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병의일기/2년차둘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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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4.10.5 : 사격지휘

아침에 후다닥 일어났다. 간신히 일어나서 옷 쳥겨입는데 역시 개중 내가 제일 굼떴다. 내가 저투복을 챙겨입는동안 젊은 고양이들 중 한 녀석이 와서 굼뜬 늙은 고양이의 모포를 개어주었다. 거참 역시 만족스럽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널널한 보직에 놓인 놈들이긴 하지만 이짓도 오래는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간만에 육군 도수체조와 구보를 하니 기분이 묘하다. 어떤 녀석이 포대장에게 질문을 한다.

배가 꾸륵거리는데 어떻게 합니까?
배를 보세요. -_- 구보에 열외 없습니다.

도수체조는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났다. 어눌하게 주변을 따라했는데 그래도 예비역 병장들은 곧잘 따라한다. 훌륭하다. 구보할 때 '전우'같은 군가도 잘 부른다. 나는 홀랑 다 까먹었다.

내가 받은 보직은 사격지휘다. 내가 왜 포병부대로 왔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만큼 나는 왜 내가 사격지휘를 보직으로 받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그런 보직을 받았다.

사격지휘 해봤습니까.
아니요.
뭔지는 아십니까.
아니요.
왠만하면 포수 하세요.
배워보겠습니다.

옆자리의 전직 포수가 말하길, 사격지휘는 땡보직이랜다. 그래서 일단 하기로 했다. 포대장이 포수로 전향하라고 한 것은 역시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보니 포수들은 정말 한참 힘을 쓰더라고.

사격지휘(FDC, Fire Direction Commander)는 뭐냐하면 포격지점을 계산해서 포를 발사할 방향과 세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기하학적인 내용이고 계산 방법은 상당히 단순하다. 기계로 하면 정말 일도 아닌 작업이다. 하지만 수동으로 가장 빠르게 계산하기 위해 많은 공식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그것을 외우는게 시간이 꽤 걸린다. 계산기로도 계산하며 동시에 수동으로 계산하는 법도 익히고 있는듯 하며, 양쪽을 맞춰가며 정확도를 체크한다. 무슨 일에 처할지 모르니 수동으로 계산하는 방법은 확실히 익혀두는 것이 좋은 일이지. 한참 배웠는데 나름대로 최적화를 추구한 것이 군대다웠다.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데다가 360도를 사용하지 않고 6400밀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기 때문에 좀 더 헷갈렸다.
새벽에 일어나니 오전이 정말 무쟈게 길다. 하긴 지금이 지하철에서 신나게 졸며 사무실로 달려갈 시간이니 졸리긴 하다. 이 상태로 오전 내내 반쯤 혼수상태로 보낸 것 같다. 쉬는 시간에는 틈틈히 책을 읽었지만 졸린건 여전했다.

뭔가 부실한 점심이다. 어제에 비해 밥이 떡져서 맛이 없었다. 드디어 충성마트가 오픈했고 나는 옆자리 박군과 함께 먹거리를 좀 샀다. 중간에 있는 의자에서 현역 애들과 까먹기 위해서다. 박군 표현에 의하면 애기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고싶다고...-_- 사실 현역 애기들에게 이것저것 먹이면서 농담따먹기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녀석들은 다들 전역 후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과 여자얘기에 관심이 많다. 나는 항상 애기들에게 말하는 레퍼토리를 풀어, 졸업하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해서 경력과 경험을 만들어두라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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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마나한 정신교육 시간이 지나갔다. 사실 그런 정신교육보다는 포대장의 몇가지 조언들이 인상적이었다. 포대장이 말하길 예비군 훈련을 하는 것은 전시에 누가 자신의 상관인지를 확인하고 상관과의 복종관계를 몸에 익히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비교적 옳은 말이다. 전쟁이란 것은 시스템대 시스템의 싸움일 것이고, 사실 병사는 그 부속물에 지나지 않으며 한 개인이 전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병사 한둘이 빠진다고 해서 그 시스템에 영향 미치는 것은 별로 없거든. 그렇다면 역시 예비군 신분으로 자신의 위치를 다시한번 자각하게 만들면 예비군 훈련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니 왜 이런 바보같은 요식행위를 7년이나 하는가도 어느정도는 이해가 된다. 약간의 훈련으로 보직을 되새기고, 한번쯤 연습을 할 수 있다면 나름대로 필요한 일일 것이다. 과연 포를 쏠 수 있을까 싶은 이 사람들이 내일 포를 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이 오늘의 훈련이다.
하지만 군대라는 공간이 인간이라는 자원을 너무 비효율적으로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지울 수는 없다. 아니면 너무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인간의 특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한국군은 인력, 자본 이 두가지 자원 중에서 인력쪽이 월등히 남아도는 집단일테니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에이 모르갔다.

다시 사격지휘 훈련이 시작되었다. 기왕 하는거 열심히 한번 해볼까 하고 시간까지 재어가며 하고 있었다. 내가 지도 하나 그리는데 30분도 넘게 걸렸는데 현역병 말이 자기는 10분 안에 주파한다고 한다. 이자슥~ 그러던 중 갑자기 훈련 중단이랜다. 왠지 모르겠지만 우리 포대는 전멸한 것으로 친다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시간이 생겨버렸고, 할일없는 FDC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읽는 것 뿐이었다.

책읽다 졸다 하다가 훈련이 끝나서 올라갔다. 올라가니 현역병 애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놈들이 무슨 학습부대인가 싶을정도로 다들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의아스러웠는데, 사실 얘들처럼 일이 불규칙적으로 그리고 간헐적으로 생긴다면 항상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거 같다. 얘들은 짜투리 노는시간이 꽤 많은 것이다. 나름대로 괜찮은 군생활인지도 모르겠다.

저녁시간이 되었다. 밥을 너무 일찍준다. 이 시간에 묵으면 밤에는 배고프잖아...-_- 여튼 육개장이 나왔는데 내 앞쪽에 선 야비군들이 야비하게시리 국물을 쪼로록 따르고 고기만 건지는 테크닉을 구사했다. 이야, 좋구만 하면서 나도 야비군인지라 따라했다. 그것을 보고있던 현역병이 얼마있다가 나오더니 직접 퍼주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덕분에 뒤쪽에 있는 총각들은 국물만 있는 육개장을 쓰벌쓰벌대면서 마셔야 했다. 하긴 현역들이라고 그런 야비한 테크닉을 모를 리가 없지. 어쨌든 나는 좀 질긴 고기였지만 넉넉히 먹었다.

나와서 발씻고 쉬다가 박군과 이형과 함께 커피를 마시러 갔다. 나는 분유로 된 우유가 있길래 먹고싶어서 뽑아묵었다. 그들과의 대화는 뭐랄까 생활인들의 그것이었다. 먹고사는 길과 뭘 해야 돈번다더라 등등. 사실 나는 이때까지 박군이 나와 동갑인 것은 모르고 있었다. 장가도 갔고, 아무리봐도 나보다는 세살은 많아보였으니까. 다들 생활인같은데 나만 아직도 마인드가 애다.

오늘도 9시 땡쳐서 점호하고 불을 꺼버렸다. 내일은 5시에 깨운다고 하니까. 다들 마지막 밤이라고 뭔가 먹을것을 잔뜩 사왔는데, 잠시 나갔다 온 사이에 홀랑 먹어버렸다. 이놈들... 역시 아귀다.
박군과 얘기를 하다가 내 전투복 및 전투화가 새것이라는 것을 알아챈 박군이 발 안아프냐고 물었다. 1년차때 너무 아파서 이번에는 양말을 여러개 가져왔으니 괜찮다고 하자, 현역병이랑 바꾸랜다. 음 녀석들이 좋아할까 하는 기분으로 한번 물어봤는데 모두 저 주십쇼~ 하더구만. 역시 박군말대로 군바리는 단순하여 새거면 일단 좋아한다...-_- 뭐 그것도 그거지만 험하게 신으면 전투화가 '떨어진다'고 한다. 나는 저 말고기처럼 질겨보이는 전투화가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병장 한 녀석은 벌써 세번째 전투화라고 하니 믿어야지. 처음엔 모두 달려들던 녀석들이 수근거리더니 내년에도 또 만날 수(?) 있는 일병 녀석에게 주라고 양보한다. 왠지 내 친구놈 하나처럼 마르고 키만 큰 녀석과 바꾸었다. 덕분에 내 전투화 사이즈는 285에서 290으로 늘어났지만 뻣뻣해서 어눌하거나 그렇지 않은 제대로 고생한 전투화가 생기게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고생하고 있는 놈들이라, 녀석들에게 뭔가 잘해주는 것은 기분이 좋다. -- 거북이 2004-10-8 2:2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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