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op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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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인터뷰 (1992년)[ | ]

DEATH IN PRAGUE -AUTOPSIA interview 1992

Q. 오톱시아는 자살에 대해서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또한 윤리적, 철학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으로는?

A. 자살은 운명을 인내하지 못하는 자아의, 스스로를 향한 행동이다. 오톱시아는 자살은 인간에게, 죽음은 신성에 속하는 것으로 믿는다.

Q. 오톱시아의 작품은 영원회귀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양 철학의 윤회와 업에 관한 오톱시아의 관점은 어떠한가?

A. 동양 철학은 오톱시아의 작품과 별 관계가 없다. 우리는 고전 시대부터 중세에 이르는 유럽의 사유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비록 우리의 작품이 반복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나 이는 영원회귀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영원과 이데아의 개념은 우리랑 거리가 멀고 우리가 철학적 사상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나 우린 그러지 않는다. 만일 철학적 사상이 우리의 창작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단지 그 단편만을 사용할 뿐, 그 의미의 기원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이미 체계화된 관념들은 문화의 진화의 일부분이며 우린 단지 이들이 현 문화의 어휘 중 하나이기에 우리 작품의 일부로 활용한다. 그러나 오톱시아의 작품에서 이 관념들은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작품에 차용됨으로써 이 관념들은 오톱시아 작품의 진수를 형성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한다. 우리는 새로운 작품에서, 이미 확립된 문화적 양식들을 기호 체계로서 활용하여 뭔가 새롭고 진정된(authentic) 것을 표현한다. 오톱시아가 우리의 작품 외의 문화적 현상에 대해 체계화된 응답을 생산하길 바라진 말라. 오톱시아는 실제로 문화의 생성 과정에서는 거리를 두고 있고 또 그러하길 장려한다. 우리는 완성된 결과물에 관하여 말한다- 과학적으로가 아닌 직관적으로, 설명하려고가 아닌 이해하려고. 오톱시아가 겨냥하는 것은 기원(origin)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조사하는 것이다.

Q. 그노시스적(gnostic) 전통과 이교(heresy)는 문화의 역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는가?

A. 어떤 관점에서 우린 이미 아까의 답변에서 이에 대한 답을 했다. 이는 유용한 전통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방법론의 일환으로 혼합주의(syncretism)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노시스 전통은 그 특성상, 작품의 창작에 일익을 담당하지만 작품을 시작할 때 그 기틀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외관상 부조화를 이루는 것들이 실제로는 어떻게 잘 기능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다. 그노시스주의는 그 구조적 불완전성 때문에 흥미롭다; 그것은 새로운 환영을 만드는데 적당하다. 신비주의는 오톱시아의 작품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외부의 이미지를 정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비체(mystical body)에 대한 인식은 있지만 이는 우리가 특정 형태를 조절하려 할 경우 이를 테면 형태의 어휘 그 자체의 이해에 도달하려 할 때 에만 한한다.

Q. 오톱시아의 음악은 어느 정도의 황홀경을 포함하고 있다. 황홀경이 인간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가?

A. 만일 사고작용이 예술적인 것과 가깝다면, 또한 그것이 작품의 처리 과정(manipulation)이 아닌 작품 자체와 함께 나타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황홀경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황홀경으로서 본질적으로 예술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현실을 나누는 예술, 철학, 과학 등등으로 경계들은 매혹 속에서 사라진다. 오톱시아는 황홀경의 요소들을 가지고 작업하지 않는다. 매혹이란 작품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 계산된 잔기교들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몇몇 방법들이 사용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매혹이란 작품에 대한 우리의 개방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우린 청자들에게 황홀경을 전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지는 않는다. 단순히 우리들 자신이 듣길 원하는 것을 만들며 이는 그래서 유혹이 아닌 베풂이다. 모든 조절(manipulation)은 작품의 창작에 방법론적인 절차로써 각자의 근거를 갖고 있으며 이는 조정된 결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Q. 정신분석의들은 죽음을 성적 본능을 자극하는 힘으로 본다. 오톱시아의 작품에서 죽음은 극한을 보이지만 성(性)이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죽음은 (무엇인가를) 승화시키지만 궁극의 것은 아니다. 측량 가능하고 비교 가능한 것에 대해 극소에서 극대까지 말한다는 것은 이미 표현된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함을 의미한다. 우린 죽음의 표현을 다루지만 이는 죽음이 (우리에겐) 이미 표현된 것이라거나, 바꿔 말하면, 표현의 힘이 깃든 것이라는 건 아니다. 우린 죽음이 객관적이거나 실증적인 것으로 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 죽음에 대한 실증적인 접근은 본능, 성, 살인, 파괴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에 부적절하다. 오톱시아의 작품에서 죽음을 논하는 방법은 완전히 다른 다른 기능을 한다. 우리는 죽음을 현상들 중의 하나로서 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의 망각(oblivion)을 말한다 - 이는 문화적 흥미의 대상을 넘어선 것이다.

Q. 유머, 블랙 유머와 아이러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유머는 담화의 효과적인 특징이다. 유머는 대상을 지시된 대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음 담화를 위해 대답하는 방식이다. 아이러니의 기원은 숙고(reflection)에 있고 유머의 기원은 직관에 있다. 아이러니는 언어에서의 기능적 측면에서 오톱시아의 흥미를 끄는 주제는 아니다.

Q. 다양한 환각 물질과 약물들이 문화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그저 존재함으로써 인간들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있다. 인간은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편익을 얻을지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마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효과는 문화의 영역 안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성취를 위한 도구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모'효과'는 개인에서 시작해서 개인으로 끝나며 바로 이것이 문화가 환각제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루는 이유이다: 생산, 유통, 제한, 박해는 모두 체제가 개개인을 지배하는 구조의 일부로서 기능하고 있다. 체제는 '이롭다'와 '위험하다' 같은 관념들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그 현상의 기원을 감춘다.

Q. 만일 오톱시아의 작품이 갑작스레 대중 문화의 영역에서 찬사를 받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활동을 완전히 중단할 것인가?

A. 오톱시아의 작품은 독창적이며 정선된(elite) 것이다. 이는 곧 오톱시아의 작품을 대량 소비의 생산물로 변형시킬 어떠한 의도도 배제한다는 의지를 내포한다. 오톱시아의 작품의 판매가 증가하여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다 하더라도 이것이 의도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오톱시아는 작품의 생산에 맞추어져 있을 뿐, 대중 매체를 통해 생산물을 유통하는 현상에서 도망치려는 어떤 인격의 현시(exposition)같은 것은 아니다. 대중 매체 속에서의 오톱시아의 존재는 한계가 있다 - 우린 이를 의식하고 있다.

Q. 문화와 예술에서의 황폐화(mummification), 주물숭배(fetishism), 우상숭배(idolatry)에 대한 오톱시아의 관점은 어떠한가?

A. 우상숭배나 주물숭배 등은 집단적인 행위의 현상이다. 오톱시아의 작품은 대중이 아닌 개개인을 향한 것이다. 우리의 작품을 일반적인 대중 문화나 대중 매체 등의 관념과 부합하여 정의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원칙이 존재하고 오톱시아에게는 오톱시아의 전략을 위한 다른 원칙이 있는 것이다.

Q. 오톱시아는 현재 체코 공화국의 수도인 프라하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다른 곳보다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왜인가?

A. 프라하는 Geistzentrale der Welt 이다. 프라하에서 우리는 전기성(electric)을 느끼며 전기성과 신성이 하나임을 느낀다.

Q. 오톱시아의 최근작 PARADIGM은 카사노바-모차르트-카프카였다. 우리에게 이 작품의 컨셉, 그리고 이 세 인물의 작품과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려달라.

A. 우리의 흥미는 그들의 자제심(self-control)과 그들의 계획된 자아(personalities)에 있었다. 이 세 인물들은 모두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스스로의 능력을 완전히 자각하고 있었다. 개성(individuality)이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지니고 처리할 권리를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신에게. 죽음은 오직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다; 집단적으로 볼 때는 운명(mortality)이 아니다. 카사노바와 모차르트, 카프카에게 있어 그것은 문화의 어휘를 형성하는, 충분히 인식가능한 수준의 문제였다. 그들은 오톱시아가 개인의 운명을 지켜보는 태도와 근접해 있다. 프라하가 세 운명들의 단편들의 공통된 장을 제공하고 있어 그 역사적 차원 소유물의 상태에 대한 자각에 대한 하나의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는 문화적 메시지의 개인적 독해와 그것을 구체화하고 실질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한 측면에서 패러다임은 변장과 변화를 위해 음모와 유혹을 숨긴다 - 그것은 가장무도회가 된다.

Q. 죽음이 거대한 속임수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A. 죽음은 속임수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이 '객체'가 되어야만 한다. 객체가 되는 모든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문명의 패러다임들을 시험함으로써 발견될 수 있었다. 우리는 명확한 패러다임을 살고 있다: 죽음의 망각, 가장 거대한 속임수의 시대 - death which it is not. 오톱시아가 하는 모든 것은 개인을 그 망각에 대치시킨다. 이는 바로 이 패러다임과 충돌하게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린 오직 무의미해 보이는 노력만이 패러다임의 파괴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매우 잘 알고 있다.

Q. 전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전쟁과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이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공포와 살해이다. 공포와 살해는 언제나 어떠한 목적에 의해 이끌려 오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목적이 정립되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는다. '무엇이 목적인가'하는 질문은 정치의 영역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이지 예술의 영역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Death gets its teeth from words and if that were our aim we would, by now, be in uniforms and armed with knives and bombs and be mere agitators of destruction although not of death. 우리가 보기에 죽음은 선동자와 파괴의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이는 그 매개물이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개인은 그 자신을 위해 언제나 태초로부터 이것을 발견해야만 한다.

Questions: S. M. Blumfield Prague, MCMXCII

원문: http://www.autopsia.net/interv.html -- 쾌변Z 2004-12-24 4:00 pm

2 # 사진[ | ]

어느 오톱시아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들인데 장난인지 아니면 진짜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Upload:autopsia_logo.gif Autopsia photographs taken in different locations in Jugoslavia, Germany and Czech Republic.

Upload:autopsia_studio.jpg Autopsia studio, Prague 1992

Upload:surround.jpg Autopsia surround room simulator

Upload:autopsia_01.jpg Autopsia-Economy of death, SKC Beograd, Yugoslavia

Upload:autopsia_fx.jpg Autopsia FX procesor 1989 (얘네들이 이런 것도 만든댑니다)

Upload:autopsia1987.jpg Autopsia-field recordings 1987, Yugoslavia.

Upload:it-lab_sm.jpg Autopsia Headquarter Prague 2001 (이 합성티가 뻔히 보이는 사진은 도대체...)

3 # 촌평[ | ]

말을 어렵게 하니까 번역도 참 어렵군요. 두 문장은 아무리 해도 해석이 안 되어서 그냥 원문을 올려버렸습니다. 독해에 밝으신 분들의 가르침 고대합니다. -- 쾌변Z 2004-12-24 4:1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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