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내기가새내기에게

1.1.1.3 (토론)님의 2015년 1월 2일 (금) 22: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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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 자체가 내 개인적인 글들을 정리해보고자 하는 것이니만큼 창피한 글도 가감없이 올리겠다. 이 글은 내가 일학년을 마칠 때 쯤에 새로 들어올 후배들을 위해서 쓴 글이다. 95년 12월에 썼네.


헌내기가 새내기에게...

                       자연과학대학 지구환경과학부 95 정철

벌써 12월. 이제 기말 시험만 끝나면 95년도 마지막이다. 별로 기대하고 들어오지도 않았기에 대학 생활의 실망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실망스럽지도 않은 일학년 생활이었다.
먼저 나의 일년간을 대충 정리해보고자 한다.
시험보기 전. 나를 가장 황당하게 한 것은 지금 나역시 즐겨하는 스포츠인 팩차기였다. 예비 소집때 보았던 그 더럽게 할일없어 보이던 놈들이 지금의 선배들인 것이다. 당시 나는 그래도 S대인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서울대 입구에서 교문까지 걸어가서 이제 다 왔구나 라는 웃기는 생각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시험 끝난 날. 생전 처음으로 술먹고 토했다.
합격했다는 사실을 안 그 순간에도 나는 전화를 끊은 뒤 그냥 잤다. 그만큼 무심했나 보다. 떨어지면 재수하지 뭐... 하면서. 그랬으니 입학하기 전까지 뭔가 영양가있는 생활을 했을 리도 없다. 먹고 자고 방이나 긁는 생활이었다. 지금 기억도 전혀 없다. 중학교 친구들을 좀 만난것 외에는.
뭐 새내기 새로 배움터? 어떤 종이에 그냥 써 있기에 꼭 가야하는걸로 알고 갔다. 지각했는데 그 때 본 광경은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댄싱'교습장면 이었다. 해방춤이라나... 보면서 나이먹은 것들이 왠 추태여..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노래나 가르쳐주고 춤이나 추고 요상한 게임이나 하는 걸 보며 나는 대학 사년동안 아마도 이런 문화 속에서 살 지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지금까지 간 MT에서 그대로 현실화 되었다. 지금 나도 즐기고 있는채로.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대학문화는 뭐였을까..? 이런 것은 조금 뒤 동아리에 들어가서야 느끼게 되었다.
새터 장소는 무슨 호수의 캠핑촌이었는데 선배들의 놀아주려는 노력이 가상해서 그럭저럭 같이 놀아주었다. 사실 매우 건방진 생각이었지만 당시 느낀 솔직한 기분이었다. 거기서 상한 막걸리를 먹고 많은 이들이 속을 배렸던 기억이 가장 남는다.
입학식. 정말 황당했다. 오건 말건 그냥 북적거리는 상황에서 그냥 치뤄지는 시장바닥에서의 입학식은 나를 벙찌게 만들기 충분했다. 나는 그 순간 교가를 한번도 부르지 않고 졸업하리라는 결심을 했다. 진짜 빌어먹을 의식(?)이었다.
삼월에는 정말 정신없었다. 수강신첨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처음보는 선배들 이름 외우기에 바빴다. 과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이거저거 술자리만 �아다니다가 한달을 보냈다. 지금도 느끼는 일이지만 사실 대학생활에는 너무 쓸모없는 술자리가 많다. 나는 그때 워낙 고생해서 지금도 쐬주를 싫어하는데 그 소태처럼 쓴 알콜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물론 술은 여러가지 효용이 있다. 특히 분위기 조성하는데는 탁월한 효과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위장에 빵꾸난 이들을 여럿 봤다. 그리고 억지로 조성된 자리는 어색함만이 충만하기 십상이다. 술자리를 골라서 다니는 것, 그것이 대학생활에서 배울 첫번째 것은 아니었는지...
사월에 동아리에 들어간 것 같다. 역사동아리인데 어쩌다 고르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안락함을 느낀 곳이다. 사실 인간을 누구나 소속감을 원하기 마련인데 과는 내게 그러한 소속감을 심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동아리에 찾아갔고 그것을 구했다. 갈때마다 반겨주는 선배들. 그들은 자기들도 별로 모르면서 후배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기위해 노력한다. 이는 결코 무시하는 발언이 아님을 그들은 알 것이다. 나 역시 후배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이기에... 바로 그러한 태도를 후배는 배운다.
그리고 이 때 처음으로 대학의 '운동'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4.19혁명일이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세상을 처음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진짜 매운 맛은 5월에 느꼈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맨날 레코드만 사러가던 종로삼가 세운상가 앞 8차선 도로에서 나는 도로를 점거한 채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왜 데모나 하고 지랄이람? 해도 안되는 걸.. 하고 비웃던 바로 그 데모대가되어 지랄탄과 최루탄을 맡고 눈물 콧물을 흘렸다. 나는 왜 나갔던 것일까?
당시 나는 하도 최루탄이 안날아오길래 최루탄이 날아오자 내심 기뻤다. 얼마나 치기어린 생각이던지. 곧 그 생각은 깨졌다. 아니 증발했다. 헛구역질을 해대며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군대가버린 베테랑 선배형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뿜어주며 등을 두들겨주었다. 그리고 다시 손잡고 들어갔다. 가스먹으러..
나중에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이걸 해서 뭐하나.. 아냐 해야돼.. 나에게 무슨 도움이지.. 정신적 허영심의 충족은 아닌가.. 나는 놀고있지 않다는 자위행위는 아닌가.. 이것이 쌓여 힘이 되는 거야.. 웃기지 마 영삼이가 들은 척이라도 할 줄 아니.. 등등. 물론 지금이야 5.18 특별법이 제정되려는 상태지만 이러한 모든 고민들은 여전히 뇌리에서 굴러다닌다.
유월엔 뭐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앞으로 이런 불상사를 막기위해 일기를 써야겠다. 아마 동아리에 안주했던 한달이었나? 동아리에서는 교양세미나다 뭐다해서 역사가 아닌 현실에 대해서 가르쳐주었다. 참여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냉소적 태도를 갖고 있었지만 열심히 한 끝에 나름의 소득이 있었던 것 같다. 동아리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점차 과와는 멀어져갔다. 아마 이때쯤이던가 이런문제로 불만이 많았다. 우리가 이런 호프집에 앉아 노동자를 논할 수있는가 하고. 지금도 털끝만치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나 역시 다른 이들과 자리를 같이하지만 그들을 생각하면 죄스럽다. 그러면서도 정말로 나를 희생하라면 별로 할 생각이 없으니... 이러한 괴리감은 가끔 나를 복잡하게 만든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 본 유일한 미팅과 소개팅이 이 쯤에 있었다. 언제나 내가 속한 집단에는 여자가 별루 없었다. 아니면 임자가 있거나. 사실 나는 그런 의도된 만남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고 그런 놈이 그렇고 그런 년을 만나러 나가는 게 아닌가 생각되어서. 그냥 한번 해봤는데 그냥 폭탄더미였다. 뭐 얼굴이 못생긴건 둘째쳐도 애들이 손톱이나 다듬고 있질 않나 커피�을 '잘먹었어~~~'라는 말로 그냥 나오질 않나. 누가 돈 안낸다나? 다행인 것은 그중 나은 애랑 파트너가 된 것(그 애에겐 행운이었든지 불행이었든지). 그나마 연락한 적도 없다. 서로.
소개팅도 별반 나은거 없었다. 내 친구놈이 해 줬는데 이 눈치없는 놈이 끝까지 줄줄 따라다니는게 아닌가? 가뜩이나 애도 맘에 안드는데 아예 잡쳐놓았다. 이제 그놈이랑 연락도 안한다. 에그...고대놈한테 부탁한 내가 바보지.
칠월엔 뭐했지? 아마 기말고사로 정신이 없었을게다. 항상 이틀전에야 책을 펴게된다. 그나마 이틀이면 양호한 편이라는게 더 황당하지만. 고등학교때의 십분의 일정도만 하면 좋겠다. 누가 그랬다. 일학년때 망해야 다음부터 열심히 한다고. 과연 그럴까?
팔월엔 집에서 굴렀다. 하나의 쾌거를 들라면 면허를 딴 것. 차는 전혀 못 몰지만 그래도 일종이다. 나는 요새 신분증을 달라고하면 그걸 내민다. 하하.
그리고 농활이 기억에 남는군. 전일 참가가 아닌 이박 삼일밖에 못갔지만 쓴맛은 볼만큼 봤다.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농촌에 대한 환상은 버리기로했다. 그곳에서 보았던 그 많던 파리떼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곳의 아이들은 좋았다. 어른들도.
또 여름 TS(total seminar)도 기억에 남는다. 그 장소가 너무 좋았다. 누구 MT가려면 대성리 '자유촌'에 가쇼. 세상에 무슨 MT촌에 호프집이랑 샤워시설이 있담...?
개강하자 거의 동아리방에서 살았다. 동아리에 95학번들도 더 들어오고 활기가 생겼다. 뭐 특기할만한 일은 없었지만 나의 과외이야기나 적을까나.
지금까지 내가 가르친(?!) 애들은 대부분 불성실한 년놈들이었다. 정말 어떻게 그렇게 책이랑 담을 쌓을수 있는지. 한시간에 똑같은 말을 여섯번정도 해보면 그냥 분노가 역류함을 느낄수 있다. 하지만 참아야한다. 나는 과외하면서 인내심을 배웠다. 돈도 벌고. 사실 스스로 생활비를 번다는 것은 꽤나 보람찬 일이다. 뭔가 색다른 즐거움이다. 아줌마들도 선생님이라고 대접해주지, 먹을거주지, 재정적으로 독립되니까 기분좋지... 시간이 좀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남는게 시간인데 뭐.
시월에는 뭘 했더라.... 역시 기억나는게 없군. 이번엔 나의 사회생활을 적어봐야지.
나는 합격된 후 즉시 하이텔 언더그라운드 뮤직 동호회의 소모임인 '아일랜드Island'에 가입했다. 그 모임은 프로그레시브 락 동호회인데 월 일회의 감상회를 갖는 친목도모 모임이다. 역시 좋은 음악을 듣는 이들은 나름대로 멋진 사람들이었다. 소설가, 회사원, 연구원, 대학생, 백수, 군바리 등으로 모였는데 나름의 개성이 팡팡 튀기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나는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많은 이들을 사귀고 나의 음악적 폭도 넓혀갔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배운 것중 가장 큰 것은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방법들이었다.
나는 음악이 너무 좋다.
십일월에는 선거가 있다. 학생회 선거. 내가 경험한 대학생활 중 가장 활기가 넘치는 분위기였다. 저마다 나름의 생각을 갖고 그것을 피력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멋졌다. 나는 그 싫어하는 '댄싱'을 하기위해 '댄싱팀(선동대)'에 들어가서 대중앞에서 재롱을 피웠다.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여러 다른 동아리 아이들을 알게되었고 머리가 조금 더 깨었다. 비록 내가 지지하는 팀은 선거에서 깨졌지만 보람찬 기간이었다. 대학생활 중 가장 뭔가가 집중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십이월은 글쎄, 아직 안지내봐서 모르겠군.
이정도로 나의 일년이 대충 정리되었다. 생각보다 파란만장한걸...^^;

물론 이건 나의 삶이다. 다른식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공부 열심히 하는놈, 당구 열심히 치는 놈, 여자 열심히 꼬시는 놈, 어영부영 살아가는 놈, ..놈, ..놈, ....
대학생활이 중고등학교때와 확연히 다른점은 바로 무한대에 가까운 자유와 자기 스스로 지는 책임이다. 뭘 하던지 네 맘대로 해라. 단 네 삶은 네가 책임지는 거다.
과선배 누나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뭐든지 경험해봐라. 아주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이것만큼 확실한 말도 없다. 그냥 아무거나 해봐라. 별로 물을 필요도 없다. 해봐서 맘에들면 그것이 너의 생활이 되는 것이다. 나는 별로 많은 경험은 못 해봤지만 너희들에게는 꼭 이것저것 해 보라고 하고싶다. 데모. 별거 아니다. 고생 좀 하면 된다. 술. 몇번 퍼먹고 토해보면 어떤 맛인지 조금은 알게된다. 담배. 나는 안피지만 피는 애들이 줄기차게 찾는걸 보면 피울만하나보지. 학점. 빵꾸 몇번 나면 대충 감이 잡힌다. 뭐 그렇다.
그러나, 결코 생각없는 백수는 되지마라.
현재 정치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지금 쟁점이 되는 사회 문제가 뭔지,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우리 현대사가 어떻게 굴러왔는지는 생각하면서 살아라.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 살아라. 그러면 된다.
학생회관 건물에는 '행동하는 민중지성'이라고 써있고 교훈은 '진리는 나의 빛'이다. 나역시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이걸 기억하라고 해주고 싶다.
그리고 선배들을 최대한 우려먹어라. 밥이든 술이든 지식이든.
그러면 너의 대학생활은 순탄히 굴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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