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 - 21세기를 위한 열쇠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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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지식혁명 시대, 인문학적 사유의 힘

한겨레 2001-04-17 26면 (과학.의학) 01판 칼럼.논단 1065자

지식혁명의 핵심은 정보를 꿰어 유용한 지식을 만들고 이 지식을 다시 정보화해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정보와 지식의 변증법'에 있다. 지금의 정보혁명과 지식기반 사회는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학기술자들이 지난 몇백년 동안 들인 노력의 결실이다. 그렇지만 지식혁명을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사유와 과학기술 활동의 접목 또는 협동이다. 인문학적 사유의 특성은 다음 일곱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인문학적 사유는 언어와 상징의 세상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나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다른 사람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보듯이 자신의 주장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을 가능케 한다. 둘째, 인문학적 사유는 기존의 세상을 새롭게 보는 독창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것이 필요할 때엔 이를 만들어 내는 활동을 높게 평가한다.
셋째, 인문학적 사유는 세상을 설명하는 성급한 이론이나 단순한 공식에 만족하기보다, 서로 다른 견해 차이의 원인에 대해 생각하고 그 차이를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이해함으로써 차이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설명을 제공한다. 넷째, 인문학적 사유는 차이에서 동질성을 발견하고, 하나라고 믿는 것에서 차이로 특징지어지는 서로 다른 개체나 그룹을 찾아낼 수 있게 도와준다.
다섯째, 인문학적 사유는 중심의 힘 있는 목소리를 의심할 수 있도록 하며 주변의 낮은 목소리에도 힘을 실어주는 것을 가능케 한다. 여섯째, 인문학적 사유는 보편적인 이론을 해체하기도 하고, 동시에 개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보편성을 발견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적 사유는 세상을 흑과 백, 정답과 오답, 진보와 퇴보의 극과 극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양분법의 중간영역에 존재하는 회색지대와 '잡종적 존재'의 창조적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훈련받은 인문학적 사유는, 선택적이고 창조적으로 정보를 얽어 지식을 만드는 과정과 그 지식의 일부를 다시 정보의 형태로 변환시키는 과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지식혁명은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요구하고 있다. 홍성욱/토론토대학 교수.과학기술사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2 # 공유할수 있는 과학과 지식혁명

한겨레 2001-02-26 21면 (과학.의학) 01판 칼럼.논단 1296자

18세기 후반에 태평양의 해안을 수십년 탐사하고 그 지도를 만들어 돌아가던 프랑스 지리학자가 한 중국 어부를 만났는데, 이 어부가 자신이 아는 만큼 정확하게 해안선을 그리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서양 과학이라는 것이 동양의 무명 어부의 지식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일화를 과학사회학자 라투르는 달리 해석한다. 지도는 중국에서 프랑스로 옮겨간 뒤 인쇄를 해서 나중에 프랑스함대가 중국을 침략할 때 쓸 수 있지만, 어부 머리 속에 든 지도는 그 어부밖에 모르는, 곧 모래사장에 한번 쓰여졌다 사라지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근대 과학의 역사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더 효과적으로 이동하고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왔던 역사다. 수학을 사용하고, 자연적 분류법을 고안하고, 자연에 근거한 단위와 표준을 만들고, 계량화해서 측정하고, 실험을 통해 통제된 환경을 만들고, 측정 계기를 만드는 과학자의 활동은 지식을 좀더 쉽게 전파하고 또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전세계 과학자들은 거의 같은 표준과 기호를 사용하게 됐다. 용이한 소통은 정보의 폭발을 낳고, 정보의 폭발 속에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속도도 가속화됐다.
실험과학자들의 실험도 흡사한 과정을 겪었다. 실험에 필요한 단순한 숙련은 점차 자동 실험 기기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전했다. 디엔에이(디옥시리보핵산)를 복제하는 것은 1970년대 말엽까지만 해도 오랫동안 훈련받은 소수의 분자생물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이 실험은 대학 고학년 학생의 실험밖에는 안된다. 인간게놈계획을 위한 디엔에이 복제는 중합효소연쇄반응(PCR)이라는 기술로 전부 이루어진다.
지식이 중요한 경제적 재화가 되었다고 할 때, 그 지식은 인간의 머리와 몸에서 분리된 지식을 의미한다. 이른바 '암묵적'(tacit) 지식에서 '고정된'(codified) 지식으로 바뀐 지식이다. 지식 기반 사회가 가능해진 것은 컴퓨터와 인터넷과 같은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때문에 이 '고정된' 지식의 소통과 공유가 혁명적으로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지식을 어떻게 인간의 몸과 머리에서 분리해서 고정된 지식으로 만드는가라는 문제는 통상 기계나 컴퓨터가 아니라 더 고차원적인 인간의 지식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지식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수많은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당장 재화가 되는 지식만이 아니라 순수 과학이나 인문학과 같은 다양한 지식이 고르게 발전하고 이것이 '지식 혁명'의 기반을 형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교수.과학사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3 # 과학기술학에 부쳐

한겨레 2001-01-08 21면 (과학.의학) 01판 칼럼.논단 1234자

지난 12월2일 고려대학교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다. 과학기술사회학과 과학기술정책학 등을 연구하는 신생 학회인 한국과학기술학연구회의 창립 총회였다. 이 연구회 회원들은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두 문화'(two cultures) 사이에 교량을 자임하고, 과학기술 문화의 육성을 강조했다. 과학기술이 점점 전문화돼 과학기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조차 과학기술 문화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기 힘든 지금, 과학기술학 연구회의 설립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한국 과학사학회는 4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몇해 전에는 과학철학회도 설립돼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 과학기술학 연구회까지 설립됐으니, 어엿하게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의 모양이 갖추어진 셈이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증대되는 지금에, 과학기술을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학문도 점점 더 그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학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일이다. 특히 대학원에 '협동과정'의 형태로 존재하는 과학학 프로그램들이 전임교수를 뽑을 수 없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간학문(interdisciplinary studies)의 중요성은 점차 커지는데, 교수의 충원은 오래된 단과대학과 학과 시스템에 의존한다면 큰 문제다. 북미의 경우 이미 70개에 가까운 과학학 '협동과정'이 있지만, 학과가 아니기 때문에 전임교수를 뽑지 못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 과학기술학의 또 다른 과제는 과학기술자들과 접점을 넓혀 나가는 것이다. 과학기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들은 '상대주의자' '사회구성주의자'라는 식의 오해가 없지 않은데, 과학기술학 전공자들은 이러한 오해를 종식시키고 과학기술학이 바람직한 과학기술 문화를 위해서나 과학기술자들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서도 유용하다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서구 근대과학의 역사를 보면, 과학자들이 강연이나 시범 실험과 같은 대중 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과학자들이 대중을 직접 설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과학의 유용성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지만, 대신 과학은 문화 일반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과학기술학을 전공자들이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자신들만 이해하는 전문 연구에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과학기술학은 대중과의 접점을 넓혀야 하고, 여기서 대중은 과학기술자를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 과학기술사 교수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4 # 정보기술의 `열림'과 '닫힘'

한겨레 2000-11-06 21면 (과학.의학) 01판 칼럼.논단 1275자

정보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정보와 지식을 생산함으로써 이를 다루는 새로운 능력을 요구하며, 정보와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수평적인 네트워크 형태의 조직과 인간관계를 활성화한다. 그리고 정보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다양한 가상 공동체들은 우리가 보고 느끼는 영역을 급속하게 확장한다. 이러한 정보 기술에는 분명히 '열린' 측면이 존재한다.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수월해지면서 정보의 소유를 바탕으로 한 권위는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 또한 정보기술이 촉진하는 수평적인 네트워크는 위계적 근대 관료조직 체계에 비해 분명히 더 열려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상세계에서 시공간의 제약이라는 '닫힌' 세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은 우리를 둘러싼 문화적 총체에 투영된다.
그렇지만 정보기술이 가져오는 어둡고 '닫힌' 측면도 직시해야 한다. 정보기술은 정보를 쉽게 수집하여 효율적으로 사람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전자 파놉티콘'(electronic panopticon)을 가능케 하며, 또 정보와 지식에 대한 지적 재산권이 확장되고 이것이 정보와 지식의 독점을 가속화함으로써 정보격차를 만들고 이는 권력과 빈부 차이를 심화시키고 있다. 사이버 세상은 익명의 가면 뒤에서 합리적 소통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폭력을 양산하기도 한다.
어려운 문제는 이러한 정보기술의 '닫힌' 측면이 '열린' 측면과 떼기 힘들 정도로 붙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 정보기술을 '열린' 것으로 만들면서 이것이 수반하는 '닫힘'을 극복하는 일은, 정보기술혁명의 무분별한 찬양이나 감정적인 거부를 넘어선 복잡하고 정교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수집된 정보가 '전자 파놉티콘'의 도구로 쓰이는가, 아니면 투명성을 고양하는 수단으로 쓰이는가는 그 정보가 구성원 모두에게 얼마나 열려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정보기술이 낳는 사회경제적 가능성을 고양하고 정보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네트워크로 유인하는 교육과 사회복지 정책은 물론 정보와 지식의 무한정한 사유화의 경향에 다양한 방법으로 제동을 거는 것 역시 무척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실천들은 세상에 대해 울타리를 둘러치는 공동체 '코뮌'을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열려 있는 대안적 네트워크를 만듦으로써 네트워크가 제공하는 이점과 기회를 살리고 동시에 자본의 네트워크를 견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들이 정보기술에 대한 '진보적' 관점이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5 # '선서'보다 전문가 윤리교육 중심에 서야

한겨레 2000-08-28 26면 (과학.의학) 01판 칼럼.논단 1147자

아직도 대부분의 의대생들이 졸업하면서 낭독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학사가들은 물론, 의사들과 환자들 모두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이 선서가 언제, 누구에 의해 쓰여졌는지가 분명치 않다. 대략 2천 몇백 년 전에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한 사람이 썼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선서의 원문은 "내게 의술을 가르친 선생을 나의 부모와 동일하게 존경하고" "선생의 자식들을 내 형제처럼 여기겠다"는 얘기로 시작하며, "환자가 원하더라도 독약을 제공하지 않겠다"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구절도 포함하고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다른 책에는 "환자는 병과 싸우는 데서 의사에게 협력해야만 한다"는 구절도 있다. 물론 "환자의 이익을 위해 의술을 사용하고, 절대로 환자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잘 알려진 구절이 `선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1994년 (영국의학저널)을 통해 회람된 `최신판 선서'는 "나는 환자에게 정직하겠다" "나는 환자에게 대안적인 치료나 처방을 제공하겠다"는 환자 중심적인 새로운 맹세로 시작한다. 하버드 대학에서 졸업생이 낭독하는 선서는 "나는 내 환자와 내 공동체, 그리고 내 전문직업에 봉사하는 의무를 알고 있다"는 구절이 첫머리에 나온다.
한국의 의대생들이 낭독하는 `선서'는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다"는 구절부터 시작한다. "양심과 위엄으로 의술을 베푼" 이후에야,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한다"는 원칙이 나온다.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비교적(秘敎的)이고 폐쇄적인 집단이어서 스승에 대한 얘기가 첫 번째로 나왔지만, 지금까지 그런 형식이 유지되고 있다면 시대착오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선서'는 상징적인 구실밖에 하지 못한다. 환자를 첫 번째로 생각한다고 선서를 백번 외워도,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우리 사회에서 의학과 의술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고찰, 의료 윤리, 의사-환자와의 관계, 생명공학의 혁명이 가져올 새로운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한 교육이 전문교육과 함께 의학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의료계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와 압력은 의사와 같은 전문가들의 교육에 전문가 윤리를 그 중심에 세우는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교수.과학기술사)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6 # 연구비 분배 문제는 공정성

한겨레 2000-07-03 25면 (과학.의학) 01판 칼럼.논단 1118자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이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가 연구비를 '따고' 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연구비는 대학, 기업, 재단,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데, 대개 대학에서 받는 연구비 액수는 무척 제한돼 과학자들은 과학재단.학술진흥재단 등 재단이나 기업의 프로젝트, 정부 각 부처가 직접 지원하는 연구비를 선호한다. 정부나 기업에서 연구비를 받는 것은 20세기 과학에 고유한 특성이다. 이전에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돈을 쓰거나, 대학에서 받은 약간의 운영비나 돈이 많은 부자 후원자들의 개인적 지원을 받아 연구를 수행했다.
이러한 '소박한' 지원 시스템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각국 정부가 과학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1930~40년대에는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 분자생물학과 같은 간학문(interdisciplinary) 분야를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전쟁과 관련된 과학연구를 총괄했던 미국의 바니버 부시가 국립과학재단(NSF)을 만들어 과학연구를 대규모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과학자들은 연구비를 따기 위해 서로 경쟁했고, '연구비 계획서'(그랜트 프로포절)를 쓰는 일은 과학자들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연구비를 신청하고 이를 받는 일은 경쟁이다. 이는 학자들의 연구 생명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한 경쟁이고, 따라서 경쟁의 공정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는 지난해 학술진흥재단에 공동연구원으로 연구비를 신청했지만 경쟁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다. 심사가 공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가지 납득이 가지 않았던 사실은 심사위원들의 평가서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에 문제가 있어서 경쟁에서 떨어졌는가를 알아야 그 다음에는 이런 부분을 보충해서 연구비 신청을 할 수 있는데, 아무런 설명없이 그냥 떨어졌다는 통보만 받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연구비 경쟁에서 평가서를 통보하는 것은 연구비 경쟁의 공정성을 향한 첫번째 작은 단계이다. BK21처럼 연구비를 늘리고 경쟁을 강화하는 것도 좋지만, 경쟁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모색이 병행돼야 한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7 # 인터넷 혁명 빗댄 기마민족론의 함정

한겨레 2000-05-15 35면 (과학.의학) 01판 칼럼.논단 1155자

인터넷 혁명을 나타내는 몇가지 메타포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정보 고속도로'다. 이는 정보와 뉴스를 빠른 속도로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인터넷을 강조한다. 이것 이외에도 인터넷 혁명이 낳는 새로운 공동체를 강조해서 '가상 공동체' '전자 아고라'(agora: 고대 그리스의 시장)라는 메타포 역시 널리 쓰인다. 최근 한국에서 인터넷 혁명, 벤처 열풍과 관련해 쏟아져 나오는 메타포 중에 '기마민족'이란 것이 있다. 대한민국이 인터넷 강국이 될 수 있는 데에는 우리가 무사의 기개를 지닌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이 한몫 한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의 단점으로 지적되던 '빨리빨리' 문화도 장점이 된다고 한다.
나는 우리가 다른 민족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기마민족이었다는 점도, 선조들이 말을 탔다고 그 기질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도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이런 점보다 기마 `민족'이라는 메타포가 인터넷 혁명에 대해 왜곡되고 위험한 담론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에 비판적이다. 북한의 존재만으로는 남한의 국민을 '대동단결'시키기 힘들어진 지금, 인터넷 혁명을 둘러업은 기마민족론은 우리를 일본과, 미국과, 유럽연합과 대결하게 하면서, 다시 '민족'의 부활을 외친다. 말타고 싸우던 정신을 상기시키고, 칭기즈칸의 정벌을 미화한다. 이런 싸움에서 인터넷은 우리의 무기이자 전장이 된다.
우리는 인터넷 혁명과 정보 인프라의 자원을 기마민족의 투지를 부활시키는 데 쏟아야 하는가? 우리는 힘을 키우고, 부자가 되고, 일본을 이기는 데 온힘을 쏟아야 하는가? 이를 위해 민족이 단결을 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개개인의 인권과 같은 '사소한' 문제는 제쳐둔 채로 정보 강국을 건설해야 하는가? 인터넷 혁명은 지난 100여년간 왜곡된 근대화가 낳았던 많은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우리는 21세기에 인터넷 혁명을 잘 이용해서 권력을 분산하고, 뿌리깊은 남녀.지역 차별을 완화하고, 교육과 직장을 더 살맛나는 곳으로 만들고, 각종 위계를 없애고, 개인의 근원적인 존엄성을 뿌리내리고, 경쟁의 룰을 공정하게 하고, 그리고 창조적인 사람을 대접하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는 힘든 과정이지만 분명한 점은 여기에 기마민족이 설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 교수.과학기술사)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8 # 인터넷 혁명이 바꿀 대학 강의실

한겨레 2000-03-27 26면 (과학.의학) 01판 칼럼.논단 1161자

내가 가르치는 '과학사'나 '과학과 사회' 수업에서 인터넷 자료를 부분적으로 사용한 것이 97년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불평을 많이 했다. 컴퓨터가 없는 학생들도 꽤 많았고, 모뎀 접속을 해도 자료를 내려받기 힘든다는 것이 불평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 자료 중에 괜찮은 자료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런 불만은 별로 없다. 이제 나는 학부 수업에서 인쇄된 교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인터넷 자료를 잘 활용하면 인쇄된 논문이나 책을 읽히는 것보다 훨씬 더 학습 효과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면담시간에 나를 찾아오는 학생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 대신 용건이나 질문이 있으면 전자우편을 사용해 내게 연락을 한다.
인터넷 혁명이 대학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점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실시간 동영상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이버 강의가 교실 강의를 조금씩 대체할 것은 분명하다. 사이버 강의는 학생들이 꼭 정해진 시간에 강의실에 출석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준다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얼마 전에 토론토의 요크대학 교수들이 파업을 했을 때, 교수노조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학교는 교수에게 수업시간에 인터넷과 같은 기계를 사용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이버 강의의 도입이 교수를 해고하거나 신임 교수 선발을 묶어둘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이 노조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20세기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15세기 이전 인쇄된 책이 나오기 전에 중세 대학에서 교수가 하는 일은 수업시간에 책을 낭독하는 것이었다. 인쇄술의 혁명과 더불어 책이 쏟아져 나오고 학생들도 책을 구입해서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수 소임이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예측은 반만 들어맞았다. 책을 낭독하는 일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책의 보급과 더불어 새로운 지식 기반이 생기면서 독창적 지식을 만드는 연구자로서의 몫이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혁명은 기존에 대학 교수들이 담당했던 강의, 토론, 평가, 연구라는 교수 본연의 소임을 바꿀 것이며, 교수들은 인터넷과 컴퓨터 혁명을 비켜갈 것이 아니라, 더욱 새롭고 창조적인 분야를 만들어 내는 쪽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홍성욱 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9 #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생산적 만남

한겨레 2000-01-17 23면 (과학.의학) 01판 칼럼.논단 1145자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만남은 21세기 인문학을 위해서나 과학기술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다. 인문학은 비트로 상징되는 정보기술의 문화적 내용을 채워줄 수 있으며, 과학기술은 인문학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문학 지식 생산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이는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한가지 방법이며, 동시에 과학기술의 인간화를 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인문학자와 과학기술자와의 대화는 쉽지 않다. 인문학자들 대부분은 과학기술에 대해 고등지식은커녕 기초지식도 없는 실정이다. 과학기술자들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며, 어떤 이론이나 설명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반면 과학기술자들은 인문학을 말장난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학은 진보했는데, 철학은 고대 철학에서 한발짝도 더 나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인문학자나 과학기술자 모두 다른 전공을 하는 사람들과 심각하게 토론하고 협동해본 경험이 없어서, 한두번 의견 충돌이 있으면 그냥 갈라서기 십상이다.
미국 카네기 멜런대학에서 98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젊은 학자 피비 센거스는 인문학적 지식과 정보기술을 잘 결합시킨 당사자다. 그는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나 프로그램을 사회적.문화적 배경 속에 위치시켜서 그 행동을 설명하는 학위논문으로 미국의 영향력 있는 학술잡지 (링구아 프랑카)가 뽑은 첨단기술 시대의 떠오르는 학자 20명에 꼽혔다. 이 연구를 위해 그는 인공지능, 60년대 반정신병리학 운동,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론과 같은 문화이론을 접목했다.
스스로 잡종인 그가, 성공적인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협동연구를 위해 제시한 8가지 요령을 소개한다. 1.상대를 모욕하지 말 것. 2.자신의 비판이 상대의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식으로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목표를 설정할 것. 3.모호한 용어를 사용하지 말 것. 4.자신의 분야와 지식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거나 방어적이 되지 말 것. 5.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이 아닌 구체적인 것을 놓고 몰두할 것. 6.지식의 정치적 결과보다 지식의 엄밀성에 대해 논할 것. 7.자신의 분야에서만 통용되는 식으로 얘기하지 말 것. 8.안 좋은 얘기를 들었을 때 웃으면서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얼굴을 가질 것.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10 # 지식과 정보

한겨레 1999-11-29 24면 (과학.의학) 01판 칼럼.논단 1149자

사람들은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부른다. 수많은 정보가 인터넷에 널려 있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무도 인터넷을 지식의 바다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정보는 사실적 지식의 한 부분 또는 단면을 의미한다. 정보는 지식으로 바뀌면서 유용한 것이 된다. 정보가 구슬에 해당한다면, 지식은 그 구슬을 꿰어서 만든 영롱한 목걸이인 셈이다.
반면에 지식도 정보로 변화할 때 그 가치가 배가한다. 지식은 일차적으로 그 지식을 만든 사람에게 국한되어 존재하지만, 이것이 또다른 정보의 형태로 세상에 주어질 때 그 가치가 커진다.
정보와 지식의 관계는 단선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작용하면서 발전하는 나선형의 관계다. 정보를 취합해서 유용한 지식을 만들고, 이 유용한 지식이 다시 새로운 정보로 탈바꿈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정보가 또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벽돌이 되는 식이다.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와 인터넷과 같은 정보기술(IT)은 정보를 모아들여 지식으로 만드는 과정을 혁신적으로 바꾸고 있다. 인터넷을 잘 이용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정보에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서 수많은 정보를 가르고, 평가하고, 취사선택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능력이 중요하게 부상한다. 즉 정보가 풍부해질수록 창조적인 지식을 만드는 능력의 부가가치는 커진다.
한편 정보기술은 지식을 정보로 바꾸는 과정을 변화시킨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숙련지식이나 노하우를 정보로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기억용량의 확장과 정보처리 속도의 증가는 전문가들의 숙련지식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었다. 환자의 증상을 보고 병명을 판단하는 행위는 지난 수천년 동안 의사들의 전문 영역이었는데, 지금 미국과 유럽에서는 점점 더 많은 의사들이 전문가 시스템이라는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데이터나 숙련과 같이 정체된 지식에 근거한 권위가 급속하게 쇠락하는 반면에, 새로운 담론.이론.숙련.기록을 적절하고 신속하게 창조하는 지적 능력에 근거한 새로운 권위가 부상하고 있다.
이런 기술과 지식이 소수의 권력자가 아닌 사회 구성원 대다수를 위해 만들어지고 쓰일 수 있는 제도나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은 21세기 민주주의의 숙제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11 # 21세기를 여는 열쇠/차세대동력 개발 '뒷북' 안될말

한겨레 1999-09-27 24면 (과학.의학) 01판 기획.연재 1166자

(성장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72년에 출판된 로마클럽 보고서는 석유가 20여년 뒤에 고갈할 것이라고 예측해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예측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났다.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들이 새로운 유전발견기술을 너무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경제학자들은 석유 에너지에 대해 낙관론을 피력해왔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이런 낙관론은 거센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98년 국제에너지 기구(IEA)에서 나온 보고서는 석유 생산의 정점은 2010~2020년 사이에 찾아올 것이고 이후에는 생산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96년에 나온 매킨지 보고서는 이 정점을 2010년께로 잡고 있고, 지난해 나온 두 편의 보고서는 이를 2000~2010년 사이로 보고 있다.
석유 자원의 고갈과 함께 석유에 의존하는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및 이로 인한 온실효과도 문제다. 향후 10년 동안 지금과 같은 속도로 자동차가 늘어날 경우 지구의 온도가 3도까지 증가하고, 이는 해수면을 1.5m 높일 수 있다고 일부 과학자들은 주장한다.
앞으로 찾아올 고유가 시대와 강력한 환경규제에 대비하기 위해 거대 자동차 산업의 합종연횡을 가져오고 있다. 올 봄에 도요타와 제너럴모터스(GM)가 제휴를 하고, 포드와 다임러가 연합 해서 차세대 `에코 카'를 만들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환경 친화적인 차세대 자동차의 동력원으로 주목받는 기술이 바로 '연료 전지'다. 수소가 전극과 반응하면서 전자를 잃고, 이온이 전해질을 통과해서 산소와 결합해 전류를 흐르게 함으로써 화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장치다. 이미 150년 전에 발견된 현상으로서, 60년대부터 우주선의 전력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최근 들어서다.
연료 전지를 자동차의 동력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백금과 같은 비싼 촉매를 써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비싼 합성 전해질에 의존해야 하는 것도 문제이고, 수소를 연료로 사용하는 데 따른 기술적인 문제도 많다.
연료전지차가 실용화될 경우 우리는 선진국들이 개발한 새로운 자동차 표준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문제에도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에서 연료전지를 연구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자동차.화학 산업.대학.연구소의 네트워크과 강력한 지원이 절실하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12 # 과학연구, 사회적 가치와 조화 이뤄야

한겨레 1999-08-16 18면 (과학.의학) 02판 기획.연재 1030자

과학자 사회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만큼이나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은 지난 93년 미국 연방정부가 지원하던 초전도가속기의 예산지원이 의회에서 취소된 사건이었다. 이는 입자물리학과 같은 거대과학의 기초연구가, 기술이나 산업에의 파급효과가 크다는 `주장'만으로는 지원을 받기 어려워진 90년대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연구비의 삭감 속에서 살아남는 과학연구는 어떤 것인가? 미국국립과학재단의 의장을 지낸 레인은 96년 미국과학진흥협회 연설에서 "오늘날의 과학은 납세자와 그들이 선출한 의원이 과학의 가치와 기여에 대해 확신을 가질 때에 한해서만 지원된다"고 하면서 과학기술자 사회의 지도자들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공중이나 시민과 어울리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90년대 들어 과학과 공중의 관계는 과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의 시기가 끝나가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1945년 출판되어 과학연구에 대한 사회의 무조건적인 지원을 주창했던 부시의 (과학, 그 무한한 프런티어)는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불변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세계대전 후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21세기 과학 연구의 정당성은 진리나 장기적 효용과 같은 막연한 가치가 아니라 과학자 사회 바깥의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자극을 통해 찾아질 것이고, 이렇게 찾아진 정당성은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속적으로 점검되고 주시될 것이다.
다른 사회.문화적 가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과학연구에 더 많은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며, 과학연구 역시 다른 사회.문화 현상들처럼 훨씬 더 급속하게 바뀌는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유연성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들이 계속되면 어느 시점에는 과학 연구가 자연에 대한 냉담한 관찰자적 시각을 탈피하고 자연 속에서 참여자로서 자연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실천이 새로운 자연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자각하면서, 과학이라는 자신의 노동 결과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차원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이 21세기 포스트모던 과학의 모습이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13 # '간세포 격리.배양' 의료 새 지평 기대

한겨레 1999-07-05 18면 (과학.의학) 04판 해설 957자

인간이 도마뱀보다 더 진화한 것은 분명한데, 도마뱀은 꼬리가 잘리면 새 꼬리를 만들지만 인간은 왜 수족이 절단되었을 때 새 수족을 만들어 내지 못할까? 21세기에는 손상된 피부나 조직은 물론 제 기능을 못하는 장기를 건강한 장기로 교환할 길이 열릴지 모른다.
소위 간세포(幹細胞; stem cell)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인간이 수천년 동안 갈구했던 이런 꿈에 희망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간세포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세포나 장기로 성장하는 일종의 모세포다. 1998년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간세포가 배아가 성장하는 짧은 단계에만 존재하고, 이를 몸에서 격리해서 살아있게 하는데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격리.배양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1998년 11월 6일 존스 홉킨스 대학의 존 기어하트 박사와 위스콘신 대학의 제임스 토머스 박사의 연구팀은 각각 서로 다른 방법을 써서 인간의 간세포를 분리하고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의사들은 1998년 이전에도 이미 유산한 태아로부터 추출한 간세포가 불치의 유전병을 낫게 하는 데 효험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한 사람의 환자를 위해 무수히 많은 태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방법을 실용화할 수 없었다. 간세포를 격리해서 배양하는 데 성공한 것은 이런 치료약이 쉽게 만들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 간세포 연구는 앞으로 당뇨병 환자에게는 정상적인 췌장을, 간질환자나 심장질환자에게는 건강한 간과 심장을, 백혈병어린이에게는 건강한 골수를 제공할 수 있는 길을 열 전망이다.
물론 아직 간세포 의술이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려면 넘어야 할 벽이 많다. 무엇보다 간세포의 추출이 인간의 수정란이나 태아에서 이뤄진다는 문제가 있었는데, 최근에 미국의 한 연구팀은 성인의 골수에서 간세포를 분리해서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간세포 연구가 열어주는 21세기 의료의 새 지평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 대학 교수.과학기술사

14 # 촌평


홍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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