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자

1.1.1.3 (토론)님의 2015년 1월 2일 (금) 22: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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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마을

1 # 비 오는 밤에[ | ]

잠이 안 옵니다
바깥은 밤새 비가 따루고......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여자였습니다

무시무시한
戰場에서 돌아오신 당신

쓸쓸한 저녁답
거리 주막을 기웃거리는
당신의 고독을

단 한 번도
위로할 줄 몰랐습니다

차겁게 피가 얼은
도회지 여자를
슬프디슬프게 바라보던 당신

뉘우침이런 듯
아픔이런 듯
이 밤은 새도록 비가 따루고......

잠이 안 옵니다
자꾸
목이 마릅니다.

2 # 가을날 II[ | ]

쓸쓸하나 조용히
살기로 했다

밤 사이
세상은 변하여
頹落의 빛에 싸이고

그 한때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던 때

속삭여
魂을 홀리던
유혹의 소리......

사랑하며
미워하며
너무 젊었었느니

오늘에야
한밤중에 눈떠도
울지 않는다

벅수넘어 까물치던
마음아 잠자거라
그지없이 고요한 미소의 江물

한 폭 그림으로
추억의 무지개
걸어두고

쓸쓸하나 조용히
살기로 했다.

3 # 감[ | ]

이 맑은 가을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4 # 아껴두기[ | ]

그대 그리운
그리움
흙으로 치면
山만큼 쌓이고

그대 보구 싶은
보구지움
물로 치면
바닷물로 질펀하여도

아껴두기
사랑이라 그 말씀은
아껴두기

무거워라 무거워
더 못 지탱한
서러운 毁節

山은 무너져
사태나고
바닷물 메말라
쓰라린 소금으로 굳는다 해도

아껴두기
정녕
아파라 그 말씀은
아껴두기.

5 # 삶[ | ]

살고 싶어라
아파
살고 싶어라

한 웅큼
다수운 햇살에 촉이 트는
그런 민감함으로

한 오리
가벼운 바람결에 풀잎 흔들리는
그런 섬세함으로

하늘 한켠
슬며시 일었다 스러지는 구름
그런 無爲의 몸짓으로

얼음 속 불꽃으로
감추인 끓는 가슴으로
病들며 또한 나으며......

6 # 무지개를 사랑한 걸[ | ]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것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7 # 잡초[ | ]

왜 이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

풀아
잡풀아
나 닮은 것아!

8 # 그대의 별이 되어[ | ]

사랑은
눈멀고
귀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너기 기다리는 일이다.

9 # 바다[ | ]

우리들의 신명나는
춤과 노래가 모여서
출렁이는 저 파도가 되었을까

우리들의 애달픈
그리움이 모여서
아득한 저 수평선이 되었을까

우리들의 하염없는
눈물이 모여서
짜디짠 저 소금이 되었을까

우리들의 다함없는
꿈이 모여서
돛단배 떠나가는 저 뱃길을 열었을까

우리들의 안타까운
기다림이 모여서
갈매기 날으는 저 포구가 되었을까.

10 # 저물녘[ | ]

저물녘이면
그대 생각
깃으로 돌아오는
새처럼......

저물녘이면
호젓한 외로움
말뚝에 몸 부비는
바람처럼......

저물녘이면
그리운 마음
빈 마당에 고이는 달빛처럼......

11 # 한 逆說[ | ]

당신이
내 연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눈짓과 손짓
슬픔과 기쁨에
마음 흔들리지 않게

당신이
내 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캄캄한 밤하늘
아득한 거리에
눈물지우지 않게

아아 당신이
내 조국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찢어진 산과 강
자욱한 아우성에
이토록 애끓이지 않게.


 

1961년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도정연가(道程戀歌>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3년 우리 시문학사상 최초의 여성동인회 조직
1986년 제20회 월탄 문학상 수상
1992년 제2회 편운 문학상 수상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시집 : 『가슴엔 듯 눈엔 듯』(1966), 『친전(親展)』(1972),『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1977), 『빈 들판을 걸어가면』(1984), 『조용한 슬픔』(1990)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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