 또 그만큼을 몇번씩 포기했구요. 제방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쳐박혀 있는 것 보다는 그걸 듣는 사람들에게 가는게 훨씬 낫죠.

Q: 좋아요. 질문전에 알려드리는 건데, 이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에요. (해석이 잘 안됩니다. : we're serious at PNMR about this); 당신의 아파트에 불이 났습니다. 부인과 아이들은 무사합니다. 당신의 옷가방에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all-time favourite)레코드 10장을 넣을 공간밖에 없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f: 무턱대고, 레코드 열장이요? 내일은 또 다른 열장을 말할거 같네요. (잠시있다가)음...Billie Holiday의 "For All We Know"(잠시있다가) Miles의 "Kind of Blue"당신도 싫어하지 않죠? 그렇죠?(잠시있다가) Glenn Gould의 Bach연주, 뭐 대강 이런거죠. (잠시있다가) Morton Feldman의 "Rothko Chapel"(잠시 있다가) Messian의 그곡"Des Canyon aux Etoils" 곡목 이거 맞아요?

Q: 흥미로운 선택인데요... Messian의 화성적인 울림(harmonically speaking) 과 당신을 연관시킨다는게 저에겐 보통일이 아닌데.
f: 전 Messian의 열성팬이죠. 구조적측면에서도 매우 좋아해요. 아마, 10년전에 이질문을 받았다면, 전"Turangalila Symphony"를 선택했겠죠, 지금은 (위에 선곡한)그곡을 좋아해요. (잠시있다가) 지금 다섯장 했죠? 맞죠? 나머지 다섯장은...(웃음) The Band의 두번째 앨범, 그것과 더불어 "The Night Burned Old Dixie Down"도 좋죠. (잠시있다가) 음... 이건 구하기 힘들었어요... 인도 영화 음악인데, Asha Bhosle이 Ghazals를 부른 것. (잠시있다가) Julian Bream이 연주한 John Downland의 음악

Q: 영국 민속음악인가요?
f: 아마 그럴꺼에요. 그 음악은 다른 어떤요소들에 더하여 민속적인 중요성을 제게 안겨다 주죠. (잠시있다가) Charles Mingus의 "Live at Town Hall"1964. (잠시있다가) 그리고, 당연히 불가리아출신의 gaida(bagpipe)연주자인 Kostadin Varimezov죠. 전 불가리아인과 펜팔을 했었는데, 그는 저에게 불가리아인들의 오래된 bangpipe 연주 LP들을 많이 보내 줬어요. 제가 기타리스트로써 작업하는 것들중에서 어떤 중요한 점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gaida연주를 들어보아야만 하죠. 저의 연주속에는 그러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

Q: 웹사이트 www.fredfrith.com은 당신이 직접 운영하는 건가요?
f: 그걸 제가 운영하는건 아니지만,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죠. 만일 누군가 제이름을 검색하고자 하면, 적어도 30여개 정도의 웹사이트들이 나오죠. 그래서 그 웹사이트가 필요하게 된거에요. 모든 사이트들은 다른사람들에 의해서, 저에겐 사전 협의도 없이, 그들의 이야기에 필수적인 진위여부에 대한 확인도 없이 그냥 정보로 나가버리죠. 물론, 그것들은 매우 좋은 것 들이죠. 그들은 모두 좋은 의도를 가진것 같고, 하지만, 많은 경우 부정확한 글들이 그냥 올라가는 경우가 있죠. 그래서 전 적어도 정확한 기준이 될만한 것을 만들어 그 정보들이 적어도 확신할 만한 것인가를 확인시켜줄 웹사이트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한거죠.

Q: 당신의 연주에 있어 테크놀로지의 사용은 어떤건가요? 현재 live sampling의 사용의 유혹을 받지 않나요?
f: 예전에 사람들이 sampler라고 불렀죠. 전 effect의 종류로 그걸 사용했죠; 80년대가 시작되던해에 Skeleton Crew를 하면서, 우린 많은 종류의 그러한 sampler들을 사용했죠. sampling은 현재 예술의 표현수단으로 커다란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전 그것에 대해 매우 신중한 상태죠. 전 studio에서 특별한 이유로 sampling이 필요할때, 그것을 사용하죠, 하지만, 무대위에서 그렇게 sampling을 사용하는 것은 어느누가 하더라도 똑같이 하기 너무도 쉽다는 걸 알게되었죠. 그래서, 좀 더 다른 어떤것을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어요. 물론, 그 수준이란, 순전히, 결국에 당신이 무엇을 sampling하는가, 그리고, 그걸가지고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있는거죠. 저는 sampling으로 만든 곡을 듣는것이 너무 지루했죠. 그런 곡들은 저를 곡속에 몰입하게 하지 못했어요. "Technology of Tears" 는 sampling을 이용한 레코드였죠, 그건 86년에 제작된 거에요. 그 당시엔 sampling을 이용해서 작업하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어서, 그렇게 했죠. 하지만, 그 시기 이후에는 근본적인 면에서 sampling은 하나도 변화하지 않았죠. Bob Ostertag같이 sampler를 이용해서 환상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진정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잘 알지도 못하는 실정이죠.

Q: 그런소수의 수용층들은 이제껏 커져왔던 것 처럼 보이는데요. 이 행사장의 저편에서는 23살의 젊은이들도 Derek Bailey의 레코드를 사서 듣자나요!
f: 야, 대단할걸요.(웃음)

Q: 이점에 대해서 당신의 친구인 Heiner Goebbels에게 물었더니, 그는 상황은 언제나 그렇듯 부진하고 비참하다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f: 유명한 상을 셀수도 없이 많이 받고, Ensemble Modern과 월드투어를 함께하고, 결국엔 메이져 레이블과 계약한 사람이 그런말을! (웃음) 그는 우리의 안식처인 우리들의 작은 ghetto로 돌아와 함께해야만 합니다! 반대로, 전 현재 벌어지는 상황은 매우 중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프랑스에선 지난 2~3년동안, 매우 관심이 증대되었죠. 그리고, 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요구만큼 음악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토로하는 엄청난 불만들을 근래에 보았죠. 결국, 더 가용한 형태들로 만들어져 network로 확산될 것이고, 저널리스트들은 그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겠죠. 어제는 France Culture(무슨 잡지이름인가 봅니다: 역자 주)에서 한남자가 와선, 이런 음악에 대한 특집을 다루고 싶고, 그러한 특집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Radio France에 어떤사람이 저란 사람은 프랑스 라디오에서는 방송되어져서는 안되는, 방송에 완벽하게 부적절한 사람이라는 매우 무례하고 모욕적인 편지를 써 보내던 때가 불과 두달전 이었는데요!(웃음) 전 어딘가에서는 이 작은 운동 (movement)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Q: 언제쯤 빠리에서 다시 볼수 있을까요?
f: 내년에 와서 여섯번 이상의 콘서트를 할거에요.

Q: 누구랑 오시죠?
f: 아! 잠시만 찾아보죠...! 아마, JimiHendr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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