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야의 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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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호야의수상소감

2003 03 22

대한민국 제4 권부가 있는 광화문 신문로에 갔다. 142번 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미국 대사관 앞에서는 오전부터 소규모 반전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거기 조선일보 맞은 편, 동아일보 옆 20층 국제회의실에서 <제7회 삼성언론상> 시상식이 있었다. 내 친구 호야가 거기서 <시각 영상> 부문상을 받았다. 호야는 교육방송에서 지난 해 가을에 방영된 라는 프로그램을 만든 기획특집팀 PD다. 호야를 ‘축하’해주기 위해서 또 다른 내 친구 뽕아랑 함께 거기로 갔다.

우리 셋은 학부 1학년 1학기 때부터 뭉쳐 다닌, 일종의 삼총사이며 ‘꿘’이었다. 같은 언더써클에서 공부했고, 정파 문제로 선배들이 오락가락할 때는 셋이 뭉쳐 선배들 방침을 거부하기도 했다. 2학년 때, 스스로를 "Struggle Machine"이라 부를 정도로 거의 매주 두어 번 CC로 뛰었어야 했을 때는 우리가 알아서 둘씩 순서를 짰다. 매번 나가면 너무 힘들고, 한꺼번에 다 잡혀가면 안 된다는 순진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2학년 봄, 나는 본의 아니게(!) 울산에 가야했다. 그해 봄 울산은 전쟁터였다. 나는 전국에서 울산으로 파견된‘2차 노학연대 선봉대’일원이었다.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무려 128일간이나 이어진 파업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기간에 노조원들은 회사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에 의해 식칼테러를 당하기도 했고, 결국 최종적으로 파업이 진압될 때 노태우정권은 5만의 병력을 육해공 합동으로 동원해야 했다. 꽤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친구들한테 알리지도 못하고 선배 누나 돈을 빌려 급하게 울산으로 갔다. 친구들은 나중에야 내가 구속을 무릅쓰고(사실 전혀 못 무릅쓰고 무척 쫄기만 했는데) 울산까지 갔다는 소식을 알았다. 그리고 이 둘은 서울에서 열린 시위에서 평소보다 2배로 꽃병을 많이 던지며 열심히 싸웠단다. 나를 생각하며, 서울에서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싸워야 울산에 있는 사람들 사정도 나아질 거라 생각했단다. 순진한 짜슥들. 정말인지 구란지는 모르겠지만, 뽕아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건 최소 다섯 번 이상은 된다.

어제 호야는 내게 전화를 해서 시상식에 오라고 했다.

결국 전쟁이 터짔네 /
어, 글네... 내일 11시에 가꾸마.

호야는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기쁘게 하는 큰 사건이 있을 때 그냥 우리한테 전화를 걸기도 한다. 몇 년 전, 롯데가 삼성과 플레이오프에서 대단한 역전극을 벌였을 때, 김훈이 물의를 일으킨 인터뷰를 하고 편집장을 물러났을 때, 작년 월드컵 때, 그리고 정몽준이 사퇴 쇼를 벌인 대선 전날에도 전화했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 발발 때문에 전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저기까지만 이야기했으니.

꽤 오랜만에 호야를 만났다. 호야의 아내와 장모님도 축하해주기 위해 왔다. 그들도 내게는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옛날에 내가 호야와 함께 자취하던 때, 근처에 살던 호야 장모님은(물론 그 때는 장모는 아니고, 그냥 여자친구의 엄마였다.) 가끔 호야 빨래도 해주셨다. 그 집엔 아들이 없어서, 호야 장모님은 “머스마 옷 빨래하는 게 재밌다”하셨단다. 와중에 나도 덕을 봤다. 내 빨래까지 덤으로 호야 장모님 손에 세탁되기도 했던 것이다. 호야 아내가 제 어머니께 나를 학교 친구라 소개할 때, 빨래 이야기를 호야 장모님께 했다. 그러자 당시 빨래를 갖다 날랐던 호야 아내도 “맞어, 엄마! 그 때 엄마가 호야 빤스랑 첸 빤스랑 같이 세탁한 거야.”며 맞장구를 쳐줬다. 대충 12-3년 전 일이다.

한국 제일의 재벌이 만들어 제4권부, 즉 메이저 언론의 종사자들에게만 주는 은 그 부문에서는 한국 최고 권위의 상이라 한다. 내 친구 호야는, 죽죽 빠진 언냐들이 세련ㆍ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방명록에 서명하라 붓펜 손에 쥐어주고, 테레비에서만 보던 진양혜라는 아나운서가 공주 화장ㆍ공주 옷 걸치고 나와서 사회를 보고,

뷔페 팀이 세팅해놓은 화려ㆍ깔끔한 식탁 앞에서

권영빈 중앙일보 주필, SBS 송도균 사장 같은(내가 얼굴 아는 이름만 썼다.)‘귀빈’들이 칵테일과 쥬스잔 들고,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이 하는 축사를 들으며 주고받는 그런 상을 받았다. 주로 국제문제로 칼럼 쓰는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 최규선과 김홍걸 홍업 비리를 특종으로 까발린 동아일보 사회 1부,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만들어 때 아닌 채식 열풍을 일으킨 SBS 부장, 일본 영사관에 진입하다 잡힌 탈북자 사진 찍은 연합뉴스 기자, 그런 사람들과 함께 상을 받았다. 가 심사해서 주는 이 상의 역대 수상자들 면면도 화려했다. 부상이 무려 1천만 원이라 한다.

“야, 뽕아. 이 상 장난 아이네-”
“국내에서 최고 큰 상이라잖아”
“호야 절마, 대단한 경력 하나 만들었다. 그쟈?”
“그럼. 사진기 들고 올 걸 그랬다.”

진심으로 우리는 반가웠고, 기뻐했다. 우리한테는 안 어울리는 게 아닌가 하며 좀 망설이며 샀던 7만원짜리 화분도 잘 고른 거 같아 기분 좋았다. 그 때까지는.

시상식이 시작되고 심사경위와 축사, 수상자들의 수상 소감이 말해졌다. 호야는 끝에서 두 번째였다. 동아일보 사회1팀을 대표한 기자가 먼저 단상에 올랐다. 그는 ‘탄압을 받으며’ 밝혀낸 비리 특종을 자화자찬했다. 그리고는 덧붙여 근래 언론의 사명을 깨닫고 있단다. 제법 진지하게 말들을 듣고 있던 뽕아와 나는 차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호야의 시상식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삼성이 주는 상이라 해도 끄덕 없이, 1%도 안 뒤틀리고 있었던 속이 차츰 꼬여갔다. 나중에 건배 제의를 한 SBS 송도균 사장은 비슷한 맥락에서 한 술 더 떴다. 봄은 왔으되 봄이 아니며,

“사회를 감시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살아온 우리가 이제 감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란다. 이제 축사를 하러 단상에 오르기 전 바로 내 앞에 서 있던 김학준 사장의 대머리나 삐딱한 안경도 참 꼴같잖게 보였다. “동아일보, 좀 제대로 합시다.”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간질하게 했다. 그가 먹물 출신 티내느라 현학적인 긴 축사를 할 때는 저절로 “좀 짧게 합시다.”는 말이 입 밖으로까지 기어 나왔다. 앞에 섰던 손님이 놀라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뽕아도 못 참고 한 마디 뱉는다.

“저 시밸새들, 오늘 컨셉이, ‘잘 나가던 우리가 어쩌다 이래 됐냐’네"

과연 그랬다. 상을 주고받는 그 자리의 공기는 저런 느낌을 갖게 했다. 저들 대부분은 변함없이 잘 나가고 있으면서도, 지난 겨울과 올 봄에 걸친 ‘변화’에 대해 적의를 갖고 있을 것이다. 물론 자리에 어울리게 점잖게들 돌려서 표현했다.

그런데 호야 앞 순서인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라는 백발의 기자가 우리를 아연케 했다. 제 말대로 언론 권력의 판도를 바꿔버린 20-30, 30-40 세대 논객들이 절대 못 받을 상을 받아 너무 기뻐 그랬는지, 이라크 침공을 두고 엉뚱하고 썰렁한 농담을 하는 거다. 어제부터 미국이 제 수상을 축하하는 축포를 이라크에서 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게 한국 최고의 언론상 부문 수상자의 풍자 수준인지 뭔지. 작년부터 북한과 미국이 문제를 많이 일으켜줘서 칼럼 쓸 거리가 끊이지 않아 좋았다는 발언도 했다.

호야가 올라가 상을 받고 소감을 말할 순서가 되었다. 호야는 어제 혼자 수상소감을 준비했었단다. 아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호야는 화들짝 놀래며 쓰고 있던 수상 소감문을 감췄단다. ‘아무 것도 아니’라며. 호야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엔 내 일인 것처럼 약간 긴장이 됐다. 호야는, 목소리 크고 말 잘하는 뽕아처럼 여러 사람들 앞에서 대중연설을 잘 하거나 앞장서서 선동대를 이끄는 그런 스타일의 ‘꿘’이 전혀 아니었다. 목소리까지 원래 저음이다. 그래서 내 결혼식과 호야 지 결혼식 사회를 본 뽕아에 비한다면 거의 어눌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호야는 원고를 꺼내지 않고, 먼저 스텝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저는 지난 여름 40-50도를 넘는 열사의 중동에 있었습니다.
인류의 문자는 중동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호야가 만든 는 중ㆍ근동 지역에서 발생한 고대 문자가 어떻게 알파벳으로 발전해갔는지를 탐색한 다큐멘터리였다. 호야는 작년에 이라크, 이란, 이집트, 레바논을 다니며 그림을 찍어왔다. 하도 전화를 해대서 보기는 했지만, 솔직히 거의 ‘재미’는 없는, 학술적인 다큐였다.

그곳이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데요.
사람이 자기가 가본 땅이라서 애착을 갖게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뽕아와 나는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호야는 이 자리와는 전혀 안 어울릴 발언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라크 땅은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고 소중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땅입니다.
그런데 이제 미군의 폭격으로 그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음...... 참 안타깝습니다.
“미국은 / 즉각 / 이라크 / 공격 / 중단하라”
“명분 없는 / 침략 전쟁 / 파병방침 / 웬 말이냐”

호야가 이런 구호를 외치지는 않았다. 호야의 짧은 수상소감은 짧은 신음 뒤에 이어진 ‘안타깝습니다’로 그냥 끝이었다. 그런데, 옛날 방식으로, 연설의 끝을 이어 받아서 아지(agi) 잘 하는 뽕아가 동을 뜨고, 내가 저 구호를 따라 외쳐야 될 거 같았다. 우리 셋이서 이 점잖고 ‘삼성’스레 세련된 프레스센터 20층을 소란스럽게 만들어야 될 거 같았다. 옛날에 셋이서 같이 외치던 구호들도 귀에서 막 쟁쟁거리는 것 같았다. 그 때, 뽕아가 나를 돌아보며 한 마디를 날려 정신을 차리게 했다.

“야 첸, 니 친구 참 멋있네.”
“하모... 씨바... 니 칭구 아이가.”

우리는 다시 호야의 수상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우리가 산 7만원짜리 난초 화분이 비록 난으로서는 쌈마이 그 자체일지 몰라도, 지란지교(芝蘭之交)라는 말이 있다는 것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미제의 이라크 공격이 시작된 사흘 째 날이었다.

2 # 촌평

그러네요.. 다시 찾아보니 그냥 였네용?^^ 지송지송
근데 훈련받을 때 저도 졸려고 무진장 노력했는데 잘 안 되더라구용. 내년에 또 가야 하는데 어케하나... -_-a 초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할 터인데 -- 자일리톨 2004-8-25 2:14 pm

그 친구가 만든 다큐 제목은 그냥 였었는데요. 암튼^^.
민방위 2년차로서 후배 예비군 님께 드리는 정신교육에 관한 조언은요-.
세월이 조금만 더 지나면 뭔 정신교육 비디오를 틀던 무심해지니까,
너무 맘 쓰시지 말고 가져 간 신문이나 책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약간의 고통은 감내하셔야 되겠지만요.
그러나 어느 순간, 저절로 도가 트이더군요.
'니는 짖어라 나는 딴 일한다', 가 아니라 아무리 웡웡웡 짖어싸도
그야말로 무심의 경지에서, 다른 데 관심을 두거나
상념에 잠기거나 조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더군요.


그리고요.
세대문제는 좀더 복잡한듯 한데요,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의 말을 한번 들어봅시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서 경제성장을 해냈다’는 것이 기성세대의 공통적 정서이자 때로 젊은 세대를 훈계할 수 있는 자부심의 근거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성세대의 오해이다. 기성세대가 조금이라도 그런 심사를 드러내는 순간 젊은 세대는 튕겨나가는 화살처럼 반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60대가 전쟁경험을 들어 북한체제의 잔혹한 성격을 부각시키려할 때 3-40대가 회의를 품는 것처럼 말이다.(송호근,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삼성경제연구소, 85쪽)"


기성세대는 뭔가 알고 있습니다. 절대 말이 안 먹힌다는 것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안되는 거겠죠. 못 참는 거겠죠.
계층 문제를 초과하는 거대한 인식 차이가 있는 거 같은데요.
세대의 함정인 듯합니다.
현대에 작동하는 세대차이, 세대갈등은 시간성의 문제 같은 뭔가 근원적인 문제를 포함하는 듯합니다.


어쨌건 우리 아버지와 스승 세대가 시대착오적인
‘수구, 냉전, 극우’의 대명사가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니
우리는 그들 세대가 더 잘 곱게 늙어 존경받는 원로가 되거나

‘현명한 노인’이 되도록 ‘협조’해야 합니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죠. 그들도 이제 북한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든지,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든지 하는 사실들은 좀 그만 ‘자랑’해야합니다. 송호근 교수 말대로 안 먹히고 그런 자랑은 오히려 벽을 높이니까요. 젊은 세대는 그런 자랑거리들의 이면에 더 주목합니다.

그리고 젊은 세대가 오늘날 처한 현실이 그런 자랑을 설득력 없게 만듭니다. 이런 게 섭섭하다 해서 우익단체의 집회에 참석하여 ‘탄핵 찬성’ 같은 구호나 외치고 그런다면, 보증컨대, 존경은커녕 손가락질 받기에 딱 좋은 거죠.

그래서 우리도 협조하되, 말이 도저히 안 먹히는 분들에겐 그냥 앞뒤 안 가리고 쎄-게 압박해드리는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예컨대 그 사무관출신 사장님들 같은 분들에게도 강한, 뒤통수를 씨게 쳐드리는, 고정관념을 깨는- 압박이 필요할 듯합니다. 당신들 세상이 이미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드리는... -- Hicnunc 2004-8-25 11:06 am


오옷~ 친구분이 "문자의 역사" 만드신 분이군요? TV에서 재미있게 본 다큐였습니다. 당시 앨버틴 가우어의 "문자의 역사"라는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인지 저로서는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보았더랬습니다. 유명인을 알고 계시네요?^^


그리고 수구기득권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권력기반은 여전히 건재한 것 같습니다. 유신말기 유신사무관이라는 제도가 있었다지요? 육사 졸업생들 중 임관하지 않을 놈들을 정부의 5급사무관으로 임명하던 제도인데, 그런 인간들이 아직도 남아서 산하 공기업들에 낙하산 인사로 내려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저희 회사에도 몇 명있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술만 마시면 "우리 각하시절에는 말이야..."라는 레파토리를 쏟아내고는 하지요. 그런 말 들으면 미쳐버리겠습니다.-_-;;;


얼마 전 예비군훈련을 갔었습니다. 정신교육을 한다고 콩나물 시루같이 한 내무반에 몰아넣더니만 비디오를 틀어주더군요. 김충배 육사교장이 만들도록 지시한 비디오라고 하는데 비디오의 첫장면에 이런 글이 자막으로 올라갔습니다.


"...너희들이 그 시절을 아느냐? 팔 게 없어서 아낙네는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고... 독일로 달러를 벌기 위해 광산에 팔려가고 간호사로 팔려간...그런 시절을 모르는 너희들이 우리 세대를 욕할 자격이 있느냐...?"


보다가 웃음이 나와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젊은이들이 부모세대를 싸잡아서 비판한 적은 없었지요. 젊은 세대들은 고생한 이전세대들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이전 세대들 중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이용해먹었던 기회주의적인 기득권세력을 비판한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세가 불리해지자 기득권들은 나이순으로 (자신들만의)패거리를 나눠서 "왜 고생한 늙은이를 구박하느냐?"이럽니다. 만약 제가 노동자로 평생동안 고생을 지지리한 제 아버지라면 무척이나 열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면상에 한마디 해주었겠죠. "니가 언제 나같은 사람을 인간취급해 준 적 있느냐? 그러면서 이제는 우리한테 들러붙어서 니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느냐?"라구요.


02년말 대선직후 각종 매체에서는 이대로 가다가 세대간의 골이 깊어져 국론분열로 가는 거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KBS에서는 특집방송까지 편성하여 방송하더군요. 제가 보기에 그 관점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문제는 과거 기회주의적이고 반인간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잘못된 권력기반을 차지하고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세력들을 어떻게 몰아내고 역사를 청산하느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헉.. 얘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위에 써놓은 걸 보니 괜히 민망하군요. 이거 확 지울수도 없고... 갑갑한 제 경험이 괜시리 저를 오바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지송지송 -- 자일리톨 2004-8-19 1:10 pm


보다가 조금 눈물이 났습니다. 아마도 형님들이 경험했던 그 분노의 원천은 여전히 유효한데, 망할눔들이 꿰차고있는 시스템 안에서 형님들이 느끼셨을 분노가 조금 전해졌기 때문일 것 같네요. 왜 개새끼들은 그렇게 대물림이 잘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모니터로 봤으면 눈물이 나진 않았을거 같아요. 역시 글은 인쇄물로 보는 것인가 봅니다. 지하철 한구석에서 피빨리러 출근하는 제 자신의 상태와 조금은 싱크가 된 것일까요. -- 거북이 2004-8-18 1:3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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