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병의일기/2년차셋째날

1.1.1.3 (토론)님의 2015년 1월 2일 (금) 22: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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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4.10.6 : 사격실습

또 득달같이 깨운다. 새벽 5시니까 밖은 아직 칠흙처럼 어둡다. 저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 복무신조를 외우고 애국가를 부르고 도수체조를 했다. 오늘은 이 포병부대의 핵심 업무인 사격 실습을 하는 날이다. 이동해서 작업을 해야하므로 한시간 일찍 깨웠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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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햄버거가 나왔다. 이름하여 딸치버거 되겠다. 딸기잼과 치즈가 있어 훈련소에서 그렇게 부르곤 했는데 공식 명칭인지는 모르겠다. 훈련소에서 먹던 것보단 나아보인다. 특히 샐러드 비슷한 야채 속이 충실했고, 스프를 많이 주어서 좋았다. 여전히 현역병 애들은 자기네 부대가 더 맛있다고 궁시렁댔지만 이정도면 나는 만족이다. 학교의 학생식당 밥도 맛있게 먹곤 했던 나인지라, 어쩌면 나는 짬밥과 궁합이 잘 맞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유는 아침보다는 낮에 먹고싶은데 어쩔수 없어서 그냥 마셨다.

올라와서 또 얼마간 퍼져있다가 집합해서 포격장으로 이동했다. 새벽이라 상당히 춥다. 포격장은 차로 15분정도 거리에 있다고 하는데 포수들은 포차에, 나는 사격지휘병이므로 박스차라 불리는 작전용 트럭에 올라타고 갔다. 다행히 박스차는 그래도 덜 추웠다.

포격장에 도착할 때까지 현역병 한눔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 녀석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아서 인터넷 업계의 동향도 신문을 봐서 대충 알았다. 몇가지 얘기를 해주니 재미있다고 들었는데 얘는 제대한 다음 부동산 평가사(맞나 모르겠네...)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해보겠다고 한다. 어디가서 굶지는 않을것 같다.

포격장에 도착해서 이런저런 세팅을 한다. 대포의 경우 그 반동에 움직이지 않도록 땅을 열심히 판 다음에 설치를 해야 했으므로 삽질 할 것이 많다. 게다가 날도 추워서 땅도 대략 얼어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다들 한참 준비할 동안, 사격지휘병인 우리는 별로 할 일이 없어서 꼬박꼬박 졸곤 했다. 그리고 대충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실제 포 사격용 사격지휘는 대대의 박스차에서 진행한다. 즉 우리는 여전히 할 일이 없다는 얘기다. 박스차는 포격 각과 세기를 결정하는 일 말고도 여러가지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에 현역병들은 이것저것 할 일들이 있었지만 사격지휘 야비군은 사실 있어봐야 방해만 되는 존재였다. 어쩔수 없이 어슬렁거리다가 현역병 애들 하는거 구경하다가, 가끔 지도 보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포격을 한다. 과연 저 야비군들이 모여서 포격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주어진 일들을 조금씩 하니까 포가 나간다. 멀리서 보기만 했지만 각 포수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분배되어있고, 그것들은 꽤나 정교하게 안전하게 나누어져있다. 언젠가 LongWarm이 군대의 시스템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얼마 겪어보지 않은 군생활이지만 군대의 조직화는 사회의 조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좀 더 경직되어 있다는 것만 빼면.

포격이 시작되자 그 소리는 굉장했다. 대기를 쩡. 하고 가르는 그 소리는 소름끼칠만큼 날카로왔고 또 컸다. 바람계곡의나우시카모노노케히메등에서 자연을 망가뜨리는 인간의 무기들이 나오곤 하는데 그 무기들이 가진 가공할만한 위협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소총도 마찬가지였지만, 역시 대포는 더 살벌하다. 솔직히 포격할 때 포 옆에는 그다지 있고싶지 않은데 포수들은 잘도 그 옆에서 포를 쏘고 있다. 왜 저런걸 계속 만들고, 더 낫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서로를 파괴하는 짓들을 하는 것일까. 정말 인간은 알수없는 머저리임에 분명하다.

밖에서 식사를 했다. 젊은 고양이들은 노인 고양이들을 위해 또 열심히 밥을 준비해왔다. 삶은계란 뭉갠거하고 아침에 남은것으로 보이는 햄버거 햄에 소스가 나왔다. 역시 밖에서 먹는 밥은 맛있다. 야비군들을 열심히 다 먹인 다음 현역병들은 나중에 먹었다. 숟가락 모자란 것은 우리가 먹은 그 숟가락을 대충 씻어서 녀석들이 또 사용했다. 깍듯한 젊은 고양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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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을 마치고 다들 돌아간다. 나는 날도 따듯해지고 하여 이번에는 그냥 수송 트럭을 타고 갔다. 여기는 언젠가 지질조사를 하러 왔던 동네였다. 나름대로 조그마한 산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있고 넓지 않은 논이지만 농사들을 하고있다. 플랭카드에 '탱크도로 확장공사 결사반대'라고 적혀있는 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항상 포격소리와 사격소리를 듣고 살 것이다. 저런 야만의 소리를 항상 들으면 마음도 조금은 야만스럽게 될 것이 분명한데 그 고통속에서 사는 분들은 얼마나 피곤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경치를 가지고 있는 곳 바로 옆에 포격장이 있는 것도 참 보기 그렇다.

부대에 돌아왔다. 이제 할 일이라곤 물자 반납과 퇴소식 뿐이다. 총을 마저 닦아서 반납하고, 몇가지 군장류를 반납하고, 차비라고 이천원이 든 봉투를 받고, 신분증을 받고 가방을 챙겼다. 그 사이에 현역 한눔과 장기를 한판 두었는데 그만 져버렸다.

퇴소식도 나름대로 연습을 한다. 폼생폼사의 조직인지라 그런 의식에서 폼이 안살면 안되나보다. 웃기는건 우수 야비군을 뽑아서 표창을 했다는 점인데,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주었는지 알 수 없다는 점, 표창받아도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 일단 재미있다. 어떻게 얼굴도 한번 안비친 국회의원이 표창을 할 수 있는지도 웃기는 일이지만 더욱 웃기는건 표창을 줄 때는 겉표지를 함께 주지만 집에 가기 전에 그 겉표지를 뺏는다는 것이다. 하여간 군대는 요식행위의 요람이다.
어쨌든 퇴소식 후 훈련필증을 받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한시간 반정도를 간 것 같다. 졸다가 중간에 깼는데 다시 잠이 안오네...-_- 서울로 들어온 다음부터는 밖을 보면서 열심히 동네로 가는 길을 익혔다. 반가운 면허시험장 앞에서 내려 우리는 헤어졌다. 박군과 이형과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동네가 비슷한 박군과 함께 걸어갔다. 노원역에는 수많은 고삐리들이 놀러 나와있었는데, 녀석들 눈에는 내가 분명 빠진 야비군처럼 보이리라 하는 생각을 하며 집에 왔다.

3일간의 예비군 훈련은 뭐랄까 생각보다 빡세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왜 애들이 병장노릇을 하고싶어하는지 알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예비군 생활이 딱 병장의 생활이랑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동원 4년차가 되어도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역시 훈련소가 문제지 나머지는 그런대로 지낼만 한 것이 군생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반기 예비군 훈련 불참자 대상 훈련을 한 것인데, 지낼만 했다. 전반기 훈련은 사람도 많고, 따라서 통제도 심하고, 추운데 밖에서 텐트치고 자는 것도 한번 있고 등등 여러가지로 더 피곤하다고 한다. 다음에도 뭔가 일이 있으면 주저없이 연기하여 후반기 훈련으로 올란다. 사격지휘라는 보직도 맘에 들고...-_-a

군대란 조직은 잠시 들어갔다 올 때마다 여러가지 잡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아무래도 나와는 정말 궁합이 안맞는 곳인것 같다. -- 거북이 2004-10-9 1:51 am

/2년차둘째날

1.1 촌평


형이 쓴 글중에서 제일 재미있고 감동적인 글이구먼.
시간있을때 이 특수부대 병장님이 멋진 감상문을 올려주께^^
야비군 훈련 쫌 지루하기 해도 재밋는 휴가 아냐? -- LongWarm 2004-10-9 8:49 am

감동이 있는줄은 몰랐는데...ㅎㅎ
어 재미있는 휴가다. 대자연과 호흡(?)하며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좋았음. -- 거북이 2004-10-9 11:11 am

잘 봤습니다. 예비군훈련이란 이런 것이었군요. 이곳 아니면 어디서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까 싶어요.:) -- AmorFati 2004-10-10 11:52 am


훈련병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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